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스트리고의 밤공기는 건조하고 시원했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에 나뭇잎들이 사각거리며 흔들렸다.
엄숙한 표정의 여인이 꽃밭 사이 오솔길을 걸었다. 가로등이 없어도 형광 국화의 빛이 시야를 밝히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데이지를 개량한 변종으로, 개화기에 형광을 내뿜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녀가 계속 걸어가자, 하얀 실험복이 눈에 들어왔다. 소녀가 화단 한가운데서 흙을 가볍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선생님.
여인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챈 실험복 차림의 소녀는 일어나 인사를 했다. 마르타는 이것이 그쯤에서 멈춰달라는 신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이가 돌보고 있는 화단 앞까지 갔다.
최근 상황은 어때?
이전의 형광 국화에서 우수한 모본을 선별해 재배했더니, 이번 꽃술의 형광이 확실히 더 밝아졌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부는 시들어버렸네요.
그래서 화단 상태를 점검해 보니 습도가 부족하고, 낮에 일조량도 너무 강했지 뭐예요. 최근 141호 도시에 비가 왔었나요?
내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라는 거 알잖니?
……
호르스트가 하늘이 선택한 자 모델에 개입했다고 들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헤르타도 너처럼 내가 보낸 학생이란다.
……
듣기로는 하늘이 선택한 자가 이틀 전 테스트에서 놀라운 평가를 받았다던데. 모든 지표가 전례 없는 성과를 보였고, 행렬의 가장 성공적인 모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이야.
지금쯤 축하 파티를 하고 있을 텐데.
답답해서 나왔어요.
마르타가 떠날 생각이 없다는 걸 눈치챈 유이는 몇 초 망설이다가 다시 쪼그려 앉은 뒤 뿌리 주변의 흙을 자세히 살폈다.
들은 게 더 있다.
그들이 널 실험실에 가두고, 매일 강제로 세 번 이상 의식 샘플링을 요구한다더구나. 일반 실험체는 3일에 한 번뿐인데 말이지.
캡슐에 저온 신경 항상성 용액을 추가해, 신경 세포의 부담을 줄일 수 있었어요.
유이는 마치 자신과는 관계없는 사소한 일을 이야기하듯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부담을 줄인다고? 그건 실험이 끝난 뒤, 몸과 뇌가 과부하 상태인 너더러 직접 파라미터와 코드를 조정할 수 있게 하려는 거겠지?
관리자가 하늘이 선택한 자의 모델을 다른 부서로 빨리 이관해서 최적화하라고 요구했어요. 그들이 모델을 가져가게 둘 순 없죠.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아무렇게나 버려질 거예요.
유이는 쪼그려앉은 채, 시선을 아래로 돌려 묵묵히 시든 형광 국화의 뿌리를 만졌다. 그녀의 눈동자엔 무감각과 공허함이 비쳤다.
그럼, 넌? 너 자신의 상태는 생각해 본 적 있니?
마르타는 깊이 눈살을 찌푸리며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러자 망토 자락이 화단 가장자리의 형광 국화를 스쳤다.
고주파 펄스 압박이 이미 감정 장애를 일으키기 시작했을 것 같은데? 이대로 가면 다음은 신경 퇴행이야. 이것도 네가 원하는 결과니?
……
유이는 침묵을 지켰다. 달빛이 핏기 없는 그녀의 얼굴을 비추자, 마르타는 문득 책상 위 제본되지 않은 종잇장이 떠올랐다.
과거 자신의 학생이었던 유이는 지금 창백하고 연약해 보였으며, 바람이 불면 사방으로 흩어질 것 같은 그 종잇장과도 흡사했다.
…………
마르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143호 폐허에서 널 데려왔을 때, 키가 내 허리 정도밖에 안 됐지.
뼈는 금이 가서 골절됐고... 내장은 손상되어 곪았고, 상처에서는 피가 멈추질 않았어.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숨은 간신히 붙어 있었지.
치료를 받았지만, 조금만 힘이 돌아와도 넌 필사적으로 몸부림쳤고, 공포에 질려 소리쳤고, 때로는 사소한 일에도 고통스러워했어.
그때의 넌 나를 꽤 힘들게 했어. 하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그때의 네가 더 "인간" 같았단다.
마르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굳은 얼굴을 풀어보려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할 말이 너무 강압적으로 들리지 않게끔 노력했다.
유이, 더 이상 행렬 계획에 관여하지 말렴.
목이 메어 나온 건조한 소리가 전하는 그 직설적인 말은 명령이라기보다는 애원에 가까웠다.
상관으로서도, 선생으로서도 아닌 그저 자신이 키운 이 아이가 이런 잔인한 "실험"을 계속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
죄송해요. 선생님.
변함없는 대답이었다.
묻기 전부터 예상했던 답이었다. 마르타는 들이마신 탁한 공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예전엔 학원에 남아 식물학을 계속 연구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니?
그들의 발치 화단에서 형광 국화의 꽃술이 밤하늘 아래 흩어져 빛나고 있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첫 번째 의식 복제 실험에서 대체 뭘 본 거야?
…………
다시 침묵에 잠겨 화단의 흙을 만지작거리던 유이는 여기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제한적이었기에 이 형광 국화들이 이 세계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남길 바랐다.
141호 도시가 건기를 맞이하게 되면서 일조 시간이 길어지고 강수량이 부족해졌어.
밤이라서 두르고 있던 망토를 화단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마르타는 작은 형광 구역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이 꽃들은 네가 직접 키웠던 것들이잖아, 그건 네가 가장 잘 알겠지... 유이.
광량이 너무 강하고 습도가 부족하면, 꽃술의 형광은 오히려 더 밝아진단다.
하지만 그 대가는 그들 자신의 생명이지. 그 밝은 빛은 그저 생명의 마지막 잔불에 불과한 거야.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니?
…………
전... 괜찮아요.
먼지 속에 섞인 유이의 목소리가 저녁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마르타는 유이가 어떤 말을 했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고 그저 옆에 서서 그녀를 일으켜주고 싶었다.
네가 원한다면, 학원으로 복귀시킬 방법을 찾아주마. 그럼, 직접 이 꽃들을 돌보고 생명을 이어가게 할 수 있어.
회사의 연구 분야는 넓고, 학원의 육성 시스템은 항상 행렬 계획에 필요한 인력을 우선시했다. 하지만 이런 세계에서도 식물학 분야의 인재는 여전히 필요했다.
괜찮아요. 마르타 선생님.
유이는 몸을 숙여 시든 꽃과 풀을 부드럽게 손바닥에 담았다.
저는 그냥 가끔 들러서 물을 주고, 흙을 갈아엎는 걸로 충분해요.
…………
마르타는 눈을 감았다.
마르타는 한번 마음을 정하면 절대 돌아서지 않는 유이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첫 번째 의식 복제 실험에서 대체 뭘 본 거니?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유이는 일어서서 흙 묻은 두 손을 가만히 모은 채, 오랫동안 화단을 바라보았다. 이곳의 풍경을 머릿속에 깊이 새기려는 것만 같았다.
한참 후, 유이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선생님의 호의는 감사히 받을게요.
하지만 지금 진행 중인 이 연구가... 제가 유일하게 하고 싶은 일이거든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담담한 표정으로 마르타를 바라보았다.
이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창백한 그림자가 밤하늘에 녹아드는 모습을 바라본 마르타는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신경 쓰지 않는다면 왜 게스트리고로 돌아왔고, 이 화단을 찾아온 거니?
<size=40>왜 게스트리고로 돌아왔을까?</size>
<size=40>왜 이 화단을 찾아온 걸까?</size>
마르타의 질문을 들은 유이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실험대의 단말기에서 규칙적인 똑딱 소리가 전해왔고, 그것은 마치 깊이 잠든 거대한 짐승의 숨소리와도 같았다.
고막은 이런 밀집된 백색 소음에 익숙해져 있었다. 유이는 책상 위의 보고서를 넘기면서도 머릿속에서는 마르타의 목소리가 계속 울렸다.
유이는 이 행렬이라는 공간을 처음 방문한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의 마르타 선생님은 유이가 탄 휠체어를 천천히 밀며, 다른 학생들과 함께 앞으로 그들이 일하게 될 구역을 둘러보았다.
지표면과는 완전히 다른 더없이 순수한 공간이었다.
강철과 케이블이 혈관과 신경이 되어 수많은 기계와 디스크 어레이를 연결하고 있었다.
그리고 연구원들이 자료와 데이터를 행렬에 입력하면, 정해진 프로그램이 정해진 결과를 도출해 냈다.
당시 유이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이곳이 좋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질서 정연했고, 명령을 실행하는 기계는 정해진 궤도를 따르면서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안정적으로 작동했다.
순환은 피로 때문에 멈추지 않았고, 분기점도 인간의 감정에 좌우되어 이탈하지 않았다.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그날부터 유이는 기계 의식 연구를 하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마르타의 영향으로 식물학을 접하게 됐지만, 기계 의식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가벼운 발소리가 문밖에서 들리더니, 연구실 문을 정중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한 번, 두 번...
헤르타 님?
노크 소리에 생각이 끊겼다.
따뜻한 인공 빛이 천천히 열리는 문틈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헤르타가 이제는 익숙해진 실험실로 발을 내디뎠다.
셋... 아니, 털 뭉치 네 마리였다. 하나는 실험대 위를 뛰어다녔고, 다른 하나는 그걸 쫓아다녔다. 그리고 나머지 두 마리는 유이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 그리고 또 한 마리는 지금 헤르타의 다리를 비비고 있었다.
(다정한 숨소리를 냈다.)
안녕하세요. 델라웨어 님. 오늘 점심 식사는 드셨어요?
네, 먹었어요.
유이는 허리를 쭉 펴고 앉아 시종일관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품에 안긴 고양이만 없었다면 엄숙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먹기 싫어서 골라낸 토마토가 옆에 산처럼 쌓여있었다.
역시 예상했던 것과 같았다. 유이는 한가해지면 이렇게 바로 들통날 거짓말을 하곤 했다.
델라웨어 님, 토마토는 중요한 비타민 공급원이에요. 심혈관 건강을 촉진하고 신경 세포 복원에도 도움이 돼요.
심전도와 초음파 보고서 어땠는지 기억하고 계시죠? 실험 중간중간에 드시라고 특별히 영양 보충을 위해 넣은 거예요.
유이의 무덤덤한 표정을 본 헤르타는 목을 가다듬었다.
토마토는 섭취 방법을 바꾸어 볼 수 있어요. 혹시, 토마토수프를 더 좋아하시나요?
끈적끈적한 토마토수프는 먹기 싫었는지 유이는 토마토 한 조각을 천천히 먹었다.
그걸 본 헤르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V가 아직 자기 발을 비비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헤르타는 V를 천천히 안아 올렸다.
조금 전에 진행했던 테스트 회의 말입니다... 결과가 나왔나요?
"실험체"인 유이는 모델 테스트 회의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연구원" 조수인 헤르타는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테스트 담당 연구원 말로는 하늘이 선택한 자가 가장 진보된 모델이라 하더군요. 하지만...
무슨 문제가 생겼나요?
자극성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어요.
이전 규정에는 그런 항목이 없었는데요.
그렇죠. 이번에 새로 추가된 테스트 세트입니다. 전쟁, 질병, 이별 등 고통스러운 상황을 시뮬레이션해서 극단적인 환경에서 모델의 반응을 관찰하는 테스트죠.
왜 미리 말해 주지 않았어요?
관리자님께서 일부러 이 사실을 숨기셔서 저도 방금 알았어요.
아무튼, 과적합으로 인한 결과 때문이었을까요? 많은 부분에서 절대적 이성을 보여줬지만, 상처나 다른 자극성 테스트에서는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지 못했어요.
"자신만의 개성이 없어서 영혼이 없는 빈껍데기 같다"라고 테스트 담당 엔지니어가 평가했어요.
빈껍데기요...
고개를 숙인 유이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녀가 책상에서 보고서 하나를 꺼냈다.
헤르타 님, 게스트리고에서 신경외과를 전공하셨죠?
네. 맞아요. 제가 뭘 도와드릴까요?
유이가 갑자기 게스트리고의 전공 경력을 물어보자, 헤르타는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의식 샘플링 과정에서 피실험자의 기억을 필터링할 수 있나요?
음, 인격만 샘플링하고 기억은 파라미터로 입력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네.
기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행렬에서는 이 방안을 추천하지 않았어요.
해마의 신경 신호를 피하면, 모델에 기억 혼란의 위험이 있을 수 있고, "의식" 성장의 기억을 잃으면 모델의 지능과 사회적 상식이 영유아 수준으로 퇴화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 전제하에 모델을 완성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을 추산하기 어렵고, 샘플링 대상자의 신경 시스템에도 손상을 줄 수 있어요.
시간은 큰 문제가 아니에요. 이대로 진행하죠.
유이는 곰곰이 생각한 뒤, 새로운 실험 계획을 정하기 시작했다.
호르스트와 연구원들이 주도하는 모델 테스트 조항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는 유이에게 여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안겨주었다.
실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 모델을 샘플링할 수 있게 됐다.
조심스럽게 두꺼운 격리복을 입은 유이는 실험 캡슐에 들어가 헤르타에게 준비가 됐다는 신호를 보냈다.
델라웨어 님, 샘플링 시작 전에 한 가지 더 여쭤봐도 될까요?
그녀의 침묵은 계속 질문해도 된다는 허락을 의미했다.
어째서 자신의 기억을 필터링하려는 거죠?
…………
왜일까? 아마도...
실험 캡슐 안의 눈 부신 빛이 그녀의 망막을 태웠다.
인간의 기억은 모델 성장의 법칙과 맞지 않잖아요, 오히려 성장을 제한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래서 "기억"과 관련된 모든 요소를 제거할 수 있다면, 샘플의 노이즈 간섭을 줄일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군요.
헤르타는 실험 캡슐 밖에서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정말 그것 때문이었을까?
실험 캡슐 문이 천천히 닫히자, 유이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럼, 시작할게요.
단지 샘플의 노이즈를 줄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이 아이가 이런 고통을 짊어지지 않고... 태어나길 원해서인가?
아니면 단순히 실험을 계속 진행하기 위해서인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런 "꿈" 속에서 자란 아이가 어떻게 될지 보고 싶어서인 걸까?
유이는 자신의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준비됐어요. 필터링 과정에서 기억을 빠르게 훑어보게 될 텐데, 이때 뇌 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다시 경험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심한 신경통이 발생할 수도 있어요. 이미 수없이 말씀드렸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릴게요.
시작해 주세요.
비가 연일 내리는 날씨 속에서 아이들이 떼를 지어 즐겁게 뛰어놀고 있었다.
이제 내 차례야.
그녀는 연못가에 서서 용기를 냈다...
첨벙! 발목에서 뇌로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졌다. 그녀는 균형을 잡을 새도 없이 진흙탕 속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아팠다.
델라웨어, 괜찮아?!
친구들이 허둥지둥 달려와 물웅덩이에 빠진 유이를 끌어올렸다.
물웅덩이로 뛰어드는 건 비 오는 날 아이들이 필수로 하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무릎과 발목의 멍 때문에, 왼발이 잘 따라오지 못해서 물웅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다쳤잖아. 무리하게 시키지 말아야 했는데...
괜찮아. 내가 하고 싶어서 뛴 거잖아. 그리고 비 오는 날도 정말 드물고 말이야.
그렇긴 한데, 오늘은 정말 춥네.
소피는 유이의 말에 답하며 손수건으로 그녀의 다리 위에 묻은 진흙을 닦아주었다. 피부의 물기가 증발하자 유이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응. 근데 우리 집은 좀...
소피!
귓가에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전해온 쪽을 보니, 키 큰 남성이 길가에서 소피를 향해 팔을 흔들고 있었다.
아빠가 소피 데리러 온 거야!
소피는 한걸음에 달려갔고, 행복한 기운이 비 오는 날씨를 뚫고 퍼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소피, 혹시 잊었니? 오늘은...
오늘은 어버이날이잖아요! 달력에서 봤어요!
그래서 오늘 아빠를 위해 준비했어요. 짜잔! 소피가 직접 만든 목도리예요!
소피 아빠가 허리를 굽히자, 소피는 신이 나서 까치발을 하고 엉성하게 짠 목도리를 아빠의 목에 둘러주었다.
하하하! 우리 귀여운 공주님, 어쩜 이리 착하지! 자, 아빠랑 집에 가자!
소피 아빠는 딸을 번쩍 안아 들고는 수염으로 소피의 볼을 간지럽혔다.
소피 아빠가 시원스럽게 웃었고, 소피는 아빠의 어깨 위에서 신나게 소리를 질렀다.
유이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울렸다.
ai... me... 그게 뭐야?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주문이야!
소피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행복하게 만든다고?
유이는 소피 아빠의 목에 걸린 목도리를 바라보았다. 소피가 수공예 시간에 그토록 집중했던 건, 아버지에게 목도리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그 목도리는 엉성했지만, 소피에게는 가장 소중한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유이의 가장 소중한 걸 아버지께 선물하면, 아버지에게서 그 주문을 받을 수 있을까? 행복하게 해주는 그 주문을?
델라웨어, 오늘은 어버이날이잖아, 너도 어서 집에 가보렴. 백작님도 네 축하 인사를 기다리실 거다!
이 주문만 외우면 소피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델라웨어 저택
부서진 건물 모서리에 새긴 정교한 조각상과 무늬는 이곳이 한때 화려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곳은 한때 와인을 많이 생산하던 유명한 와이너리였다.
호박색 술이 와인 저장고에서 흘러나와 황금시대를 수놓았고, 델라웨어 가문은 좋은 술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이것이 델라웨어 가문이 가장 번성했던 시절이었다.
그 후로...
유이는 고장 난 가사 로봇을 지나, 술 얼룩과 패인 자국으로 가득한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어른들이 말하는 "퍼니싱"이 발발한 후, 이 와이너리는 외진 곳에 있어서 침식체의 대규모 침입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서 와인은 분명 필수품이 아니었다.
그렇게 세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 와이너리는 자연스레 세상에서 버려졌다.
유이·델라웨어... 이 어색한 이름처럼,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운명에 균열이 간 것 같았다.
어머니...
동양 여인이 늙은 델라웨어와 결혼해 유이를 낳았고, 와이너리가 몰락할 때쯤 떠나버렸다.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그녀는 아주 멀리 떠났다고 한다.
집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생각이 끊긴 유이는 발걸음을 멈췄다.
아버지께서 또 와인잔을 깨고 있는 건가?
또 시작이었다. 이 둔탁한 소리는... 와인병이 탁자에 부딪치는 소리였다.
와인병, 액자, 좀 더 긴소리는 탁자 위의 물건들을 모두 밀어 버릴 때 나는 소리였다.
깨진 건 자신이 아닌데도, 다리의 상처가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몸이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너무 추워서 온몸이 떨리고, 이는 멈추지 않고 부딪쳐서 잇몸까지 아파져 왔다.
다리의 통증이 곧 일어날 거라고 예고했다. 유이는 발걸음을 뗄 수 없어서 더는 앞으로 갈 수 없었다.
왜일까? 안에 있는 사람이 왜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어야 하는 걸까?
그렇다...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마을을 지키느라 바쁜 소피의 아빠도 멀리서 소피에게 달려올 만큼 특별한 날이다.
신기한 날이다.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날이다. 그러니 아버지에게도 분명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그 주문만 외운다면, 소피의 아빠처럼 수염으로 얼굴을 간지럽히며, 기뻐하며 유이를 안아 줄지도 모른다.
유이는 선물을 꼭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주문을 듣고 싶고, 소피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다.
유이는 두려움에 떨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커다란 방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가자, 빛을 반사하는 온갖 종류의 파편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와인 병, 거울, 도자기 접시, 유리 액자...
시선을 위로 돌리자, 아버지가 파편이 흩어진 벽에 기대어 앉아 눈을 반쯤 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왔니?
아버지가 천천히 일어나 다가오자, 큰 그림자가 천장의 불빛을 가리면서 유이의 시야를 삼켰다.
네... 네.
더러운 카펫과 술 얼룩 묻은 가죽 구두를 내려다본 유이는 계속해서 다리를 떨고 있었다.
어쩌다 또 이렇게 더러워졌냐?
아버지의 말투가 불쾌해지기 시작하면서 그림자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저...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어버이날이라 아버지를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아... 아버지께 드릴 선물을 가져왔어요!
…………
유이가 허둥지둥 가방을 열자, 그 안에 하얀 토끼 인형이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것은 유이에게 가장 소중한 인형이었다. 아무리 우울해도 그 인형을 보기만 하면 금방 진정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걸 아버지께 드려야 할까?
저...
이 인형과 함께 한 시간은 아버지와 보낸 시간보다 더 길었고, 유이의 친구이기도 했기에,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전처럼 고집부려선 안 된다.
아버지께서 선물을 받고, 정말 더 기뻐하신다면...
아버지께 드리고 싶어서, 엄마가 떠나기 전에 남기신 인형을 수선했어요.
아쉬움을 담아 인형을 내밀었다.
그 여자가 남기고 간 물건이냐?
아버지께서 화가 난 모양이다. 왜일까? 분명 어떤 오해가 있으신 것 같다. 유이는 되도록 잘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가 아니라 엄마예요. 엄마가 남긴 거라고요!
찰싹!
유이의 몸이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졌고, 얼굴엔 따갑고 뜨거운 통증이 전해졌다.
…………
지지직... 지지직... 아무렇게나 널린 폐지를 찢는 것처럼 눈이 내렸다.
지지직... 지지직... 하늘에서 눈이 내리듯 인형의 몸에서는 하얀 솜이 흩날렸다.
지지직... 지지직... 그것은 바닥에 흩어진 유리와 함께 파편이 돼버렸다.
아버지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워졌다. 파란 핏줄이 돋보이는 손은 또다시 주변의 물건들을 마구 잡아 던지기 시작했다.
모두 부서졌다.
와인병, 자줏빛 술 얼룩, 코르크 마개, 거울, 도자기 접시, 유리 액자...
어린 유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녀는 다른 잡동사니들처럼 높이 던져졌다가, 세게 떨어졌다.
모든 것이 부서져 버렸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