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광이 직사각형 구멍을 통해 어두운 실내로 쏟아져 들어와 사다리 모양의 부드러운 흰색 구역을 만들어냈다.
함영이 정비 통로의 붉은 비상등 아래 멈춰 섰을 때, 갑자기 통신 요청음이 울렸다.
세르반테스 님...
드디어 연락이 닿았군요.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걱정했습니다.
곧 그쪽에 도착할 텐데, 우주 도시 상황은 어떻습니까?
교란으로 인한 잡음 속에서도, 평소 차분한 성격의 세르반테스 목소리가 급박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말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었다.
교회 내부 사정도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주 도시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아요.
통신이 끊긴 이유는 도시 내 자력 가속 궤도인 "천국의 다리"가 에너지 축적 중이라, 전자기파가 제 통신 채널을 교란하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천국의 다리가 에너지 축적 중이라고요?
늘 침착했던 세르반테스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전자기파 교란이 심해서 짧게 말씀드리자면, 베로니카가 전임 "거꾸로 매달린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우주 도시 전체를 장악한 상황이에요.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자 세르반테스는 생각에 잠겼다.
"정의", 베로니카, 황제...
이 일이 황제의 소행인지는 단정 지을 수 없어요.
가능성이 높지만, 정말 황제가 한 일이라면 분명 목적이 단순하지는 않을 겁니다.
베로니카의 실력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평소 편집증적인 성향이 있어서, 정면으로 싸우게 된다면 반드시 조심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선현님의 "열쇠"에 대한 단서를 찾았어요.
이런 소란에 휘말리게 됐지만, 함영은 본래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한 결과, 그 물자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열쇠"는 자신의 기체와 함께 운반되어 왔고, 도시 내 다른 곳에서 신호가 감지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우주 도시의 창고에 보관된 것이 분명했다.
다행이군요.
전자기파 교란이 심해지면서 통신이 불안정해졌다.
천국의 다리의... 발사를 최대한 저지... [지지직]
모든 일에... 조심하... [지지직]
알겠어요.
통신이 다시 끊겼다.
천국의 다리가 다시 에너지 축적을 시작했고, 함영에겐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함영은 단호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부드러운 흰빛 속에 짙은 녹색 바다가 일렁였다.
그녀의 옷자락이 나부끼는 모습에서 경쾌함과 민첩함을 볼 수 있었다.
은비녀는 봉인이 됐고, 그녀는 모든 감정을 온화함이라는 감정 밑에 숨겼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칼날의 빛이 가득할 때, 속박의 고치를 벗어던진 결의는 치명적인 일격이 되어...
과거의 그림자를 꿰뚫었다.
알렉세이는 자율 기계체 제어 어레이를 통해 가장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
도시의 기계체들이 인간들을 마구잡이로 사냥하기 시작했고, 우주 도시의 거리는 피바다가 되었다.
커튼월 뒤에 굳게 서서, 무한한 쾌감을 느꼈지만, 기계와 의체로 간신히 유지되던 그의 몸은 완전한 붕괴 직전이었다.
하... 위대한 선현님이시어, 정말...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거라 생각했어?
아니. 그렇게는 안 되지. 흥... 네가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을 내가 대신... 해낼 거야.
알렉세이는 전쟁으로 붉게 물든 거리를 바라보았다.
윽... 제기랄...
의식 속에서 찌르는 듯한 고통이 퍼져나갔다.
쿨럭쿨럭... 쿨럭...
알렉세이는 제어 어레이의 조작 콘솔 옆에 쓰러져 관자놀이를 필사적으로 눌렀다.
기계체 팔은 제자리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으나, 신경 전도의 전기 신호에 제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고장 난 리모컨 장난감처럼 기계적으로 경련하며 무의미한 반복 동작만 수행할 뿐이었다.
머리가 너무 아파. 여긴... 여긴 어디지?
알렉세이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기억 속에서 여기로 온 단서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찾을수록 기억 속 회상 사이사이에 공백이 더욱 빈번하게 나타났다.
맞아. 천국의 다리!
알렉세이는 오른팔로 몸을 지탱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야 끝에 보이는 거대한 궤도는 성스러운 빛을 연상케 하는 전기 아크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높이 솟은 기단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화약 연기와 울려 퍼지는 총성은 마치 다른 세상의 오염물처럼 보였다.
베로니카, 베로... 쿨럭쿨럭...
알렉세이는 더 이상 또렷한 소리를 낼 수 없었고, 목구멍에서 터져 나온 액체가 콘솔의 스크린에 튀었다.
좌절에 개의치 않고 성주는 두 발로 선 뒤, 천국의 다리로 이어지는 연결 통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다.
만회할 수 없는 잘못은 없다.
게다가 알렉세이는 이 모든 일의 원인이자, 베로니카의 공범이었다.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인간들에 비하면, 갇혀 있는 포로들이 오히려 더 운이 좋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센서에서 푸른 빛을 내는 기계체들이 베로니카의 금지령을 충실히 수행하며, 간수라기보단 초병에 더 가깝게 행동했다.
저항군 병사들과 포로가 된 시민들이 좁은 임시 대피소에 두세 명씩 모여,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저격 기계체가 좀... 이상한데...
우릴 통제하는 것만으로 저 뾰족 머리가 만족했나 봐. 역시 우리가 일하는 실력은 무시 못 하는 거지!
고철 덩어리와 일일이 따질 필요 없어. 이번 일만 끝나면 우리가 뾰족 머리와 직접 조건을 협상할 수 있을지도 몰라.
저항군 병사는 태평스럽게 하품을 하며 임시로 설치한 야전 침대에서 몸을 뒤척였다.
아니. 내 말은... 저 기계체가...
포로를 감시하던 기계체의 투명한 센서 아크에서 갑자기 섬뜩한 붉은 빛이 퍼져 나왔다.
늘어지게 누워 있던 노병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 팔꿈치로 상체를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젊은 병사가 반응하기도 전에, 찰나의 순간 이상한 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렸다.
바로 코앞에서 발생한 불빛과 큰 폭발음에 저항군 병사는 반사적으로 양팔로 머리를 감쌌다. 그러자 끈적하고 뜨거운 흙덩이들이 팔 바깥쪽 피부에 튀는 것이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이 냄새는... 흙이 아니었다.
눈을 떴을 때 야전 침대에는 피 웅덩이와 두 개의 잘린 팔다리만 남아 있었고, 노병이 일으켰던 상체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 구금소 바닥에는 피부 조직과 부서진 뼈의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젊은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본능적으로 허리의 홀스터를 더듬었지만, 가죽 아래는 텅 비어 있었다. 그렇다. 저항군의 무기는 이미 기계체들이 수거해 간 뒤였다.
병사들이 갇혀있던 곳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길든 것처럼 보이던 기계체들은 순식간에 잔혹한 본성을 되찾아 생명 신호가 감지되는 모든 대상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침착해. 그리고 반격 준비...
수많은 전투를 겪은 노련한 병사의 반응은 아주 빨랐다. 하지만 기계체의 속도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또다시 사격이 시작됐고, 유탄이 그의 큰 체구를 관통해 지나가면서 뒤로는 피안개를 남겼다.
사람들은 사방으로 도망쳤고, 일반인 구금자들은 억제할 수 없는 공포에 더욱 빠지게 됐다. 반면 기계체들은 새로운 명령에 따라 전진하며 인간들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자동 속사 무기의 협주곡과 함께 살점이 죽음의 꽃처럼 피어났다.
신체 조각이 아마천과 금속 조각에 뒤섞여 솟구쳤다가, 극북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박처럼 무자비하게 이 혼돈의 공간을 내리쳤다.
무기를 탈취해! 어서 반격해!
살점이 타는 냄새에 어지러울 지경이었지만, 인해전술이 그들의 마지막 이점이었다.
생존 본능에 이끌린 병사들은 혼자 있는 기계체를 에워싼 뒤, 자동화 무기를 강제로 떼어냈다.
하지만 이런 탈취 과정에서도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어갔다.
귀를 찢는 비명이 거리 구석구석에서 터져 나왔다.
윽...
기계체가 병사의 전우를 찢어놓는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졌지만, 그의 다리는 이미 관통당한 상태라 움직일 수 없었다.
피가 그의 몸에 튀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거리 모퉁이를 향해 기어가는 것뿐이었다.
그때 학살을 종식할 듯한 거대한 폭발음이 먼 곳에서 울려 퍼졌고, 그 소리는 하늘을 관통하는 듯했다.
새로운 도살장이 순간 고요해졌다. 자욱한 먼지가 모든 사람과 기계를 짙은 갈색 장막 속으로 집어삼켜 버렸다.
저건... 뭐지...
기계체의 새로운 지원군이 온 것일까? 병사는 바닥에 누워 절망했다.
눈부신 빛이 전투의 연기와 먼지를 뚫고 들어왔다. 그리고 먼 어둠 속에서 무언가... 다른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사격하는 소리, 인간의 외침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침착한 지휘 소리가 들렸다.
3시 방향의 기계체들 제압 완료!
휠체어에 앉은 소녀가 높이 든 제논등의 빛이 화약 연기를 뚫고 암흑을 몰아냈다. 안개 속 등대처럼 모든 생명의 방향을 인도했다.
율리아의 뒤를 따르는 이들은 풍파를 겪고 상처투성이가 된 난민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거무스름한 얼굴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등의 빛에 이끌려 더 많은 무장 난민들이 연기벽 뒤에서 걸어 나왔다.
율리아의 손에 든 등의 빛은 갇혀 있던 번개 같았고, 폭발 이후 그 위대한 힘으로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헤쳐 나갔다.
그리고 절망한 전사들이 다시 방향을 찾도록 이끌어 주었다.
Yulia, 이 이름은 영원한 순종과 영원한 온화함을 의미했다.
아버지의 우유부단함이 빚어낸 비극으로, 율리아의 이름에 담긴 기대는 하나의 풍자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 순간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되찾았다.
온화함의 의미는 도피가 아니었다.
저는 율리아입니다. 모두 일어나 주세요.
율리아가 평소처럼 차분하게 사실을 말했지만, 구출된 저항군들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율리아는 차분한 목소리를 유지하며 다시 한번 권유했다.
모두 일어나서 저희와 함께해 주세요.
여러분이 여기 있는 분들을 봤을 땐, 기계체의 보호를 받는 겁쟁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이 도시가 파괴된다면, 우리의 모든 견해 차이는 무의미해질 테니까요.
기계체들이 먼저 학살의 칼을 들었습니다.
몇몇 저항군 병사들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들은 눈부신 불빛이 반사되는 눈동자로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는 조용히 무기를 내려놓고 어둠 속으로 걸어가야 할까요? 아니면 눈먼 증오에 사로잡혀 서로를 죽여야 할까요?
아무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병사들이 일어섰다.
우리는 생존할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고, 이 도시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저희와 함께해 주세요. 그리고 무기를 들어주세요.
율리아는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점점 더 많은 인간들이 무기의 먼지를 털어내고 서로를 부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율리아가 있는 방향으로 모여들었다.
죽어가는 저항군 수장이 율리아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율리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앞으로 몸을 기울여 수장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내민 평화의 상징을 받아들였다.
피로 물든 수장의 손바닥에서 율리아는 참회의 깨달음을 느낀 듯했다.
율리아 테레시코바는 치올콥스키 우주 도시 "천국의 다리" 우주선 자기 가속 궤도 프로젝트 연구 총책임자인 레오니드 테레시코프의 딸이었다.
이제 율리아는 밤낮으로 넘실대는 피바다를 건너, 도시의 사람들을 저편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휠체어의 전동기가 가동되기 시작하자, 미세하게 떨리는 두 바퀴에서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진동이 전해졌다.
화약 연기 너머 거리 반대편에서 센서의 붉은 빛이 다시 번쩍였다.
새로운 기계체 군대가 이곳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율리아는 사방으로 진군하기 시작한 전사들을 향해 모두가 듣고 싶어 하던 말을 외쳤다.
"우주 도시의 시민들이여! 생존을 위해 무기를 들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