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프라도스 교외, 폴라드 보육원 터
폴라드 보육원 터
로프라도스 교외
경고: 침식체 활동이 감지됐습니다. 내장된 차단 장치의 퍼니싱 농도가 곧 임계치를 초과할 것입니다.
날카로운 경고 메시지가 수없이 반복되었지만, 릴리스의 귀에는 오히려 즐거운 전투의 함성처럼 들렸다.
너희들 보러 돌아왔는데, 좀 더 반가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
지하층에서 끊임없이 몰려드는 시체들은 녹슨 몸에 적응하지 못한 듯, 기괴하게 기어다니며 방어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것들은 실험에 실패한 잔재였고, 아이들의 뇌를 철제 껍데기 안에 가둔 원형 구조체였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마주한 것이 단순한 적이 아니라 떠나지 못한 영혼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그저 이 광경이 지옥 같다고 느낄 뿐이었다.
각 소대, 방어선 수축!
탄약이 부족해. 즉시 후속 지원 부대를 호출하고 철수 준비해!
검붉은 순환액이 전투 구조체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지만, 그들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침착하게, 좌측 복도의 목표 집단을 점사로 제압해!
소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강렬한 폭발음이 전장을 삼켰다.
너도 원해? 그럼, 와봐! 와보라고!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총성이 이어졌고, 구조체 하나가 단발 발사 명령도 잊은 채 탄환을 퍼부었다. 하지만 방어선까지 기어 온 침식체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휘청거린 그는 순환액과 기름때로 얼룩진 나무 바닥 위를 끌려가며, 필사적으로 권총을 뽑아 들었다.
내가 이렇게 죽을 것 같아? 꺼져, 이 괴물아!!!
끼이익... 원... 원장님... 모르... 겠어요... 저는...
움직이는 잔해를 향해 연이어 방아쇠를 당기자, 침식체는 경련하며 의미를 알 수 없는 헛소리를 내뱉었다.
죽어, 죽어버려!!!
아이들도 이제 겨우 열정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가혹하게 대하면 얼마나 슬프겠어.
보라색 머리의 소녀는 병사와 침식체의 몸싸움을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의 긴 다리가 공중에서 곡선을 그리더니…
곧이어 고난도 체조 동작을 하는 선수처럼 다리를 내려찍어, 날카로운 가시로 바닥에 있는 잔해의 머리를 관통했다.
으윽... 엘리너 대장님! 감사합...
침식체는 몸부림치며 일어나려 했지만, 목에서 흘러나온 순환액 때문에 감사 인사를 끝내지 못했다.
머리가 관통된 그것은 자극에 반응한 듯 금속 팔을 높이 들어 올려, 녹슨 잔해를 구조체 병사의 허리에 찔러 넣었다. 릴리스의 공격이 오히려 침식체를 자극한 것이다.
이, 이건...
구조체 병사는 힘없이 쓰러졌고, 복도를 가득 메웠던 비명과 총성도 점점 잦아들었다.
엘리너... 정말... 내가 정말... 미안...
잔해는 여전히 통제되지 않는 떨림을 보이며 릴리스를 향해 기어갔다.
릴리스는 목소리의 주인을 단번에 알아챘다. 음색이 변했어도, 그것이 누군가의 참회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환영은 뜨거웠지만, 내 부하들이 많이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아. 단순한 보육원이 왜 로프라도스 교외에서 퍼니싱 활동이 가장 활발한지 이해하기 어렵겠지.
제, 제발... 난...
철제 외피 안의 기억은 뇌가 두개골에서 뜯겨 나가는 고통에서 멈춰 있었다.
수년 후, 그 안에 갇힌 영혼은 퍼니싱에 사로잡혀 현실을 보지 못하는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
오블... 오블리크는... 여기 없어...
침식체는 유압 구조가 부서지기 직전 마지막 한마디를 짜냈다.
응? 내가 이곳에 돌아온 게 그 애를 찾기 위해서라고 생각한 거야?
그녀는 포상이라도 주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침식체의 진심에 감사를 표했다.
인성은 본래 선하다더니, 정말 틀린 말이 아니네.
그럼... 그 답례로 네 소원을 들어줘야겠지?
하지만 오늘은 내 월산이 많이 더러워져서, 더 이상 더러워지는 건 피하고 싶네.
그때, 구조체의 종아리가 복잡한 구조를 드러내며, 코그휠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접이식 칼날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쓰러져 있는 구조체 병사의 시체를 넘어서며, 우아하게 발을 들어 올리더니 침식체의 잔해를 단숨에 찍어 눌렀다.
잘 자... 구속 벨트가 없으니 깊이 잠들 수 있겠네.
더 이상 꿈틀거리는 침식체도, 총성도 없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복도에는 싸우는 사람도, 이야기하는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때 영광스러웠던 장엄 화력 소대, 곡도 화력 소대, 덩굴 화력 소대, 흰담비 화력 소대… 그들의 마지막은 결국 질척한 시체들로 끝이 났다.
그리고 그 잔해 속에서, 월산을 손에 든 한 구조체가 조용히 서 있었다.
기체 전체가 오염되었고, 군화마저 먼지와 순환액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그녀는 의식 회수도, 난공불락의 내장 순환 장치도 없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녀는 퍼니싱 정보가 만든 네트워크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겼다.
구조체 화력 소대 정비 갑판
2시간 후
2시간 후, 구조체 화력 소대 정비 갑판
마지막으로 정화한 거점이 보육원이었다고?
몬자노는 미묘한 불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전투 보고서의 지형 데이터를 다시 한번 짚어나갔다.
네, 도시 외곽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고농도 감염 지역이었습니다.
치열한 전투를 끝내고 살아남은 구조체는 마치 남의 이야기인 양 담담하게 대답했다.
실망한 거야? 내가 사과라도 해야 하나?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고모의 속뜻을 조카는 쉽게 읽어냈다.
오블리크의 행방은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릴리스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설령 그곳에 단서가 남아 있다 해도 심한 오염 때문에 흔적조차 사라졌겠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시급한 문제부터 처리해야겠네요.
수년 전의 오염물질 유출 사고 이후, 릴리스는 몬자노의 계획에 한층 더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했다.
좋아, 전과를 정리해 보자. 로프라도스의 침식체는 완전히 제거됐고, 도시 통제권도 되찾았어. 이젠 이곳을 기반으로 지상 복귀 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겠지.
다만, 대규모 보육 구역을 만들려면 정화 설비가 필수적이야. 우선은 로프라도스를 기점으로 거점을 하나밖에 건설할 수 없겠군.
그래도 이건 지구를 되찾는 여정에서의 첫 승리야.
고모의 발목을 잡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릴리스는 언제나처럼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했다. 차갑고 날카로우면서도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태도였다.
자화자찬은 그만해. 난 아직 네게 훈장을 준 적 없어.
하지만 몬자노는 릴리스의 말재주에 이미 면역이 되어 있었다.
결코 무례한 뜻은 아니었어요. 고모께서 혼자 이런 성과를 이루시는 걸 직접 지켜보니, 그저 기쁠 뿐입니다.
그 말은 인정받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성과는 확실히 있었지. 하지만 네가 진짜 원하는 건 뭐지? 구조체 부대의 지휘권? 설마 단순히 장교가 되고 싶은 건 아닐테고,
보육 구역 하나의 통제권? 아니면 그 이상을 노리는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처음으로, 그녀는 유일한 혈육인 조카를 정면으로 몰아붙였다.
고모도 아시잖아요? 저는 지금까지 계속 목숨을 걸면서 살아왔어요.
전장에서 살아남을 때의 그 죄악 같은 흥분감… 그 짜릿한 감각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죠.
그날도 마찬가지였어요. 제 실수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지만, 결국 그 위기가 고모께 새로운 실험 기회를 가져다줬잖아요.
위험 속에 뛰어들어 능력으로 위기를 역전시키고, 그만한 보상을 얻는 것. 바로 그 짜릿함이 제가 갈망하는 거예요. 고모도 이해하시죠?
소녀는 차분히 추궁에 답했다.
말장난 그만해! 유일한 데이터 샘플이 기계체와 함께 사라졌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재현되지 않았어!
한 번 성공했다면, 앞으로도 기회는 반드시 올 거예요. 인내심도 승리의 필수 조건이니까요.
옛 카지노의 심판자는 기본 원칙을 철저히 숙지하고 있었다.
넌 어떻게 매번 살아남았을까?
네?
날카로운 추궁에 소녀는 순간 당혹한 기색을 드러냈다.
물론 난 구조체 부대의 희생자 수는 신경 쓰지 않아. 하지만 매번 살아 돌아오는 건 너 하나더군.
이건 정상적인 일이 아니야.
승리의 환호는 찰나에 불과했고, 몬자노의 발언은 날카로운 질문으로 돌변했다.
고모께서는 내장 차단 장치와 의식 전이가 퍼니싱의 시험을 통과해, 진화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퍼니싱을 피하기만 한다면, 결국엔 퍼니싱의 먹이가 되고 말 텐데요.
마치 어린 학생을 가르치듯, 릴리스의 목소리는 깃털처럼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왜, 천재 조카님. 뭔가 기발한 생각이라도 떠올랐어? 퍼니싱을 쓸어버릴 무기라도?
몬자노 부인은 조롱하듯 쏘아붙였다.
고농도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두려움은 사고의 적이니까요. 침착한 정신만이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결국 그게 생존을 좌우하죠.
릴리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풀어냈다.
몬자노 부인은 더는 추궁하지 않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확률이든, 운이든... 상관없어. 난 이미 승산이 있으니까.
네가 그동안 세운 공은 나도 다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몬자노 부인은 다시 위엄 있는 목소리로 돌아왔다.
공중 정원만 지켜낸다면, 언젠가는 쿠로노 그룹은 물론… 하산의 권좌까지 장악할 수 있어.
네가 어떤 의도를 품고 있든 상관없어. 하지만 한 가지만 명심해. 내가 권력을 잡기 전에 경솔한 행동을 했다간 우리 모두 파멸할 거야.
자원과 권력. 보이지 않는 힘이 여전히 생존자들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었다.
경고하는 것뿐이야. 무모한 도전으로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말라고.
알겠어요, 고모.
문이 좌우로 열리는 소리와 함께 복도에서 금발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접니다.
작전은 순조로웠나요?
몬자노는 묵묵히 단말기를 건넸다.
로프라도스의 실시간 전장 지도에는 붉은 경고 표시가 사라지고, 평화를 알리는 푸른빛이 영역을 채웠다.
고무적인 소식이군요! 그럼 지상 복귀 의안도 바로 준비할 수 있겠네요.
연임에 또 성공하셨나요?
릴리스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불쑥 꺼냈다.
그렇죠. 압도적인 지지였어요. 주민들이 우리의 전장 공적을 인정해 준 덕분이죠.
겉으로는 자신만만한 말투였지만, 그의 목소리에 미세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몬자노가 케프하트를 향해 수락의 눈빛을 보냈다.
괜찮아요, 말하세요.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사실… 이번 임명은…
내가 설명하지. 이제 더 이상 투표는 필요 없어, 투표할 사람이 남아 있지 않으니까.
그게 무슨 뜻이죠?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릴리스는 마치 후방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최전선 지휘관처럼 능청스럽게 물었다.
내부의 변화를 눈치채지도 못한 걸 보니, 너는 지상 전투에만 집중했나 보네.
급하게 철수하느라 배의 생태 순환 시스템을 제대로 점검하지 못했어. 결국, 물과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했다는 거야.
이것도 우리가 지상 복귀를 서둘러야 하는 이유 중 하나야.
몬자노는 충격적인 사실을 마치 일상적인 보고처럼 덤덤히 전했다.
그럼 주민들은...
잊지 마. 에덴형은 원래 식민 함선이야. 세대를 넘는 항해를 대비해서 대량의 동면 캡슐이 마련돼 있어.
동면 상태에서는 생체 대사가 극도로 느려져서 외부 자원이 거의 필요 없어.
물론, 가끔씩 뛰어난 몇몇을 깨우는 것도 유용하겠지. 최상의 컨디션으로 구조체 개조를 거쳐 전력을 보강할 수 있으니까.
...
무한히 착취 가능한 거대 "생체 자원고"... 이것이 바로 고모가 말한 승산이었다.
걱정 마세요. 핵심 주거 구역의 생활에는 전혀 영향이 없을 테니까요.
술과 춤으로 떠들썩하죠. 지상 전황이 순조로워서인지 모두들 그 어느 때보다 들떠 있더군요!
케프하트는 그 특유의 가벼운 태도를 숨길 줄 몰랐다.
정책 추진은 케프하트와 그의 동료들의 몫이야. 소수가 미래를 쟁취하는 동안, 다수는 순응하고 기다려야 하는 법이거든.
대규모 주민 냉동이 의회에서 공식 승인한 방안인가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같은 결정을 내렸을 거야.
이건 권력자들의 냉혹한 선택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 평범한 공포는 바로 이렇게 연출된다.
상식을 무너뜨리고, 이성을 짓밟으며, 궤도 철수 이후 인류가 지켜온 모든 가치를 산산이 부숴버린다.
릴리스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광기에 물든 대다수는, 정작 그 광기의 실체조차 알지 못했다.
작은 균열에서 시작된 혼돈이 모든 계획과 책략을 삼켜버렸다.
마치 현미경으로 균군을 들여다보며 미생물에 매혹되는 광기 어린 과학자처럼, 릴리스는 그 결과를 보고 싶어 했다.
두 분께서 더 논의하실 일이 있으실 테니, 저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산 로렌초에서 술 한잔해야겠네요.
릴리스는 말투에 적당한 피로감을 섞었다.
그러시죠. 고강도 전투였으니 피곤하시겠네요.
충분히 휴식을 취하세요,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요.
당연한 보상이었다. 하지만 릴리스를 기다리는 위안이 단순한 칵테일 한 잔일 리 없었다.
이후 거점 건설 추진 절차는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가봐. 네 자제력이야 의심할 바 없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근래 귀빈들이 향락에 빠져, 분별력을 잃어가는 듯하더군.
허락과 경고를 동시에 담은 말투, 몬자노다운 방식이었다.
릴리스는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려던 속내를 꾹 눌러 담았다.
완벽한 계획이라고 확신하는 고모야말로 이성을 잃은 게 아닐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침내 꺼낸 말은 물처럼 싱거웠다.
절제된 품위야말로 릴리스의 본질이었다.
릴리스는 방을 나와 고요한 복도를 지나, 산 로렌초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수정 천장 아래로는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대화가 가득했고, 그 소리에 천장의 장식품들마저 흔들리는 듯했다.
릴리스가 처음 럭키38 카지노를 찾았던 그때처럼, 이런 환락의 공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황금시대, 대재앙 이후, 환락의 도시 그리고 궤도 돔 모두 마찬가지였다.
끝까지 채워! 비용 걱정은 하지 마, 액수는 상관없어!
흐트러진 자태의 남자가 와인잔을 허공에 흔들며, 검정과 금색으로 빛나는 카드를 기계체 바텐더 앞에 내보였다.
오류: 인식 불가. 포맷 중...
기계체 바텐더는 차가운 응답음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진작 말했잖아, 이런 깡통은 사람만 못하다고. 만져도 차갑기만 하고... 하하하!
옆자리의 취객이 위스키가 담긴 잔을 기계체 바텐더의 몸통에 쏟아부으며 거칠게 웃어댔다.
이봐, 낭비하지 말라고! 마시기 싫으면 나 줘!
취객이 투덜대며 유리잔을 벨벳 테이블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명령을 무시한 깡통을 혼내주는 건데, 뭐 잘못됐어?!
욕설과 함께, 술기운에 휘청이는 주먹이 날아들었다.
에라이! 똥물에 튀겨 죽일 놈!
덤벼 이 자식아!
정장 차림의 취객들이 난투극을 벌이자, 옆 테이블의 도박판 무리들이 야유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얼룩진 피부는 어두운 조명 속에 가려져 있었다. 취기와 도박의 열기 속에서 그런 것쯤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썩어가는 듯한 공기가 취객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사이, 월산을 든 소녀는 바 카운터와 도박판 사이를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시선은 홀 구석의 뷔페 바를 향했다.
장사의 요령은 간단하다. 무료 음식으로 배를 채운 손님들은 발길이 묶이게 되어있다.
그리고, 이런 곳엔 시계가 없다. 현실을 깨닫게 하는 모든 것들이 감춰져 있는 것이다.
금박을 입힌 베이컨은 언제 나와?
뷔페 바 건너편의 조리 기계체는 이미 오래전에 작동을 멈췄고, 표시등은 두꺼운 먼지에 가려져 흐릿하게 빛날 뿐이었다.
내가 예전부터 말했잖아, 저 물건은 장인의 손맛을 따라갈 수 없다니까...
손님은 호사스러운 기대를 접어두고, 쟁반을 들어 높게 쌓인 요리 사이를 훑었다.
구운 랍스터 꼬리로 시작해야겠군.
손님은 균사가 피어오른 요리를 집어 탐욕스럽게 삼켰다.
릴리스의 코끝에는 썩어가는 악취가 스며들었다...
보이지 않는 퍼니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맑은 공기를 오염시키고, 생체 조직을 갉아 먹으며 스며들 뿐이었다.
안전지대라 불리는 핵심 주거 구역과 그 지하 실험 시설은 결국 밀폐된 퍼니싱 배양 접시가 되어버렸다.
우득, 우득... 우욱, 퉤엣! 뭐야, 이거?!
손님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더니 구역질하기 시작했다.
그의 혀와 목구멍에서 부자연스러운 검붉은 얼룩이 어렴풋이 보였다.
맛있게 드세요...
술에 취한 무리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광기의 향연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릴리스는 알고 있었다. 이제 곧, 그녀가 기다려온 순간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그녀는 1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 섰다.
광란의 재즈와 기괴한 록이 귓가를 때려댔지만, 그 부조화는 오히려 스테이지에 열기를 더했다.
의회 의석의 엘리트들은 품위를 벗어던지고, 술에 취해 유리잔으로 광기 어린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쾌감 속에서만 생기를 찾았고, 그 외의 모든 것은 공허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샴페인이 넘쳐나고 황금이 눈부시게 빛나는 이 순간, 세상의 아픔과 투쟁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릴리스는 완성된 걸작을 바라보며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완벽해... 독이 스며든 술잔과 치즈, 이 치명적인 향연을 마음껏 누려봐!
독배의 근원은 침묵 속에 감춰졌다. 쾌락의 늪에 빠져 죽을 희생양들에게 진실 따위는 무의미했다.
릴리스는 고모가 이 결말을 반길 것이라 확신했다. 고모의 실험에는 고농도 환경이 필요했고, 지금 이곳은 완벽한 실험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귀족들도 결국 동면 캡슐 속 실험체들처럼, 쓰고 버려질 배양기에 불과했다.
그때, 계단 아래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릴리스를 불러세웠다. 이에 그녀가 뒤돌아보자, 얼굴이 붉게 상기된 취객이 흐릿한 눈으로 무례한 말을 내뱉었다.
이봐, 넌... 누구야!?
저요?
당신들이 존경하는 심판이자, 기술이 뛰어난 바텐더?
몬자노 부인의 이름을 빌려 호기를 부리는 아가씨?
...
희열이 생체공학 피부 구석구석을 타고 흘러내리며, 그녀의 영혼마저 선홍빛으로 물들였다.
잿더미가 된 옛 도시, 신들의 분노가 퍼부어진 폐허. 그녀는 그곳에서 무르익은 광기 어린 환희를 떠올렸다.
심판의 권한은 아직 강림하지 않은 그 거대한 체가 행사할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벌을 내릴 권한 따윈 없었다.
그러나, 광란의 소용돌이에 몸을 던지는 어리석음은 이미 역사가 증명한 숙명이었다.
릴리스라고 합니다. 저는 손님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죠.
그녀는 완벽한 품위와 우아함으로 무장한 채, 작은 실수조차 매력으로 둔갑시켰다.
오염된 피로 물든 발뒤꿈치는 은빛 장식 아래 감춰져, 대리석 계단 위에서 우아함과 환희를 자아냈다.
그녀는 이 감옥에 쾌락을 선사하는 지배자였다.
광기에 사로잡힌 무리는 결국 하나둘씩 쾌락만을 좇는 핏빛 늪으로 빠질 것이며, 보이지 않는 어둠의 종소리는 영원히 울려 퍼질 것이다.
삼각대 위의 화려한 불빛은 꺼지지 않았지만, 릴리스는 마지막 선별의 순간이 다가옴을 직감했다.
너는 어떻게 매번 살아남는 거지?
당신들의 공포는 내겐 아무 의미도 없어. 그게 다야.
곧이어 붉은 죽음이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그 무리는 부패하는 살덩이와 광란의 증상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부패한 낙원 속, 극락의 가면을 쓴 붉은 죽음이 영원한 광기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