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에서 온 언니, 이거 받으세요.
좌석 밑을 한참 뒤적거리던 병사는 여러 부품을 조립해 간신히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총을 꺼냈다.
방금 보니 이거 다루실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가는 길에 습격을 당할 수도 있으니 잠시 빌려드릴게요.
고마워요.
무용수 차림을 한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소총을 건네받은 뒤, 약실 덮개를 열어 총열을 확인했다.
병사들에게는 흔치 않은 광경이었기에 그들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운송 장비에 숨어 여기까지 오신 걸 보니, 우주 도시에 들어가려고 하셨던 거죠?
그곳엔 어쩐 일이죠? 거기에 친척이나 친구가 있나요?
잡담은 그만... 그리고 경계를 늦추지 마.
흥분한 소녀는 늙은 병사의 꾸짖음을 무시한 채 전술 조끼의 수납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물건을 꺼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엄지손가락으로 구겨진 은박지 포장을 누르며 포장지의 주름을 없애려고 애를 썼다.
그나마 볼만한 형태로 만든 뒤, 젊은 병사는 그 물건을 함영에게 건넸다.
방금 전의 전투에서 정말 큰 도움을 주셨어요.
이건... 도시 외곽 매립지에서 일주일 동안 야간 근무하고 교환한 거예요.
좀 초라해 보이긴 하지만, 맹세코 개봉하지 않은 거예요. 손도 대지 않은 다크초콜릿이랍니다!
늙은 병사는 답이 없다는 듯 살짝 고개를 저었지만 불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러실 필요 없어요...
괜찮아요! 귀하긴 하지만, 아예 구할 수 없는 건 아니거든요. 저는 더 있으니까 받으세요!
체력을 많이 소모하셨을 텐데... 사양하지 마세요.
그럼...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병사의 선물을 받아 든 함영은 포장지의 설명을 살펴보았다. 카카오, 설탕... 기계체에게 에너지 공급을 할 수 없지만, 인간의 선의를 증명하고 있었다.
방금 "교환"이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인가요? 우주 도시 안에선 지금도 물자를 교환해야 하나요?
옆에서 함영의 말을 듣고 있던 늙은 병사가 총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정말 모르시나요?
함영의 곤혹스러운 표정을 바라보던 늙은 병사는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기계체들과 한패인 줄 알았는데... 상황을 전혀 모르시네요.
젊은이의 적극적인 호의가 늙은 병사에게도 영향을 미친 듯, 그도 점차 경계심을 풀었다.
그 차림새를 보니... 구룡 측에서 파견한 분이군요.
구룡 소속인 건... 맞아요.
함영은 아직 이들이 왜 "기계체"에 대해 거부감을 가졌는지 알 수 없었기에, 이성적인 판단 끝에 자신의 기계체 신분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
구룡이 드디어 지원을 파견하기로 한 건가요?
전투력이 만만치 않은 걸 보니 능력자인 건 틀림없겠군요, 그런데 지원군은... 단 한 명인가요?
지원군이라기보다는... 정찰병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네요.
함영은 계략에 능숙하지 않았기에, 늙은 병사의 말을 최대한 맞춰주려고 했다.
정찰병이라고요? 그럼 뭐, 여기 남은 사람들의 생사를 확인하러 온 건가요?
죄송합니다.
그녀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늙은 병사의 목소리에 담긴 피로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들도 오랫동안 사과를 기다려왔을지도 모른다.
쳇... 됐어요. 괜히 젊은 아가씨를 난감하게 할 생각은 없어요.
그녀가 상대의 결론을 따라주자, 긴장된 분위기도 한결 누그러진 것 같았다.
그럼, 지금 도시 내부 상황은 어떤가요?
방금 그 애가 하는 말 못 들으셨나요? 말 그대로 일하고 먹을 걸로 교환했다는 뜻이에요.
이곳의 규칙은 인간이 정하는 게 아니거든요.
인간이... 정하는 게 아니라고요?
그건... 이미 오래전 일이죠.
어린 병사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늙은 병사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뾰족 머리 기계체가 갑자기 나타난 이후로, 이 도시는 우리 것이 아니게 됐어요.
그녀는 중앙 제어 시스템을 장악한 뒤, 기계체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죠.
선배들 말로는 도시에서 여러 번 무장 반격을 시도해 봤는데, 인간이 고철 덩어리를 이길 수는 없었다고 해요...
젊은 병사는 겪지 않은 역사를 말하기엔 자신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과거 이곳이 과학 연구의 성지로 불렸을 땐, 군인이 가장 한가한 직업이었어요.
도시의 위치 자체가 절대 기밀이었으니, 감히 누가 나쁜 마음을 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 사건이 터진 이후... 기계체들은 그 뾰족 머리 기계체의 지휘 아래, 전임 연구 책임자를 "처형"했고, 스파이를 성주로 앉힌 뒤, 명분을 만들어 통치를 시작했어요.
그 다음은요...
겪어온 과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상대가 언급한 그런 환경은 그녀에게 있어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다음? 그 기계체들은 24시간 연속 근무를 강요하면서 사람들을 괴롭혔고, 정해진 노동 시간을 채워야만 의식주로 교환 받을 수 있게 했죠.
그들이 요구한 노동 시간을 채우지 못하면, 노인이든 어린이든 상관없이, 굶어 죽기만을 기다려야 했어요.
결국 자신과 같은 편에 섰던 기계체들과 맞서야 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죠.
함영은 순간 멍해졌다. 이렇게 뒤틀린 법률이라니...
그녀의 왼손이 무의식적으로 목 옆으로 움직였다. 그 부위는 이제 더 이상 전류의 찌릿한 통증이 전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쓰라린 기억은 신체 이외의 오래된 흔적처럼 힘으로 쉽게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와 그 소녀 둘만의 약속은... 영원히 이행할 수 없는 이정표 속에 오랫동안 갇히게 됐다.
결국, 그들은 과거의 세월을 뒤로하고 새로운 여정을 떠났다.
선현, 교회 그리고 거리의 다과와 떠들썩한 분위기... 모든 것이 미래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시간은 결국 괴이한 순환이었고, 그녀를 다시 비참한 상황으로 이끌었다.
(뾰족 머리 기계체라... 설명으로 봐서는 외부에서 온 것 같은데.)
(베로니카일까?)
흠, 도시 안에서의 생활이 힘들긴 해도, 밖에서 끼니를 걱정하며 사는 것보다는 낫겠죠.
늙은 병사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함영은 그의 한숨소리에 사색을 끊고 비좁은 운송차량 안으로 주의를 돌렸다.
구룡 측은... 무슨 계획이라도 있나요?
더 많은 병력을 보내 우주 도시를 탈환할 건가요? 여긴 예전에 아주 중요한 우주 기지였잖아요.
저는 구룡이 어떤 모습인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우주 도시랑 비슷한가요?
구룡은...
쾅!!
함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갑작스러운 충격이 차 안의 떠들썩한 분위기를 깨트렸다.
충격과 함께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고, 두꺼운 아머 내벽도 진동을 흡수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위기가 한가로운 대화의 여유를 앗아갔다.
습격이다! 방어 태세를 갖춰라! 기관총 사수 준비!
전에는 덜렁대는 것처럼 보였던 늙은 병사가 그의 연륜을 보여주자, 차 안의 병사들이 그의 지휘 아래 재빨리 전투 준비를 마쳤다.
군복을 입은 젊은 여성은 방금 전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거두고, 능숙하게 일어나 기관총 탑의 회전 구조물로 올라가 상반신을 천창 밖으로 내밀었다.
기계체는 소음에 영향을 받지 않기에, 함영은 주위 인간들처럼 소음 방지 장비를 착용하지 않았다.
윽...
하지만 차량 지붕에서 먼저 들린 건 짧고 둔탁한 소리였다. 마치 날카로운 무기가 공기를 가르며 부드러운 물체를 타격하는 소리 같았다.
방금까지도 민첩하게 움직이던 그녀의 두 다리는 축 늘어뜨려졌고, 따뜻한 액체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렸다.
함영은 문득 그녀의 이름도 묻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