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프라도스
10월 2일
관습을 깨는 동시에 소중한 이들을 해치고 싶지 않다면 예술을 해보세요. 진심입니다. 예술은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니까요.
신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예술을 배워보세요. 그것은 당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어느새 당신의 영혼을 정화할 것입니다.
카드 뒷면에 만년필로 서예를 연습해 보세요. 민트와 기주로 음료를 만들어 마셔보세요. 그리고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서툰 이야기라도 괜찮습니다. 당신이 만든 이야기는 언젠가 친구들의 마음속에서 진실이 될 테니까요.
최선을 다하세요. 그러면 당신은 신성한 계시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에 따른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낭독자는 조용히 양장본을 덮었다. 순간, 주변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해졌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조심스럽게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행사에 참석한 청중들은 점차 흥미를 잃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둘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테오도르 앤슨 스터긴 신간 공유회". 천장 아래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행사에 참석했던 명사들은 점차 흥미를 잃은 듯 실망한 표정으로 아치형 문을 지나 임시 강당을 빠져나갔다.
이 호텔의 다목적 홀 임대료가 상당할 텐데, 신인 작가가 로프라도스에서 행사를 연다는 게 꽤나 이례적인 일이군요.
단순한 투표권자로만 머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 민선 대표들은 문화예술 지원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에 행사 후원자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지난 7월 중순, 법안 통과 직후에도 이곳에 얼굴을 비추시더니, 또 오셨군요? 로프라도스에 이렇게 자주 오시는 걸 보니, 혹시 새로운 ‘후원자’라도 물색 중이신가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조소가 섞여 있었다.
폴라드 기관의 예산 집행권을 쥐고 계시고, 쿠로노의 신임까지 받고 계시니, 저 같은 힘없는 의원을 눈여겨볼 이유가 없겠지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상황 파악이 빠르군요.
시간적 여유가 생기니 새로운 관심사가 필요해지더군요. 요즘 화제작들을 많이 읽다 보니, 문학의 향기가 몸에 배어가는 기분입니다.
문인들과의 교류도 꽤 흥미롭습니다. 그들의 작품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면, 마치 오랜 벗처럼 어린 시절의 소소한 비밀까지 털어놓고 싶어 하더군요.
그는 음성을 낮추며 말을 이었다.
스터긴의 이 신작은 그가 어느 장례식에 참석했던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런 가벼운 태도로는 품위 있는 문인들에게 존중받기 어렵지 않을까요?
저 역시 직접 만나 본 후의 소견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방금 무대 위에 있던 그분만 해도... 틀림없이 당신도 뉴스에서 그의 이름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작은 지역 신문 어디쯤 실렸던 기사였겠지요? 저는 그런 매체를 접할 기회가 없어서요.
아, 제가 말한 건 '스터긴'이라는 표면적인 이름이 아닙니다. 문학계의 속설에 따르면, 그것은 그가 사용하는 여러 필명 중 하나일 뿐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관심사를 발견하셔서 좋으시겠습니다만, 제게는 다른 일정이 있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호텔 로비에 들어섰을 때, 파란고스키의 표정에는 이 공허한 대화에 대한 피로감이 역력했다.
편안히 돌아가십시오, 파란고스키. 다음에 더 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흠, 원하시는 대로 하시지요.
형식적인 악수를 나눈 뒤, 그녀는 시계를 슬쩍 확인하고 경사로 아래 주차된 차량으로 향했다.
그녀는 소맷단 단추가 교체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동료의 경솔한 언행이 그녀의 경계심을 흐트러뜨린 것이었다.
작가는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과 달리, 금발의 남자 옆에 남아 있었다.
이렇게 큰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이번 신작도 기대 이상입니다. 정식 출간되면 서명본 한 권 받을 수 있을까요?
그는 눈을 반짝이며 진심 어린 감탄을 내뱉었다.
과찬이십니다.
생각해 보니 지난번 대화 중에 빌린 만년필을 아직도 가지고 있더군요.
마침 오늘 직접 뵙게 되어, 만년필을 돌려드릴 수 있게 되었네요.
의원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검은색과 금빛이 조화를 이룬 만년필을 꺼냈다. 다이아몬드 장식은 만년필에서도 희소한 디테일이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빛나는 다이아몬드 장식을 슬쩍 매만진 뒤 작가에게 내밀었다.
감사드립니다. 몬자노 부인과의 약속이 있어서 먼저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차량이 로프라도스의 화려한 거리를 벗어나 고즈넉한 주택가로 들어섰다.
창밖의 고층 건물들이 서서히 줄어들더니, 이내 거리에는 낮은 건물들만 보였다.
파란고스키는 송화기를 들어 통화를 연결했다.
우려했던 대로, 케프하트가 출처 불명의 자금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자수가위" 작전 개시를 건의드립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잖아. "자수가위"도 이제는 예전 같지 않을 테고... 당시 그가 데려간 아이라면... 한번 기회를 줘볼 만해.
수화기 너머 쉰 목소리의 남자가 지시를 내렸다.
무슨 말씀인가요?
"자수가위"는 버려도 되지만, 그 아이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자원이야. 기존 후보자들 중에서 그 아이만 지금까지 살아남았잖아? 앞으로 큰 일을 해낼 수 있을 거야.
그럼, 그녀를 몬자노에게 접근시킬까요?
사고가 이렇게나 단순해질 줄이야... "자수가위"가 움직이는 순간, 몬자노는 즉시 위험을 감지할 거야. 그녀가 정말 우리에게 경고를 보내려 한다면, 망설임 없이 그를 제거해 버릴 게 뻔해.
몬자노를 통해 "자수가위"를 제거해야만, 그 아이가 진정한 능력을 펼칠 수 있을 거야.
통신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지만, 파란고스키는 침묵 속에서 지시 사항을 경청할 뿐이었다.
몬자노 부인의 저택
15분 전
엘리너는 응접실 입구에 서서 귀빈의 방문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오늘은 케프하트가 주선한 보크농 계획의 신규 투자자가 방문하는 날이었다.
정확한 약속 시각에 맞춰 도착한 검은색 세단에서 남자가 내리자, 엘리너는 정중히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로프라도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몬자노 부인의 조카 엘리너라고 합니다.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엘리너는 자신의 완벽한 기억력을 신뢰했다. 지금 마주한 이 방문객의 얼굴은 분명 3개월 전 카지노 홀에서 보았던 그 사람이었다.
그는 홀 한편에서 예리하게 주변을 관찰하고 있었다.
트라우트라고 불러주세요.
트라우트... 아, 저명한 작가분이시군요.
유명한 도망자이기도 하죠.
그는 지체 없이 엘리너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한 탐색전에 들어갔다.
주목받는 위치에 선 사람들은 언제나 세상의 온갖 추측과 소문의 중심에 서게 되는 법이지요.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로프라도스에서 일어난 일은 영원히 로프라도스에 남는다"... 이것이 우리 도시의 철칙이니까요.
그렇군요. 편견 없이 바라보는 상대방에게는 진솔해지는 것도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있겠죠.
현재의 일과는 무관하지만, 이토록 교양 있는 숙녀분께서 제 작품을 알고 계시다니 영광입니다.
이 작은 선물로 저희의 첫 만남을 기억해 주시겠습니까, 엘리너 아가씨.
그는 "첫 만남의 선물"이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를 실었다. 트라우트는 케이스를 꺼내 조심스럽게 열었다. 검은색과 금색이 조화를 이룬 정교한 만년필이 벨벳 위에서 은은한 광채를 뿜고 있었다.
이렇게 귀한 선물을 주시다니...
엘리너는 트라우트의 시선이 만년필의 다이아몬드 장식에 머무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을 눈치챈 엘리너는 보석을 살피며 감탄했다.
익숙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마침내 몬자노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트라우트를 마주하기도 전에, 그녀의 입가에는 이미 세련된 사교적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카지노 운영과 관련된 긴급한 업무 때문에 공항에 직접 마중 나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 조카, 엘리너가 대신 손님을 맞이하러 나간 건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너의 품격 있는 응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훌륭한 가정교육이 빚어낸 결실이겠지요.
트라우트는 예를 갖춰 인사했다. 세련된 사교계의 인사말이 자연스럽게 오갔다.
엘리너는 고모를 향해 공손히 목례를 하고, 트라우트에게 예의 바른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자리를 떠났다.
복도의 적막을 확인한 그녀는 조심스럽게 만년필을 손에 들었다. 정교한 금색 문양들이 펜촉을 향해 유려하게 흘러들었고, 끝부분의 다이아몬드 장식에서는 미세한 녹색 광채가 은은하게 번뜩였다.
엘리너는 이 정교한 위장의 본질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이런 구식의 감시 도구가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조소가 흘러나왔다.
트라우트의 진의는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엘리너는 이런 우연도 하나의 기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 많은 정보를 확보할수록 주도권을 쥘 가능성도 높아질 테니까.
그녀는 반짝이는 보석을 귓가에 밀착시킨 뒤, 클립 부분을 조작했다.
그럼, 그 아이를 몬자노에게 접근시킬까요?
마치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듯한 깨끗한 여성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엘리너는 선명한 음질을 분석해 송신기가 대상의 손 가까이에 은밀히 설치되었음을 직감했다.
사고가 이렇게나 단순해질 줄이야... "자수가위"가 움직이는 순간, 몬자노는 즉시 위험을 감지할 거야. 그녀가 정말 우리에게 경고를 보내려 한다면, 망설임 없이 그를 제거해 버릴 게 뻔해.
그 걸림돌만 치우면,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할 거야.
유명 상점 주인의 딸이 아버지를 잃게 되잖아? 도시 거물들한테 이만한 약점도 없을 거야. 몬자노도 어쩔 수 없을 거고... 결국 그 아이한테는 절호의 기회가 생기는 거지.
거친 쇳소리 같은 목소리에서 승리를 확신하는 자의 오만함이 묻어났다.
일석이조가 되겠군요.
흐흐흐... 폴라드 기관은 어떻게 보면 "자수가위"의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고, 너도 그저 그의 제자였을 뿐이지.
이제는 네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스승을 제거하려 하다니, 이게 너희들만의 특별한 성인식인가 보지?
엘리너의 귀에 여자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가, 다시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을 이어갔다.
지시 사항을 잘 전달하겠습니다.
그렇게 대화는 갑자기 끝이 났다.
12월 23일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는 계절이 돌아왔다. 하지만 엘리너는 고모의 굳어진 표정에서 축제와는 거리 먼 그림자를 보았다.
스위트룸 문 앞에 다가서자 안에서 격앙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고모는 케프하트와의 통화에서 이성을 잃는 순간이 잦아졌다.
엘리너는 문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굳이 노크할 필요는 없었다. 고모는 그녀가 엿듣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고, 엘리너는 남들이 자신을 단순한 소녀로만 보고 있는 걸 즐기고 있었다.
폴라드 기관의 스파이들이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는 상황에서... 진행 상황 점검을 위한 사설탐정이라... 이런 허술한 거짓말로 저를 속이시겠다는 건가요?
프로젝트 재개는 온전히 당신의 독단적인 행동이고, 그 노인네가 처음부터 이 일에 흥미가 없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뭐, 자금만 제때 들어온다면야... 당신들의 내분까지 신경 쓰고 싶진 않네요.
분명히 말씀드리죠. 제 영역을 침범하는 월권행위는... 가차 없이 처리하겠어요.
그녀는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다는 듯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에는 이미 다음 수를 내다보는 날카로움이 서려 있었다.
일, 이, 삼... 천천히 열까지 센 그녀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들어와.
엘리너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문가 근처에 섰다. 그녀는 몬자노 부인이 길게 말을 늘어놓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를 찾으셨나요?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니 매년 이맘때처럼 준비할 것들이 있네.
여기 목록을 잘 확인해 줘. 특별히 신경 써주면 좋겠어.
그녀는 크라프트지 두루마리를 조심스레 소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엘리너의 시선이 문장들 사이를 스치듯 오가다가, 한 단어에서 멈췄다. 수년간 잊혀져 있던 단어였지만, 그녀의 표정은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했다.
"깃털 장식".
목록을 보니 온통 의상 관련 품목들이네요. 이번엔 어느 가게를 점찍어 두셨나요, 고모?
로즈워터 양복점.
몬자노의 입술 사이로 그 이름이 무심하게 흘러나왔다.
이 모든 것은 엘리너의 예상대로였다. 그녀는 이미 한발 앞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정성스레 고른 가죽 서류봉투 하나가 그 증거였다.
그것은 치밀하게 배치된 거짓 정보였고, 이로써 그녀는 모든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color=#ffee82ff>Rosewater Ltd. EST.2132</color>, 중앙에 새겨진 화려한 금박 글씨가 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나이트든 폰이든, 체스판 위의 말들은 모두 정교한 계략의 일부일 뿐이었다. 체스판 위의 말들은 결국 플레이어의 손에 의해 움직여진다.
모든 수는 정확히 계산된 순서대로 펼쳐질 것이고, 왕은 곧 모든 보루를 잃고 체크메이트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녀에겐 반드시 완수해야 할 임무가 있었다.
로프라도스 공동묘지
14년 전
연단 위에 선 남자의 목에는 어울리지 않게 큰 십자가가 매달려 있었다. 악단이 연주를 마치자, 그는 헛기침을 하고는 미리 준비한 원고를 펼쳤다.
아무도 보거나 듣거나 생각조차 못 한 것을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해 두셨습니다.
프레드 싱클레어와 필리스 싱클레어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땅에 묻는 것은 그들의 육신뿐입니다. 그들의 고귀한 정신과 영혼, 그리고 이 도시를 위해 바친 숭고한 헌신은 영원히 우리 곁에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이제 친지들의 가슴속에서 더욱 깊어지고, 자녀들의 삶 속에서 영원한 등불이 되어 빛날 것입니다.
목사가 고서를 공손히 덮자 처연한 피리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조문객들이 왼쪽부터 한 사람씩 나와 깊은 마호가니 빛 관에 손을 얹고 마지막 작별의 순간을 가졌다.
카퍼필드 재단의 군수업계 거물, 세계 정부 의회 예산 위원장, 아딜레 에너지 제국의 후계자. 이들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는 실력자들이었고, 아이들마저 TV에서 많이 보아 익숙히 아는 얼굴들이었다.
그림자처럼 희미한 얼굴들이 차례로 행렬에 섞여 들었다. 무대의 배경처럼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이들은 쿠로노 그룹의 일원들이었다.
그 작가도 조문객들 사이에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책이나 미디어에 실제 모습을 공개하지 않아, 그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과 격식으로 가득한 어른들의 세계에, 소녀는 마치 우연히 피어난 봄꽃처럼 외톨이로 서 있었다.
야, 네 차례야!
재촉이 섞인 거친 목소리가 그녀를 차가운 현실로 끌어왔다.
네, 알겠습니다...
소녀는 마지못해 발걸음을 내디뎠고, 그녀의 눈길은 여전히 발밑의 잔디에 머물러 있었다.
관에 손바닥을 얹고 스치듯 지나가는 앞사람들과는 달리, 그녀는 오랫동안 주저하다가 검지 하나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날카로운 손톱은 여린 소녀의 모습과 기이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섬세한 손길로 관 위에 초승달을 그렸고, 그 아래에 작은 십자가를 새겼다.
...
성직자는 예리한 시선으로 소녀의 행위를 포착했다. 이윽고 그의 미간에 불편한 주름이 잡혔다.
소녀를 재촉하던 남자의 포효가 침묵을 무참히 부숴버렸다.
프레드가 너 같은 독사는 키우지 말았어야 했어! 이건 그가 죽... 그가 떠나기 전에 내게 직접 한 말이야! 오, 주님 용서하소서!
너 같은 흉악한 건 조만간 지옥에나 갈 거야!
하필 유언장에 너를 유일한 수혜자로 지정하다니! 죽을 때까지도 마음이 너무 약했어!
조문을 마치고 돌아서던 고위 인사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 무례한 발언을 한 사람에게 꽂혔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부모님과 특별한 사이셨나요?
그녀는 순간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대답은 차분하고 날카롭지 않았다.
천성적인 품위는 이유 모를 분노의 물결을 고요히 잠재웠다.
남자가 당황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소녀는 그의 눈빛에서 익숙한 감정들을 읽을 수 있었다. 미세하게 퍼지는 충격, 스며드는 혐오, 그리고 그를 삼키는 공포…
피보다 진한 인연은 없다고들 하지만, 여러분이 부모님과 함께한 시간이 저보다 훨씬 길었으니까요.
아마도 너무 슬프셔서 그러신 것 같습니다.
놀란 표정은 순식간에 미소로 바뀌었고, 그녀는 오히려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상대방을 위로하는 듯 보였다.
구경꾼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여러 남자가 동시에 그의 어깨를 잡았다.
사람들은 그를 위로하며, 그의 거친 분노를 치유할 수 없는 슬픔의 표현이라 여겼다.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녀는 일찍 자리를 뜨는 아쉬움을 전하면서도, 우아한 미소와 단아한 몸가짐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묘지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고급 세단에 도착하자, 위압적인 실루엣이 엘리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내가 네 보호자야.
고모, 안녕하세요.
그녀는 땅에 파묻힌 비석 받침마냥 초라하게 서 있었다. 이제부터 소녀는 스스로를 낮추어 두 사람 사이에 거짓된 높낮이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 새로운 시작에서 두려울 것은 없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자산이 담긴 계좌들, 난공불락의 금고, 그리고 성인들과 거래할 수 있는 권한까지.
소녀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초승달과 십자가를 수놓고 싶은 간절함이 피어났다.
12월 24일
23:30
에그노그와 기름진 칠면조 향이 섞인 공기 속에서, 음식 냄새가 우아한 분위기를 깨고 있었다.
소녀는 손님들이 떠난 자리를 정성스럽게 치우며 거실을 원래 상태로 복원했다.
늘 화려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주최하던 몬자노가 이번에는 모든 사교 모임을 피했다.
똑똑똑...
시계가 자정을 알리는 순간, 종소리와 함께 문을 두드리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네. 잠시만요.
무거운 나무문이 열리고, 그녀는 예의 바르게 방문객을 맞았다.
엘리너의 예상대로 고모는 혼자가 아니었다.
몬자노의 뒤로 한 여린 실루엣이 드러났다.
로즈워터 양복점에 큰 화재가 났어. 피해가 심각해.
얘는 사장의 양녀야. 하인이라 부르든 동생이라 부르든 네 마음대로 해. 이제부터 우리와 함께 지낼 거야.
설명을 마친 몬자노의 시선은 문가에 있는 방문객을 향했고,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네가 누군지 얘기해 봐.
몇 해의 시간이 지나…
붉은 비상등이 깜박이는 가운데, 엘리너의 귓가에 그날의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건전지로 작동하는 인형...
마음대로 고쳐 쓸 수 있는 코드...
엄격하게 시간을 지키며, 영원히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식 시계.
더없이 좋은 생일 선물:
재회.
안녕하세요. 저는 오블리크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