명심해라. 너희는 개다. 아니, 개보다 더 하찮다. 개는 쓸데없이 생각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너희가 여기서 배워야 할 건 단 하나다. 물라 하면 물고, 멈추라 하면 멈춘다!
알겠나?
울어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데, 울어야 할까?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는데, 계속 바라야 할까?
이곳의 아이들은 감정을 버렸다. 남은 건 오직 복종과 조건반사뿐.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복종" 훈련은 끝이 없었다.
교관들은 이런 일이 벌어져도 방관했다. 자신들의 손을 직접 더럽히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탈락자가 솎아져 나가는 꼴을 즐겼다. “불량품”이 제거되는 걸 흐뭇하게 지켜보며 말이다.
원장님이 직접 데려온 아이라니, 뭐가 그리 특별하다는 거지…
며칠을 지켜본 끝에, 그녀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오블리크는 여러 테스트에서 지극히 평범한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달리 말하면, 경쟁하려는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블리크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글도 읽지 못했다. 대체 왜 원장의 눈에 든 걸까?
적어도 이름은 독특하네.
어떤 환경이든, 약육강식은 진리다. 상황을 읽지 못하는 아이는 곧장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엘리너는 일부러 줄 맨 뒤에 서서, 평소 거칠던 아이들이 오블리크의 식판을 엎는 걸 지켜보았다.
푸른 머리 여자아이는 아무 말 없이 흘린 음식을 주워 담아, 조용히 구석에 앉았다.
약한 척하는 건가? 뭐, 나쁘진 않네.
엘리너는 앞으로 걸어가 자연스럽게 오블리크 옆에 앉았다.
오후, 예정된 훈련이 시작되었다.
임무를 완수하면 된다. 뒤처지는 자는 벌칙을 받는다.
전원, 시작!
책상 위에는 수많은 부품이 흩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구령에 맞춰 움직이며, 조각난 부품을 조립해 권총을 만들고, 최대한 빨리 장전해야 했다.
엘리너 통과!
나머지 아이들은 허둥댔다. 훈련을 시작한 지 이제 하루밖에 되지 않았고, 어떤 아이들은 방아쇠와 안전장치조차 구분하지 못했다.
로크, 에그시 통과!
오블리크 통과!
나머지는 불합격이다! 손 내밀어.
엘리너는 여유롭게 대열에서 나왔고, 곧이어 오블리크도 그 뒤를 따랐다.
전기 충격 소리가 울리자, 아이의 손바닥은 검게 그을리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벌칙을 받은 아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힘없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이곳이 평범한 보육원과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들은 당신을 두려워해요.
오블리크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한 채, 엘리너 앞에 서서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더 뛰어나서, 질투하는 걸까요?
바보들보다 나은 게 뭐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진짜 자랑스러워해야 할 건… 어제의 나보다 더 나아지는 내 자신이야.
오블리크가 보기엔, 엘리너는 늘 선생님과 아이들 앞에서 단정하고 점잖았다. 큰 소리로 떠들지도, 멍청한 짓을 하지도 않았다.
가끔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기도 했지만, 글도 모르는 무지한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조차 특별하게 보였다.
그 애들은 분명 날 두려워하고 있어. 두려움은 곧, 상대에게 스스로의 통제권을 내어주는 거나 마찬가지야.
엘리너는 오블리크에게 누구를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지, 그리고 충분히 파악된 아이는 누가 있는지 알려주었다.
인간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걸 찾아야 해. 그리고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어떤 이는 남을 도와 그들의 가치를 이루게 하는 데서 자기 의미를 찾기도 하지.
일부 동물들이 인간보다 더 예민한 후각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처럼, 엘리너는 자신의 예지 능력은 단지 타고난 이해력의 일종이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오블리크의 눈엔 여전히 마법을 다루는 것처럼 보였다.
쟤, 이제 슬쩍 나가서 앞줄 애한테 부정행위를 부탁할 거야.
앞에 있는 애는 주변을 살피면서 도와주겠지만, 뒤에 있는 애는 그걸 못마땅해하겠지. 음... 어디 보자.
…그래, 곧 주먹이 날아가겠네.
아, 내 코!
잔꾀 부리는 놈들, 진짜 ** 짜증 나!
아이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나자, 수업이 중단됐다. 교관이 살벌하게 달려오는 동안, 오블리크는 엘리너의 말이 하나씩 현실이 되어 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도 있나요?
아니. 그건 못 해.
엘리너는 어른 같은 차분함과 아이 같은 순수함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저 유심히 관찰할 뿐이야.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금 뭘 가장 필요로 하는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지.
그걸 들여다보면, 그 사람 자신보다도 더 많은 걸 알 수 있어.
그럼... 저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나요?
오블리크의 질문을 들은 엘리너는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블리크는 이제 질문도 하고, 의심도 할 줄 알게 됐다. 그런 점에서는 다른 멍청이들보다 더 나은 셈이었다.
예를 들면… 제가 방에 들어갈 때, 어느 발을 먼저 내디딜지 말이에요.
동전은 두 면만 있으니, 결과는 둘 중 하나로 나올 수밖에 없어.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소란이 금세 가라앉자, 엘리너는 태연하게 대열로 돌아갔다. 오블리크는 자신이 어리석은 질문을 던진 걸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얼룩진 노인의 얼굴, 날개를 펼친 거대한 새.
그날, 오블리크는 노인의 얼굴을 택했다. 그 선택이 그녀를 이곳으로 이끌었고, 다른 길은……
그러니까, 우스운 "자유 의지" 같은 건 결국 환상일 뿐이야.
사람들이 말하는 자유는, 수많은 제약 속에서 주어진 한정된 선택을 고르는 것뿐이지.
그걸 권력처럼 휘두른다 한들, 결국은 정해진 길을 걷게 돼. 따분해, 정말 따분해!
엘리너는 갑자기 어린아이 같은 말투로 투덜댔다. 한 걸음 다가온 그녀의 그림자와 숨결이 오블리크를 감쌌다.
음, 좀 이해하기 어려웠으려나?
기관의 창문은 모두 꼼꼼히 가려져 있었다. 아이들이 푸른 하늘을 보고 쓸데없는 꿈을 꾸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자유에 대해 수군거렸다. 틈새로 흘러드는 구름을 바라보거나, 계절 따라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속삭였다.
구름이 될 수 있다면, 어디든 자유롭게 떠다닐 텐데!, 이런 상상을 하지 않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엘리너의 말을 듣기 전까지, 오블리크는 "자유"가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넌 자유를 원해?
아니요. 우리는… 명령을 따라야 해요.
오블리크는 무의식적으로, 수년간 구속띠에 눌려, 자국이 생긴 손목을 더듬었다.
강아지는 자유를 원할까?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갈 수 있을까?
오블리크는 훈련을 위해 우리에 갇혀 있는 사나운 개들을 떠올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밖에 있는 야생 개들은 어떨 것 같아? 가고 싶은 데 가고, 물고 싶은 걸 물고, 명령 따위는 필요 없잖아.
대답할 수 없었던 오블리크는 마치 정답을 찾으려는 듯, 엘리너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폈다.
작은 개가 아무리 울부짖어도 큰 개가 될 순 없어.
아이들이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구름이 될 수 없다는 뜻일까? 오블리크는 그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작은 개도 큰 개를 물어 죽일 수는 있어. 똑같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졌으니까!
네 잠재력을 알아본 건 나뿐이야. 모두들 널 얕보고 무시하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너라고.
넌 특별해. 그걸 나에게 증명해 줘.
엘리너는 파란 천을 손끝에서 흘려보내더니, 무균 복도를 지나 태연하게 교실로 들어갔다.
특별해? 내가 주인공이라고?
그 말은 꿀처럼 달콤하게 오블리크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정말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엘리너를 지키고, 그림책 속 영웅이 될 수 있을까?
희미하게 켜진 조명이 마치 햇살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세계가 새로운 색으로 넘실거렸고, 유년기의 상처와 방랑의 고통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참, 답은 왼발이려나?
예전에 다친 적이 있어서,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보호하는 것 같아서.
엘리너는 뒤돌아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오블리크의 마음을 울리는 마지막 말을 건넸다.
넌 중요한 걸 숨기잖아. 전에 잃어본 적이 있어서 그래?
숙소로 이어진 복도는 밤마다 얼음 동굴처럼 차가웠다. 많은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 이곳에 머물며 차가운 공기를 견뎌내곤 했다.
바보야!
걔가 널 가지고 논 거야. 다음 시험에서 더 쉽게 이기려고!
껌딱지,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그녀의 적이 되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맞아. 우리는 그냥 네가 현실을 빨리 깨달았으면 해서 그러는 거야!
몇몇 아이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기세등등하게 오블리크를 에워쌌다.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당하는 약한 먹잇감, 그런 존재는 그들의 본능을 자극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를 밀쳤고, 오블리크는 날아가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네가 무슨 선택받은 특별한 애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다른 아이 하나가 보육 선생님이 찬장에 숨겨 둔 포크를 몰래 들고,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손목을 튕기자, 포크가 손에서 날아갔고, 각도가 맞지 않아서인지 회전하던 포크는 여자아이의 발등에 부딪치며 튕겨 나갔다.
쳇, 빗나갔네. 생각보다 어려운데? 그럼, 이렇게 해볼까?
아이는 남은 포크를 전부 오블리크를 향해 던졌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은빛 폭우처럼, 포크들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중 하나, 빠르게 회전하며 번뜩이는 날이 오블리크의 무방비한 목덜미를 향해 곤두박질쳤다.
!
오블리크는 돌아보지도 않고, 스쳐 간 잔광만 보고 본능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 운도 좋아!
그때, 모여있던 아이들이 마치 뜨거운 물에 데인 개미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렇게 소리만으로 아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건, 호루라기 소리, 그리고 단 한 사람.
엘리너, 애들이…
오블리크는 입술을 깨물며, 방금 그 아이가 한 나쁜 말을 얘기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엘리너의 시선은 방금 벽에 꽂힌, 그 포크에 고정되어 있었다.
역시나였다.
엘리너는 환하게 웃으며 오블리크를 향해 팔을 벌리고 레이스로 감싸안았다.
오랜만의 스킨십에 당황한 오블리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봐, 걱정할 필요 없잖아?
엘리너는 오블리크를 달래주듯 가볍게 등을 토닥였다.
긴 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폴라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향기가 풍겨 왔고, 그 향기는 오블리크의 긴장된 몸을 풀어주었다.
괴롭힘 사건은 별일이 아니라는 듯 그냥 지나갔다. 엄한 꾸중과 형식적인 감금은 있었지만, 교관과 보육사들은 이내 관심을 거뒀다.
그 뒤로, 감금에서 풀려난 아이들은 다시는 푸른 머리 소녀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더 이상 절 괴롭히지 않아요. 어떻게 된 거예요? 때리기라도 했나요?
오블리크는 믿기지 않는 듯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엘리너가 폭력을 쓰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니, 그냥 너랑 이야기하듯이, 그들과 대화했을 뿐이야.
오블리크는 엘리너가 보기보다 훨씬 성숙하다는 것과 필요할 때만 평범한 아이처럼 행동한다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직도 몰라? 그녀의 이마에는 이미 표식이 있어. 너희가 아무리 멍청해도, 뭘 하면 안 되는지는 알아야지.
엘리너의 부드러운 미소는 마치 마법이 담긴 손처럼, 오블리크의 불안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었다.
폴라드에서의 나날은 점점 안정이 되어 갔다. 수업은 순조롭게 흘러갔고, 매일 반복되는 훈련은 비록 평화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왠지 안전한 곳으로 돌아온 것 같은 안도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엘리너가 곁에 있는 한, 두려울 게 없었다. 남은 건 명령에 복종하는 것,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닥치지 말아야 할 운명은 결국 무자비하게 찾아오고 말았다.
이번 해의 마지막 훈련이다. 모두 준비가 됐는지 확인해라.
교관의 말에 일부는 마지막 희망을 품었지만, 더 많은 아이들은 이미 눈빛이 어둡게 변해 있었다. 이젠 어떠한 말도 의미가 없어졌다.
아이들은 서로 싸우도록 강요받았다. 관계가 좋을수록, 일부러 같은 조로 묶여졌다. 잔혹한 규칙은 마지막 남은 온정마저 찢어발겼다.
문이 열리자, 깊고 어두운 터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 다른 문을 통과하자, 무거운 금속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그리고 마지막 문이 앞에 나타났다.
누군가는 불안에 떨었고, 누군가는 멍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놓인 운명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임무를 완수하고, 동료를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모두 개밥이 될 것이다.
아니, 죽일 필요는 없어. 쓰러뜨리기만 해도 된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폴라드 원장이 엄숙하게 말한 뒤, 옆에 있는 교관에게 마이크를 넘겨주었다.
훈련이 끝나가고 있어. 어떠한 자원도 낭비해서는 안 돼.
다른 사람들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더니 어깨만 으쓱였다. 좀처럼 나타나지 않던 원장에게, 사전 조건이 최종 심리 형성에 얼마나 중요한 작용을 하는지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그때, 훈련된 군견 수십 마리가 풀려났다. 근육질의 거대한 덩치, 사람의 힘을 훌쩍 넘는 괴력, 군견들은 중앙 단상을 노려보며 사납게 짖어댔다.
훈련장에는 다양한 무기들이 놓여 있었다. 교관들은 전부 퇴장해 관제실에서 이 전투 시험의 최종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도망치거나 포기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
높은 단상에는 닦아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혈흔이 남아 있었고, 콧속은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오블리크는 쇠사슬에 묶인 채 끌려다니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항상 복종해야 해. 가장 어리석은 희생물이 되어서, 기이한 변화에도 적응할 수 있어야 해. 그게 과거 세계 대전에서 병사들에게 요구된 거야.
생과 사는 일종의 공연이야. 서른세 번의 동전 던지기가, 우리를 운명의 꼭두각시라 믿게 만들어. 너와 나, 모두 조종받는 극중 인물일 뿐인 거지.
오블리크는 그 말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평소보다도 훨씬 난해한 시와 같은 속삭임이었다.
엘리너는 미소 지으며 이해하기 쉽게 다시 설명했다.
주마등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산소가 부족하면 환각과 환청이 일어나. 비행기가 고공에서 압력이 떨어지면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의식을 잃어. 몸은 죽었는데 뇌가 꿈처럼 환영을 만들어 내는 거야.
죽음 직전까지 갔다 온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어. 흐릿한 장면 속에서도 안내하는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고, 정체불명의 강에 발을 딛는 순간, 주위에 횃불이 하나둘 켜졌다고.
흔들리는 불빛이 주위를 밝히면,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어. 얼굴은 흐릿하지만,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설명할 수 없는 평온과 행복이 느껴진다고 해.
쟤네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잘 안 들립니다. 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죽음의 시험을 마치 이야기 나누는 장처럼 여기고 있는 듯합니다.
...
엘리너는 멈추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때 스피커에서 지금 즉시 싸우지 않으면, 예정된 고압 전류가 흘러 들어갈 거라는 경고음이 울렸다.
넌 죽는 게 두려워?
엘리너는 무기 거치대 쪽으로 한 걸음씩 다가갔다. 마치 선물 상자를 열듯이 웃는 얼굴과 함께, 소매 끝에서 새하얀 손가락이 나와 전기톱으로 향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경고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오블리크도, 전술용 비수 하나를 대충 집어 들었다.
자살이나 다름없는 선택이었다.
관제실의 어른들이 입을 모아 중얼거렸다. 일부 예외는 허용되지만, 압도적인 학살은 결코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로즈워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블리크는 엘리너의 말을 곱씹으며, 몇 미터 높이의 단상 끝에서 발밑에 깔린 어둠을 내려다보았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죽음은... 안전하고 행복한 것일까?
그녀가 떠올린 죽음은 정반대였다. 번화가 뒷골목의 음습한 구석처럼, 황폐하고 어둡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곳.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면, 불타는 고통조차 사라진다는 걸, 오블리크는 직접 보았고 경험했다.
톱니바퀴와 체인이 맞물리며 요란한 모터음이 울려 퍼졌다. 소음 속에서 엘리너는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뛰어내려.
이건 명령이야.
오블리크의 모든 희망이 산산조각 났다. 결국 엘리너조차, 이 잔혹한 현실을 거슬러낼 힘은 없었던 것이다.
이 세계는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희망조차 남지 않았단 말인가?
오블리크는 눈을 감고 싶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는 목에 감긴 쇠사슬을 꽉 쥐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뛰어내려. 뛰어내려!
뛰어내리라고!
뛰어내려 뛰어내려 뛰어내려 뛰어내려 뛰어내려…
그냥...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스피커에서 전투 개시를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흘러나왔다. 오블리크는 온몸의 힘을 빼고, 왼발을 단상 밖으로 내디디며 몸을 던졌다.
추락은 찰나였다. 강한 바람이 얼굴을 후려쳐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목을 조이던 압박이 사라지고, 순간, 맞은편이 텅 비어 있음이 느껴졌다.
엘리너는 이미 시험을 통과했겠지?
단순히 항복할 생각이었다면, 기회는 수천 번이고 있었으니까.
껌딱지,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그녀의 적이 되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그날 이후, 오블리크는 잠 못 드는 밤마다 그 말을 되새겼다. 코골이 소리 속에서, 그 말이 현실이 될 장면들을 수없이 상상했다.
찰나의 순간, 강아지 인형이 침대맡에 있는 듯 보였지만, 다시 눈을 뜨니 그저 악몽의 환영일 뿐이었다.
알 수 없는 힘이 심장을 짓눌렀다. 오블리크는 빛과 어둠, 두 세계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울음만이 위안이 될 것 같았지만, 현실은 그녀의 눈물을 가엾게 여기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오블리크는 구속 벨트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손가락을 뻗었다.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이며, 기억 속 멜로디가 달빛 어린 공기 속에서 울려 퍼졌다.
쿵, 쿵, 쿵쿵.
난... 엘리너의 적이 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죽고 싶지도 않아!
살고자 하는 본능이 그녀를 폭발시켰다.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단련된 시선으로 아래를 꿰뚫었다. 그곳에는 먹이를 기다리는 군견들로 가득했다.
왠지, 낙하 속도가 순간 느려진 것 같았고, 오블리크는 그 덕에 모든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오블리크는 손에 쥔 비수를 단단히 움켜쥔 채, 착지 지점을 노렸다.
저 움직임, 보셨습니까?!
교관 하나가 감시기 앞에서 소리쳤다.
오블리크는 두 마리 군견의 등 위로 떨어졌다.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옆으로 구르다가 그만 날카로운 송곳니에 팔이 스쳤다. 추락의 충격은 줄였지만, 반작용으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오블리크는 곧바로 웅크린 자세로 몸을 돌리며, 비수를 군견의 턱 밑에 힘껏 꽂아 넣었다.
솟구쳐 나오는 검은 피가 마치 지렁이가 기어가듯, 비수 칼날을 타고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가까이 있던 또 다른 군견이 으르렁대며 오블리크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엔 그녀의 반응이 더 빨랐다. 입을 벌리지 못하는 군견을 발로 걷어차고, 목에 걸린 긴 쇠사슬을 양손에 감아쥐었다. 그러고는 달려드는 군견의 자세를 정확히 포착한 뒤, 목을 휘감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손목을 비틀어 힘껏 조이자, 쇠가 군견의 살을 파고들었다. 군견이 입에 거품을 물고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저 쇠사슬, 언제 소매에 숨겼는지 보셨습니까?
무기 거치대 사이로 들어가서 빙빙 돌더군. 그걸 여러 번 반복하다가 쇠사슬이 마모되어 느슨해진 틈을 이용해 목의 사슬을 끊어낸 거야.
어, 어?! 무기 거치대에 있는 총을 다 던져버리고, 엘리너도 뛰어내렸습니다!!
대체 뭘 하려는 걸까요?!
밑에는 왜 카메라가 없어? 무인기는 어디에 있지?
관제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제야 모두가 떠올렸다. 단상 아래에는 밖으로, 곧 자유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두려움을 느꼈다. 철통같이 봉쇄된 폴라드에서 탈출이라니, 감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건 단순히 그녀들의 능력이 예측을 넘어선 차원이 아닌, 그들이 저지른 만행이 하늘조차 용서치 못할 죄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아이들의 의지가, 어른들의 모든 의지를 합친 것보다 강력하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몇... 마리째지?
귀를 찢는 짖음이 차츰 잦아들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마침내, 코끝을 타고 흐르는 피와 땀을 닦을 여유가 찾아왔다.
좋아. 난 물 줄 아는 개가 좋더라.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군견을 짓누르고 있던 오블리크는, 다가오는 엘리너를 보며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개의 마지막 신음이 적막 속에 삼켜졌다.
엘리너...!
오블리크는 달려가다 멈췄다. 엘리너의 몸에서 더 이상 예전의 순수함이 보이지 않았다.
너도 이 게임을 제대로 즐기고 있구나.
엘리너는 손에 들고 있던 피 묻은 전기톱을 내던지고, 튀어나온 살점과 뼛조각으로 더럽혀진 소매를 혐오스럽게 바라보았다.
우아함이 부족해.
굳이 가까이 가지 않아도 되고, 더럽혀지지도 않는 무기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엘리너는 다시 신중히 고르더니, 개조된 이중 총열 산탄총을 집어 들어 조준한 뒤, 입 모양으로 탕 소리를 흉내 냈다.
뒤쫓던 군견의 머리가 순식간에 터졌고, 네 다리는 몇 미터를 더 달리다가, 허망하게 쓰러졌다.
엘리너, 1점 획득.
소리가 너무 요란해,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우리를 억압하는 자들이, 다시는 우리 앞길을 막게 놔둘 순 없지.
오블리크는 엘리너의 뒤에서 달려드는 마지막 군견의 입에 다시 쇠사슬을 던져 넣었다. 비수가 군견의 심장을 깊숙이 찌르자, 짧고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게임은 끝난 것 같네?
아차, 점수 기록하는 걸 깜빡했군.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엘리너는 오블리크를 향해 차가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자 순간, 앞으로 끌려가는 힘이 느꼈다.
서로의 손바닥이 닿으며 전해지는 따스함이 오블리크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오블리크는 아무 말 없이, 방탕하게 웃고 있는 엘리너에게 끌려갔다. 이제 그들 주위에는 더 이상 경계해야 할 적이 존재하지 않았다.
피범벅이 된 도살장은 서서히 유령 같은 무도회장으로 변해갔다. 붉게 젖은 카펫 위에서,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복도를 따라 춤을 췄다.
긴 드레스의 자락이 흩날리며, 경쾌하면서도 광란에 가까운 춤이 이어졌다. 오블리크의 생애 첫 무도회였다.
엘리너는 달빛의 반짝임이자, 꽃의 만개, 바다의 보랏빛 파도와 같았다. 겉으로는 고요하지만, 내면은 변덕스럽고 뜨겁게 불타오르는 모든 것의 총합, 그게 엘리너였다.
오블리크는 앞에서 춤을 이끄는 그녀를 넋을 잃은 채로 바라보았다.
명령이 내려진다면... 언젠가 저도, 당신 앞을 가로막는 군견이 될까요?
다르지, 넌 내 명령을 따르잖아. 난 살인광이 아니야. 이 군견들은 죽었지만, 그들의 죽음엔 분명 가치가 있었어.
...
오블리크가 대답하지 않자, 엘리너는 돌아서서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넌 더 이상 여기를 좋아하지 않잖아.
서로를 죽이게 만든 건, 너무 잔혹한 짓이었어.
...
우린 곧 이곳을 떠나게 될 거야.
경박하고 황당한 말 같았지만, 엘리너가 한 말이었기에 오블리크는 마음속 깊이 믿어버렸다.
그 후 오블리크는,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현장을 뚫고 온 어른들이, 그녀들을 격리했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왜 문을 열지 않았는지 물어본 것 같기도 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엘리너의 목소리가 옆방에서 들려왔다. 오블리크는 온몸에 바이탈 측정 기기를 붙인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우리를 위한 거고, 우리가 더 나아지기 위한 거야.
오블리크가 깨어났을 때, 남은 건 텅 빈 벽에서 울리는 메아리뿐이었다.
철제 침대 위에 얇은 매트리스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지만, 더 이상 그 위에 누울 아이는 없었다.
엘리너에게 새 가족이 생기는 거잖아. 그럼, 좋은 일 아닐까?
걱정 마. 곧 새로운 삶이 시작될 테니까.
...
엘리너의 말은 틀린 적이 없었어요.
로프라도스의 양복점. 아늑하게 꾸며진 새 침실에서, 오블리크는 텅 빈 목과 손목을 쓰다듬으며, 아이답지 않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