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교 갑판
선발대가 군부와 독립적으로 구 로프라도스 지역의 정찰 임무를 완수했어. 도시를 중심으로 여러 차례 임무를 수행한 덕분에, 주변 황무지의 퍼니싱 오염 상태도 대략적으로 파악됐지.
홀로그램 지형도에는 버려진 도시의 상처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 가운데 선명한 진홍빛이 유독 눈에 띄었다.
최전선에서 소규모 교전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건 우리 임무와 무관해. 원형 구조체의 차단 능력을 완성하려면 고농도 환경에서 실전 테스트를 진행하고, 그 데이터를 직접 회수해야 해.
인간 생존자가 한 명도 남아있지 않은, 처음부터 침식체에게 완전히 점령당한 구 로프라도스는 최적의 테스트 장소야.
화면이 확대되더니, 도시 안 폐허를 중심으로 멈췄다.
이것도 옛날 기억을 되돌아보는 거라고 할 수 있을까요?
릴리스는 흥미롭다는 듯이 도시의 잔영을 바라보았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퍼니싱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게, 카드 게임보다는 훨씬 재미있지 않을까?
몬자노는 의도적으로 릴리스의 흥미를 자극했다.
고모께서 언제부터 이렇게 관대해지셨죠? 이런 기회를 제게 먼저 양보해 주시다니, 정말 뜻밖이네요.
노는데 정신 팔리지 말고 임무에 집중해. 가능한 한 많은 데이터를 수집해 오고.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기체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제대로 확인하고 오라고.
몬자노 부인은 조용히 한 걸음 다가서며, 릴리스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고모만큼 이 문제의 답을 찾고 싶거든요.
릴리스는 몬자노의 압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벼운 미소로 답했다.
그리고... 그레이 샤크 화력 소대의 멤버들도 잘 좀 이끌어줘.
몬자노가 갑판 구석에 있던 구조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맨 앞에 있던 구조체가 재빨리 경례를 올렸다.
그레이 샤크 화력 소대 Mako-1, 엘리너 부사관님께 보고드립니다. 총원 셋, 현재원 둘. 이상입니다.
너무 격식 차린 거 아니야? 군대식 예절은 아직도 좀 적응이 안 되네.
아, 그러고 보니... 나머지 한 명은 어디 있지? 상황 보고해.
잠깐 놀란 표정이 스쳤지만, 그녀는 곧 단호한 지휘자의 태도를 되찾았다.
해당 대원은 실종 상태이며, 그를 찾는 것도 이번 임무 목표에 포함돼 있습니다
앞선 정찰 임무 중 Mako-3은 철수 시 수송기에 탑승하지 못했습니다. 희미하게 감지된 신호에 따르면, 그는 아직 도시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구조체 전사는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채, 동료의 예상 위치를 설명했다.
그들에게 이번 작전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하지.
몬자노 부인은 릴리스를 위해 마지막 정보를 덧붙였다.
...?
원형 구조체로 개조된 후보자들은 모두 로프라도스 시민 출신의 지원자들이야.
케프하트는요? 저는 그런 "명예시민"이 스스로 지구 역습의 선봉에 선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릴리스는 그럴듯한 명분을 비꼬듯 말했다.
케프하트도 의회 회의장에서 어느 정도 공을 세웠어. 말은 좀 공손하게 하지 그래?
알겠어요. 뭐,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싸우는 거겠죠.
몬자노 부인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릴리스는 자연스레 여유로운 태도를 되찾곤 했다.
...
구조체 대장은 어색한 침묵을 지켰고, 그의 얼굴은 센서 장비가 장착된 단말기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전투 동원은 여기까지야.
행운을 빌지. 출발해.
갑판 뒤쪽의 문이 소리 없이 좌우로 열렸다. 그 너머에는 격납고로 연결된 엘리베이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전선이든, 어떤 규칙이든...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요.
릴리스는 평소처럼 몸을 숙여 인사를 올렸다.
엎드리십쇼! 뒤에...
폭우가 센서를 교란한 듯, 전투에 몰두하던 구조체 대장은 등 뒤의 위협을 감지하지 못했다.
어...
급히 총구를 돌리려 했지만, 반응할 새도 없이 침식체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우산?!
그 순간, 보라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소용돌이가 침식체와 구조체 대장 사이에서 번쩍였다.
끼이익...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돼?
순식간에 펼쳐진 월산이 구조체 대장을 감싸 보호했다.
엎드려!
이에 구조체 대장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바닥으로 몸을 내던졌다.
이윽고 꽃잎들이 모여들며 우산살이 접히더니, 우산 끝에 있던 작은 구멍에서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끼익...
침식체는 잠시 비틀거렸지만, 곧 균형을 되찾고 릴리스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불길한 붉은 빛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우산 끝이 정확하게 센서를 관통하면서,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끽...
네 실수로 죽음을 맛본 기분이 어때?
월산을 내린 릴리스는 바닥에 널브러진 침식체의 잔해를 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정, 정말 감사합니다!
겨우 목숨을 건진 구조체 대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음에는 이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야.
좌측의 적이 마지막 목표물입니다!
이번에는 구조체 대장도 신속하게 반응하며 총구를 겨눴다.
!!!
자동 속사 무기가 연이어 발사되며, 구릿빛 탄피들이 빗속에서 눈부신 궤적을 그렸다.
치명적 손상, 자가...
니켈 도금 반철갑 고폭탄이 침식체의 척추를 꿰뚫었다. 통제를 잃은 강철 덩어리가 진흙탕 속으로 무너졌고, 둔탁한 충돌음이 폭우 소리를 삼켰다.
모든 위협 제거 완료. 사주 경계!
그래, 이래야지.
사랑하는 고모가 심혈을 기울이신 결과물인데, 미친 로봇 몇 놈한테 당하기라도 하면... 고모 얼굴을 어떻게 봐.
화력 소대 대원은 그 빈정거림을 흘려들으며, 휴대용 단말기 스크린에 집중했다.
Mako-3의 식별 신호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감지됩니다.
지형의 교란과 퍼니싱에 의한 오차값을 제외하면, 신호 출처는 9시 방향의 버려진 쇼핑몰로 추정됩니다.
으...
구조체 대장은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그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했다. 실전은 언제나 이론보다 가혹한 법이다.
내장된 차단 시스템은 역원 장치처럼 인간의 마인드 표식으로 의식의 바다를 안정화할 필요가 없었지만, 고농도 환경에서의 작동 효율은 그리 높지 않았다.
결국 차단 시스템이 퍼니싱 정보를 투석하고, 역원 장치가 퍼니싱을 막는 역할을 할 뿐, 퍼니싱을 완전히 흡수할 수 있는 기술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기적 같은 기술은 여전히 먼 미래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는 것, 그것이 곧 이 임무의 본질이었다.
전투 데이터 기록 장치를 계속 켜두는 거 잊지 마. 이런 상황에서 수집한 실험 데이터가 가장 중요하니까.
계속 전진하자.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표식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비는 이미 그쳐 있었다.
릴리스는 텅 빈 쇼핑몰의 중앙 홀에 들어서서, 고개를 치켜들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음...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핥은 그녀는 후각보다 극도로 민감한 혀의 센서를 더 신뢰했다.
비가 멎은 뒤의 공기는 상쾌함 대신, 녹슨 쇳내와 썩은 악취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를 진짜 흥분시킨 건 따로 있었는데, 바로 맛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점점 더 짙어지는 퍼니싱의 기운이었다.
난 너희들 보모가 아니니, 정신 바짝 차려~
그녀는 자신이 임시 부사관이라는 걸 잊은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먼저 쇼핑몰 깊숙이 들어갔다.
구조체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계속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Mako-2, 에스컬레이터로 전진.
무너진 천장 아래, 물웅덩이를 지나는 구조체들의 군화 소리가 적막 속에 울려 퍼졌다.
에스컬레이터 도착, 구조 완정성 확인.
구조체 대원들이 녹슨 금속 구조물을 살피는 사이, 우산을 검처럼 쥔 여성 구조체가 2층 통로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대원들은 다시 자신감을 되찾았다.
서로 교대로 엄호하며 엘리너 부사관을 따라 이동한다.
수신 완료. 2층으로 이동하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계단을 밟는 순간, 상황이 급변했다.
아니야. 나는... 데이터 손상, 재로딩중중중중중중중...
퍼니싱 임계치 돌파! 철수... 의식 업... 업로드 중...
한 침식 구조체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뒤틀린 목소리, 그러나 희미하게나마 의식이 남아 있는 듯했다.
신원을 밝혀라!
안 돼... 제발! 안 돼, 안... 안 돼, 제발... 제... 제발, 잠깐만! 안 돼... 쏘지 마...
안 돼... 쏘지 마!
처참한 비명을 지르는 기체는 무기도 없었고, 공격하려는 의도조차 보이지 않았다.
당장 멈춰!!
안 돼... 제발... 안... 돼!
그 침식 구조체가 계속 휘청거리며 다가오자, 구조체 대장이 대원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윽고 2번 대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아쇠를 당겼다.
반철갑 고폭탄 한 발이 정확히 침식 구조체의 이마를 관통하며 그의 고통은 끝내 주었다.
나는... 로... 이...
침식 구조체는 마지막 유언을 힘겹게 내뱉고는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쓰러졌다.
...?
다른 화력 소대의 낙오자인 것 같은데, 식별 표식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곧이어 그 둘은 공포에 질린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 구조체가 마지막으로 읊은 건 실종된 동료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텅 빈 쇼핑몰 복도에는 엘리너 부사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표식 발원지를 향해 계속 전진한다.
수신 완료.
얼마 후, 모퉁이를 돌아 한 가게를 지나자, 그들은 더욱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레이 샤크 화력 소대의 3번 대원이 완전히 침식당한 채, 텅 빈 골격만 남아 있었고, 보라색 머리의 여성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를 바닥의 철근에 박아 넣고 있었다.
엘리너 부사관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에 릴리스는 몸을 획 돌려 소름 끼치는 웃음을 흘렸고, 그 소리는 두 구조체의 의식의 바다 회로 깊숙이 한기를 퍼뜨렸다.
이곳이 퍼니싱 농도가 가장 높은 구역이란 걸 몰랐어?
자동화된 안내 시설, 판매 기계체들... 대형 쇼핑몰은 카지노보다 퍼니싱을 훨씬 더 쉽게 퍼트릴 수 있어.
네트워크 접속 중... 오류... 오류...
바닥에 짓밟힌 잔해는 희미한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엘리너 부사관님, 저희가 받은 명령은 Mako-3를 회수하는 것입니다.
그는 말을 마친 후, 총기 옆면의 방출 버튼을 눌러 새로운 탄창을 삽입한 다음 장전 손잡이를 당겼다.
Mako-3은 저희의 동료입니다.
그들에겐 아직 완수해야 할 임무가 있었기에, 차단 장치의 과부하를 무시한 채 천천히 릴리스에게 다가갔다.
어머?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거야?
조금 전에 너희가 직접 동료를 죽였잖아. 그레이 샤크 화력 소대의 3번 대원... 아니, 그의 백업 의식이었지.
그리고 내 발밑에 있는 것도... 그 대원이야.
고모도 자신의 계획이 이렇게 빨리 결과를 보게 될 줄 몰랐을 거야.
...!
말도 안 됩니다! 의식 회수는 한 번도 성공한 적이...
릴리스의 말을 들은 구조체들은 충격으로 총구를 떨구었다.
그 둘은 개조 수술을 받던 날 몬자노 부인과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의식은 이식할 수 있지. 그리고 육체 같은 건,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어.
차단 장치가 무용지물이 되면, 병사의 의식은 중추로 업로드되어 새로운 기체를 할당받을 때까지 기다리게 된다.
이것은 몬자노 부인이 갈망했던, 군부나 쿠로노와는 다른 완벽한 전사를 만들어내는 방식이었다.
그들은 믿고 싶지 않았지만, 생생한 증거가 눈앞에 있었다.
아쉽네? 성공까지는 아직 한참 멀었어.
다들 봤지? 그의 의식은 공중 정원으로 전송되지 않았어. 그저 하드웨어 접속 방식을 통해 정지된 다른 구조체로 전이됐을 뿐이야. 게다가 데이터의 일부만 전이됐고.
이런 자잘한 것들은 너무 지루해, 오래 산다고 강해질까? 그렇다면 퍼니싱이 터지기 전까지 2억 년을 살아남은 투구게가 지구의 지배자였겠네?
여성 구조체는 계속 헛소리를 중얼거리며, 뭔가에 취한 듯 비틀거렸다.
엘리너 부사관님, 구속을 풀어주십쇼. 저희는 Mako-3의 잔해를 회수해야 합니다.
그는 눈앞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나 있었다.
나 부른 거야? 너무 서두르지는 마. 너희는 이미 임무 목표를 달성했어.
우리 임무는 '고농도 환경에서 실전 테스트를 진행하고, 데이터를 회수하는 것' 아니었나?
그 순간, 구조체 병사의 센서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경고, 내장된 차단 장치가 투석 순환 임계점에 도달했습니다. 즉시 철수하십시오. 경고, 내장...
엘리너 부사관님, 당장 철수해야 합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곁에 있던 대원이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을 질렀다.
투석 장치에서 더 이상 퍼니싱을 배출할 수 없게 되자, 퍼니싱이 폭발적으로 역류하며 데이터 스트림이 두 구조체 병사의 마지막 이성마저 휩쓸었다. 순식간에 퍼진 정보의 홍수는 의식의 바다를 짓누르며, 그들의 전자두뇌를 집어삼켰다.
백업 의식...
전자두뇌가 마지막 생각을 처리하기도 전에 대장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다른 한 명은 여전히 몸부림쳤다.
이건… 으윽, 내 머릿속에… 들어오지 마… 으아악!!
으악... 너무 아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날렵한 움직임으로 전술을 수행하던 그 병사는, 이제 바닥에 웅크린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모르겠어...
넌...
그는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하는 듯 중얼거렸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곧이어 그의 센서에서 붉은 빛이 깜빡였다.
그 순간, 침식된 구조체는 꼭두각시처럼 뻣뻣하게 몸을 일으켰다.
끼이익...
쓸모없는 것! 접속하자마자...
기회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녀석 같으니.
그녀는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렸고, 목소리에는 아쉬움과 경멸이 서려 있었다.
그냥 죽어.
릴리스는 가볍게 손을 휘둘러, 카드 모양의 고탄소강 표창 두 개를 던졌다.
하나는 침식 구조체의 CPU를 관통했고, 다른 하나는 쓰러져 있는 전 대장에게 최후의 사형 선고를 내렸다.
좋아, 너희가 어디까지 갔는지 한번 확인해 볼까?
릴리스는 발밑의 잔해를 내려다보며, 그의 의식의 바다에 접속했다.
쇼핑몰의 잔해는 중력에 의해 아래로 길게 늘어져 기괴한 형상을 이루었고, 릴리스는 원근법이 붕괴된 듯한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윤곽을 알아볼 수 있는 물체들이 하나둘씩 녹아내렸고, 퍼니싱이 머릿속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듯한 감각이 전신을 덮쳤다.
바로 이거야... 멈추지 마!
릴리스는 환희에 찬 목소리로 퍼니싱을 불러들였다.
그러자 예상대로, 짙은 붉은빛을 띤 거대한 무언가가 그녀를 덮쳐왔고, 고통이 수백 개의 정사각형으로 조각나며 몸을 갈랐다.
시야 끝에서 검붉은 파도가 모여 굳어지더니 익숙한 형상으로 변했다.
다시 만났네.
인정해 주지. 이번에는 아주 훌륭했어.
스스로 승격 네트워크를 불러와 방문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거든.
혹시 제가 실패하길 바라신 건가요?
기쁨에 도취된 그녀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승리를 선언했다.
내 힘은 단지 네트워크를 부여할 뿐이야. 네가 선택받은 건 내 의지와는 상관없어.
승격 네트워크는 날카로운 칼날이 아니라 촘촘한 체야. 물론, 지나치게 연약한 샘플들에겐 절대 자비를 베풀지 않지.
본 네거트는 차분하게 규칙을 설명했다.
그렇다는 건... 조금 전 그들은 모두 실패했다는 거네요.
그래. 그리고 너처럼 고농도 환경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개체에게는 승격 네트워크가 초대장을 보내지. 다만, 그 은혜를 누릴 수 있을지는 너의 각오와 능력에 달려있어.
고모가 겨울 계획의 불완전한 자료만 가지고 우연히 이룬 결과가 이 정도라니...
그녀가 이해한 진화란, 내장된 차단 장치와 의식 전이로 퍼니싱의 습격을 완전히 막는 것이었나 보네요.
잘못된 출발점, 잘못된 경로로도 올바른 문을 두드릴 수 있다니 놀랍군요.
그녀는 이 터무니없는 상황에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잘 생각해 봐. 넌 너무 서둘렀고 아직 그 문턱을 완전히 넘지 못했어.
본 네거트는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이 자신의 판결을 내렸다.
지난번 승격 네트워크에서의 대결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요? 괜찮습니다. 저는 새로운 규칙도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녀의 표정에 불쾌함이 스쳐 지나갔다.
조급해할 필요 없어. 아마도 몬자노가 네게 전투 임무를 너무 많이 맡긴 탓일 거야. 지성체는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사고방식이 형성되기 마련이니까.
난 네가 지성보다 무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부류가 아니라고 믿고 싶어.
무력은 단지 공정한 게임을 위해 필요할 뿐이란 걸 잘 알고 있어요.
좀 더 명확하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네가 승격 네트워크에 노출된 시간은 아직 턱없이 부족해. 이건 첫 단계일 뿐이야.
이 고통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는 것만이 선별로 가는 유일한 출구야.
처음에 왕좌를 바로 공격하려 했던 건 너였어. 그리고 지금, 역병의 발원지는 네 손안에 있지.
잘 생각해 봐. 문의 열쇠는 이미 네게 줬어. 현명하게 사용해.
그 말을 끝으로, 본·네거트의 형체는 점점 희미해지더니 왜곡된 공간 저편으로 사라졌다.
환희의 물결은 점차 잠잠해지고, 릴리스의 흥분도 차츰 가라앉았다.
정사각형으로 조각났던 고통이 녹아내리며 현실로 돌아오는 감각이 들었다.
차가운 쇼핑몰의 복도가 다시 시각 센서에 나타났다.
온 마음을 다해 내맡겨라...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잠시 후 발끝을 들었다.
여기는 Echo-419, 그레이 샤크 화력 소대는 응답하라. 회수 좌표 확인 바란다. 오버.
통신 채널에서 호출이 들려왔다.
그레이 샤크 화력 소대의 부사관 엘리너입니다. 현재 임무 시간은 03:56, 위치는 N 36°9', W115°3'입니다.
그레이 샤크 화력 소대의 대원들은 전원 전사했고, 작전 데이터는 수집 완료했습니다. 오버.
알겠습니다. 집결 지점으로 이동하여 회수 대기하겠습니다. Echo-419, 오버.
릴리스는 두 구조체의 시체 옆으로 걸어가, 그들의 척추 위에 있던 데이터 칩을 뽑았다.
그녀는 철근에 꿰뚫린 세 번째 잔해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고, 이내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배양 접시, 실험 샘플, 균군, 그 무엇도 빠져선 안 됐다.
이미 선별을 위한 모든 준비는 끝나 있었다.
사랑하는 고모... 이번에는 제가 먼저 움직일게요.
모든 상식을 비틀어버리는 간절함 속에서, 플레이어는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타락의 감옥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