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 주둔지
새로운 임무 분배를 위한 소규모 회의가 끝난 뒤, 누군가가 지휘관의 앞을 가로막았다.
[player name] 지휘관님, 시간 좀 내주실 수 있나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루시아가 발걸음을 멈췄다.
……
지휘관은 루시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트로이와 함께 주둔지의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음... 네. 조금요. 그러니까... 음... 앞으로...
말을 하던 트로이가 손으로 원을 그리다 멈추었다. 이내 손을 내리자, 긴장으로 굳어있던 그녀의 몸도 서서히 풀어졌다.
후... 됐어요.
지휘관님께서 이런 성격일 줄은 몰랐네요.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은 이해심이 깊어서, 남의 속마음을 잘 헤아린다고 들었는데.
아무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브리이타... 아니. 당신들은 안젤에게서 어떤 정보를 들은 거죠? 브리이타가 하루 종일 저를 피해 다니고 있어요.
안젤을 심문... 이 아니라, 대화를 시도해 봤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고 그게 연기는 아닌 것 같았어요. 그럼, 문제는 그 자료에 있다는 거겠죠.
트로이는 지휘관이 대답하지 않자, 자신의 말솜씨로 상황을 풀어보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단순 명료하고, 해바... 풉...
트로이는 말하던 중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체념한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해바라기 같던 브리이타가 왜 갑자기 자기 의견을 말하게 된 건가요? 대체 자료에 뭐가 적혀 있었던 거죠?
트로이는 대답에 담긴 숨은 뜻을 알아차리고, 한동안 침묵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브리이타의 세상에서는 태양이 영원히 저물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아... 네. 지원 부대 브리이타 대장님, 안녕하세요. 저는 트로이라고 해요.
트로이가 지휘관의 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당시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네.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알아요. 물론 제가 그녀와 친한 사이는 아니에요. 최소한 지금의 기억으로는요. 하지만... 느낌만큼은 속일 수 없죠.
트로이는 지휘관이 던진 질문에 존재하지도 않은 가면이 벗겨진 듯했다. 그리고 심문 경험이 풍부했던 그녀는 자신이 이런 평범한 대화술에 끌려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화 내용은 어느새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이 아닌, 상대방이 알고 싶어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상대의 궁금증이 곧 자신의 궁금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트로이는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브리이타와 이 광정이 주는 느낌은 똑같아요. 거북하다고나 할까요?
모든 정보가 우리 둘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고 말해주고 있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답을 찾을 수가 없어요.
원래는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곤 했어요. 먹고살기도 바쁘니까요. 하지만...
트로이가 몸을 돌려, 멀지 않은 곳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브리이타를 바라보았다.
브리이타는 지휘관의 시선을 느꼈는지 순간 굳었다가, 끝내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뻣뻣한 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지휘관님이라면, 자신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숨겨진 폭탄 같은 존재이길 바라세요? 언제든 펑~ 하고 터질 수 있는 그런 존재요.
솔직히 전 제 과거에 딱히 관심 없어요. 하지만...
트로이가 손을 들어 루시아 쪽을 가리켰다가 다시 거두었다. 이는 의도가 분명했다.
폭탄인 제가 터질 때, 저 혼자 산산조각 나는 건 괜찮아요. 하지만 주변 사람들까지 희생되는 건 막아야 하잖아요.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수많은 일을 겪어온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이라면 이런 느낌을 누구보다 잘 아실 것 같은데, 아닌가요?
제가 원하는 건 안전핀 하나뿐이에요.
결심을 하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 어느새 다가온 누군가가 대화를 끊었다.
저기, [player name]... 그... 그리고 트로이.
?
[player name], 셰릴 쪽에 진전이 있다고 연락이 왔어. 상황이 좀 급하니까... 먼저 가서... 좀 봐줄래?
브리이타와 트로이의 시선이 마주쳤다. 브리이타의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지더니, 결국 둘은 침묵 속에서 서로를 응시할 뿐이었다.
침묵을 먼저 깬 건 트로이였다. 그녀는 항복이라도 하는 것처럼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알았어요. 더 이상 묻지 않을게요. 여기까지 하시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 같아서 좀 민망하네요.
셰릴한테 가 보세요. 급하다면서요?
트로이가 브리이타의 곁을 지나 주둔지를 향해 걸으려는 순간, 브리이타가 갑자기 트로이를 붙잡았다.
트로이.
?
너 잘못이 아니야.
네? 뭐라고요?
내 말은... 네가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거야. 적어도 그 자료에 그런 내용은 없었어.
이것만으로 네가 폭탄인지 확신할 수는 없어. 하지만...
지금 너에게 화약은 숨겨져 있지 않아.
알겠어요.
트로이가 잠깐의 침묵과 함께, 브리이타에게 잡힌 자신의 손을 떼어냈다.
이젠 됐어요. 뭐가 맞는지도 신경 쓰지 않을래요. 아무튼 고마워요.
트로이는 그 말을 남긴 뒤, 곧장 자리를 떠났다.
…………
어.
임시 주둔지
셰릴의 막사
셰릴과 노르만 연구원 몇 명이 장비 한 대를 둘러싸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셰릴 팀이 광정 안에서 무전 전신을 찾았고, 여기 있는 연구원들의 도움으로 송신기와 수신기를 개조했어.
여러 번 조정을 거쳐서 공중 정원의 통신 주파수를 잡을 수 있게 됐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들과 조용한 무전 전신을 보고 있다 보니, 지휘관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왜 그래? 장비는 문제없을 거야. 방금 공중 정원과 연락도 됐고, 이제는 그쪽에서 보낸 파라미터에 맞춰 조정만 하면 돼.
무전 전신에 파묻혀 있던 셰릴이 고개를 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광정에 아직 작동하는 회로가 남아있어서 거기서 전원을 끌어다 썼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지휘관은 셰릴의 의문에 대답하는 대신, 브리이타와 시선을 마주쳤다. 순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던 브리이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전원이 있을 리가 없잖아. 설령 잔여 전력이 있다고 해도, 이런 장비들을 구동하기엔 턱없이 부족할 거야. 그래서 지금처럼 안정적인 전력 공급은 불가능하다는 거야.
그렇다는 건, 광장 안에...
삐...
지지직...
귀를 찌르는 전자음에 대화가 끊겼고, 스크린에 흐릿한 화면이 나타났다.
이를 본 셰릴과 노르만의 연구원은 손에 쥔 도구를 내려놓고, 막사를 떠났다.
상태가 괜찮은 것 같군. 그렇다는 건, 내 예상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라는 거겠지.
공중 정원은 너희와 연락이 끊기자마자 즉시 대응을 시작했다. 현재 정비 부대가 광정 외곽에 도착해 주둔지를 설치하고 있다.
가장 외곽 층 탐사는 끝냈는데 상황이 그리 좋진 않아. 노르만 그룹으로부터 설계도를 받긴 했는데...
카레니나가 다른 방법들을 시도 중이야. 기존 통로가 안 되면, 새로운 길을 뚫어보려고 해.
광정 안에 다른 위험 요소라도 존재하나?
알겠네. 하지만 이쪽에서도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야.
말이 끝나자마자, 통신 채널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금 [player name] 지휘관에게 가장 부족한 건 시간인데, 제 제안은 왜 고려하지 않으시죠. 참모장님?
지지직...
불안정하던 영상이 일그러지더니, 새로운 인물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님, 처음 뵙겠습니다. 현재의 위기 상황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정비 부대와 [player name] 지휘관님께서도 현 상황에 어려움을 겪고 계신 것 같은데, 제가 한 가지 제안을 드려도 될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흐릿한 스크린 속 의원의 눈빛은 광정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뚜렷이 보이진 않지만, 그의 시선에서 강렬한 탐구열과 욕망이 느껴졌다.
사실 노르만 그룹이 가지고 있는 광정 설계도는 완전하지 않아요. 지하 시설을 만들고 사용한 건 쿠로노였으니까요.
저희 쪽에 좀 더 구체적인 자료가 있어요. 조금만 협조해 주신다면, 지원 부대와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님의 현재 상황 해결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니 섭섭하군요. 지휘관님께서는 공중 정원의 중요 인사이신데, 단순히 비즈니스 관계로만 볼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물론, 이건 쿠로노 쪽에서 피와 돈으로 얻어낸 자산이니... 아무 조건 없이 드리고 싶어도, 규정상 그럴 순 없어요.
좋습니다. 지하가 많이 답답하신가 보군요. 전 그냥 분위기 좀 풀어보려 했을 뿐입니다.
많은 걸 바라진 않으니 걱정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