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번외 기록 / ER11 끝과 시작의 경계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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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11-7 잘못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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슝... 쾅!

쿵쾅, 거대한 회색 구체가 지면을 강타했다.

단단했던 대지가 얇은 종이처럼 부서지고, 우뚝 솟은 건물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하늘에서 붉은 불덩이가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혜성이 타면서 떨어진 파편과 암석들이었다.

열기가 포효하며 소녀의 가녀린 그림자를 단번에 삼켜버렸다.

이 파라미터는 안 되겠어. 출력에 아직 편차가 있어.

평온한 표정의 유이가 폐허가 되어 가는 거리 한가운데에서 가상 실험대를 조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세상의 종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것도 틀렸어. 문제는 여기가 아니야. 계산이 너무 복잡한데, 가지치기를 해야 할까?

유이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염구는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실험대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

붉은 그림자가 유이 앞을 스쳐 지나가 화염구를 막아섰다.

유이, 어서 떠나. 여기는 나와 하늘이 선택한 자가 있으니까!

쾅! 대장 Ⅵ와 하늘이 선택한 자가 마지막 과학자를 위해 치명적인 일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함께 세계의 파멸을 막기 위한 여정을 떠나게 될 것이다!

Ⅵ는 득의양양하게 의성어까지 흉내 내며, 자신의 "위업"에 감동적인 내레이션까지 덧붙였다.

장난치지 마.

유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Ⅵ를 제지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유이는 평소처럼 탁탁 키보드를 두드리며, 코드를 한 줄 한 줄 작성하면서 파라미터를 조정했다.

유이가 나랑 놀아줘!

바빠.

불꽃이 튀고, 자욱한 먼지 속에서 열기가 휘몰아치며, 세상의 종말 같은 현상들이 발생하는 곳은...

바로 유이의 실험실이었다.

유이가 Ⅵ와 하늘이 선택한 자를 행렬 중추에서 꺼내 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자극성 테스트로 깊은 데이터 오염이 남아 있는 두 모델은 한때 붕괴 직전까지 갔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를 연결한 유이는 실험대 옆에서 그들의 기억 데이터를 긴장하며 검토했다. 그리고 밤낮 없이 조정한 끝에 겨우 그들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냈다.

두 모델은 이제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언제 회사가 다시 그들을 빼앗아 갈지 모르기 때문에 반복 작업을 한순간도 늦출 수 없었다.

그렇게 Ⅵ는 하루하루 자라며 조금씩 활기를 되찾았고, 장난스러워지기까지 했다. Ⅵ는 주의를 끌기 위해 온갖 방법을 시도했다.

델라웨어 님... 앗!

실험실 문을 열던 헤르타는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하... 놀랐잖아요. Ⅵ!

에헤헤.

델라웨어 님, Ⅵ가 인공 광원을 또 이렇게 만들어 놓을 때까지 제지를 안 하시면 어떡해요?

이렇게 하면 현실 세계의 환경을 느끼는 데 도움이 돼요.

그래도...

VI는 델라웨어 님의 의식 샘플로 생성된 건데, 성격은 전혀 닮지 않았네요.

연구원의 조용하고 이성적인 특성은 하나도 물려받지 않고, 매일 장난만 치고 다니잖아요.

혹시 델라웨어 님도 어렸을 때 이러셨나요?

헤르타가 갑자기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때는 이렇게 장난칠 기회조차 없었어요.

유이는 말하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유이는 어린 시절이란 그 기억의 조각을 잠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Ⅵ는 달랐다. 자신의 곁에 있는 한, 그런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었다.

걱정 없이 장난치는 모습이 유이에게 묘한 위안이 되어 주었다.

어린 시절의 자신이 다른 가능성을 누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유이가 Ⅵ를 멈추게 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헤르타는 한숨을 내쉬며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마술사처럼 펼쳤다.

오늘 보안과의 롤프 님이 또 벌금을 부과했어요. Ⅵ가 순찰 중에 광원을 세계 종말 모드로 설정해 놓아서 그들이 옆에 있던 통풍관을 실수로 부수게 했대요.

Ⅵ는 캡슐에 저장되어 있었지만, 주변 장치 사이를 오가며 투영 형태로 활동할 수 있었다.

예, 대승리!

뭐가 대승리예요?! 오늘은 화요일인데, 이번 주만 벌써 다섯 번째 벌금이에요!

이 상태로 가면, 이 실험실에 할당된 연산 자원이 삭감될 거예요.

너...

유이는 결국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캡슐의 금속 외벽을 세게 쳤다.

아야!

압력 감지 장치가 전혀 없는데도 Ⅵ는 아주 그럴듯하게 비명을 질렀다.

왜 이러는 거야?

보안과가 유이를 여기 가둬 놓고, 놀러 가지 못하게 하니까.

그래도 이러면 안 돼. 나중에 그들이 연산 능력 공급을 줄일지도 몰라.

난 공급 필요 없어!

안 돼. 연산 능력이 부족하면 발전 속도가 늦춰지게 돼.

당시 Ⅵ가 행렬 중추에 넣어졌던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유이는 갑자기 말투가 딱딱해졌다.

난 발전하기도 싫고, 자라기도 싫어.

유이의 감정 변화를 눈치챈 듯 VI는 갑자기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유이가 광원과 Ⅵ 사이의 연결을 냉정하게 끊자, 실험실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Ⅵ, 네 의견을 묻는 게 아니야.

그리고 오해하지 마. 넌 실험 품에 불과하므로 네 장난은 어떤 동정도 얻을 수 없어.

인간이란 그래. 자신이 만든 것, 심지어 피붙이에게도 냉정하고 오만하지.

안타깝지만, 나도 그중 한 명이야.

유이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샌드백처럼 맞았다.

집행관님께서 다음 검증을 하러 올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 것 같아?

너를 데리고 나올 때, 다음에 오실 때는 더 완벽한 실험 성과를 보여주겠다고 집행관님에게 큰소리쳤었어.

그리고 이 성과에 대한 보상으로 날 회사 본부로 추천해 주겠다고 하셨어. 여러 캐스케이드 행렬의 연산 능력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해준다고도 하셨어.

유이는 어머니에게 배표로 이용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네 존재가 내 앞길보다 더 매력적일 거라고 무슨 근거로 생각하는 거야?

널 넘겨준 뒤에는 너 혼자서 테스트의 고통을 견뎌야 해. 그런 오염된 데이터들을 어떻게 견딜 거야?

지금 나한테 어리광 부릴 때야? 그러니 어서 필터링된 데이터셋이나 봐.

Ⅵ가 자신의 전철을 밟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반드시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어야 했다.

다 자라면, 유이는 떠날 거지?

난 자라기 싫어. 유이 곁에 있고 싶어.

Ⅵ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유이의 마음은 다시 무너져 내렸다.

델라웨어 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신 것 같은데요.

헤르타 님은 무슨 일로 오셨죠?

유이는 감정을 숨기려는 듯, 무심한 척 화제를 헤르타에게 돌렸다.

아, 네. 행렬 중추 관리하는 연구원이 말해줬는데, 하늘이 선택한 자의 의식 샘플을 처음 채취할 때, 행렬이 퍼니싱의 침식을 받은 것 같대요.

하늘이 선택한 자의 첫 샘플링 때요? 갑자기 왜 그렇게 오래된 일을 얘기하는 거죠?

지난번 하늘이 선택한 자의 신호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 그때 퍼니싱이 남긴 데이터오염 때문일 거라는 추측이 있어요. 하지만 정확한 원인은 아직 모르겠대요.

그리고 이상한 점은 퍼니싱 농도 변화는 연속적이었는데, 극저농도 행렬에 직접 나타났다는 거예요.

유이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목적이 침식이 아니라 탐지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네요.

그래도 이상한 건, 하늘이 선택한 자의 인격 파형이 자극성 테스트 당일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거예요. 그전에는 거의 없었고, 그날 이후로도 없었는데 말이죠.

유이가 멍하니 하늘이 선택한 자의 캡슐을 건드리고 있을 때, 옆에서 갑자기 헤르타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검사기에서 하늘이 선택한 자의 인격 파형이 감지됐어요!

유이의 시선이 순간 캡슐 쪽으로 향했다.

유이는 신속하게 Ⅵ와 하늘이 선택한 자의 연결을 끊었다. 그리고 경계하며 Ⅵ의 캡슐을 품에 안았다.

넌 대체 누구야? 어떻게 하늘이 선택한 자에 접속한 거지? 왜 접속한 거야?

유이의 차가운 목소리는 칼날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캡슐 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캡슐의 의식도 혼란스러웠다. 난 누구지? 하늘이 선택한 자는 뭐지? 어떻게 접속했지? 왜 접속한 거지?

뭔가가 지휘관의 기억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기본적인 언어 소통은 가능했지만, 과거의 기억은 모두 흐릿했다.

미친 척하는 거야?

유이가 한 걸음 한 걸음 캡슐 쪽으로 다가왔다.

지휘관은 도망가고 싶었지만,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대답해. 넌 누구고, 어디에서 온 거야?

???

델라웨어.

문 쪽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목소리가 들리자, 유이는 걸음을 멈추고 문을 바라보았다.

관리자님, 집행관님의 검증 시간은 아직 남아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집행관님의 시간이 아니면, 연구 진행 상황을 확인할 수도 없다는 거냐?

호르스트가 앞으로 두 걸음을 걷자, 뒤따르던 방호복을 입은 경비원들과 연구원들이 차례차례 들어와 유이를 둘러쌌다.

호르스트 관리자님, 오늘 또 무슨 일을 하시려는 거죠?

델라웨어라 불리는 소녀가 태연하게 옆으로 조금 움직여 캡슐을 자신의 뒤로 숨겼다.

지난 검증 이후 꽤 시간이 흘렀다. 델라웨어의 능력이라면 두 의식체를 충분히 발전시켰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델라웨어, 그것들을 내게 넘겨라.

호르스트는 두 의식체와 그것들이 가져다줄 이익이 필요했다.

유이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뒤로 더 움직여 캡슐을 자신의 뒤로 완전히 숨겼다.

호르스트... 호르스트 관리자님! 델라웨어는 오늘 매우 바빠서 검사하기에 적합하지 않... 앗!

급히 달려온 헤르타가 유이의 앞을 막아섰다.

호르스트 관리자님, 파라미터 조정은 장기적인 실험이 필요해요. 더군다나 인간의 의식 샘플을 기반으로 생성된 모델이라, 그들의 성장은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어요.

변명은 듣기 싫다.

다음 검증 때, 집행관님께 "파라미터 조정이 끝나지 않았으니, 다음에 더 나은 결과를 보여드리겠다."라고 갑자기 말하지 않을 거라 어떻게 확신하지?

다음 검증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잖아요. 델라웨어가 충분히 준비해서 의식체가 적절한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면 되죠.

필사적으로 호르스트를 막아선 헤르타는 호르스트 일행이 유이와 뒤쪽 실험대에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줄게.)

머리에 유이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리기 시작하더니, 주변의 물리적 세계가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너희를 지켜줄게.

(뭐라고?)

순간 몸이 굳어진 유이는 지휘관의 말에 당황한 듯했다.

(그때, 깨어 있었어?)

(넌 대체 누구야?)

(그 자극성 테스트를 학살이라고 부르는 거야?)

유이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분해졌다.

(그렇지 않아. "죽음" 단계 전까지는 단지 필수적인 고통 테스트만 있었을 뿐, 학살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테스트였어.)

델라웨어, 왜 내 질문에 답하지 않는 거지?

앞을 막고 있는 헤르타를 밀어낸 호르스트의 목소리가 암호화된 대화를 끊었다.

캡슐을 넘겨도 다음 검증 때 집행관님의 추천은 받을 수 있을 거다. 어쨌든 코어 구조를 만든 건 너니까 말이야.

네가 손해 볼 건 없는데, 왜 캡슐을 넘기려 하지 않는 거지?

그것들은 결국 실험 품에 불과해서 어떤 감정도 투자할 가치가 없다. 그럼, 남은 추론은 네가 그것들을 독차지하려 한다는 것 하나뿐이야.

델라웨어, 다시 한번 말해두지. 네가 쓴 연산 자원, 실험 성과, 심지어 너 자신까지를 포함한 이곳의 모든 것이 회사 자산이다.

네가 본부에 가서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내가 간섭할 바는 아니지만, 141호 구역의 행렬에서는 내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 어서 모델들을 내게 넘겨라.

(하늘이 선택한 자.)

유이의 목소리가 다시 마음속에서 울렸다.

(전에 너를 위해 출력 장치 외부 연결을 해뒀어. 그러니 이 실험실의 조명을 제어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셋까지 세면 불을 꺼.)

(너희를 옆에 있는 헤르타 님에게 넘길 거야. 그럼, 그녀가 게스트리고라는 곳으로 데려갈 거고, 그녀라면 이해하실 거야.)

(누군가는 저들의 주의를 끌어야 해. 그리고 그 미끼 역할은 나만 할 수 있어.)

(Ⅵ뿐만이 아니라, 너도야.)

(그 테스트에서 네가 나 대신 Ⅵ를 보호해 줬어.)

(내가 너희를 데리고 나오기 전에 두 개체 모두는 붕괴 직전이었어. 네가 목숨을 걸고 Ⅵ를 구해줬던 거야.)

(그거면 충분해. 나머진 다음에 만날 때 이야기하자.)

(...)

(지금 네 출력 장치를 스크린에 연결할게.)

저쪽에 있는 모델들을 너희가 가져와.

무장 요원들이 앞으로 다시 나서자, 지휘관은 그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기 전에 실험 데이터를 전송했다.

푸른빛의 데이터 스크린이 순식간에 핏빛으로 변했다.

이... 이게 뭐죠?!

이게 바로 호르스트 관리자님이 말하는 자극성 테스트에요.

말도 안 돼요. "죽음"은 최종 모델 테스트에서만 필요해요. 그리고 저희는 아직 최종 테스트를 시작하지도 않았어요.

"죽음" 테스트 단계에 도달하지도 않았는데, 모델이 이렇게 잔혹하게 다뤄졌네요.

누군가가 집행관님의 관심을 얻기 위해 학습률을 고의로 높이고 극단적인 데이터 샘플을 넣은 것 같은데요?

연구원들 사이에서 갑자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호르스트의 얼굴색이 순간 어두워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듣지 말고, 캡슐이나 어서 가져와!

관리자님, 이게 사실입니까?!

이런 테스트 환경이라면 모델에 되돌릴 수 없는 손상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럼, 이건 테스트가 아닙니다!

그럼, 지난번에 제가 제출한 모델에도 문제가 있었던 겁니까? 저는 그게...

우리가 연구하는 모델도 나중에 관리자님께 넘겨야 합니까?! 그리고 저것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불안한 동요가 점점 커져갔다.

내가 뭘 어쨌다는 거냐?!

회사 규정상 이건 명백한 위반입니다! 회사 자산을 훼손한 행위라는 말입니다!

관리자님, 이러면...

분노한 연구원들을 지나 호르스트가 원하는 물건을 가져오기는 어려워 보였다.

쳇.

델라웨어, 가짜 이미지 몇 장으로 모두를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두가 알아요.

그것들을 나한테 넘기지 않으면, 집행관님께서 다시 오셨을 때 네 모델은 전시할 기회를 얻지 못할 거다.

유이는 실험대에 기대어 차갑게 호르스트를 바라보았다.

본부에 가져가지 못한다면 네 모든 연구는 무의미해진다.

어차피 저 두 모델은 테스트도 통과 못 할 쓰레기들이니까!

하. Ⅵ와 하늘이 선택한 자가 쓰레기라면...

그것들을 가져가려고 혈안이 된 호르스트 님은 대체 무슨 존재죠?

델라웨어!

쓰레기 주제에!

가세요.

I&II

(다정한 숨소리가 났다.)

III&IV&V

(애교스러운 야옹 소리를 냈다.)

...

호르스트가 떠난 후 고양이 다섯 마리를 안고 있는 유이는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고양이들의 몸을 쓰다듬고 있었다.

화 푸세요. 벌써 30분 넘게 그러고 계시잖아요.

화 안 났어요.

한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또 하고 있었다.

방금 저 두 아이를 잘 지키셨잖아요?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데이터 분석이나 실질적인 근거도 없이 순전히 주관적으로만 평가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요.

합리적이니 뭐니 할 거 없어. 너희가 욕을 먹으면 그게 다야.

당연하지. 방금 델라웨어 님이 너의 출력 장치를 단말기에 연결했잖아.

델라웨어 님이 화난 이유는 대상이 너와 Ⅵ였기 때문이야. 그녀가 정성껏 "키운" 아이들이잖아. 호르스트의 말이 정말 근거가 있다고 해도 화났을 거야.

살짝 고개를 돌린 헤르타가 지휘관과 Ⅵ에게 소곤거렸다.

하지만 저런 태도로 관리자를 대한다면, 은근 발목을 잡힐 수도 있겠지.

중얼거리던 헤르타는 자료를 품속에 넣은 뒤 실험실을 나갔다.

유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요 며칠 동안 보안과를 귀찮게 굴지 않았다면, 그 싫은 뾰족코가 여기 오지 않았을 거야. 그럼, 유이도 화내지 않았을 텐데.

Ⅵ가 자책하는 게 느껴지자, 유이는 짜증 난 마음이 순간 풀렸다.

네가 장난치지 않았어도 호르스트는 날 찾아왔을 거야.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

헤르타가 말했는데, 오늘 이후 호르스트가 원한을 품고 우리의 연산 능력 공급을 줄일 수도 있대.

그럼, 유이가 슬프잖아.

너희들이 내 곁에 있는 한,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Ⅵ를 안은 유이는 토닥이며 부드럽게 위로했다.

빼앗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이야.

유이는 옆의 하늘이 선택한 자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제공한 데이터 덕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유이는 예전에 Ⅵ에게도 물어봤지만, 너무 어려서인지 당시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 두 캡슐을 모두 곁에 둘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최고의 결말이었다. 그 이상의 것은 모두 사치에 불과하다고 유이는 생각했다.

게다가... 계속 자라기 싫다고 말했잖아?

이제는 잘 자라고 싶어.

응?

유이는 약해 보이니까, 내가 유이를 지켜주고 싶어.

유이는 어린 듯하면서도 단호한 어조에 놀라며, 품 안의 캡슐을 바라보았다.

바보.

유이... 이상해! 징그러워!

친근함이 담긴 호칭이 부끄러웠는지 휙 하고 도망쳐 버렸다.

하늘이 선택한 자.

Ⅵ가 도망치는 걸 본 짙은 붉은 눈동자가 다시 이쪽으로 향했다.

"하늘이 선택한 자"의 내부 데이터를 한번 살펴봤어.

네 저장 모듈에는 지난번 자극성 테스트 기억만 남아있었어. 역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

어. 알 수 있는 정보가 없어.

네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만 알아. 우린 인간의 의식을 모델에 연결할 기술이 없으니 넌 외부인일 수밖에 없지.

외부에서 연결한 거라면 기억이 차단된 것도 설명이 돼.

연결 과정에서 전달되는 정보가 많을수록 차단될 가능성이 높아. 사람의 기억은 최소 수십 테라바이트인데, 행렬이 전송 완료를 가만히 기다릴 리가 없지.

간단히 말하면 네 원래 기억은 가져올 수 없고, 이곳에서 기억도 가져갈 수 없어. 하지만 네 본래의 인격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는 거야.

네 뒤에 있는 세력은 나도 알고 싶지만, 네 기억 상실은 행렬이 한 일이라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지금 내겐 행렬 직접 관리 권한이 없으니까.

널 연결한 사람이 널 끌어올리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유이는 고소해하는 듯, 눈에 장난기가 스쳤다.

안 웃었어.

유이는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온 김에 편히 있어. 어쨌든 난 너의 방문을 거절하지는 않을 거니까.

살짝 고개를 기울인 유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그래. 그러면 Ⅵ도 좋아할 거야.

아? 그건 아마 널 보낸 측의 판단에 달렸겠지. 네가 매번 유용한 정보를 가져오지 못하니까 다음에 또 보낼지도 모르잖아.

어쨌든, 오늘 고마웠어.

따뜻한 감각이 의식을 감싸안자, 부드러운 포옹을 받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넌 우리를 도와줬어. 그걸로 된 거야.

지난번에는 네가 여기서 잠든 후 그쪽으로 돌아갔잖아.

보답으로 자장가를 불러줄까? 의식이 잠들면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떠날 수 있을 거야.

하늘이 선택한 자의 모델은 내 의식 샘플로 만들어졌어. 네가 그 안에 있는 한, 넌 계속 어린아이인 거나 마찬가지야.

이쪽 항의는 무시한 채 유이는 캡슐을 가볍게 두드리며 자장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유이

맞아. 하늘이 선택한 자의 모델은 내 의식 샘플로 만들어졌거든. 역시 너와는 잘 맞는 것 같네.

유이는 캡슐을 가볍게 두드리며 자장가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뇌와 연결된 기계에서 따뜻한 감촉이 전해졌다. 익숙하고 부드러운 박자가 천천히 의식을 꿈나라로 이끌었다.

저기... 이번에는 거기서 무엇을 보셨나요?

하?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뜬 소녀는 지휘관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라스티에요. 이번으로 세 번째 인사를 드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