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번외 기록 / ER10 사기술의 황홀경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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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10-19 은빛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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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ze=50>반드시 완수해야 할 임무였다. 그러다 그녀는 문득 고민에 빠졌다.</size>

<size=50>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엘리너를 마주하게 된다면 오블리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size>

포탄이 주변에서 폭발했다. 귀를 울리는 충격과 함께, 의식이 아득해졌다.

어...

지금 당장 떠나야 합니다!!

절박한 외침이 그녀를 혼미한 상태에서 깨워냈다.

흐트러지지 말고, 대형을 유지해!

정면 약 30미터 거리에는 기계체와 침식 구조체들이 대군을 이루고 있었다.

비상등의 붉은빛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바닥의 혈흔과 기름때는 더 이상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

종대 대형으로 왼쪽 벽을 따라 통로를 빠져나가세요. 지금부터 교전을 중단하며, 전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순간, 유탄이 벽면을 강타했다. 파이프가 찢어지며 짙은 가스가 폭발하듯 분출됐다.

이사루스? 드몽?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대신 들려온 것은 구조체 병사들의 긴박한 응전 사격 소리뿐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목에 손을 올려 송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이사루스? 드몽? 상황 보고 바랍니다!

통신 채널

철수...광장에서 방어선... 구축... 지원 대기... 배치...

퍼니싱 농도가 극도로 높아지며, 적들은 더욱 거세게 몰려왔다. 통신 상태도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광장으로 철수해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후속 지원 부대를 기다리라는 말입니까? 확인 후 다시 무전 바랍니다. 이상.

통신 채널

맞습니다.

노이즈 속에서 짧은 응답이 들려왔다.

수신 완료.

잠깐만요! 저... 저 구조체는 뭐죠?!

놀란 병사의 외침이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의 주의를 끌었다.

가스가 시각 센서를 교란하고 있습니다! 지금 즉시 열상...

그때, 안개 깊은 곳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으윽...

마지막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의 가슴에 큰 구멍이 생겼다.

붉고 푸른 순환액이 쏟아지고, 기계 심장은 격렬히 경련했다.

화력 지원! 자유 사격으로 위협을 제압하세요!

그러나 냉정하게 지시를 내리던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잔해의 가슴 한가운데, 카드 모양의 표창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 무기를 사용하는 자는 한 명밖에 없었다.

소총 탄약 소진! 비살상...

앞서 동료가 당했던 것처럼, 그녀 역시 마지막 말을 끝맺을 기회조차 없었다.

그녀의 몸은 보랏빛의 가시에 관통당했다.

으윽... 이, 이건...

유일한 생존자의 눈앞에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짙은 안개는 여전히 걷히지 않았고, 오블리크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순환액에 젖은 날카로운 가시였다.

가시 뒤로 깔끔하게 접혀있는 천은 위협적인 기색은 없었지만, 그저 단순한 무늬 속에서도 기품과 우아함이 묻어나왔다.

그러나 보랏빛 가시는 구조체 병사의 복부에 더욱 깊숙이 박혔고, 부서진 장비와 생체공학 피부 그리고 기체 속에서 튀어나온 부품들이 마치 찢어진 인형 속 충전재처럼 흩어졌다.

그 보랏빛 물체는 접혀있던 월산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 말은 거의 본능적으로 튀어나왔다. 이 상황이 그녀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죽어가는 구조체의 떨리는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그녀는 어떤 말도 떠올릴 수 없었다.

월산이 천천히 빠져나가자, 구조체 병사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해서, 유일한 생존자와 월산의 주인을 가로막던 마지막 장벽이 사라졌다.

어머, 너는...

우와 이게 얼마 만이야!

5년? 어쩌면 10년? 정확한 연월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세월 속에는 윤년들이 만들어낸 여분의 날들이 있었다.

월산을 든 한 여성이 무기를 지팡이처럼 벽에 기대 세웠다.

배신한 구조체는 즉시 무장을 해제하고 신원을 밝히세요.

오블리크는 카빈총의 총구를 내리긴 했지만, 다른 손엔 장전된 권총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배신자라고? 여기는 공중 정원이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릴리스는 살짝 놀란 척하며, 경계를 풀고 오블리크에게 협조했다.

그게 당신의 결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철수 때 공중 정원에 간 건 저예요.

기계적인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블리크는 옛정을 나누러 온 것이 아니었으며,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답이었다.

어머, 설마 여기까지 날 찾으러 온 거야? 거기 생활이 마음에 안 들었어?

제 목표는 몬자노입니다. 그녀가 만든 구조체 군단은 승격 네트워크를 확산시키는 온상이 되었죠.

내가 그중 하나일 수도 있다고는 생각 안 해?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자발적이었을지도?

그건 제 임무와 무관합니다. 배신한 구조체.

엘리너 싱클레어는 공식적으로 실종 또는 사망자로 등록됐습니다.

협박이라도 하려는 거야? 아니면 몬자노를 혼자 상대하고 싶어서 그래?

약한 패를 들고 게임에 뛰어드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어.

사실 나도 그녀와 결판을 내려던 참이었어. 그런데 너랑 네 친구들 타이밍이 썩 좋지 않네.

그녀는 자신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톱에는 네일아트 대신 날카롭고 적나라한 살인 무기가 있었다.

대철수 때부터 당신은 자발적으로 몬자노의 통제를 받아들였습니다. 어째서 그런 겁니까?

통제? 그런 잔재주를 통제라고 부를 수 있나?

오블리크의 발언은 릴리스에게 모욕과 다를 바 없었다.

대형 우주선은 결국 홀로그램 환형 창이 설치된 하강 엘리베이터에 불과하다는 걸 내가 몰랐을 거라 생각해? 나는 그때 고모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나.

오히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그 조잡한 영상보다 훨씬 더 진짜 같았어! 그런 거짓말에 속을 사람은 무식한 귀족들뿐이야.

지상 지원 임무에서 나타났던 수송기, 마찬가지로 우스꽝스러운 것들이었지.

하지만 이런 경멸이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걸 모르겠어?

고모는 자신의 질서와 상식만을 믿었어. 그런 오만함에 기생해 그녀를 완전히 갉아먹는 것, 그게 바로 내가 가진 가장 큰 패야.

릴리스는 초보자에게 기초 전술을 설명하듯, 인내심 있게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녀 입가의 미소 뒤에는 독사 같은 악의가 감춰져 있었다.

고모는 공중 정원에서 새롭게 시작할 배짱이 없었어. 그저 자기만의 지하 왕국에 숨어 기회만을 기다렸지. 하지만 결국 과거를 내려놓지 못했어.

그래서 널 쿠로노로 돌려보낸 거야, 양쪽을 쥐어 잡으려고. 하지만 재앙의 영향은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너는 고모와 연락이 완전히 끊겼을 테지.

그러고 보니... 네가 쿠로노에서 조사하던 그 "진실"은 찾았어?

릴리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대화에 결정타를 날렸다.

그 얘기는 꺼내지 마세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뭐가 필요가 없다는 거야? 쿠로노가 로즈워터를 버리고, 몬자노의 손을 빌려 그를 제거했잖아.

그러니까 네가 말한 대로, 너의 표적은 줄곧 몬자노였다는 거지.

당신도 그 우편물을 봤으니,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겠죠.

편지에는 정보국이 버려졌고, 원래대로라면 제가 직접 로즈워터를 숙청했어야 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몬자노 곁에 잠복한 것은 그 지시의 다음 단계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몬자노가 로즈워터를 숙청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 조사 결과를 좀 공유해 줄래?

릴리스는 흥미로운 듯 입술 한쪽을 천천히 핥았다.

그만하세요.

그런 나약한 각오로 몬자노를 제거하겠다고? 넌 이미 답을 알고 있잖아! 말해 봐!

릴리스는 오블리크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그녀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기세와 목소리만으로 오블리크의 마지막 선의를 무너뜨렸다.

제 목표는 몬자노이며, 과거의 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해보라고!

릴리스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진실을 회피하는 건 오블리크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진범…… 아니, "엘리너"의 본질을 외면하려 하고 있었다.

엘리너, 제발 그만하세요.

엘리너 싱클레어는 이미 죽었어. 네 입으로 그렇게 말했잖아?

...

지금 이 순간에도 몬자노의 앞잡이들은 계속 네 부대에 피해를 입히고 있어.

오블리크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논리는 임무였기에, 릴리스는 이걸 이용해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이게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만하세요.

오블리크가 천천히 마스크를 벗었다.

뭘 그만하라는 거야? 그렇게 애매하게 말하고도 부탁이라고 할 수 있어?

릴리스는 인내심이 바닥났다.

그녀는 등 뒤에서 긴 가위를 꺼내 오블리크에게 건넸다.

녹이 슨 자국조차 은백색 칼날의 날카로운 빛을 가리지 못했다.

그럼, 내가 대신 답해줄게.

넌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지?

크리스마스이브, 거리에서 드레스를 입은 소녀와 부딪혀 우편물을 떨어뜨린 게 누구였을까?

조금 조사해 보니, 그 우편물엔 내 지문 말고는 먼지 한 톨도 묻어 있지 않더라.

오블리크는 은색 가위를 가슴 앞에 들고 말없이 눈을 감았다.

오블리크에게는 실제로 식도와 위장이 없었지만, 의식 깊은 곳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따뜻한 음식이 전해주던 온기였다.

그리고, 동전 한 닢. 구속 벨트 없이도 찾아온 평온한 잠.

하지만 그 모든 기억 뒤에는 엄격한 훈련과 연금되었던 세월이 따라왔다.

릴리스

넌 모든 걸 알면서도 나보고 함께 가자고 했어.

왜? 네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야?

저울질해 보니, 군부와 쿠로노의 통제 아래 사는 게 몬자노, 그 편집증 할멈 밑에서 사는 것보단 낫겠다고 판단한 거야?

릴리스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 입가의 곡선은 마치 붓으로 그린 듯, 그녀의 입술에 영원히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오블리크

당신도 같은 고통을 겪었잖아요. 우리에겐 그 고통이 헛되지 않았음을 믿게 해줄 어떤 목표가 필요합니다.

그녀의 뒤에서 경멸적인 냉소가 들려왔다.

릴리스

고통에는 두 종류가 있어. 하나는 힘이 되어 주지만, 다른 하나는 아무 의미 없는 고난일 뿐이지.

난 쓸모없는 것엔 인내심이 없거든.

입가에 걸린 날카로운 미소가 옛 동료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릴리스

공중 정원에 있을 때 "불사의 로이드" 전설을 들어본 적 있지?

오블리크

그건 제 임무와 무관하며, 저는 그런 선전에 관심이 없습니다.

릴리스

하지만 그게 바로 군부가 너희들이 말하는 "목표"를 만들어낸 방식 아닌가? 믿음, 믿음이야말로 너희들의 힘이잖아?

릴리스는 방송 톤을 흉내 내며 자연스럽게 읊조렸다.

오블리크

많은 이들이 희망에 의지해 살아갑니다.

릴리스

그럼, 네 희망은 뭐야? 너는 머릿속에 오직 임무밖에 없는 거 아냐?

오블리크

미래를 깊이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퍼니싱 폭발조차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으니까요.

릴리스

그럼 위대한 공중 정원이 사랑하는 모성, 지구를 되찾은 다음에는 어떡할 건데?

늙은 재봉사의 유골이라도 찾아서, 장례식을 치를 생각이야?

릴리스는 의도적으로 찌르듯 말했고, 오블리크는 차갑게 눈을 뜨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들의 만남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덤 위에 마지막 비석을 얹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릴리스

네가 날 증오한다면, 결국 너 스스로를 증오하는 셈이야.

마치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공격의 기회를 노리듯, 릴리스는 깊이 있는 어조로 바꿔서 말을 이어갔다.

릴리스

우리는 원래 뇌가 도려내질 운명이었어. 세상이 우리 같은 소모품들에게 선의를 베풀 거라 생각해?

이 세상은 우리를 멸시해. 내가 사랑했던 고모처럼.

그들은 멸시하는 것들로부터 재산과 권력을 짜내지. 나는 버려진 걸레에서 더러운 물을 짜냈고, 그 더러운 물이 바로 그들이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퍼니싱이야.

그게 바로 내 힘의 원천이야.

하지만 넌 결국 그 걸레를 깨끗이 빨아, 높이 걸어두기로 했어.

그게 네가 말하는 임무고, 목표야. 언젠가 삶이 예전처럼 돌아갈 거라는 허상의 상징이기도 하고.

뭐가 다른 거지? 네 선택이 더 상식적이라서 괜찮다고 생각해?

상식이란 약자들이 진실을 가리기 위해 사용하는 눈가리개일 뿐이야.

진화를 피하는 약자들에게는 멸종의 길밖에 없어.

그녀는 자신의 동기를 설명하는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그것은 오블리크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지막 선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오블리크

저는 그 누구도 증오하지 않습니다. 임무에 있어서 감정은 불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제게는 반드시 완수해야 할 임무가 있습니다.

이해와 수용은 같은 개념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다른 길을 걷고 있었지만, 오블리크는 기억 깊숙한 곳의 그 응어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깨닫게 되었다.

오블리크에게는 더 이상 후회할 것이 없었다.

큰소리치기는. 그래도 그런 면은 발전한 것 같네.

그래서, 몬자노를 어떻게 제거할 생각이야? 선택지는 하나뿐이라는 거 너도 잘 알 거야.

네가 이렇게까지 공들여 날 찾아왔다는 건, 내가 하는 김에 좀 도와달라는 의미겠지?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난 "배신한 구조체"야. 그런데 정화 부대 대원으로서 총알 한 발도 쏘지 않고 이대로 철수하려고?

몬자노가 연구한 구조체들은 내장 차단 장치가 달린 일회용 소모품에 불과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난 그런 하찮은 것에 의존할 필요가 없지.

릴리스가 천천히 오블리크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나는 더더욱 소모품이 아니야!

자, 이제 네 임무를 완수하도록 해. 정화 부대 대원!

릴리스는 오블리크를 벽에 완전히 밀착시킬 정도 가까이 다가갔다.

곧이어 그녀가 바라던 대로, 밀폐된 공간에 화약 폭발음이 복도를 울렸고, 명치로부터 희열에 가득 찬 통증이 전해졌다.

후... 으윽... 하아... 하...

광기에 찬 숨결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퍼니싱을 억제하던 마지막 족쇄가 고폭탄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곧이어 진홍빛 파장이 그녀를 휩쓸고 지나갔다. 마치 황홀한 세례를 받은 듯, 진홍빛은 주변의 공기와 함께 그녀의 영혼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건 제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에요. 이제 가서 그녀를 제거하세요.

오블리크가 근접 사격했던 총구를 내렸다.

그 붕괴와 타락은 수많은 두려움과 어둠이 뒤섞여 있었지만, 이제는 금속 바닥에 흩어진 뜨거운 탄피처럼 무의미해졌다.

공포든 광기든,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공통된 목표를 위해, 그녀는 다시 한번 릴리스를 믿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