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허억.
반즈야, 계속 앞으로 가. 이제 보이니?
아이가 고개를 들자, 불어오는 바람이 안개를 흩트렸다. 그리고 그의 하얀 곱슬머리가 바람결에 따라 눈가를 간지럽혔다.
음, 아직 안 보여.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해, 반즈. 뒤돌아보지 마.
계속 앞으로 가자.
응.
앞으로... 가...
헉, 헉.
드디어 도착했다.
아이는 거대한 참나무 아래에 도착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곳까지 오는데 모든 힘을 쏟아부은 듯했다.
참나무의 울창한 나무줄기들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이를 본 아이는 앙상한 손을 조심스레 뻗어 나무껍질에 갖다 대었다가, 예상치 못한 거친 감촉에 놀라 손을 움츠렸다".
밑을 한번 봐볼래?
남자아이가 몸을 숙여, 어머니가 말한 나무 밑동 밑의 흙을 힘겹게 파냈고, 그곳에서 옅은 노란색의 "돌"을 발견했다.
이건 앰버라고 해.
앰버? 안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잘 안 보여.
남자아이가 발견한 노란 앰버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짙은 안개에 가려진 햇빛 때문에, 반투명한 보석 속의 형체가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뒤편에서 한 여성의 가벼운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해가 뜨면 잘 보일 거야.
이제 엄마가 네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끝났단다. 반즈야, 너는 이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될 거야.
엄마?
엄마가 예전에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하니? 지구와 "에덴" 사이를 오가며, 두 세계를 잇는 전령들의 이야기 말이야.
그 전령들이 반즈와 함께 "에덴"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하네.
가기 싫어. 전령들은 내가 없어도 되잖아.
엄마가 "에덴" 여행의 검사는 엄청 까다롭다고 했잖아. 검사를 통과하려면 똑똑하거나, 힘이 세거나, 씩씩해야 한다고.
그들도 반즈가 아직 어린 걸 알고 있으니, 반즈가 다 클 때까지 기다려 줄 거야.
여행은 그리 길지 않을 거야.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면 도착해 있을걸?
남자아이가 두 손을 만지작거렸다. 방금 흙을 파느라 손가락에 묻은 흙이 옷소매까지 더럽혔다. 그는 아직 자신을 제대로 돌볼 수도 없는 어린아이였다.
오랫동안 엄마를 못 보는 거야?
맞아.
하지만 반즈는 나중에 엄마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엄마가 반즈를 찾으러 갈 수도 있어.
……
엄마가 미안해.
47호 병상 심폐정지!
47호 병상이라면, 반즈? 이 아이는 이곳에 얼마나 있었지? 어서 멜비 선생님을 불러와.
47호 병상에 응급 대응 시스템을 가동하세요. 먼저 기관 삽관 확인하고, 정맥로를 확보하세요.
보호자에게 연락하라 할게요.
연락은 안 해도 돼. DBS 펄스 주파수를 100 이상으로 올려.
뇌심부 자극술의 일반적인 강도는 이보다 훨씬 낮아요.
책임은 임시 보호자인 제가 질 테니 서둘러주세요.
정적이 감돌던 병실이 순식간에 분주해졌다. 의사들은 47호 병상을 확인한 뒤 급히 자리를 비웠고, 곧이어 생명 유지 장비들을 끌고 와 아이의 몸에 연결했다.
……
한 걸음만 더 가자, 반즈. 조금만 더 힘내.
헉, 허억.
47호 병상이 눈을 떴어요!
작은 병상 위, 움츠러든 몸이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이내 그가 눈을 떴지만, 생기 없는 눈동자는 천장만을 향해 있었다.
으으.
뭐라고? 우선은 조급해하지 말고, 내 말대로 따라 해볼래? 눈을 두 번 깜빡여봐.
당신 수련의인가요? 정신 연령이 1살도 안 되는 아이는 일반적인 지시조차 수행할 수 없는데, 어떻게 의식을 확인하려는 거죠?
하지만 병상 위의 네다섯 살로 보이는 아이가 천천히 두 번 눈을 깜빡였고, 의사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 아이를 향해 쏠렸다.
이번엔 눈을 세 번 깜빡여볼까? 좋아, 잘했어. 다음에는 내가 가리키는 손으로 주먹을 쥐어볼래? 맞아, 잘했어.
뇌심부 자극술이 효과가 있었나 보네요. 제가 지켜본 아이 중 의식을 회복한 두 번째 아이예요. 인간의 생명이란 정말 신비롭네요.
……
의사가 신이 나서 뒤돌아 멜비를 보았다. 멜비는 멍하니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수련의는 3개월 동안 이 병원에서 근무해 왔지만, 멜비의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정말 해냈나?
멜비가 떨리는 손으로 반즈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반즈는 힘겹게 멜비의 손바닥에 얼굴을 가까이 대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기관에 삽입된 관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멜비는 잠시 생각하다가 반즈의 비어 있는 아카이브에 진료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생명의 별 소아과 감호실에서 수년간 재활". 이것은 반즈 자료의 첫 번째 정보가 되었다.
재활 중인 반즈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고,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만 했다.
반즈는 휴대용 호흡기를 달고 다니며, 보조기의 도움으로 발을 내디디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멜비의 부축과 함께 몇 발짝 걸을 수 있는 성과를 이루었고, 몇 달 후에는 비틀거리긴 했지만, 마침내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안녕 반즈, 어디 가니?
멜비 이모, 멜비 이모는 어디 있어?
방금 퇴근하시는 것 같던데? 오늘 밤 근무가 있으신지는 모르겠네.
오늘은 밤 당직이야. 무슨 일 있니?
반즈의 뒤에서 멜비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는 몸을 숙여 반즈의 뒤통수에 있는 호흡기 고정끈을 정리해 주었다.
멜비 이모! 오늘 밤에도 "예비 조수"를 하고 싶어.
안 돼. 내 임무는 밤에 일을 하는 가고, 네 임무는 밤에 잠을 자는 거야.
하지만 나도 "소원 카드"를 갖고 싶은걸.
"소원 들어주기 카드"는 멜비가 소아과에서 만든 작은 보상 제도였다. 얌전히 주사 맞기, 약 먹기, 잠자기 또는 멜비의 "예비 조수" 역할을 하면 소원 카드를 받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매주 스무 장씩 지급되는 소원 카드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반즈 옆 병상의 "스패로우"라는 아이를 예로 들 수 있었다.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그 아이는 병으로 두 다리를 잃었으며, 그 병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소원 카드로 뭐 하려고? 내가 카드를 줄 때마다 장난감이나 사탕으로도 안 바꾸잖아.
그건...
그냥 안 자려고 꾀부리는 거지?
멜비가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반즈는 말을 더듬거리며 변명을 늘어놨다.
꿈에서 괴물이 나와 무서워.
그리고 엄마가 나한테 뭐라고 말해줬는데, 기억이 안 나.
그 말에 멜비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곧이어 그녀는 반즈의 손을 잡고, 퇴근하려는 다른 동료들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구석에 도착하자, 멜비가 진지하게 반즈를 다그쳤다.
반즈, 밖에서는 절대로 "엄마"라는 말을 하면 안 된다고 말했었지?
말했어.
지금 내가 하는 말 잘 기억해. 반즈가 생명의 별에 온 후, 엄마는 다른 곳으로 떠났어. 반즈는 다른 곳에 가본 적도 없고, 지금까지 내가 돌봐준 거야.
하지만 엄마는 내가 "지구"에서 왔다고 했어.
그럴 리 없어.
거기엔 풀밭이랑, 꽃, 흙, 큰 나무, 새 그리고 바다도 있었어. 거짓말 아니야.
그만해, 반즈. 그건 전부 네 망상이야!
반즈는 말없이 빠르게 숨을 내쉬며, 불만에 가득 찬 눈빛으로 멜비를 바라보았다.
네 잘못은 아니야. 너는 잘 모르겠지만, 누구한테도 그런 얘기를 하면 안 돼.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있어.
악몽은 익숙해지면 돼. 시간이 지나면 다 잊게 될 거야. 반즈야 알겠지?
……
저녁밥이 곧 올 거야. 얼른 돌아가고, 오늘 밤엔 날 찾아오지 마.
반즈가 훌쩍거렸다.
멜비 이모.
……
멜비는 자신이 너무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다시 부드러운 말투로 바뀌었다.
그래. 네가 정말 나랑 있고 싶다면, 오늘 밤에 진료 기록을 정리하는 걸 도와줘. 늘 하던 대로, 내 의자를 옮기기만 하면 돼. 약품은 절대 건드리지 말고, 다른 것도 그냥 보기만 해. 잘 해내면 소원 카드 한 장 줄게, 어때?
반즈의 눈이 순식간에 반짝였다.
말 잘 들을게.
응? 누구 말을?
멜비가 경계심을 품고 반즈를 한쪽으로 당기며, 흐릿한 금색 눈을 가진 중년 남자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몸을 숙여 반즈에게 인사를 했다. 그 순간, 남자의 명찰이 반즈의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다.
얘야, 이름이 뭐니?
반즈는 남자가 흰 가운을 입고, 가슴에 명찰을 단 모습을 보며, 그를 믿어도 될 거로 생각했다.
반즈야.
안녕, 반즈. 여기서 뭐 하니? 의사 선생님이랑 왜 나와 있어?
멜비 이모랑 당직을 가려고.
멜비, 멜비라... 들어본 것 같은데. 동료가 언급했던 것 같아.
쿠로노 히사카와가 허리를 펴고 멜비를 바라보았다.
저는 쿠로노 히사카와라고 해요. 전에는 못 뵌 것 같은데, 소아과에 온 지 얼마 안 되셨죠?
누구시죠? 제게 볼일이 있으신가요?
그 남자는 멜비가 노려보는 와중에도 반즈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하얀 곱슬머리가 손가락 사이로 찰랑거렸다. 반즈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어른을 올려다보자, 그는 계속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반즈,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잠시 후, 그 남자는 반즈가 가장 신경 쓰는 단어를 꺼냈다.
엄마를 기억하니?
엄마?
엄마라는 단어가 멜비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반즈의 손을 꽉 잡고, 자리를 떠날 준비를 했다.
당신도 그 실험을 노리고 있군요!
그분이 나중에 지상에서 뭘 했는지 저는 몰라요. 그건 아무도 모른다고요. 반즈도 이제 그분과는 상관없으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마세요.
게다가 여긴 공중 정원이에요. 당신들 마음대로 실험체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요.
반즈가 똑같이 흰 가운을 입은 둘을 비교해 보았다. 반즈는 멜비가 더 좋았기에, 멜비가 시킨 대로 남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기억 안 나. 나는 엄마가 없어.
반즈, 대답하지 마!
멜비가 그렇게 말하라고 했니?
당장 떠나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보안 요원을 부를 거예요.
멜비의 말은 신경 쓰지 마. 나는 반즈에게 뭘 물어보고 싶은 것뿐이야.
쿠로노 히사카와가 허리춤에 있던 총을 꺼내 반즈를 겨눴다.
...!!
멜비가 급히 달려들며 뭐라고 외쳤다.
반즈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그가 총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도...
검은 총구가 반즈를 겨누고 있는 그 찰나, 머리에 극심한 고통이 터져 나왔다.
!
반즈가 정비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깊게 숨을 들이쉬자, 온몸에 순환액이 빠르게 돌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후.
반즈는 수년 전 생명의 별에서 깨어났을 때처럼, 손목을 뒤집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밀폐된 실험실 안은 고요했고, 반즈만이 홀로 있었다. 오늘은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차징 팔콘의 다른 멤버들은 지상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었고, 반즈는 공중 정원에서 새 기체에 적응하고 있었다.
밀폐된 실험실의 뒷문이 열리며, 누군가 검사 장비를 끌고 들어왔다.
그대로야?
맞아, 기억 데이터를 불러온 의식이 없어. 이번 달에만 벌써 일곱 번째라고.
부작용은 의식의 바다에 작은 편차가 생기는 정도지만, 빈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 일단은 기존 기체로 되돌려놨어.
수면 부족으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던 아시모프가 자신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반즈에게 검사 장비를 연결했다. 그 후, 파형을 확인한 아시모프는 표정이 점점 더 심각해졌다.
기체를 교체하면 종종 의식의 바다에 편차가 생기곤 해. 보통은 적응 기간이 지나면 괜찮아지지만, 이 기체는 신청한 지 오래됐고 적응 기간도 어느 정도 됐는데, 이런 사소한 문제가 계속 생기는 건 뭔가 이상해.
그럼 내 의식의 바다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거네.
어제, 네 개조를 담당했던 의사한테 물어봤는데, 당시 상황이 위급해서 의식의 바다에 혼란을 일으킬만한 기억 데이터를 모두 봉인했다고 했어. 그러지 않았다면 개조할 수 없었을 거래.
너도 이 상황을 알고 있지?
반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임시 개조에는 종종 있는 일이야. 대부분 인간 시절의 기억 일부가 개조에 영향을 미치곤 해. 그 기억들을 봉인하면, 구조체의 의식의 바다 안정도를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어.
이 봉인된 기억 데이터를 강제로 불러내는 건 추천하지 않아.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르거든. 하지만 넌 이미 무의식적으로 그 데이터들을 불러오고 있어.
너희 대장에게 적응 기간을 연장해달라고 해야겠어. 당분간 중요한 임무는 맡지 마.
앞으로는 지휘관의 도움이 필요할 거야. 네 의식의 바다 깊숙이 있는 혼란스러운 데이터를 완전히 꺼내서 정리하든, 봉인을 강화하든, 결국에는 안정적인 환경에서 네 의식의 바다를 다시 안정시켜야 해.
알았어.
이제 돌아가서 쉬어.
잠깐만.
?
새 기체에 적응하는 거, 한 번만 더 해보자.
설마...
작은 편차라면, 무시하는 방법을 찾으면 될 거야.
꿈처럼 말이야.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
공중 정원, 작전 디스패칭 센터
감시기 장치에서 날카로운 경보음이 울려 퍼지자, 주변의 작업자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경고가 울렸습니다! AQ 구역에서 적조 이상 징후가 발생했습니다! 지금 해당 구역의 상설 정찰 인원과 통신을 연결하겠습니다!
AQ 구역을 담당하는 통제원이 즉시 지상에서 온 통신에 연결했다.
간섭으로 조금 흐릿했던 통신 화면은 상대방이 고속으로 이동 중이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음성은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AQ 구역의 적조 이상 징후에 대해 보고할게.
적조가 마지막으로 이동한 후 44시간이 경과했어. 30분 전에 다시 이동이 관찰되었고, 현재 환경 관측 장치 한 대가 잠식된 상태야. 적조 이상 징후가 확실해.
적조의 목표는 189번과 190번 보육 구역으로 추정되고 있어.
적조는 평균 20km/h로 북서쪽에서 남동쪽을 향해 이동 중이야. 1시간 후에는 시속 30km/h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며, 12시간 후 189번 보육 구역에 도달하고, 13시간 후에는 190번 보육 구역에 도달할 거야.
특히 두 보육 구역 모두 공중 정원의 연료 공급 시설이 있어서, 적조에 뒤덮이면 문제가 더 커질 거야.
2차 판단 결과, 모든 주민과 기술자들을 철수시켜야 해.
알겠습니다. 이번 주 두 보육 구역의 철수 준비는 이미 완료된 상태이며, 언제든 출발 가능합니다.
통제원이 조작 패널을 두드리며 여러 스크린을 살펴보았다. 그러던 중 그는 한 비고 사항을 발견했고, 곧이어 멈춰 서서 몇 초간 그 화면을 주시했다.
지원이 필요하십니까? 평소에는 필요 없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질문드립니다.
통신 화면 속 빠르게 움직이던 영상이 느려졌다.
이번엔 필요해. 정찰 인원 한두 명 정도 지원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가장 가까운 척후병에게 지원 요청을 보냈습니다. 다만 그곳은 여태 안정적인 구역이었기에 대기 인원이 없어, 도착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필요하다면 두 보육 구역에서 임무 수행 중인 집행 소대를 투입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 다른 척후병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게.
조금 전만 해도 가벼웠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진지해졌고, 통신을 하던 둘은 곧바로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럼 통신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계속 적조의 상황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통제원이 통신을 종료하자 구석에서 다른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다.
잠, 잠깐만요!
이 신입 통제원이 담당하는 뒤쪽의 감시기 장치에도 붉은 경고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189번 보육 구역 북서쪽 80킬로미터 지점에 버려진 건물이 있는데, 그곳도 적조가 퍼지는 경로상에 있습니다!
2시간 전에 그곳에서 알 수 없는 신호가 감지되었습니다. 그래서 부근의 구조체 몇 명을 임시 소대로 편성해 수색을 보냈는데, 지원 요청 신호를 보낸 후로 완전히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게다가 신소피아시에서 온 엘리트 구조체도 자발적으로 동행했는데, 마찬가지로 연락이 끊겼습니다.
임시로 편성된 구조체 소대가 실종됐고, 마지막 신호가 지원 요청이었다는 건가?
신입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자료를 건넸다.
그리고 이것도 있습니다! 구원 요청과 함께 수집된 자료도 일부 전송됐는데, 이 건물이 예전에 연구소였다는 게 확인됐습니다. 하지만 과학 이사회의 아카이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엄숙함을 지켜왔던 통제원이 전송된 자료를 잠시 살펴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부근에 있는 다른 소대들의 상황을 확인했다.
지금 바로 이 자료들을 보고하고, 임시 소대의 멤버들 명단도 보내줘.
내가 지원을 요청할게. 189번과 192번 보육 구역에 대기 중인 집행 소대 두 개와 지휘관이 있을 텐데, 가장 가까운 건...
스크린에 수색구조 작업이 가능한 두 개 소대의 정보가 표시됐고, 통제원이 통신을 시작했다.
지상
지원이 필요한 소대의 정보를 단말기로 보냈습니다. 확인되셨습니까?
지휘관이 질주하는 수송차에 앉아, 전술 단말기의 상세 임무 정보를 확인했다.
최근 보육 구역 근처에서 적조 이상 징후가 뚜렷해지면서,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이 대원들을 이끌고 보육 구역 내 철수 준비 작업을 돕고 있었다.
어제 저녁부터 오늘 저녁까지 보육 구역에서는 이미 두 차례의 철수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고, 각각 리브와 리가 그 과정을 인솔했다.
원래 계획에 따르면,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이 남은 주민들을 맡고, 날이 밝으면 리브가 돌아와, 지휘관과 함께 임시 수용소로 주민들을 데려가 리와 합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척후병이 보육 구역에 적조 이상 징후 경고를 보냈다. 그 동시에 공중 정원에서도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에게 긴급 지원 임무를 하달했다.
지금은 지휘관님이 상설 구조체 두 명과 함께 지원을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쪽의 척후병이 여러분을 지원할 것입니다.
임무 지점은 버려진 연구소입니다. 임시 소대의 대원들을 수색하는 것 외에도 연구소의 데이터 수집도 부탁드립니다.
가장 중요한 건, 9시간 후면 적조가 임무 지점을 뒤덮을 겁니다. 그 전에 반드시 철수해야 합니다.
임무 통신이 끝나자, 앞에서 수송차를 운전하던 구조체가 들뜬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189번 보육 구역에서 1년 넘게 근무했는데, 이런 지원 임무는 처음이네요.
나도... 우웩... 난 못할 것 같아.
샌디가 조금 오버하며 그레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레그는 뭐든 처음엔 긴장을 많이 하지만, 막상 본격적으로 하면 꽤 믿음직스러워요. 지휘관님이 좀 봐주세요.
진짜 못 하겠어. 우욱! 샌디, 창문 열어! 우우욱.
뭐?! 진짜로 토하게? 구조체가 무슨 토를 해!
샌디가 소리치며 창문을 내리자, 그레그가 바로 매달려 구역질을 했다.
찬바람이 차 안으로 밀려들었지만, 지휘관의 방한복이 그 바람을 막아주었다. 비록 봄이 왔다고 했지만, 이곳의 차가운 온도는 무시할 수 없었다.
목표 지점에 거의 다 왔는데, 중요한 순간에 망치지 마. 지휘관님이 보고 계시잖아.
수송차가 바위를 밟고 지나가면서 차체가 두어 번 흔들렸고, 그레그는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우엑, 저게 뭐지?
숨을 헐떡일 정도로 구토를 하던 그레그가 힘겹게 시각 모듈을 조정했다.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멀지 않은 어둠 속에서 숨어있는 그림자 몇 개를 발견했다.
조심해! 어서 오른쪽으로 꺾어!
그레그가 어둠 속의 물체를 확인하자마자, 소리치는 동시에 총을 들어 올렸다.
이합 생물이에요!
샌디가 핸들을 세게 꺾자, 시끄러운 타이어 소리가 나며 차체가 미끄러졌고, 연이어 그레그의 총성이 울렸다.
지휘관도 위협을 발견하고 재빠르게 총을 들어, 차 뒤에 매달린 두 마리의 이합 생물을 처치했다.
왼쪽에도 약 열 마리가 포착되었어요!
적조는 아직 멀었을 텐데 어떻게 된 거지? 속도가 빨라진 건가? 척후병도 별다른 말이 없었잖아.
지표면에서도 적조 반응이 감지되지 않았어. 이것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지? 그러니까 난 못 하겠다고 했잖아. 왜 첫 임무부터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냐고.
이합 생물 한 마리가 오른쪽 차창으로 뛰어올라, 지휘관을 향해 커다란 입을 벌렸다.
그레그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총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는 지휘관을 향해 몸을 던져, 총구를 이합 생물의 입안으로 밀어 넣고는 한 탄창을 모조리 쏟아부었다.
샌디가 그 틈을 타서 차체를 좌우로 흔들어, 매달려있는 나머지 이합 생물들을 떨어뜨렸다.
제가 말했죠! 그레그는 보기보다 믿음직스럽다니까요!
제 운전 실력도 괜찮지 않나요? 임무를 끝내고 지원 부대에 지원해 볼까 봐요.
좋아하기에는 이른 것 같아. 앞을 봐.
그레그가 떨리는 손으로 수송차 앞을 가리켰다. 도로 끝에는 이합 생물이 빽빽하게 모여 있었고, 외롭게 달려오는 수송차를 덮치려 하고 있었다.
쳇, 목표인 연구소가 바로 저 앞인데, 진입하려면 저 괴물들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겠군요.
두 구조체가 동시에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며칠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신뢰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엔진이 포효하며 수송차가 급가속했고, 지휘관은 관성으로 인해 좌석에 파묻였다.
순식간에 수송차 앞부분이 이합 생물들을 짓밟으며 지나갔고, 그들의 괴성에 둘러싸인 채 덜컹거리며 건물로 돌진했다.
여기까지가 한계예요. 저기 앞에 문이 있으니, 안으로 빠르게 진입한 후 바로 문을 닫으시죠!
엘리트 구조체가 목표 지점에서 우리랑 합류하기로 한 거 아니야? 안 보이는데?
지휘관 일행이 무기를 든 채, 수송차에서 뛰어내려 건물 안쪽으로 달려갔다. 지휘관은 달리면서도 단말기에 표시된 정보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뒤돌아보지 말고 계속 뛰어.
건물 위에서 누군가의 소리가 들려왔고, 지휘관 일행은 본능적으로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다음 순간, 뒤에서 빗발치는 총성이 울려 퍼졌다.
문 안쪽으로 뛰어든 지휘관이 뒤를 돌아보자, 하얀 그림자가 뛰어내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냉동탄을 발사했고, 괴성을 지르는 이합 생물들을 그 자리에 얼려버렸다.
문 닫을 준비해!
최전방의 이합 생물들을 처리한 구조체가 문으로 달려왔고, 그의 뒤에서는 무인기가 화력을 지원하고 있었다.
지휘관이 저도 모르게 그 구조체의 이름을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