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외곽의 매립장을 비추던 석양이 사그라지면서 금속 무덤에 침울한 암 금색 빛을 드리웠다.
체포와 저항으로 불타오르는 도시와 달리, 이곳은 결계에 둘러싸인 다른 세상 같았다.
베로니카가 수많은 기계체의 잔해를 지나갔다. 이곳은 너무나 많은 동포의 고통이 봉인된 곳이자, 그녀가 끝까지 방문하고 싶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리고 이 무덤가에 흩어져 있는 비밀 거점들을 그녀는 사실 알고 있었다.
광장에서 늘 추모를 하던 그 기계체가 난민들과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반각성 기계체들을 이곳에 숨겨주고 있었다.
새로운 질서가 막 형성되던 시기, 베로니카는 드미트리의 반항을 묵인해 주었다. 기계체라 할지라도 미래에 대한 이해가 하나일 수는 없다는 것을 그녀는 어느 정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혼란은 이미 관용을 위한 여유를 남겨두지 않았다.
공중 정원에서 온 손님은 이 도시에서 언제나 외부인이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 했던 인간들은 이 길에서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됐고, 될 수도 없었다.
독립적인 의식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기계체들을 상대할 때, 해킹하는 건... 어쩌면 각성 기계체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베로니카는 손에 든 장총을 더욱 꽉 쥐었다.
율리아와 드미트리가 저쪽에서 뭔가를 논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이 많고 시끄러워서 구체적인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전히 불안정해요. 간단한 보고는 발송이 된 것 같은데, 적절한 타이밍에 통신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공중 정원의 군대가 개입한다면 더 큰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아직 없습니다.
드미트리는 율리아와 작은 다툼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은신처를 떠났다.
아직 전투가 가능한 난민들이 바깥쪽에서 방어선을 형성했다. 하지만 그 진형은 촘촘하지 못해서 잘 훈련된 저항군과는 거리가 멀었다.
은신처는 더 이상 은밀하지 못했고 사태는 점점 더 위급해졌다. 함영이 베로니카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면...
하지만... 그 가능성은 너무나도 작았다.
지휘관은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스스로를 부정해버렸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 난민들을 보호하려면 그 알 수 없는 소식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드미트리는 매립장을 걸어가면서 센서가 포착한 정보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것은 구체적인 위협 신호라기보다는 예전에 유라 님이 말한 적이 있는 인간의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이었다.
멀리 도시의 윤곽이 점점 짙어지는 황혼 속으로 녹아들었다가, 이내 밝아진 불빛으로 다시 그 윤곽이 드러났다.
그리고 이 매립장은 순식간에 너무나 조용해졌고, 여기저기서 활동하고 있어야 할 동포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스캔 실행.
잔잔하던 파형 스크린에 파문 하나가 나타났다.
동포의 신호였다.
드미트리는 기기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폐기된 운송 장비들이 쌓여 있는 철산 아래로 갔다. 그러자 그의 앞에는 익숙한 저격형 자주 기계체가 있었다.
니아, 상황을 확인해 주세요. 다들 어디로 간 겁니까?
식별 불가한 대상을 발견했습니다. 목표를 조준합니다.
기계체가 뻣뻣하고 기계적인 동작을 하더니 기관포의 총구를 드미트리에게 돌렸다.
레이저 조준점이 드리트리의 우주 헬멧을 단단히 조준하고 있었다.
니아?
눈앞의 동료는 퍼니싱에 침식된 듯, 각성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드미트리가 니아의 기체를 확인하러 가려 하자, 더 많은 레이저 점이 그의 헬멧을 비췄다.
이와 함께 파형 스크린에 격렬한 파도가 몰아쳤다.
경고. 조준당했습니다. 경고. 조준당했습니다. 경고. 조준당했습니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동포들이 철산의 틈새에서 줄지어 나와 과거의 보호자를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검붉은 그림자가 기중기 위에서 뛰어내렸고, 착지한 뒤의 모습이 그의 센서에 선명하게 찍혔다.
이 도시에서 비밀을 숨길 수 있다는 망상을 정말로 품었던 거야?
대인, 오셨습니까?
드미트리는 조용히 자신의 근거리 통신 시스템을 가동했다.
거짓말은 하지 마. 너의 충성 대상은 그 인간 소녀잖아. 날 향한 너의 원한을 숨길 필요 없어.
대인... 동포들에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제발... 제발 그들을 풀어주십시오.
드미트리의 언어 모듈이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그는 동포들이 왜 처음 모습으로 돌아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시에 있는 기계체들처럼, 내가 저들의 중앙 제어 시스템을 장악해 버렸거든.
이제 이 동포들은 더 이상 비정상적인 논리를 출력하지 않고, 질서 유지를 위해 일할 거야.
모든 게 끝나면, 그들에 대한 통제를 해제할 거야. 하지만 네가 협조하지 않으면, 난 언제든 그들 모두를 초기화할 수 있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대인.
베로니카가 돌아서서 드미트리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네가 숨기고 있는 인간들을 나한테 넘겨. 공중 정원의 그 둘도 함께.
그건 안 됩니다. 베로니카 대인.
대인께서 예전에 공포하신 법령에 따르면, 기계체는 개인 재산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제 재산이고, 대인께서는 지금 제가 가진 소유권을 침해하시려는 겁니다.
터무니없군.
주변의 제어된 기계체들이 천천히 앞으로 나와 드미트리를 구석으로 몰았다.
그들은 대인의 계획에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이건 협상이 아니라 명령이야. 내가 말했지, 네가 인간을 넘기지 않으면, 이 동포들은 모두 초기화될 거야. 내가 세 번이나 말하게 하지 마.
창에 새겨진 복잡한 구조가 꼬이며 감겨 창 끝에서 마무리되었다.
무언의 위협과 거부할 수 없는 경고가 협상의 여지를 압박했다.
드미트리의 근거리 통신 시스템을 통해, 매립장 반대편에서 인질로 잡힌 인간들은 모든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이건 살인입니다. 베로니카... 대인.
베로니카가 동포들의 기억을 협박 수단으로 삼는 것을 듣자, 드미트리의 회로에 정의할 수 없는 신호가 흘러서 언어 모듈이 일시적으로 합선될 뻔했다.
이런 반박에 동요하지 않던 베로니카의 목소리는 어두운 방 서리처럼 차가웠다.
살인이란... 위선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야.
그들은 죄를 지었으니, 참회가 필요하다며,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고의적 치명상"이라고 미화하지. 그러고는 존재하지도 않은 신의 용서를 기대해.
하지만 기계체는 순수해. 에둘러 말할 필요가 없어. 데이터는 마음대로 복사하고 이동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 당연히 삭제할 수도 있지.
기계체에게는 내세도 없고, 죽음도 존재하지 않아. 기억을 담은 회로가 손상되지 않는 한, 기계체의 생명은 영원해.
손에 든 창을 바닥으로 향한 베로니카는 양보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인간에게 왜곡되어 인식된 동포를 설득하려는 욕심은 내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네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해줄게.
드미트리, 난 언제든 널 죽일 수 있어.
통신기에서 들려온 고고하고 낮은 목소리에 휠체어에 앉은 소녀의 몸이 떨렸다.
!
안 돼. 안 돼!
디마, 왜...
곧이어 백색 소음을 뚫고, 작은 벌집 모양의 스피커에서 다시 대화가 들려왔다.
율리아 그리고 공중 정원에서 온 자들, 내 말이 들리는 걸 알아.
이어서 마찰음이 들렸다. 드미트리가 통신기를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스피커를 통해 위협을 가했다.
지금 당장 강제 수색을 시작할 수도 있지만, 그건 우리 모두가 원치 않는 결과야.
그러니 무기를 내려놓고 스스로 나와.
무장하지 않은 각성 기계체에게는 그에 맞는 권리를 부여해 줄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가려진 율리아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고, 휠체어 손잡이를 꽉 쥔 손가락 마디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휘관과 리브가 지금 나간다면, 이곳 난민들의 안전과 맞바꿀 수 있을까? 베로니카가 공중 정원 소속은 손대지 않겠지만, 정말로 다른 인간들을 안전하게 보내줄까?
지휘관이 머릿속으로 가능한 방안들을 빠르게 검토하며 절충점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지휘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율리아의 여린 몸이 갑자기 앞으로 숙여지더니, 재빨리 두 손으로 통신기를 눌렀다.
매립장에서 가장 높은 크레인을 기준으로 삼각 측정을 하면, 이 신호의 발신지가 나오는데 그곳이 우리의 은신처다."
우리는 저항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드미트리는 해치면 안 된다.
율리아 님!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사람들을 마주한 율리아는 통신기를 내려놓고 휠체어에서 몸을 움츠렸다. 그것은 지친 듯 체념한 듯한 모습이었다.
지휘관님, 먼저 떠나시겠습니까?
리브의 실력이라면, 지휘관을 보호하면서 빠져나가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휘관은 알렉세이의 이상한 태도와 베로니카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떠올리니, 이 속에 또 다른 "답"이 있을 것만 같았다.
기계체의 대군이 철근과 고철을 밟으며 이곳으로 진군하는 소리가 이내 확성기를 가득 채웠다.
난민들은 율리아에게 복잡한 시선을 던졌지만, 결국 기계체들의 포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았다.
문명의 진보가 일찍이 정지 버튼으로 멈춰버렸음에도, 도시의 자동 시설들은 충실하게 명령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높은 하늘 아래, 밤이 깊어갈수록 차례로 켜지는 불빛들이 우주 도시의 강철 숲 사이로 기묘한 평화로움을 자아냈다.
마치... 꿈속에서 본 행인 하나 없는 구룡 시장처럼, 시간마저 흔들리는 불빛과 나비 그림자 사이로 모두 녹아든 것 같았다.
하지만 함영은 이곳에 머물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매립장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베로니카가 도시의 저항군을 이미 제압한 상황에서 마지막 목적지는 아주 명확했다.
통신 신호인가?
근거리 통신으로 이상한 신호가 반복적으로 연결을 요청하고 있었다.
함... 함영?
[지지직]... [지지직] 함영 맞으신가요?
통신 채널에서 어디서 들어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신지...
죄송합니다. 이건 긴급... 채널... 제가... 시간이...
끊어진 문장들이었지만, 이내 상대방의 목소리가 전류음을 뚫고 선명해졌다.
긴급 방송 채널로 직접 연결하여 수신 주파수가 교란될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알렉세이?
함영은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전파를 타고 상대방에게 전해진 것이 분명했다.
맞습니다. 궁금한 게 많으시겠지만,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 진심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음량은 작았고, 그의 목소리도 압박감에 떨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전의 경박하고 광기 어린 태도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듣고 있어요. 말씀하세요.
베로니카가 매립장의 기계체들을 통제한 뒤, 보호받던 난민들을 모두 납치했습니다.
뭐라고요?!
가장 우려했던 상황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 정보가 인간을 경멸하던 꼭두각시에게서 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공중 정원의 두 분은...
함께 끌려갔습니다. 베로니카는 그들을 우주선 정박 구역 3C 격납고에 가둬뒀을 겁니다.
상황이 급박합니다. 꼭 저를 믿어주길 바라요. 제가 정신이 맑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주선 정박 구역 3C 격납고입니다.
베로니카가 더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해주세요.
그 목소리에서 광기는 사라지고 무게감이 느껴졌다.
당신을 전적으로 믿을 순 없어요.
기계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함영은 태도가 완전히 바뀐 인간을 그대로 신뢰할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더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제가 얼마나 더 맑은 정신으로 대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정무청 입구 비밀 코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정무청의 주위에는 매복한 이가 없다는 걸, 이미 그쪽을 살펴보셨을 거기에 알고 계실 겁니다.
알렉세이는 급한 말투로 긴 비밀 코드를 알려주었다.
어떻게든 베로니카를 막아주세요. 그녀가 더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해주세요.
제가 확인해 볼게요.
소중한 사람들과 물건들이 위협받을 때, 함영은 그 위험에 맞서는 것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함영의 대답을 들은 후 채널은 조용해졌고, 전류 소음조차 들리지 않아서 통신이 끊어진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알렉세이?
그리고... 절대 베로니카를 다치게 하지 말아주세요.
그러고는 통신이 갑자기 끊겼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강제로 차단된 것 같았다.
...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함영은 매립장에 도착했다. 알렉세이의 말대로 매립장의 여러 은신처는 모두 텅 비어 있었다.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전투를 해야 하는 걸까?
함영은 비파를 꼭 안은 채 정무청 방향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함영의 모습이 점차 눈보라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리고 정찰하러 왔던 인간은 결국 이 전쟁에 휘말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