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외에 이 상자도 함께 가져가 주세요.
음... 이건 예비 부품입니까?
맞아요. 그리고 언니가 평소에 입었던 옷도 있어요.
"언니" 말입니까? 아닙니다. 당신은 우리의 일원이 아닙니다.
그녀와 우린 모두 로봇이지만, 당신은 구조체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꿈에서 당신의 이름을 계속 불렀습니다.
로봇도 꿈을 꾸나요?
정확히 말하면 사고 회로를 최저 효율로 유지하는 겁니다.
살아 있는 사람만이 꿈을 꿀 수 있어요.
그녀는 사람이 아닌 저희의 동포입니다.
참! 그날 당신이 가게 사장에게 부탁해서 저한테 전해준 물건 말인데요.
어떤 거 말입니까?
그 이상한 기호가 빽빽이 적힌 종이요.
그건 우리 로봇이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당신 옆에 있던 로봇이 번역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이치는 말할 수 없어요.
그럼, 제가 번역해 드리겠습니다.
"미안해... 유유."
…………
이상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꿈에서 이 말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없어요.
어쨌든 당신과 그 선현님이 언니를 고칠 수 있다는 말이죠?
꿈이 매우 복잡한 그녀를 깨울 수 있는 건 선현님만이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선현님께 방법이 있다고 해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그녀의 영혼이 꿈속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영원히 방황하다가 꿈의 끝에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요. 그녀는 반드시 깨어날 거예요.
어라? 이상하네.
내가 말하고 있는 건가?
몸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아.
저 항구에 있는 모습은 나인 거 같은데? 그리고 저 이상한 로봇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저 유리 캡슐은...
아니. 그녀는 반드시 깨어날 거야.
누구지?
유유...
함영... 언니.
그래. 나 여기 있어.
길고 긴 꿈을 꾼 것 같아요.
나도.
전 지금 꿈속에 있는 거죠?
아니. 넌 이미 깨어났어. 유유.
모두 끝났어. 유유.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포뢰는 함영의 품 안에서 다시 눈을 감고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함영이 "미고"의 소원을 이뤄주자, 제어 받던 로봇도 멀리서 들려오던 종소리도 산속에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함영의 품에서 깨어난 포뢰는 이십여 년 전의 그날 밤처럼 함영을 꼭 껴안았다.
눈물도 대화도 없었지만, 행복한 느낌만이 감돌았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포뢰가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있는 포뢰파들에게 산에 남아 있는 "요람"의 잔당을 잡고, 희생당한 포뢰파를 찾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스프너도 드물게 그녀들을 도와줬다.
악! 아파! 아파!
스프너는 요람을 체포하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함영이 용신을 교회에 데려갈 거냐고 물었을 때, 스프너는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전 그의 소원을 존중해요.
스프너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들이 부오산 산기슭으로 내려왔을 때, 산에는 로봇과 사람들의 모습만 사라졌을 뿐, 다른 변화는 없었다.
이 산은 참 아름답네요.
응. 이런 곳은 구룡에서만 볼 수 있을 거야.
함영은 예전처럼 유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문득 유유의 부하들 앞에서 한다면, 예의에 어긋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돌아가요.
말을 마친 포뢰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함영이 내민 손을 잡았다.
쑥, 돌피, 띠 사이에서 본 구룡성의 벽돌과 기와는 한 폭의 두루마리 그림처럼 부서진 벽의 이끼와 강철 잔해에 생긴 녹을 같이 기록하고 있었다.
바닥에 깔려 있던 돌의 대부분은 깨지고 가루가 되어 전란 속에 사라져 버렸고, 그중 일부만 남아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을 지나는 모든 사람에게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전하고 있었다.
포뢰 님. 산에서 체포해 온 사람들은 모두 동쪽 거리의 곡창에 가둬놨어요.
보고를 마친 포뢰파는 포뢰에게 열쇠 하나를 건넨 뒤,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곡창에요? 왜 그들을 곡창에 가뒀죠?
조풍 님께서 배에는 그들을 가둘 곳이 없다고 하셔서, 식료품점에서 낡은 창고를 빌렸어요.
음. 조풍 그 녀석이... 그럼, 전 이따가 허 사장님한테 감사 인사를 전하러 가야겠네요.
포뢰 님, 다른 지시 사항이 있으신가요?
가면 너머로 들리는 포뢰파의 목소리가 아직은 앳된 느낌이었다. 몸집은 열일곱, 열여덟 살 정도로 보였지만 말투나 움직임은 꽤 어른스러웠다.
다들 가서 쉬세요. 당신도 소식 전해주러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얼른 가서 쉬세요.
아니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걸요.
포뢰의 말에 포뢰파는 황송하다는 듯 뒤로 물러난 후, 지붕으로 뛰어올라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직 어린애 같은데?
네. 지난달에 포뢰파에 가입했는데, 올해로 17살 됐어요.
어리게 보이지만, 생각하는 게 많아요! 그리고 어른처럼 행동하려고 애쓴다니까요.
음... 어릴 적에 유유도 그랬어.
네? 제가 언제 그랬다고요!
소녀는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가 금세 행복한 듯 미소 지었다.
벽돌 위를 걷는 발소리가 조금씩 멀어지면서 그녀들의 그림자는 점차 청회색 두루마리 그림 속으로 녹아들었다.
강물은 폭발로 생긴 포탄 구멍, 무너진 고층 건물 그리고 일부 퍼니싱이 완전히 여과되지 않은 미세한 구석까지 흘러갔다.
이 다리를 건너면 물은 더 깊은 곳으로 흘러간다. 다리 옆, 찌그러져 변형된 철제 도로 표지판에는 이 거리의 이름인 곡창 거리 동쪽 20번지가 적혀 있었다.
함영 언니. 이 거리 이름이 왜 곡창 거리야? 이 거리엔 크고 높은 곡창이 없는 것 같은데.
지금은 그러지 않지만, 여긴 예전에 야항선이 창고를 열고 곡식을 나눠주던 곳이었어.
이곳엔 식당과 간식거리가 엄청 많아. 그리고 설탕 공예도 있어!
먹고 싶어? 나한테 남은 청부가 있는데...
저기 봐! 함영 언니! 무대에서 무술 연습을 하고 있는데, 공연하려는 거야?
아니. 그들은 일종의 보디가드라고나 할까. 부자들이 자신과 화물을 지키기 위해 고용한 거야.
어, 이 정도로도 보디가드가 돼서 돈 벌 수 있는 거야? 그럼, 유유도 할 수 있겠네!
의지만 본다면, 유유는 지금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공연이 끝날 때쯤이면 시간이 늦을 텐데, 그때에도 시장이 열려 있으면 이 거리에 와서 간식거리 사자.
응!
모든 것이 강물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범람하고, 말라붙고 또 범람하면서 강물은 쥐 죽은 듯 조용히 흘러갔다.
함영과 포뢰는 그때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듯, 손을 잡고 구룡의 거리를 말없이 걸었다.
함영 언니...
응.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불러보고 싶었어.
우리가 이렇게 산책하는 것도 오랜만이네.
벌써 이십 년이 넘었네. 유유가 구조체로 개조되지 않았다면 어떤 모습일까?
어? 싫어. 난 조풍처럼 잔소리쟁이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
유유는 구조체가 된 걸 후회하지 않아? 내가 아니었다면...
함영 언니가 없었다면, 난 배 위에서 굶어 죽었을 거야.
다 지나간 일이잖아! 함영 언니도 더 이상 그런 말 하지 마! 나도 안 할 테니까.
웃는 얼굴의 포뢰가 갑자기 손을 뻗어 함영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포뢰의 눈길이 함영의 목덜미로 향했을 때,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들에게 시간이 남긴 상처는 아주 뼈아팠다. 그렇지만 그녀들 그리고 구룡 도시의 기억들은 시간의 굴레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어이, 너희 둘. 앞 좀 보고 다녀.
높이 쌓인 짐을 멘 행인이 갑자기 두 사람 곁을 지나가면서 말했다.
머리보다 높게 쌓인 물건들이 흔들리자, 그걸 짊어지고 있던 행인은 균형을 잡으려고 한참이나 애를 썼다.
죄송해요. 어?
당신은... 이건...
뭐. 행상 처음 봐?
그 역사 로봇들이 내 일을 가로채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많은 짐을 한꺼번에 옮길 필요는 없었을 거야.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됐어. 별일 없으면 간다.
행상은 넉살 좋게 웃으며, 짐을 짊어지고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함영 언니도 봤어? 저 사람 엄청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었어!
탕후루~ 갓 만든 탕후루~
꽃 사세요~ 갓 따온 꽃 보고 가세요~
호객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거리 안에는 형형색색의 네온사인 간판이 즐비했고, 인파의 움직임에 맞춘 듯 처마의 장식과 붉은 등롱이 살랑거리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게 구룡의 본래 모습이야.
사람들이 북적이는 거리에서 팔짱을 낀 중년 부부가 함영과 포뢰의 뒤에 나타났다. 그중 전통 의상을 입은 남자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 당신은...
쉿...
이때, 연구원인 것 같은 여자가 남자 옆에 꼭 기대어 검지를 입가에 갖다 댔다.
어?
너희... 여기 출신 아니지?
무슨 소리예요! 전 구룡성에서 자랐다고요!
구룡 사람이라는 신분을 의심받은 게 마음에 걸렸는지 포뢰는 가슴을 펴고 반박했다.
온갖 고생을 다 한 모습이 딱 밖에서 온 사람 같은데.
너희 둘은 자매니?
당연하죠!
어머. 이렇게 나이 어린 동생이라니, 너도 고생 좀 했겠구나.
아, 아니에요.
야항선에서 유유와 함께 보낸 나날들은 저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야항선?
이이는 모를 수도 있어. 내 기억으론 패하가 만든 엄청나게 큰 배를 말하는 걸 거야.
야항선에 가보신 적 있으세요?
이런, 가본 적이 없는데.
음. 아쉽네요. 그래도 괜찮아요. 야항선은 계속 항구에 정박하고 있으니까 언제든지 보러 오세요.
그 말은 네가 주인으로서 우릴 안내해 줄 수 있다는 거니?
주인이라기보단 포뢰로서...
뭐!? 포뢰파를 말하는 거니?
어? 네. 포뢰파요.
이렇게 작은 아이가 구룡의 아이 중 하나라니...
구룡파가 되면 생활비는 걱정 없겠네? 월급은 얼마나 돼?
그냥 그래요. 청부를 벌기 위해서 구룡파에 들어간 건 아니니까요.
그건...
유유와 중년 남자가 구룡파 이야기를 신나게 하고 있을 때, 중년 여자가 슬며시 남편의 팔짱을 놓고 함영의 곁으로 다가갔다.
중년 여자는 별다른 의미 없이 함영의 팔에 자기 팔을 걸었다.
지금도 어릴 때처럼 잘 웃네.
어렸을 땐,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영웅이 되고 싶다고 했었거든.
지금은 그 꿈을 이룬 것 같네.
구룡에 돌아오는 것도 유유의 꿈이었어요. 하지만 당신들은...
더 이상 얘기하지 말라는 듯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우린 시간 밖에서 흩날리는 먼지가 됐어. 하지만 너희와 구룡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
유유는 당신들이 누군지 모르는 눈치네요.
괜찮아. 몰라도 돼.
전에 구룡으로 돌아와 함께 당신들을 찾겠다고 유유와 약속했었어요.
그럼, 약속을 지킨 거나 마찬가지네.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구룡에서 평범한 모습을 살았을 때 지었던 것과 같은 미소였다.
그렇게 먼 북쪽까지 가봤어?
네. 북극 항로 연합과는 부동항에서만 거래할 수 있어요.
거긴 엄청 추워요. 콧물이 나오면 바로 얼음이 될 정도니까요.
세상에 그렇게나 추워?
네. 그래도 부동액을 많이 사용한 구조체라면 끄떡없어요.
가는 길에 침식체가 습격하거나 기이한 돌발 상황이 발생하는 것에 비하면 추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쯧쯧. 사막에서 설산까지 위험한 곳이란 위험한 곳은 다 가봤구나.
뭐였더라, "사랑과 희망만 있다면"...
"두려워할 것 없다!"
맞아! 바로 그거야!
<구룡의 마법 소녀>를 아세요?
알지. 그 애니메이션에 날줄도 알고 말할 줄도 아는 판다가 나오는 것도 기억해.
헉! 이렇게 오래된 애니메이션을 아는 분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래? 하하하...
넌 우리에게 충분히 뼈아픈 존재인데, 왜 두루마리 그림에 잊고 싶지 않은 추억을 더하려는 거니?
이제 가야 할 시간이야.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 다른 사람 붙잡고 어린아이처럼 수다 떨지 말고 얼른 돌아가자.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두 분, 벌써 가시게요?
하하하, 이 길에선 모두가 행인일 뿐이야.
너희는 너희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우리도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있어.
아저씨와 아줌마는 성에서 사세요?
맞아. 우린 어떤 의미에서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구룡성에 살고 있단다.
하지만 유유는 여러 장소에 가봤으니까, 계속해서 성에 있진 않겠지?
나중에 일은 나중에 생각할래요.
나중에 두 분을 성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방금 누군가가 <구룡의 마법 소녀> 특전 DVD를 교환해 주기로 약속하지 않았니?
에이. 그런 건 마음속에 잘 기억해 두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약속한 거예요. 다음에 봐요!
그래! 다음에 보자.
함영. 앞으로 잘 부탁해.
네. 걱정하지 마세요.
골목 깊숙한 곳 모퉁이를 돈 팔짱을 낀 부부는 벽돌과 기와 사이에서 모습을 감췄다.
긴 울음소리와 함께 구룡은 다시 구룡으로 돌아왔다.
함영과 포뢰도 여전히 그녀들이었다.
함영 언니. 그들을 알아?
응. 우리는... 오랜 친구였어.
그렇구나. 근데 나도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어.
그 아저씨랑 이야기할 때, 평소에 함영 언니랑 있는 것처럼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하고 즐거운 느낌이 들었어.
그건 유유가 다 컸기 때문일 거야.
이러면 다 큰 거야?
방금 아저씨와 아줌마도 이젠 유유가 다른 사람을 지켜줄 수 있는 어른이 됐다고 말했잖아?
유유는 그들에게 야항선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했었지? 그런 건 어린아이가 할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그들이 떠날 때, 가슴이 덜컥하면서 뭔가가 갑자기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함영은 포뢰와 맞잡은 손에 힘이 조금 더 실려지는 게 느껴졌다.
왜 그래?
"우린 시간 밖에서 흩날리는 먼지가 됐어. 하지만 너희와 구룡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
그건 새로운 시작 전에 필요한 여정이었다.
함영은 대답 대신 유유의 손을 꼭 잡아 줬다.
괜찮아. 유유.
그날 더 이상 울지 않겠다고 약속한 거 기억나?
아니야. 유유는 울지 않았어. 다만 슬플 뿐이야. 이유는 나도 모르겠어.
괜찮아. 내가 여기 있잖아.
유유.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기억나?
몰라. 구룡성의 거리는 너무 복잡해.
함영 언니. 그래도 함께 앞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