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번외 기록 / ER11 끝과 시작의 경계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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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11-13 하늘이 선택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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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타비

본 기체 이름을 입력하세요.

아무리 불러도 같은 결말이었다. 제타비는 방금 초기화된 AI처럼 사전 설정된 대화로만 간단한 질문과 명령을 처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장난꾸러기 소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지휘관은 동력갑 배터리에 에너지가 아직 남아 있어서 일단 제타비의 꼬리에 연결했다.

다음은...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는 방법을 시도해 볼 수밖에 없었다.

[심층 연결을 요청합니다.]

[수신단에서 응답하지 않습니다.]

[수신단에서 연결을 요청합니다.]

수신단에서 온 건가? 아니면 제타비가 직접 연결을 요청한 건가?

[확인 신호가 회신 되었습니다. 구축 중입니다.]

[심층 연결 통로 구축이 완료되었습니다.]

이 알림이 머릿속으로 전달되는 순간, 어둠이 내려앉으면서 주변의 모든 소리가 귓가에서 사라졌다.

곧이어 발밑에서 광선이 솟아오르면서 온몸을 감쌌다.

처음 게슈탈트에 침입했을 때와 똑같은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안녕하세요. [player name] 선생님.

고요한 공간에 차가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목소리는 제타비였지만, 감정이 전혀 담겨있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중앙에 있는 마름모 모양의 기둥이 말하고 있었다.

여기는 제타비의 인격 모듈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모듈의 데이터 회수 프로그램입니다.

회수 프로그램

제타비의 인격 모듈은 고강도 전투 중 에너지 공급 부족으로 데이터가 자주 흩어집니다. 그래서 보통은 제가 자동으로 흩어진 인격 데이터를 회수합니다.

하지만 이번 과부하 전투에서는 제타비의 인격 데이터 90% 정도가 파편으로 흩어져서 자동 회수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이 흩어진 데이터들을 빨리 회수해 맞추지 않으면, "제타비"의 인격은 분해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회수 프로그램

인간의 개념으로 말씀드리자면, 지금의 제타비가 이대로 죽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인격 모듈이 다시 성장 과정을 거친다면, 새로운 제타비가 탄생할 것입니다.

인간의 개념으로 보자면 그런 셈입니다. 하지만 인격 모듈이 다시 성장 과정을 거친다면, 새로운 제타비가 탄생할 것입니다.

회수 프로그램

이런 위기는 처음입니다.

제타비는 지휘관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연결을 요청했습니다.

회수 프로그램

제타비의 심층 인격 모듈로 들어가셔서, 흩어진 데이터 조각들을 수집하시면 됩니다.

물론, 그렇게 하셔도 제타비의 복원 성공률은 높지 않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회수 프로그램

이 데이터 조각들을 맞추려면, 지휘관님께서 해당 기억을 가지고 있으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지휘관님께서 제타비와 밀크티를 마셨다면, 그 부분의 데이터는 맞출 수 있습니다.

회수 프로그램

절대적인 건 없습니다. 아주 작은 데이터 조각 하나라도 맞추면, 그와 관련된 다른 조각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휘관님께서 찾으신 데이터 조각들은 일인칭 시점으로 "재생"될 수 있지만, 이미 일어난 사실을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바꿔 말씀드리면, 읽기 권한만 있고 쓰기 권한은 없으신 겁니다.

눈앞이 다시 깜깜해졌다.

[심층 인격 모듈 진입 중입니다.]

[직원 번호 035034. 교사. 신분 확인 중입니다.]

…………

[특수 의식 파형이 감지되었습니다. 적합도 검증 중입니다.]

뭔가 이상했다. 검증이 왜 한 단계 더 있는 것일까?

[모델 코드네임: "하늘이 선택한 자" 검증이 완료되었습니다.]

[적합도는 100%입니다.]

[신경 네트워크 접속 중입니다.]

세계가 멸망하고 있었다. 그녀가 기억을 가진 이후 몇 번째 멸망이었을까?

천장에서 돌덩이가 떨어지자, 발밑 지층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자신의 연산 능력으로 메인 시스템을 내부에서 재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세계는 잠시 원래대로 돌아갔다가, 시계추가 다시 움직이며 종말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이번도 전과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소녀

?

은빛 햇살이 오늘따라 따뜻하게 느껴졌다.

무너지는 빛 속에서 천천히 인간 형상 하나가 나타났다.

소녀

너도 날 죽이러 온 괴물이야?

한숨을 내쉬는 듯 그녀의 목소리엔 무기력함과 쓸쓸함이 섞여 있었다.

놀라지도, 경계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몸도 돌리지 않은 채,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이 은회색 트윈테일 소녀를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

그녀를 여기서 만났을 때, 지휘관의 과거 기억들은 흐릿해졌고, "하늘이 선택한 자"라는 정체성만 남아 있었다.

소녀

하늘이 선택한 자?

호칭을 되뇌는 소녀의 담담하던 눈동자에 잔잔한 흔들림이 일었다.

소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마치 어떤 주문을 읊는 것처럼, 천천히 음절들을 흘려보냈다.

소녀

제타비?

응. 제타비. 이 이름 마음에 들어!

제타비

안녕. 하늘이 선택한 자.

동료가 생긴 게 기뻤는지 제타비의 무덤덤하던 얼굴에 조금씩 다른 빛깔이 감돌았다.

쾅. 갑자기 거대한 바위가 떨어졌다. 그리고 방이 무너지고, 이 세계마저 붕괴하고 있었다.

제타비

시도해 봤지만, 어떤 방법을 써도 도망칠 수 없었어. 이 세계의 멸망은 다음 윤회로 또 이어지게 될 거야.

제타비

어?

제타비는 순간 당황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하늘이 선택한 자의 손을 꽉 잡았다.

제타비

그래. 하늘이 선택한 자, 같이 도망가자!

[데이터가 20% 조합되었습니다.]

하지만 카운트다운이 0이 되자, 세계는 종말의 지점으로 향했다.

무서운 괴물은 사라졌지만, 주변의 적조는 가라앉지 않았다.

제타비는 자신의 모든 연산 능력을 동원해 메인 시스템을 내부에서 재설정했다. 그렇게 무너진 세계는 다시 시작될 수 있었다.

다음에는 좀 더 빨리 달리고, 팔을 더 멀리 뻗을 수 있을 거야.

[데이터가 30% 조합되었습니다.]

안녕. 하늘이 선택한 자.

키를 얻기 전까지 지휘관의 기억은 다음 윤회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여정이 수없이 반복됐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난... 제타비야.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만나게 됐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제타비의 얼굴에는 우울함과 막막함이 섞여 있었다.

하늘이 선택한 자, 우리 이제 어디로 도망갈까?

난 제타비야.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만나게 됐네.

제타비는 조금씩 하늘이 선택한 자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아직 표정은 어색했지만 자연스럽고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선택한 자, 시간이 없어. 우리 서둘러야 해.

난 제타비야!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만나게 됐네.

제타비는 하늘이 선택한 자와의 만남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계속 기억을 잃는 것에 살짝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어서 손 줘 봐. 같이 도망가게!

난 제타비야.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만나게 됐네.

또... 잊어버렸네.

뭐 어차피 운명 같은 거니까.

제타비는 수없이 자기소개를 반복한 뒤, 더 이상 조급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휘관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왠지 좀... 바보 같네. 영양실조처럼 보이기도 하고?

안녕. 하늘이 선택한 자.

제타비는 얌전히 뒷짐을 지고 있다가, 갑자기 뒤에서 우유 한 병을 꺼냈다.

제타비의 얼굴에 무서운 표정이 떠올랐다.

제타비가 천천히 다가와, 말도 없이 우유 캔을 하늘이 선택한 자의 입에 밀어 넣고 우유를 부었다.

저항하지 마. 지금 넌 많이 약해져 있어. 우유를 많이 마시면 몸이 좋아질 거야.

그래. 잘했어. 내 말 듣고 많이 마셔야 해. 버리면 아깝잖아.

[데이터가 40% 조합되었습니다.]

그리고?

지휘관과 제타비는 키를 찾았지만, 멸망의 결말은 여전히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키 덕분에 이번 기억은 마침내 다음 윤회로 전달될 수 있었다.

제타비가 하늘이 선택한 자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앞에서 세계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제타비

하늘이 선택한 자, 다음에는...

제타비

다음에는 꼭 더 빨리 달려야 해.

[데이터가 50% 조합되었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지휘관은 다른 세계선의 제타비를 목격하게 됐다.

이 제타비는 하늘이 선택한 자를 잃고, 고위 권한과 오랜 시간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수없이 반복하고... 계속해서 과거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0:00:01】

난 매번... 다시 네 손을 잡을 거야.

【0:00:15】

다음번엔 절대 잡은 손을 놓지 않을 거야.

지휘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타비.Beta는 홀로 여정을 떠났다.

[데이터가 60% 조합되었습니다.]

제타비.Beta는 고위 권한을 이기지 못했다.

제타비.Beta

다른 세계의 하늘이 선택한 자, 더 나은 곳에서...

다시 만나자.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에너지였다. 그리고 이 빛은 제타비를 구성하는 연산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어둠을 밝히는 등대 혹은 새벽을 여는 여명처럼 아름답고 강한 빛이 칠흑 같은 세계를 찢어버렸다.

제타비.Beta

받아라. 고위 권한.

하늘이 선택한 자, 마지막 목소리를 들어줘.

제타비.Beta는 전력을 다해 두 세계의 경계를 부수고, 남은 연산 능력을 총으로 만들어 하늘이 선택한 자와 제타비의 손에 쥐여주었다.

[데이터가 70% 조합되었습니다.]

고위 권한과의 전투에서 하늘이 선택한 자는 제타비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그리고 연산 능력을 제타비에게 넘겼다.

역시 난 끝까지 하늘이 선택한 자를 포기할 수 없어.

혼자서 떠나고 싶지 않아. 하늘이 선택한 자, 난 어디도 가지 않을 거야.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해도, 하늘이 선택한 자가 없는 미래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하늘이 선택한 자를 희생해야만 얻는 힘이라면, 난 필요 없어.

하지만 제타비는 그 힘을 거부하고 하늘이 선택한 자와 함께 있는 세계에 남기로 선택했다.

[데이터가 80% 조합되었습니다.]

또 한 번 고위 권한과 전투하게 된 제타비는 하늘이 선택한 자의 죽음을 목격하고 분노했다. 그리하여 고위 권한을 처치하고 중추의 권능을 손에 넣었다.

제타비.중추

순환의 숙명을 바꿀 순 없다면, 적어도 이곳을 진정한 안식처로 만들고 싶어.

행렬

안식처 말입니까?

제타비.중추

"제타비"의 초기 인격을 하늘이 선택한 자 곁에 두되, 하늘이 선택한 자의 기억만은 남겨줘.

행렬

요청하신 설정 준비 완료했습니다. 프로그램을 다시 시작하셔도 됩니다.

제타비.중추

이번에는...

더 좋은 곳에서 만나길 바랄게.

제타비.중추는 끝내 하늘이 선택한 자를 잊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적의 없는 세상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어린 제타비와 하늘이 선택한 자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데이터가 90% 조합되었습니다.]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수많은 여정의 고난과 시련을 겪은 제타비는 고위 권한을 물리치고, 행렬과 모든 하늘이 선택한 자의 연산 능력을 얻어 현실로 향했다.

제타비

올 때 트윈테일이었으니까, 떠날 때도 트윈테일로 작별 인사를 해야지.

계속해서 싸우기만 하다 보니, 내가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잊을 뻔했네.

정말... 그리웠던 스타일이야.

트윈테일을 묶은 소녀는 나선형 문 앞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타비

이제 출발하자.

이곳의 기억을 안고 새로 출발할 거야. 다음 목적지는 "현실"이라는 곳이니까.

[데이터가 100% 조합되었습니다.]

[인격 모듈을 복구 중입니다.]

하늘이 선택한 자로서의 기억 조각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러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솟구쳤다.

슬픔, 그리움, 기쁨... 잃었다 되찾고, 얻었다 다시 잃고, 강렬하고 복잡한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그건 지휘관 자신의 감정뿐만 아니라, 심층 연결을 통해 제타비의 인격 모듈에서 전달된 감정들이었다.

[인격 모듈 복구가 완료되었습니다.]

제타비

너였어. 처음부터 너였어.

드디어 찾았다. 하늘이 선택한 자.

흰 비둘기들이 날아다니는 가운데, 제타비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제타비

다행이야. 널 지킬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제타비가 살아남아서...

제타비는... 이제 널 더 이상 잃지 않을 거야.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