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금속 벽, 똑같이 낮은 천장.
공중 정원의 강력한 공기 순환 시스템이 가동 중이었지만, 그곳의 공기는 여전히 그때처럼 끈적했다.
파란고스키, 폴라드 기관의 멤버들이 어디서 왔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평소 그린스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 정도면 꽤 부드러운 어조였다. 하지만 파란고스키는 그의 의도를 뻔히 알고 있었기에 협조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다 알고 있잖아요.
폴라드 보육원. 당신이 그 아이들을 납치했죠.
저는 어떤 강요도 하지 않았어요. 전부 돌아갈 집이 없는 아이들이었다고요. 그리고 창립 초기의 후보자들은 대부분이 로즈워터가 모집해 온 거예요.
그는 어디 있죠? 죽은 지 오래됐겠군요. 사인은…
그린스는 과장된 동작으로 단말기 스크린에 오래된 작전 보고서를 띄웠다.
로프라도스 정보국을 버리고, 몬자노의 손을 빌려 그를 제거하며, 오블리크에게 더 많은 행동의 자유를 주는 것. 이 모든 것은 노인네의 명령이었어요.
이건 변명이 아닌 진술이었다. 그녀는 어떠한 사실도 이 심문의 결말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방금 어디까지 얘기했죠? 아동 후보자였나요? 계속 말해보세요.
아이들은 통제하기 쉬웠고, 신체 적응력도 뛰어났어요. 그 결과, 쿠로노는 훈련된 특공 소대를 갖게 되었죠.
세계 정부 안전 정보국과 대항하던 시절, 폴라드 기관은 우리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칼과 방패였어요.
음? 흐흐흐흐흐...
그린스는 코웃음을 치며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미화한다고 감형이라도 될 것 같습니까? 잊지 마세요. 폴라드 보육원의 설립 목적은 요원 훈련이 아니었어요.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왜 폴라드 기관은 이후에도 계속 성인 후보자를 모집한 거죠?
게슈탈트, 영점 에너지 엔진 그리고 예산안까지... 기관이 이 귀중한 정보들을 노인네에게 전달했을 때는 아무도 우리 요원들이 어디서 왔는지 신경 쓰지 않았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노인네가 당신의 공헌을 무시한 건 절대 아니에요.
다만 아시다시피, 공중 정원은 이제 세계 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습니다. 규칙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항상 경계하며, 쿠로노 그룹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아라. 무슨 말이 더 듣고 싶으신 거죠?
옛 정보국장은 지금 이 상황이 지겨웠다. 파란고스키는 그동안 수많은 대상을 심문해 왔고, 자신도 언젠가 배신당할 운명임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하고만 있을 그가 아니었다.
당신은 무엇을 희생했죠? 목숨 하나 부지하려 발버둥 치는 사람이 나를 심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날카롭게 반격했다.
제가 무엇을 희생했냐고요? 평온과 선량함, 이런 진부한 대답을 원하시는 건가요?
한 가지 확실히 해두시죠. 당신은 쿠로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 게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한 거예요!
규정과 조항, 인도주의라는 명목 아래 만들어진 법들. 대중의 입을 막기 위해 통과시킨 그 법들을 우리가 철저히 지켰다면, 퍼니싱 사태가 터졌을 때 첫 번째 방어선조차 세우지 못했을 거라고요!
우리는 모두 자신이 저지른 과오로 인해 저주받았고, 다른 이들의 미래를 위해 마지막 남은 존엄까지 스스로 희생했어요!
그러니 제 입장을 의심하지 마세요.
그린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의 내면에서 솟구치는 분노는 이전의 차분한 태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저를 난처하게 하지 마세요. 의회에 심문 보고서를 제출하면, 과거는 지나간 일이 됩니다.
우리가 더 이상 "자발적 원칙"을 어기지만 않는다면, 구조체 연구... 겨울 계획은 계속 추진될 거예요.
그린스는 좀처럼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쿠로노가 공중 정원에서 입지를 다지고, 더 진취적인 비전을 실현할 수 있다면 체면 따위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진화의 발걸음은 그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갈수록 더욱 기승을 부리는 퍼니싱의 재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 아이들을 선택할 때, 우리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단순히 그들의 자질만이 아니었어요.
우리가 주목했던 것은 바로 그들의 뇌였죠.
이 작은 도시는 한때 공군기지의 잔재에 불과했지만, 프레드 싱클레어라는 거물의 아낌없는 투자 덕분에 사막 한가운데의 오아시스로 변모했다.
카지노, 리조트 호텔, 생체공학 동식물원 그리고 결코 멈추지 않는 축제까지. 그렇게 로프라도스는 쾌락의 도시가 되었다.
특급열차의 은빛 유선형 차체가 대사막을 가로지를 때면, 늘 창밖 풍경에 넋을 놓는 승객들이 있었다. 모래와 선인장의 바다 너머, 도시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는 한 폭의 그림.
너무 갑작스러우면서도, 그만큼 매혹적인 풍경이었다. 럭키 38 카지노의 나선형 탑신은 지평선 위 붉은 바위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햇빛과 달빛 아래에서 황홀한 빛을 뿜어냈다.
그 풍경을 가장 먼저 본 승객들은 늘 같은 반응을 보였다.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윽고 흥분한 목소리로 "로프라도스에 도착했어!"라고 외치곤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하늘을 지붕 삼아 살아가는 빈민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여기엔 주정차 금지 표지판도 없잖아!
한 남자가 짜증스럽게 길가에 세워진 수소 자동차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요금기에는 "벌금을 부과해 주세요."라는 문구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소중한 차가 압류된 것이었다.
어디 보자... 혼잡 시간대에는 중심가 주차 금지, 그 외 구간은 다음 기준으로 요금 부과, 상세 요금은 시간당...
그는 가까이 다가가 요금기 패널 아래쪽에 벌레만 한 크기로 적힌 안내문을 읽었다.
참나, 카지노에서 사람들 돈을 죄다 털어먹더니, 이제는 도로변까지 내 지갑을 노리네.
돈만 내면 되는 거지? 정말 기가 막혀서!
이윽고 그는 체념한 표정으로 카드를 꺼내 패널에 긁었다.
그러나 요금기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타이어 밑 잠금 장치의 표시등은 여전히 붉게 빛나고 있었다.
뭐야? 아, 맙소사! 이 망할 곳은 아직도 토큰으로만 결제할 수 있는 거야?
그는 어이없는 결제 방식에 불만을 터뜨리며, 요금기 기둥을 발로 세게 걷어찼다.
너무 구식인 거 아냐? 딜러는 AI이면서 왜 이런 쓸데없는 걸로 성가시게 만드는 거냐고...
내가 지금 동전이나 금화라도 가지고 있으면, 이렇게까지 서두르겠어?
불운한 남자는 기적적으로 잠금이 풀리기를 바라는 듯, 계속 투덜거리며 차량 주위를 서성거렸다.
저기...
저기요...
그는 뒤에서 다가온 망토를 입은 작은 그림자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파란 머리의 소녀는 낡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고, 얼굴은 오랜 기름때처럼 지저분했다.
난 오늘 이미 충분히 재수 없었어. 구걸은 딴 데 가서 해!
그는 화가 풀리지 않은 듯 멀리 있는 카지노 건물을 노려보았다.
저 건물 보이지? 저 안에는 돈이 남아도는 사람들이 널려있어. 들어갈 수만 있다면 저들 돈을 떼여내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저기나 가봐!
그게 아니에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뭐라고?
떠돌이 여자아이는 더 설명하지 않고 요금기 앞으로 다가가, 망토 아래에서 실과 쇳조각으로 만든 목걸이를 꺼냈다.
잠깐만, 뭐 하려는 거야?!
여자아이는 차주의 당황한 모습을 무시한 채, 실을 이용해 쇳조각을 요금기 투입구에 조심스레 넣었다.
어...
남자는 뭔가를 깨달은 듯 조용히 지켜보았다.
여자아이는 온 신경을 집중해 실을 가볍게 흔들었다.
철컥.
성공한 거야?
네.
표시등이 초록색으로 바뀌며, 그를 초조하게 만들던 잠금장치가 풀렸다.
소녀는 조심스럽게 실을 감아올리고는 쇳조각에 감았다.
오호라...
턱을 어루만지던 남자가 눈앞에서 손쉽게 풀린 잠금장치를 살펴보며 감탄했다.
그러고 보니, 넌 송금받을 단말기도 없을 텐데, 내가 어떻게 보답하면 좋을까?
그는 차 문을 열며 거짓이 담긴 말투로 덧붙였다.
나중에 인연이 닿는다면...
괜찮아요.
다음에 저 같은 아이들을 만나면, 때마침 식품권이나 토큰이 있으시다면... 그들에게 도움을 주세요.
곧이어 망토 소녀는 몸을 휙 돌려 주차 공간을 벗어나더니, 이내 거리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
한편, 길 건너편 파라솔 아래에서 단정한 차림의 요원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방금 전 작은 사건 때문에 무뎌졌던 생존 본능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그녀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계속해서 따라오는 발소리.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막혀버렸다.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괜찮을까?
예상과 달리, 낯선 남자의 말에는 위압적인 기운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그녀에게 숨 쉴 틈을 열어주었다.
...
확실한 건, 그녀가 곤란한 상황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와 게임 하나 해볼래?
로즈워터가 정장 재킷 주머니에서 엄지손가락 크기만 한 동전을 꺼내 보여주었다.
이건 유흥 도시에서 쓰는 금은 토큰과는 달라. 아주 오래전, 로프라도스가 목축업자들의 작은 마을이었을 때, 사람들이 실제 화폐로 사용했던 동전이야.
그는 짧고 간결하게 게임 도구의 원래 용도를 설명했다.
그럼, 신용 포인트로는 얼마인 건가요?
그 순간, 로즈워터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안심해. 골동품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게 꽤 값진 물건이란 걸 알 테니까.
잘 보여? 동전 앞면은 노인의 얼굴이고, 뒷면은...
로즈워터는 동전을 튕겨 공중에 띄웠다.
무서운 새... 그리고 제가 모르는 글자들이 있네요.
그 여자아이는 믿기 힘든 시력과 민첩성으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도 회전하는 동전의 디테일을 단숨에 포착했다.
이에 로즈워터는 만족스러워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이걸로 게임을 해볼래? 네가 이기면 동전은 네 거야.
...
그녀는 경계하듯 망토에 얼굴을 숨긴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규칙은 간단해. 내가 동전을 던져 손으로 받을 텐데, 손바닥을 펴기 전에 하늘을 향한 면이 노인인지 새인지 맞히면 돼.
이해했어요.
그럼, 시작할게.
로즈워터는 엄지와 검지로 동전을 튕기며 다른 한 손을 천천히 펼쳤다.
그리고 동전이 손바닥에 닿는 순간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노인이에요!
로즈워터가 손을 내밀어 천천히 손가락을 피자, 노인의 초상화가 햇빛 아래서 보석처럼 빛났다.
여자아이는 그 자리에 서서 잠시 고개를 들었고, 로즈워터는 그 짧은 순간에 그녀의 눈빛에서 두려움, 경계심 그리고 간절함을 읽어냈다.
그리고 천천히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약속대로, 이건 이제 네 거야.
소녀는 먹이를 발견한 길고양이처럼 천천히 다가와, 그 동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망토에서 재빨리 손을 뻗어, 남자의 손바닥 위에 있던 자신의 물건을 단숨에 가져갔다.
네가 소중히 여기는 동전이 어떻게 생겼는지 좀 보여줄래?
그 말에 여자아이가 반사적으로 크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건 동전이 아니라...
강아지가 제게 준 거예요.
방금 손에 넣은 동전이 온기를 머금자,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쓸쓸함이 피어올랐다.
참, 아직 이름을 묻지 않았네. 나는 재단사 로즈워터라고 해.
그 순간, 한 단어가 그녀의 신경을 건드린 듯, 소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오블리크...
저는 오블리크라고 합니다.
그녀는 끈으로 묶인 작은 보자기를 꺼내더니, 소중한 보물을 살짝 보여주었다.
로즈워터는 그제야 그것이 동전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오래된 애완동물의 이름표. 그리고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
오블리크, 혹시 폴라드 보육원이라고 들어봤니?
그는 운명 같은 건 안 믿었기에 이런 선택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이 부랑아들은 어느 당국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존재였지만, 대중의 방역을 위해 결국 임시 수용소에서 백신을 접종받았다.
때문에 잠재적 후보자의 데이터 파일은 사소한 부분까지 철저히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운은 유전자 검사로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은 선별 과정에서 의미 있는 지표로 간주되었다.
질문을 던진 그 순간, 그는 이미 소녀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셈이었으며, 이는 로즈워터가 반드시 내려야 할 선택이었다.
로프라도스 근교
폴라드 보육원
심리 평가 보고서가 완성됐어요. 후보자 오블리크는 최종 평가를 통과했어요.
오블리크를 아이들에게 데려가 주세요. 플라스틱 구속 벨트를 주는 거 잊지 마시고, 기본 규칙도 다시 한번 설명하는 게 좋겠어요.
파란고스키가 보기 드문 종이 서류를 책상 위에 남겨두고 방을 나갔다.
로즈워터의 시선은 문 옆에 걸린 해부도로 향했다. 빨강, 노랑, 흰색이 뒤엉켜 마치 꽃잎처럼 보이는 수채화였으나, 그것이 묘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뇌였다.
신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길.
...
작전복은 허름한 망토에 비하면 오히려 편했다.
하지만 거리에서 살아온 아이들에게 이런 깔끔한 옷은 낯설고 불편하기만 했다. 그들에게 옷이란 더럽지만 따뜻한 거적때기 같은 것이었고, 카지노 벽화처럼 매끈한 훈련복은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하나, 소등 후를 제외하고는 항상 평상복이나 작전복을 입어야 한다.
둘, 보육원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와 지시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셋... 밤에 늑대가 너희를 잡아먹지 못하게 하려면, 자는 동안 구속 벨트로 손목을 침대 머리에 고정해야 한다.
마디가 도드라진 손이 두 손가락 너비만큼 되는 주황색 띠를 건넸다.
여기가 너희가 생활할 방이야. 내일 아침 5시 정각에 기상나팔이 울리면, 중정에 집합해서 아침 체조를 하니까 늦지 말고.
소녀는 평범해 보이는 얇은 띠를 손에 들고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사람이 이미 떠났다는 것도, 아이들의 악의 어린 시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봐, 신입!
너 말이야! 안 들려?
맨 앞에 선 두 아이가 큰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자, 구경하던 아이들이 그녀를 문가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어디서 왔어?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주황색 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오랜만에 배불리 먹은 탓도 있을 것이다. 조금 전, 화려한 옷차림의 여자가 텅 빈 식당에서 그녀에게 햄 슬라이스, 그레이비 소스를 얹은 매쉬드 포테이토, 부서진 초콜릿 쿠키로 된 식사를 제공했다.
오랜만에 접한 풍족한 음식에 그녀의 뇌는 혈당 상승을 견디지 못하고 느려진 듯했다.
벙어리야?!
앞에 있던 한 여자아이가 오블리크를 놀리며 과장되게 웃어댔다.
그 말을 듣고 아이들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악의라기보다는 무리를 따르는 본능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난 말할 수 있어.
곧이어 오블리크가 고개를 들고 짧게 대답했다.
벙어리가 아니라 바보인가 보네!
이제는 바보도 받아주나 봐? 그 할망구,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숨 막히는 적대감이 느껴졌다. 조금 전 어른들의 냉담한 무관심과는 또 다른 형태의 잔혹함이었다.
잘 들어, 폴라드에서는 놀고먹는 사람은 안 키워.
조건반사 훈련을 잘 받아야 밥도 잘 먹고 편히 잘 수 있어.
누구든지 우리 발목을 잡으면 그땐...
그때, 그 여자아이가 한 발짝 다가와 오블리크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오블리크는 조건반사 훈련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따르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기다릴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알겠어.
신입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고, 감정이 배제된 기계음처럼 들렸다.
악의적으로 오블리크를 괴롭히려던 아이들은 그녀의 담담한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손에 그건 뭐야?
뭔가를 눈치챈 한 아이가 오블리크의 손을 거칠게 붙잡았다.
예상보다 강한 힘에 오블리크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블리크는 낯선 아이들에게 이름표를 빼앗겼다.
돌려줘!
그녀가 소리치는 순간, 다른 아이들이 그녀의 양팔을 붙잡았다.
결국 이름표는 두목처럼 보이는 아이의 손에 넘어갔다.
어, 이 문양은 뭐지? 동그라미 두 개에 막대기가 있고, 또...
소녀는 그 문양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오블리크는 그런 반응이 익숙했다. 거리에서 자란 아이들은 글자를 마주할 때마다 늘 이런 표정을 짓곤 했다.
놔줘!
숙소 끝자락 침대에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아이들은 순식간에 흩어졌고, 그 모습을 본 오블리크도 적잖이 놀랐다.
둘, 보육원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와 지시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호루라기 소리가 아니었다.
문가 쪽에서 키가 큰 소녀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의 절제된 걸음걸이에는 무용수 같은 우아함이 배어 있었다.
거칠게 구는 아이들과 비교하면,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 같았다.
안녕, 난 엘리너야. 폴라드에 온 걸 환영해.
그 낯선 소녀는 오블리크에게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오블리크를 괴롭히던 아이들은 그녀처럼 밝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역병이라도 만난 듯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뭐야 이게! 도로 가져가!
그 아이는 못 볼걸 보기라도 한 것처럼 재빨리 이름표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 후, 아이들은 흩어져서 각자의 침대로 돌아갔다.
그제야 오블리크는 엘리너의 손이 놀랍도록 매끄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손끝은 마치 거울처럼 반짝였고, 소매 안쪽으로 화려한 프릴이 살짝 드러났다.
하나, 소등 후를 제외하고는 항상 평상복이나 작전복을 입어야 한다.
그러나 그 드레스는 둘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았다.
저는 오블리크라고 해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엘리너의 손바닥은 초겨울의 샘물처럼 차가웠고, 오블리크는 그녀의 차가운 몸을 바라보며 서서히 불안에 휩싸였다.
삐이익!
그 순간, 복도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고, 아이들은 별다른 지시가 없었음에도 없이 마치 기계처럼 일사불란하게 같은 동작을 수행했다.
겉옷을 벗어 옷장에 접어 넣고, 내의 팔 부분에 있는 집성 단말기를 누른 후,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아이들의 모든 동작에서 나는 소리는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잘 시간이 된 건가요?
오블리크가 상황이 파악됐을 때, 방 안에 서 있던 건 그녀와 엘리너뿐이었다.
오블리크가 옆구리의 작전복 지퍼를 풀려 하자, 엘리너의 차가운 손이 그녀를 막았다.
쉿.
엘리너는 오블리크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곧이어 어두운 기숙사 안에 무언가가 일제히 잠기는 소리가 울렸다. 이불 속의 아이들이 취침 전 마지막 단계를 수행하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침대 머리맡의 금속 파이프에 팔을 걸치고 주황색 띠를 휘둘렀다.
튼튼해 보이던 띠는 순식간에 오그라들어 손목을 감싸는 구속 벨트로 변했다.
이리 와, 네 침대는 내 옆자리야.
오블리크는 "소녀"라는 단어가 눈앞의 우아한 자태를 떠올리게 하는 데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어느 카지노에서 들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엘리너는 오블리크를 방 안쪽 구석으로 데려갔고, 그곳 벽에는 뜻밖에도 작은 환기창이 있었다.
구속 벨트가 사실은 훌륭한 악기라는 거 알아?
잘 모르겠어요.
소리를 내는 관이나, 튕기면 소리가 나는 현 같은 걸 말하는 건가요?
다소 핵심을 벗어난 답변이었지만, 엘리너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이렇게 하는 거야.
그녀는 하얀 손가락으로 주황색 띠를 집어 들고 머릿장의 금속 가장자리에 천천히 가져갔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구속 벨트의 한쪽 끝을 조심스레 눌렀다.
적절한 힘 조절이 관건이야.
엘리너가 아주 미세한 움직임으로 구속 벨트를 살짝 튕기자, 띠 모양의 물체와 금속 테이블이 공명을 이루며 쟁쟁한 소리가 울렸다.
!!
오블리크는 엘리너의 연주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숨을 삼켰다.
그럼 계속할게? 이건 내가 아주 좋아하는 곡이야.
그녀는 같은 동작을 반복했고, 맑은 선율이 고요한 공간을 가득 채우면서 침대들 사이의 작은 공간을 감쌌다.
셋... 밤에 늑대가 너희를 잡아먹지 못하게 하려면, 자는 동안 구속 벨트로 손목을 침대 머리에 고정해야 한다.
이곳의 아이들은 이런 이야기에 놀랄 나이가 아니었다.
그 순간, 오블리크는 어둠 속에서 희미한 마찰음을 들었다. 복종이 당연시된 아이들이 이불 속에서 동경과 반항 사이에서 흔들리며 뒤척이는 소리였다.
수많은 동경은 결국 공포에 의해 억눌리고 길들여졌을 것이다.
한 소절이 끝나자, 엘리너가 오블리크를 향해 말했다.
한번 해볼래?
저는 어떻게 하는 건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괜찮아, 조금씩 연습해 보면 잘할 수 있을 거야.
소녀는 어색해하는 오블리크의 손을 잡아, 구속 벨트를 튕길 위치에 손가락을 올려주었다.
팅—
어설픈 소리가 났지만, 악기의 크기 때문인지 그리 거슬리진 않았다.
흐흡... 하하하하하하~
봐, 어렵지 않지?
오블리크는 엘리너가 웃음을 참으려다 결국 터뜨리고 만 것을 알아챘다.
오블리크가 겪은 고단한 삶은 그녀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고, 덕분에 그녀는 아주 작은 악의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에는 조롱이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 차가운 숙소에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따스함이었다.
문득, 오블리크는 식당에서 본 그레이비소스를 뿌린 매쉬드 포테이토가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은... 매쉬드 포테이토를 먹을 때보다 마음이 따뜻했다.
뭔가 이상해요. 방금처럼 좋은 소리가 안 나요.
오블리크는 쑥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앞으로 내 반주자가 될 수도 있겠는걸!
네, 노력해 볼게요.
눈앞의 보라색 머리의 소녀는 얇은 천을 두른 작은 새 같았고, 끝없는 암울한 침묵 속에서 그녀를 향해 지저귀는 듯했다.
엘리너는 그녀의 손을 잡고, 다시 주황빛 띠를 튕겼다.
사실 어떻게 연주해도 이 음색은 너무 단조로워. 좋은 소리와는 거리가 멀지.
하지만 오블리크의 기억 속에서 그 곡은 아름답고, 부드러웠으며, 자장가처럼 평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에서 조용한 숨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고른 잠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달빛이 환기구의 둥근 구멍을 통해 들어와, 판자 바닥 위에 흐릿한 달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니까, 그 엘리너가 훗날의 엘리너 싱클레어, 로프라도스의 딸이라는 거예요?
네. 엘리너는 양부모를 갑작스럽게 잃은 후, 양부의 여동생인 몬자노에게 입양됐죠. 지금은 행방불명 상태고요.
로프라도스 폭발 사건 당시, 몬자노와 함께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파란 머리 꼬마에게 그런 눈물 나는 과거가 있었다니.
그의 얼굴에 혐오스러운 과장된 표정이 떠올랐다.
기관에서는 왜 규칙을 어기는 저 후보자를 마음대로 날뛰게 내버려두는 거죠?
그린스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었다.
우리의 훈련 방식과 관련이 있어요.
지식은 후천적으로 주입하거나 지울 수 있지만, 조건반사만큼은 신경 깊숙이 새겨지는 낙인과 같죠.
우리는 엄선된 두뇌들을 주입식 교육으로 오염시키지 않고, 대신 복종성 테스트와 강제 체력 훈련을 통해, 후보자들의 기본적인 신체 기능을 유지했어요.
육체는 사고 기관의 그릇이니까. 잔인하군요, 마음에 드는데요.
당신의 논평을 듣고 싶다고 한 적 없어요.
긴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는 과거의 지배자가 되었고, 잠시나마 과거의 위엄을 되찾은 듯했다.
화내지 마세요. 저는 이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할 뿐이에요.
사형수를 이용한 인체 실험은 진행 속도가 너무 더뎠어요. 게다가 연구자들은 의식 업로드, 융합, 심지어 전이를 한 번에 이루려 했죠. 허황된 꿈이었어요.
그래서 노인네는 적절한 시기가 되면, 이 후보자들을 웻웨어 구조체 실험에 투입하라고 지시했어요.
겨울 계획도 나중에 같은 실수를 반복했죠? 쯧,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지요.
그러고 보니, 우리 쪽에서도 얼마 전 겨울 요새를 다시 방문했어요. 고집불통 노인네, 고드윈에게 군용 구조체 연구에 집중하라고 압박을 넣었죠.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국 여러분의 노력이 인간이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결실을 맺었네요.
이제 이 모든 것이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 될 거예요.
너무 비관적으로 보지 마세요… 조금 전 어디까지 얘기했죠? 아, 엘리너였나요?
그 소녀는 모든 지표에서 단연 돋보이는 최고의 후보자였어요.
신체 협응 훈련의 일환으로 무용 수업을 진행했죠. 후보자들은 화음이나 음표를 이해할 필요 없이, 단순히 멜로디에 맞춰 동작을 수행하면 됐어요.
그런데 엘리너는 수업에서 처음 들은 곡을 곧바로 휴대용 장비로 연주하더군요.
핀치-프랭크스 지능 지수, B7 행동 식별 템플릿, 존재 한정 인지...
엘리너는 다른 후보자들을 제치고 모든 테스트에서 가장 높은 성적을 거뒀어요.
이제야 알겠네요. 곧 첫 번째로 뇌가 도려내 질 소녀 이야기군요? 참 안됐네요. 예쁜 척하며 돋보이고 싶었서 그랬겠죠~
그린스는 파란고스키의 쏘아보는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노인네가 기대했던 실험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아직 안 끝났나요? 이제 보고서에 뭔가를 쓸 공간이 없는데.
그러고 보니, 엘리너가 파란 머리 꼬마에게 연주해 준 곡이 뭐였죠?
… 이런 걸 궁금해할 줄은 몰랐네요.
특별한 곡은 아니에요.
리스트 프란츠의 <탄호이저> 서곡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