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함선의 그 누구도 모르는 구석에서, 심문이 계속되고 있었다.
실험에 참여하지 않았나요? 다른 프로젝트가 너무 순조롭게 진행돼서, 이제 그 노인네도 그 꼬맹이들에게 더는 기대하지 않는 걸까요?
네, 의식 융합 실험은 예상보다 훨씬 순조롭게 진행됐어요.
인체의 한계를 극복하지 않는 한, 영점 에너지가 현실화된다 해도 인간은 영원히 은하 식민을 실현할 수 없을 거야.
보크농 계획? 인공 생태권 실험으로 식민 함선의 거주 가능성을 높이자고? 예산 지원이야 가능하지. 하지만… 그런 쉬운 방법이 통했다면 좋겠지만, 모든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는 건 현명하지 않아.
사고는 유지하면서 육체를 바꾸는 것, 그게 더 고려해 볼만한 방법일지도 모르지.
이 아이들은 용병 한 사단, 냉핵융합로 하나, 가을급 우주함 한 척보다도 더 중요해. 결국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건 이 아이들뿐일지도 몰라.
그는 노인의 당부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뒤바뀌는 시국 앞에서 약속이란 무의미했다.
아이들의 뇌를 기계체로 이식한 죄악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고, 의식 전이와 융합이라는 광적인 상상이 로즈워터의 자리를 대체했다. 소모품도 결국 각오를 다졌겠지만, 인간은 자신의 양심을 쉽게 이겨내지 못하는 법이었다.
우리는 건너편을 약속받았기에 피로 물든 물속으로 뛰어든 거예요. 그런데 지금 와서 저희더러 피바다에 빠져 죽으라고요?
실험 샘플은 여전히 귀중한 자산이에요. 그리고 로즈워터 씨가 쿠로노에 기여한 공로는 헛되이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이번 후보자들을 기반으로 노인네는 폴라드 기관을 설립하기로 했어요. 기관은 쿠로노 정보국에 직속으로 운영될 거고, 저는 기관의 이사로 임명받았어요.
집단의 수장이 내린 개편 명령은 그녀에게 확고한 자신감을 심어준 듯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로즈워터의 조력자’가 아니었다.
정보국? 제가 데리고 있는 아이들은 결국 알파벳도 제대로 못 읽는 파블로프의 개에 불과해요! 그저 명령이나 수행하는 아이들이라고요!
초연한 태도를 유지하던 남자가 분노에 차 험악한 어조로 반박했다.
그게 바로 요원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자질 아닌가요? 명령의 의미를 고민하지도 않고, 심지어 임무가 자신의 한계를 넘는지조차 의심하지 않아야 하죠. 그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본능적으로 수행해야 해요.
그럼, 기본적인 인지 능력은요? 노인네가 세계 정부의 인재를 빼 오려 한다면서, 문서도 못 읽고 위장도 못 하는 아이들에게 그걸 맡기겠다고요?
이 아이들이 살아있는 이유는 그 수술을 받기 위해서예요. 운이 좋다면 새 삶을 얻겠지만, 우리 시설에서 가장 바쁜 곳이 지하의 화장터와 구조체 회수실이라는 걸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로즈워터는 이 모든 것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성과를 내는 것만이 양심을 덜어내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지만, 이제 그는 그 사치조차 빼앗길 처지에 놓였다.
걱정 마세요. 요원은 여러 유형이 있고, 아이들에게 모든 걸 기대하는 것도 비현실적이죠. 폴라드 기관은 앞으로 성인 후보자도 채용할 겁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폴라드 기관의 제0호 감시 및 정화 부서를 구성할 예정이에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던 그녀에게 이 대화는 결국 단순한 인수인계에 불과했다.
결국에는 쿠로노의 킬러라는 거잖아요.
로즈워터는 이런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체념한 듯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네, 맞아요.
그녀는 필요한 정보를 모두 전달했다는 듯, 천천히 팔걸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보육원 원장으로서의 마지막 시간을 잘 보내세요, 원장님.
로즈워터는 조각상처럼 책상 앞에 굳어 있었고, 방문자가 나가며 문을 닫는 소리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문 뒤에 있던 해부도가 그려진 방수 종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 뒤, 다시 정신을 차린 로즈워터는 사무용 책상 서랍을 열어 파일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백여 명에 달하는 보육원 아이들의 명단이었고, 로즈워터는 그 내용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후보자의 절반 이상은 그가 직접 "모집"한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인수인계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내가 원장이야.
그렇고말고.
로즈워터는 혼잣말을 하며 결심을 굳혔다.
알겠습니다.
아이는 중년 남자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테 안경을 쓴 원장은 거의 숙소에 오지 않았다. 이는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한 번쯤 그를 마주했지만, 그 이후로 다시 볼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홀로 외로워하는 아이의 침대 옆에 앉아,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이곤 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게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면 해. 자, 이제 가서 짐을 챙겨와.
그는 아이의 어깨를 다정히 토닥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옷장 문 뒤로 사라졌다.
잠시 후, 아이는 자신의 모든 물건을 군용 가방에 담아 나왔다.
좋아, 이제 가자.
원장이 아이를 데리고 나가자, 숨죽였던 목소리들이 서서히 퍼져나갔다.
… 저 애가 수술을 받게 됐나 봐.
대장 노릇을 하던 아이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아이들 사이에 수군거림이 일었다.
말도 안 돼! 쟤는 실력도 부족한데, 어떻게 선택된 거지...?
옆에서 듣고 있던 아이가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지만,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네가 뭘 생각하는지 알아. 가장 뛰어난 건 엘리너인데, 왜 저 애가 선택됐는지 납득이 안 가는 거지?
...
그녀는 험담의 대상이 같은 방 구석에 있다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반항적인 성격도 때로는 도움이 되나 보네. 어른들은 그 애가 수술실의 모든 것을 박살 낼까 봐 두려워하는 거지!
비웃음 섞인 말에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대장은 슬그머니 엘리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편, 기숙사의 한쪽에서는 두 소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저들이 말한 게 사실인가요?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야. 그 애는 수술받으러 간 게 아니라, 입양된 거야.
입양이요? 하지만 이곳은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된 곳인데.
저번에 내가 부상 보고서를 제출하러 가면서 원장실 앞을 지나쳤거든.
원장님이 전화를 하고 계시더라. 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목소리를 낮추셔서… 그냥 자연스레 귀가 기울었어.
남의 대화를 엿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
그래서 복도 의자에 앉아, 보고서를 치마 옆에 내려놓았어. 난 그저 길을 잃었을 뿐이었고, 원장님이 통화를 마치시면 의무실 위치를 여쭤보려 했지.
그 층은 늘 조용하죠.
소녀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
응! 워낙 조용한 곳이라 대화 내용이 들릴 수밖에 없었어...
통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어. 원장님이 누군가에게 보증을 서는 듯했는데,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시더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트라우트".
그러니까,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그 아이를 입양했다는 거예요?
잘 모르겠어.
그날 원장님께 여쭤봤더니, 좀 놀란 듯 날 보시고는 주임 의사 선생님이 휴가를 가셨다고만 하셨어.
폴라드에서 가장 바쁜 분이 휴가를 간다는 게 말이 돼? 그래서 그분 사무실에 가봤는데... 문이 잠겨 있었어.
엘리너에게 오블리크는 유일하게 믿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였다. 어차피 이런 소문은 금방 퍼질 것이니, 미리 공유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소녀도 두려웠다. 모든 일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것만 같았다.
수술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지도 몰라...
그녀는 결국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기로 했다.
!!
파란 머리 소녀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무르기 없어! 네가 이미 수를 뒀잖아!
대장 말 못 들었어? 그 손 치워!
입구 근처 침대 쪽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장난꾸러기들은 자유시간을 놓치지 않고 열띤 다이아몬드 게임을 시작했다.
설령 재미있는 게임이라 해도, 엘리너와 오블리크는 이런 놀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엘리너는 상대의 수를 미리 읽고 가차 없이 승리하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게임에서 진 아이들은 엘리너가 보이지 않을 때마다 오블리크를 괴롭히며 분풀이를 했다.
내버려둬. 어차피 시간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입양되면… 새로운 엄마, 아빠랑 살게 되는 거예요?
그럴 거야...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
"수술"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이들은 알지 못했다.
교관이 오지 않는 날이면, 보육원 선생님은 간식이 담긴 작은 카트를 끌고 숙소를 찾아왔다.
크리스마스나 어린이날 같은 특별한 날이면,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체리가 장식된 작은 케이크를 나눠주었다. 바깥세상과 떨어져 지내는 아이들은 명절의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부드럽고 달콤한 생크림은 평소 먹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그리고 가끔, 보육원 선생님은 아픈 아이의 침대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알약을 건넸다.
그 아이는 알록달록한 작은 알약을 삼킨 뒤, 선생님의 뒤를 따라 조용히 숙소를 나섰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입양 프로젝트라니?!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지금 당장 신청서를 써보시죠. 노인네가 가장 유능한 암살자를 보낼 테니까요.
서류 뭉치가 책상 위에 거칠게 던져졌다. 그녀의 태도는 여전히 엄숙했지만, 말투에서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앞의 두 글자를 놓쳤네요. 이건 "극비" 입양 프로젝트입니다.
보육원의 비밀은 철저히 지켜지고 있어요. 크틸라 계획의 후속 진행은 물론, 폴라드 기관에도 전혀 지장이 없게 보장해 드리죠.
보육원의 "원장"이라 불리는 남자는 조용하면서도 단호하게 반박했다.
더군다나 제가 보낸 아이들은 모두 특출난 면이 없는 평범한 아이들뿐입니다. 얼마 전에도 혼자 지내길 고집하던 아이가 있었는데, 정신과 의사가 데려갔죠. 그 아이, 시험에서 항상 최하위권이었어요.
오히려 전 폴라드 기관을 위해 최상의 인재들을 보호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는 완벽한 논리로 자신의 입장을 마무리했다.
제가 오늘 이곳을 찾은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방문자의 말투는 달라졌지만 냉랭함은 그대로였다.
더 얘기할 게 있나요?
노인네는 읽자마자 태워버려야 할 최고 기밀만 종이로 받죠. 서류는 책상 위에 있으니 확인해 보세요.
그녀가 턱짓으로 서류 뭉치를 가리키자, 로즈워터가 첫 페이지를 펼쳤다.
임명장?
그는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결과는 예상과 전혀 달랐다.
책상 맞은편에 앉은 상대가 냉소적인 미소를 띠었다.
노인네가 왜 당신을 이토록 아끼는지 모르겠네요. 보육원은 없애면서도 새로운 길을 열어주다니...
오늘부터 당신은 폴라드 기관 소속 요원이에요.
명령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파란고스키는 고개를 숙여 장신구의 보석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원장은 그 반짝이는 표면 아래 치명적인 청산가리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쿠로노 그룹에 대한 제 충성심은 절대 변하지 않아요.
발령을 받아들이죠.
감정을 배제한, 전문가다운 태도였다.
그럼, 당신의 첫 임무는 이미 시작됐어요.
속죄의 기회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겠네요.
로즈워터는 단호하게 대화의 주도권을 쥐었다.
맘대로 생각하세요. 중요한 건, 노인네가 보크농 계획의 실행 단계를 승인했다는 거예요.
크틸라 계획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에요. 하지만 세계 정부의 동향도 무시할 수 없죠.
에덴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어요. 쿠로노는 처음부터 장거리 우주선 내부의 생태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았죠.
우리는 보크농 계획을 통해 이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게 될 거예요. 연구 시설은 북미 생태 과학 연구소에 세울 예정이에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죠.
제 역할은 뭔가요?
방문자가 긴 설명을 끝내자,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물었다.
연구소장 에이드리언느 몬자노가 건설 작업을 시작하려고 해요. 하지만 노인네는 크틸라 계획에 모든 자금을 쏟아부어서, 그녀의 막대한 예산 지원 요청에 망설이고 있는 상황이에요.
이 사막 한가운데는 황금으로 포장된 도시가 있죠. 로프라도스. 그곳의 실질적 지배자는 몬자노의 오빠, 싱클레어와 그의 부인이죠.
파란고스키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마치 보육원을 둘러싼 황야를 넘어, 저 멀리 빛나는 도시를 응시하는 듯했다.
몬자노가 로프라도스에서 예산을 끌어올 수 있도록 도우라는 건가요? 전, 금융 쪽엔 문외한인 거 알잖아요.
그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노인네가 자신을 이런 식으로 곤란하게 만들려는 건가 싶었다.
아, 그렇게 생각하진 마세요. 여기 싱클레어 부부에 대한 조사 자료가 있으니 한번 보시죠.
로즈워터는 다시 자료 문서를 펼쳐 내용을 검토했다.
프레드 싱클레어. 여행 중 가수 필리스 싱클레어를 만났으며, 나이 차이는 31살...
불임 진단. 양자 혹은 양녀 입양 고려 중...
프레드의 직계 가족은 여동생뿐이네요.
서류를 덮고 고개를 들자, 파란고스키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쳤다.
당신이 훈련시킨 어린 암살자들을 투입할 때가 왔네요?
싱클레어 부부가 사라진다고 해서 몬자노가 재산을 상속받을 거란 보장은 없어요.
그는 서류를 덮으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물론, 직접적인 상속은 어렵겠죠. 하지만 부모의 사랑은 다릅니다.
특히 평생 자식 없이 살다가, 이제 와서 불임을 판정받고 젊은 아내의 출산만을 기대하는 늙은 부자라면 말이에요.
로즈워터의 몸이 굳었다. 그는 파란고스키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정확히 깨달았다.
당신의 입양 계획은 참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덕분에 모든 과정이 훨씬 간단해졌으니까요.
그녀는 결국 로즈워터가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린 것에 화가 난 것이였다.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죠?
지금부터 적임자를 찾으시면 돼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로즈워터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방문자가 떠난 후, 그는 매번 기도문을 읊던 습관을 처음으로 잊었다.
"주님, 저희를 지켜 주시옵소서".
하지만 아이들을 도구로 삼는 이 계획 속에서, 과연 주님의 뜻이란 게 존재하기나 할까?
사무실은 그대로였지만, 책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인물은 이사보다 훨씬 작은 체구의 존재였다.
지난번 부상 보고서는 결과가 나왔어?
머릿속이 복잡했던 그는 정신없이 인사말을 건넨 후, 뭐라고 말을 이어갈지 고민했다.
주치의 선생님은 휴가 중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나이 탓인지 요즘 기억력이 많이 흐려졌네.
그런 말씀 마세요. 원장님께서는 저희를 위해 늘 애써 주시잖아요.
엘리너의 적절한 미소는 로즈워터가 왜 이 뻔한 결정을 내렸는지 상기시켜 주었다.
그는 이 특별한 아이가 어디서 글을 배웠는지, 어떻게 절대음감을 가지게 되었는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숙소에서 ‘다이아몬드 게임 챔피언’이라는 소문이 퍼졌을 때도, 그는 그 진상을 파헤치려 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그녀의 재능은 이번 임무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산이 될 터였다.
넌 영리한 아이니까, 폴라드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대충 알고 있을 거야.
원래는 병원과의 협력을 통해 가까스로 운영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로즈워터는 눈앞의 소녀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수술들이 잘 안 풀려서 그런 건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어.
엘리너의 담담한 반응을 보고, 로즈워터는 어른들의 달콤한 거짓말이 이 아이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어쨌든, 이곳은 곧 문을 닫게 될 거야.
세상에는 아이를 간절히 원하지만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 많고, 자신의 작은 가정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너희는 그런 새로운 가정에서 살아가게 될 거야.
원장은 냉담하게 비현실적인 미래를 약속했다.
원장님께서 절 부르신 건, 무슨 계획이 있으신 건가요?
원장님은 늘 저희를 먼저 생각해 주셨죠. 그러니 저도 원장님 말씀을 잘 따를게요.
소녀는 흠잡을 데 없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로즈워터는 그 이면의 깊이를 읽을 수 없었다.
한 노신사 부부께서 우리가 올린 입양 공고를 보시고, 너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단다. 좋은 날을 골라 너를 만나고 싶어 하셨어.
약속은 이미 정해졌고, 그분들은 모레 이곳으로 오실 예정이야.
로즈워터는 자신이 마치 유기 동물에 대해 논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불쾌해졌다.
좋아요! 제게 새로운 엄마, 아빠가 생기는 거네요?
그러나 엘리너는 로즈워터가 아직 가장 중요한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기쁨에 찬 목소리로 환호했다.
원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게요.
다만… 작은 부탁이 하나 있어요.
순간 그녀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고 공손한 미소는 그대로였다.
네 친구 때문에 그런 거구나?
모든 준비는 내가 끝내 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 아이의 새집은 네가 있을 곳과 그리 멀지 않을 거야.
안경 너머로 진지한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로즈워터의 유일한 진심이었다.
거짓말하시면 안 돼요!
약속할게.
로즈워터는 소녀가 어떻게 이토록 품위 있는 침착함과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을 동시에 지닐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임무 수행에 가장 적합한 인물일지도 몰랐다.
그럼, 저와 오블리크, 그리고 원장님은 분명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겠죠?
...
로즈워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꼬리가 그린 우아한 곡선에서, 남자는 죽음을 부르는 낫 날의 서늘함을 보았다.
넓은 숙소에는 이미 절반 이상의 침대가 비어 있었고, 가져가지 않은 짐과 가방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로즈워터는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파란 머리의 소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내가 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전부야.)
로즈워터는 그런 생각과 함께 앞으로 걸어갔다.
오블리크...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블리크, 이제 가야 해.
절대로 명령을 거역하지 않는 소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엘리너는요?
너도 알다시피,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야. 입양 가정이 결정하는 거지.
그럼, 저는 또 버려지는 건가요?
그녀는 조금의 격렬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마치 흔들리며 꺼져가는 불꽃처럼, 조용히 어두워질 뿐이었다.
엘리너에게 새 가족이 생기는 거잖아. 그럼, 좋은 일 아닐까?
그 말을 내뱉고서야, 로즈워터는 자신의 위로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깨달았다.
소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갈 곳은 엘리너의 새집과 꽤 가깝단다.
내가 새로 연 양복점으로 갈 거야. 네가 예전에 살았던 로프라도스에 있지.
로즈워터가 한 단어를 언급하자, 오블리크가 갑자기 멈춰 섰다.
양… 복… 점...?
그녀는 마치 아주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 듯, 그 단어를 조용히 되뇌었다.
나에게 이런 능력이 있는 줄 몰랐지?
걱정하지 마. 곧 새로운 삶이 펼쳐질 거야.
로즈워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오블리크의 손을 살며시 잡아 그녀를 위로했다.
오블리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로프라도스
3일 후
정교하게 재단된 복장들이 절제된 장식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었다. 오블리크는 여전히 망토나 작전복 같은 실용적인 옷만 알고 있었다. 이런 고급스러운 옷들은 카지노 손님들의 차림새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접해본 것이 전부였다.
로즈워터는 그녀를 데리고 원목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간 후, 한쪽에 있는 작은 문을 열었다.
안쪽에는 따뜻한 분위기의 침실이 있었다. 모든 가구가 갖춰져 있었고, 이전에 머물렀던 딱딱한 숙소의 침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편안해 보였다.
여기가 네 새로운 집이야.
오는 길도 힘들었을 테고, 곧 어두워질 거니 오늘은 푹 쉬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녀에게는 여전히 명령만이 가장 익숙한 언어인 듯했다.
이제 여기선 훈련도, 명령도 없을 거야. 그러니 편하게 지내렴.
소녀는 아무 말 없이 곧장 침대 옆으로 가, 가방에서 구속 벨트를 꺼냈다.
익숙한 동작으로 손목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로즈워터가 그 주황빛 띠를 단번에 빼앗았다.
...
이제 이런 건 필요 없어. 그리고 작전복에 내장된 세정 기능도 따뜻한 온수 목욕만큼은 못 할 거야.
로즈워터는 침대 맞은편에 있는 화장실 문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다만,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요.
그래. 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요 며칠 새로운 손님들이 많이 올 텐데, 이 도시는 조금 복잡하고 위험한 사람들도 있어. 그러니까 항상 조심해야 해.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화제를 돌렸다.
내게 말하지 않고 혼자 나가선 안 돼. 알겠지?
2층에는 생활 시설이 잘 갖춰져 있으니까, 관심 있으면 한 번 둘러보고 이용해 봐.
오블리크는 로즈워터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바로 이해했다. 그는 외출 금지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했다.
그럼, 잘 자.
곧이어 묵직한 나무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 후, 오블리크는 작전복을 벗고 부드러운 침대 위에서 몸을 한껏 웅크렸다.
엘리너는 어디 있는 걸까?
오블리크는 사실 엘리너가 조금 그리웠다. 또다시 버림받긴 했지만,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외출 금지에 오블리크는 앞으로의 양복점 생활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묘한 기대감도 함께 피어올랐다.
떠돌이 생활을 시작하기 전, 바느질은 그녀가 가장 능숙했던 일이자, 자신이 가장 자부심을 가졌던 기술이었다.
어찌 됐든, 이날 밤은 오블리크가 정말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든 날이었다.
손목이 침대 머리에 묶여 있지 않은 채로, 그녀는 꿈속에서 처음으로 자유를 만끽했다.
그리고 꿈속에서는 낭랑한 진동으로 연주되는 <탄호이저> 서곡이 울려 퍼졌다.
파란고스키는 긴 이야기를 마치고 가볍게 헛기침을 한 뒤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니까 로즈워터가 오블리크를 입양하고, 로프라도스 정보국 설립을 명목으로 도시에 자리 잡았다는 거군요?
그럼, 노인네가 다른 사람을 시켜 그를 제거하려 한 것도 당연하네요. 결국, 기관의 후보자를 마치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긴 셈이잖아요?
그린스가 파란고스키의 말을 끊으며 험악하게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최소한의 보호라고 생각했겠죠. 오블리크가 폴라드 기관의 제0호에 들어가는 걸 원치 않았으니까요.
그 보호의 결과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네요.
엘리너가 임무를 완수한 후, 보크농 계획은 한동안 원활하게 진행되었어요. 크틸라 계획의 순조로운 진전으로 노인네가 자금줄을 완전히 끊기 전까지는 말이죠.
암살 사건 이후, 오블리크는 몬자노 곁에서 잠복하며 일부 정보를 수집했지만, 퍼니싱이 모든 계획을 뒤엎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몬자노는 오블리크를 회유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녀는 오블리크가 이중 스파이가 되어 쿠로노로 돌아가기를 바랐죠.
물론, 퍼니싱이 발발한 후에는 몬자노와 엘리너 모두 행방불명이 됐어요.
그들이 성공적으로 철수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전 이 이야기를 더 믿고 싶네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우리는 공중 정원의 모든 나사못을 하나하나 뜯어 조사할 겁니다.
그런 대물이 이 거대한 함선에 탑승했는데 제대로 환영해 주지 못했다니... 그럴 순 없죠.
그린스는 또다시 과장된 몸짓으로 아쉬운 척을 했다.
그 이후의 일은 그린스씨도 잘 알고 계시죠.
폴라드 기관의 전 이사는 모든 진술을 마쳤다. 이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그는 이 이야기를 무덤까지 가져가야 하는 줄 알았다.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네요. 초대 의장처럼 치욕을 견디며 공헌하려는 분이 우리 쿠로노에는 정말 많다니까요!
그린스는 기록 문서를 덮고는 정말 감동하기라도 한 듯, 눈물 몇 방울을 짜냈다.
파란고스키는 이것이 최후의 선고임을 잘 알고 있었다.
보고서를 의회에 어떻게 제출할지는 우리가 고려해 볼게요. 누군가는 보기 싫은 실패를 짊어져야만 우리의 사업이 계속될 수 있으니까요.
과거는 과거로 묻어야죠. 의회에서도 '각종 인체 실험 프로젝트가 이로써 종결되었다'는 보고서를 보면 그리 믿게 될 겁니다.
당신의 희생 덕분에 진정한 겨울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될 겁니다.
그린스는 녹슨 술병 하나를 꺼내 금속 테이블 위에 툭 내려놓았다
그 술병은 원래 파란고스키의 것이었다.
그럼, 숙녀분께 자리를 비켜 드리죠.
...
파란고스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린스는 조롱 섞인 미소를 남긴 채 방을 떠났다. 마지막 말을 할 기회는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굳이 그 기회를 붙잡지 않았다.
유언은 영웅들의 몫이었기에 그녀가 감히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파란고스키는 고개를 숙여 손안의 에메랄드 장신구를 바라보았다. 아름답게 빛나는 그 속에는 치명적인 청산가리가 숨겨져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술병을 열고, 장신구 속의 내용물을 모두 그 안에 쏟아 넣었다.
병을 흔들자, 독과 술이 섞이며 잔잔한 소리를 냈다. 마치 마지막 칵테일을 완성하는 듯한 순간이었다.
마지막까지 품위를 지키고 싶었다. 침묵한 채로 떠나지 않겠다고 그녀는 결심했다.
옛 세상을 위하여.
그녀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술병을 들어 단숨에 비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