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이 나타나 빛과 지휘관을 부드럽게 손바닥 안에 감싸안았다.
걱정하지 마. 내가 너희를 지켜줄게.
어디선가 소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귓가가 아닌 마음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강인하면서도 슬펐다.
영원한 품속에 안겨 있는 듯, 따뜻한 감촉이 물결처럼 밀려와 몸의 상처들을 감쌌다.
그러자 무서운 악몽도 조수와 함께 사라졌다.
괜찮아. 괜찮아.
그녀의 목소리는 때로 선명하고, 때로 흐릿했다.
익숙한 멜로디로 가볍게 박자를 두드리자, 평온한 고요함이 찾아왔다.
자장가를 흥얼거리는 걸까?
따뜻한 바다에 잠기자, 의식도 점점 흐려졌다.
눈을 떴다.
눈동자를 찌르는 차가운 불빛 때문에 머리가 절로 어지러웠다.
지휘관이 깨어난 걸 알아차린 그림자 하나가 앞으로 다가왔다.
저쪽에서 뭘 보셨죠?
연한 파란색의 긴 머리 소녀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낯선 환경, 낯선 이 그리고 흐릿한 기억... 본능적으로 몸을 급히 일으켜 허리의 권총을 더듬어봤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지휘관은 기억도 흐릿하고 주변이 너무 낯설었다. 눈앞의 이는 대체 누구이며, 조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그러세요? 저조차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 같네요.
눈살을 찌푸린 라스티가 지휘관을 살펴보았다. 지휘관의 혼란스러운 상태가 연기가 아님을 확인한 그녀는 옆의 단말기 데이터를 확인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라스티고, 여긴 공중 정원의 감사원이에요.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님.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여기는 임무 수행차 오신 거예요.
이번이 두 번째 자기소개지만요.
라스티는 지휘관에게 감사원의 ID 카드를 건넸다. 망설이며 ID 카드를 받아 확인해 보니 거기에 있는 정보는 확실히 그녀가 말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세요?
잠시 망설이던 라스티는 다시 단말기의 데이터를 확인했다.
예상은 했지만, 기억이 이 정도로 영향을 받다니 뭔가 이상하네요.
어쨌든, 여기는 임무 수행차 오신 거예요. 전 인도자고, 지휘관님은 집행인이시죠.
옆의 임무 브리핑을 넘겨보던 라스티는 그제야 자신의 손에 브리핑이 두 부인 것을 알아챘다.
지휘관의 의아한 시선을 알아차린 라스티는 난처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하... 원래는 게슈탈트가 선배님께 안내를 맡기려고 했는데, 요즘 다른 일로 바쁘신가 봐요. 그래서 제가 안내를 맡게 됐어요.
그냥 좀 골치 아픈 선배님이 있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반대로 인도자인 저는 꽤 믿음직스러우니 안심하세요.
라스티는 미소를 지으며 지휘관에게 임무 브리핑을 건넸다. 그 사이, 다른 한 부의 브리핑은 은근슬쩍 등 뒤로 감추었다.
라스티의 설명이 의심스러웠지만, 브리핑의 임무 지시는 모두 공중 정원의 프로세스와 일치했다. 단지 지휘관은 그 위의 일들을 대부분 기억하지 못했다.
네.
라스티는 가벼운 미소를 거두었다.
얼마 전 게슈탈트가 지표면에서 게슈탈트의 서브 단말기 신호를 감지했어요. 이 서브 단말기 안에서 하나의 "의식"이 배양되고 있었는데, 이 AI 의식이 한번 침식되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거든요.
게슈탈트가 지휘관님을 집행자로 선정했는데, 의식 전송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편차가 좀 생긴 것 같아요.
그래서 이 과정에서 지휘관님의 기억 일부를 잃게 되셨는데, 지금 보니 임무 수행 기억뿐만 아니라 예전 기억까지 잃으신 것 같네요.
감시기의 데이터를 본 라스티는 앞에 있는 지휘관은 신경 쓰지 않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게슈탈트의 원천 기술로 만든 슈퍼컴퓨팅 센터인데, 화서나 게슈탈트의 본체에 비하면 연산 능력이 한 단계 떨어져요.
서브 단말기의 존재도 최근이 돼서야 발견되었어요. 왜 존재하는지, 어떤 조직에 속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예요. 그래서 조사가 필요한 이유 중 하나가 이 점 때문이기도 해요.
꽤 예리하시네요. 주된 이유는 그게 거대한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에요.
간단한 예를 들어볼게요. 게슈탈트 같은 존재가 인간의 반대편에 서게 되거나, 악용되거나, 또는 퍼니싱에 침식된다면...
같은 이유예요. 제가 서브 단말기의 연산 능력이 본체보다 낮다고는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만만히 볼 수는 없어요.
맞아요.
그 서브 단말기가 새로운 AI 의식을 배양했는데, 이 AI 의식이 중점적으로 관찰해야 하는 대상이 된 거죠.
게슈탈트와 같은 원천 기술의 슈퍼컴퓨팅 센터라서 내부 환경이 비슷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그리고 지휘관님은 게슈탈트 내부에 침투해서 작전을 수행한 경험이 있으시잖아요.
그건 얼마 전의 일이었다.
게슈탈트의 엔진 점화 신호 차단을 해결하고 지구로 추락하는 공중 정원을 구하기 위해,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파오스의 창을 이용해 게슈탈트 내부에 잠입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지휘관님을 정식으로 침투시키기 전에 여러 번 실패했었어요.
상대의 침입 감지와 방어 시스템이 상당히 민감한 편이에요. 당연한 거죠. 본체인 게슈탈트도 다층의 외부 방어 메커니즘을 갖추고 있는데, 이런 연산 자원을 가지고 그걸 그냥 두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걸 "내부의 존재"로 인식시킬 수만 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져요. 어떤 시스템도 자신의 것을 제어하지는 않으니까요.
간단히 말하면, 과학 이사회의 도움으로 저희는 서브 단말기 내부에서 의식의 "빈껍데기"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눈썹을 찌푸린 라스티는 다음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AI 의식은 인간이 특정 영역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만든 거라서, 문제 해결 능력은 있지만 실제로는 지시에 따라 실행하는 기계에 불과하죠.
자신만의 개성, 욕망이 없고, 어떤 자발적인 행동도 할 수 없죠.
이 정도라면 기계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명령에 따라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일 뿐, 인간의 의식을 담을 능력은 없죠.
하지만 그 개체는 달라요. 인간의 의식 샘플을 기반으로 만든 모델이라서 인간의 의식과 높은 호환성을 가지고 있어요.
우연한 계기로 인간의 의식으로 만들어졌지만, "과적합"으로 인해 개성을 잃어버리게 됐죠.
쉽게 말하면, 영혼이 빠진 빈껍데기인 거죠.
파오스의 창을 이용해 지휘관님께서 그 개체에 연결해 빈껍데기를 채우는 영혼이 된다면, 지휘관님의 침투가 가능할 거예요.
네.
라스티는 실망한 듯 고개를 저었다.
지휘관님께 침투 임무를 맡겼고 성공적으로 침투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쪽 상황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으시더군요.
심지어 침투 전에 제가 설명해 드렸던 임무 내용도 사라졌어요.
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예상은 했던 일이에요. 슈퍼컴퓨팅 시설이 외부 신호를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리는 없을 테니까요. 아마 우리가 보지 못하는 장애물이 있었을 거예요.
그것도 의문스러운 부분이긴 한데요. 사실 이것뿐만 아니에요.
서브 단말기 탐측 요청도 게슈탈트가 했고, 갑자기 서브 단말기 신호를 포착하게 된 것도... 게슈탈트의 설명은 같은 원천 기술 추적이라고만 했어요.
굳이 말하자면, 이 설명은 합리적이고, 빈껍데기에 대해 왜 잘 알고 있는지도 설명할 수 있어요. 하지만...
뭔가 다른 요인이 있는 것 같아요.
라스티는 고민에 잠겼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포기했다.
이 일은 미지의 세력에 대한 비밀 침투예요. 그리고 게슈탈트 서브 단말기의 존재는 공중 정원 사람들 대부분에게 공포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극도로 높은 기밀 등급의 임무예요.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님, 사실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아요. 이번 기억 상실에 대해서도 제가 임무 과정을 설명할 의무는 없어요.
앞으로도 계속 침투를 부탁드려야 하니까요. 아무것도 모르시면 다음번에 또 설명해야 하고, 제가 번거로워지잖아요.
라스티는 그 자리에서 크게 기지개를 켰다.
어쨌든 그 서브 단말기의 상황은 계속 지켜봐야 해요.
이번 기억 상실이 일시적 현상이길 바라요. 다음 침투 때는 확실히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게요.
공중 정원의 최고 관리 AI로서, 게슈탈트 코어 구역으로 가는 통로의 봉쇄는 그야말로 엄격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
분홍 머리의 여성이 담담하게 거대한 기계 야수 앞에 서 있었다.
행렬에 관한 정보가 모두 전송 완료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볼 수 있다면, 왜 계속 관측하지 않으십니까?
그들의 성장에 간섭하고 싶지 않거든.
나도 똑같이 놀랐어.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에게 요청한 관측 임무 대행을 승인해 주다니 말이야.
계산 결과, 이 일은 게슈탈트의 최고 명령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또한, 본 기기는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고 다양한 기술에 대한 인식을 보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이 서브 단말기에 침투할 추가 연산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을 활용하면 더 많은 연산 능력을 절약하면서 서브 단말기의 기술 정보를 탐색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
그럼, 정보 제공에 대한 보답으로 나도 그 아이의 성장 소식을 함께 기다리게 해줘.
소리 없이 나타났던 것처럼, 분홍 머리의 여성은 소리 없이 이 삼엄한 경계의 방을 다시 떠났다.
선생님.
게스트리고의 형광 국화 화단에서 마르타는 실험복을 입은 유이를 다시 만났다.
유이는 평소처럼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었고, 황금빛 눈동자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마르타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때 한 번 만지면 부서질 것 같았던 그 창백한 얼굴이 오늘은 혈색이 살짝 돌아온 것 같았다.
공손한 호칭을 듣자 마르타는 손사래를 치며 더 이상 인사하지 말라고 했다.
헤르타네 아이들이 졸업한 이후 난 더 이상 선생님이 아니야. 그리고 게스트리고에는 새 학생이 없을 거야.
마르타는 질렸다.
교육이란 명목으로 집 없는 고아들을 받아서 가르치고, 결국엔 그들을 회사의 용광로에 장작처럼 보내는 이 긴 순환에 질려버렸다.
지난번 유이를 만난 후, 마르타는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제 마음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유이는 무언가 고민이 있는 것 같았다.
마르타는 예리하게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대답하지 않은 채 유이가 다시 입을 열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지식과 이성은 위대한 힘이에요. 두려움을 이기고 무지를 물리치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죠.
황금시대 학자가 남긴 명언을 인용한 것뿐이야. 난 그때 책 몇 권을 네게 가져다준 게 전부였어.
그렇지만 그 책들 덕분에 당시 저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성장할 수 있었고, 오늘까지 올 수 있었어요.
넌 지금까지 잘해왔잖니?
모르겠어요. 제가 어리석은 일을 한 것 같아요.
유이의 무표정하던 눈동자가 어딘가 모르게 막연함을 띠고 있었다.
"실험 성과"를 되찾기 위해 본부 진급 기회를 포기했어요.
유이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지더니, 얼굴에 우울함이 스쳤다.
단순히 "실험 결과"라는 무기질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마르타가 흥미롭게 유이를 보았다.
특별하긴 했어요. 마침, 회사 집행관이 그 자리에 와 있었고, 141호 행렬이 다른 행렬의 연산 능력을 공유받을 수 있는지 결정되는 아주 중요한 날이었거든요.
그 외에는 제가 당시 집행관을 50% 이상의 확률로 설득할 수 있다는 증거는 없었어요. 실제론 10%도 안 됐을 거예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하기 위해 가능성 있는 이익을 포기한 거예요. 여러 요소를 종합해 보면, 저는 잘못된 결정을 내린 거죠.
그때 구하지 말아야 했다는 거니?
아니요. 저는 구해야만 했어요.
유이의 단호한 표정을 보자, 마르타는 자연스레 미소를 지었다.
그럼,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건데?
유이가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때처럼, 감정에 휘둘린 행동을 했어요. 그리고 그게 저를 두렵게 해요.
이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봐 두려워요.
마르타가 손을 휘저었다.
이성적인 신조로만 자신을 단속하다 보면 오히려 고통스러울 수 있단다.
내가 보기에는 네가 수식과 프로그램으로 가득한 우리에서 벗어나려 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닌 것 같구나.
유이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마르타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몸을 숙여 형광 국화의 꽃잎을 살며시 잡고 자세히 살폈다.
네가 태어난 곳에 Je t'aime라는 말이 있다던데.
마르타가 꽃잎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유이는 눈썹을 찌푸리며 뭔가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듯했다.
그 얘기는 왜 갑자기 꺼내시는 거예요? 레보비츠에 온 뒤로는 그런 언어는 쓰지도 않았어요.
알고 있겠지만, "사랑해"라는 뜻이지.
물론 알죠. 하지만 사랑은 마음을 약하게 만들어요.
그게 "주문"이라고 하던데?
맞아요. 하지만 전 신을 믿지 않아요.
신앙과는 상관없단다. 그저 행복을 얻기 위한 말일 뿐이지.
하... 그렇군요. 그래서 제가 어릴 때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네요.
유이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저를 낳고 키워준 사람들은 단 한 번도 이 터무니없는 "주문"을 걸어준 적이 없으니까요.
가늘게 한숨을 내쉰 유이는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마르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국어는 그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언어란다.
인간은 사랑으로 저주받기도, 축복받기도 한단다. 우리는 이런 주문에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물이지.
유이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런, 은퇴했는데도 잔소리하는 버릇은 어떻게 할 수가 없구나.
마르타는 알루미늄 포일 봉지 몇 개를 꺼내 유이에게 건넸다.
최근 회사에서 보낸 물자 중 커피 원두가 좀 들어왔는데 실험실로 가져가렴. 내 입엔 너무 쓰구나.
감사해요. 선생님께 쓸 정도면, 정말 귀한 물건이겠네요.
이후에 시간을 보내는 데 작은 소일거리가 될 것 같네요.
상황은 어떻지?
앞에 있는 연구원들이 서로 쳐다보며 대답하는 걸 망설였다.
상황이 어떠냐고 묻잖아?
많은 실험 대상이 정신 이상을 겪고 있어서, 이제 사용할 수 있는 실험체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럼, 모델 샘플링 결과는?
대부분 좋지 않습니다.
그런 건 기계체 내부에 넣어서 실행해 봐야 알 수 있는 거다.
하지만 델라웨어가 기계 의식이 각성 기준치에 도달하기 전에 의식을 몸체에 이식하면, 제어 불가 상태가 될 위험이 크다고 말했었습니다.
델라웨어, 델라웨어, 하루 종일 델라웨어 얘기만 하는군. 델라웨어 없이는 연구할 수 없다는 건가?
행렬의 안전 시스템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질질 끌지 말고, 일부 샘플부터 먼저 시험해 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