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번외 기록 / ER04 그 꽃이 꿈속으로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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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04-12 생과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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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따라 지은 플랫폼 아래엔 바람 한 점 새지 않을 것 같은 구름이 있었다.

그리고 산 정상에 걸린 석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 너머로 내려갈 것 같았다.

산을 오르기로 마음먹은 사람의 마음속엔 험준한 잔도, 두꺼운 이끼가 낀 돌계단 그리고 넘어야 하는 산 정상만 있을 뿐일세.

과거엔 이곳에서 구룡성을 볼 수 있었지만, 이곳을 넘으면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지.

테라스에 서 있던 로봇이 노인의 말을 듣더니 각자 흩어져서 함영과 노인에게 테라스로 가는 길을 비켜줬다.

지금은 두꺼운 구름만 보이네요.

아직도 납득할 수 없는 "진실" 속에서 헤쳐 나오지 못한 함영은 노인이 말하는 경치를 볼 여유가 없었다.

이 산속에 있는 로봇들이 실은 전부 인간이었다면...

그렇게 말하는 건 정확하지 않다네. 그 로봇들은 현실에서 움직이는 "진짜" 로봇이 꿈속에 투영된 모습일 뿐이거든.

이런 투영 안에서 "요람"은 그들이 추출한 실제 인간의 기억과 데이터를 이곳 로봇에 입혀서 현실에 존재하는 로봇들을 통제하는 거라네.

그럼, 산에 올라온 이후로부터... 전 줄곧 사람을... 죽이고 있었던 거네요.

…………

받아들이기 힘든가?

잘... 모르겠어요.

함영의 목소리는 그녀의 몸과 함께 떨리고 있었다.

로봇의 몸속에 있는 것이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면... 전...

어쩌면 우린 인간 모양의 가죽을 뒤집어쓴 채, 인간과 같은 죄악을 범하고 있는 차디찬 로봇일지도 모르지.

아니요! 그것과는 다른 얘기입니다!

함영은 자신의 양손을 보며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살인... 도구.

(아니야... 이건 아니지.)

함영은 유유를 찾고, "마음"이나 "영혼"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서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어쩌면 함영은 그것이 이기심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도 모른 채, 희생적인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 도대체 무엇을...

이곳에 살아있는 모든 건 "인간"이라 할 수 없지.

육체는 없고 기억과 데이터만 남아 있다면, 과연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노인은 옆에 있는 역사 로봇의 팔을 인자한 가장처럼 쓰다듬었다.

"요람"은 인간의 기억과 데이터를 복사해 이 꿈속에 투영했어. 그리고 그때, "그들"은 모든 희망을 버리고 죽음을 선택했다네.

그들은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어. 그렇기에 "그들"도 자네에게 고마워하고 있을 걸세.

왜죠?

사상과 정신만 남아 있더라도,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이에요!

그들의 마음, 기억, 소원과 괴로움... 전 모두 들었어요!

하지만 제 앞에서 사라졌죠... 마치 부서진 기계처럼... 찌그러지고 말았어요.

힘겹게 허리를 굽힌 노인은 녹이 슬고 칼날이 휘어진 장검을 주웠다.

장검이 노인한텐 너무 무거웠는지, 장검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다음 순간 노인은 주운 장검을 함영에게 건넸다.

그의 소원을 이미 듣지 않았는가?

모든 이가 살아 있는 대가를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니라네.

과거를 위해 사는 걸 선택하듯이, 과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다네.

그런 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야말로 잔인한 일이지.

함영이 너덜너덜한 장검을 들자, 누군가의 온도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희망을 품고 사는 선택지가 있는데, 왜 죽음을 선택했을까요?

"그들"에게 있어 "희망"이라는 단어는 너무나도 무거웠기 때문이지.

함영은 이런 논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로봇이 이해할 수 있는 논리적 판단이 아니었다.

판단 알고리즘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결과를 출력했다면, 로봇은 그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희망을 품고 살 수 있다면 왜 생명을 포기하겠는가?

자책할 필요 없다네.

생사지간엔 인간조차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존재하지.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건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네.

자네와 자네 친구는 찾고 싶은 이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더 필요했던 함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그녀가 데려온 인간 구룡파들은 지금 산 정상 대전에 있다네. 그리고 모두 살아 있어.

산 정상...

아이야. 이 늙은이는 자네가 찾는 이를 구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라네.

설령 자네가 그녀를 구하지 못한다 해도 이 꿈을 끝내 줬으면 하네.

노인은 천천히 몸을 돌려, 피로 물든 것 같은 석양과 끝없이 펼쳐진 구름바다를 뒤로했다.

이 꿈이 지속된다면, 머지않아 구룡의 거리도 이 로봇들에게 잠식될 걸세.

"요람"이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할지라도, 로봇이 들고 있는 무기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려줄 걸세.

그때가 되면, 인간은 생과 사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게 될 걸세.

구룡을 지키려면, 이 로봇들과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네.

구룡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 데이터를 구하면서, 요람의 복수를 막는 그런 방법은 정말 없는 건가요?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유유는 기억을 잃은 채 구룡성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됐을 것이고, 함영도 "요람"의 제어를 받아 그날 밤에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두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할 방법이 없을 땐, 선택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로봇에게 있어 이건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선택이었다. 다수를 구하기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함영도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는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런 선택을 했을 때, 함영은 몸속 어딘가에서 은은한 통증이 느꼈다.

없네요.

거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 선택할 수 없는 것도 있어.

이 꿈도... 깨어날 때가 됐어.

참. 꿈과 현실 사이에 또 하나의 문이 있는데

방금 전 자네가 만났던 이가 바로 문을 지키는 스님이라네.

그도 인간인가요?

어떻게 보면 그는 문을 지키는 직책만 부여받았을 뿐이네.

그 문을 건너야 진정한 현실을 볼 수 있고

용신을 볼 수 있어.

둥... 둥...

마치 귓가에서 종을 치는 것처럼, 그 종소리는 더욱 무겁고 또렷하게 들려왔다.

테라스에 모여 있던 로봇들의 모습도 점점 희미해지면서 사라졌다.

허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용신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그도 자네처럼 "마음"을 가지고 있는 특별한 로봇이지.

다른 점이라면, 그는 줄곧 현실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지.

이곳의 주민들과 반대네요.

그는 꿈을 꿀 권리를 빼앗겼어. 로봇은 꿈을 꾸지 않으니까.

하지만 우린 지금 꿈속에 있잖아요.

그래서 그가 현실에서만 살 수 있다는 거야. 하지만 현실은 그에게 너무 가혹했지.

둥... 둥... 둥...

산속 종소리는 귀청이 떨어질 것처럼 크게 울렸다.

늙은이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나?

이건 자네에게 있어서 잔인한 일일지도 몰라.

노인은 함영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려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노인은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함영은 그 부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함영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용신"이라는 동포를 반드시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함영이 한번 죽고 꿈에서 다시 살아난 것처럼, 잔혹한 현실을 견디고 있는 자도 꿈속에서 영원히 잠들 권리가 있었다.

이 늙은이의 부탁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얼굴이군.

그럼, 네 마음속엔 이미 답이 있겠구나?

…………

함영 자신에게 정말로 <답>이 있을까?

아니요. 전 잘 모르겠어요.

저에겐 다른 이의 생사를 결정할 권리가 없어요. 그건 그의 "마음"이 선택해야 할 문제예요.

그렇다면 자네의 마음은 이미 답을 찾은 것 같군. 자네들이 찾고 싶은 건 여기서 다 찾을 수 있을 걸세.

어르신!

노인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지자, 테라스엔 함영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스프너만 남게 됐다.

종소리는 끊임없이 귓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모두 사라졌어요.

조용히 종소리를 듣고 있던 함영의 몸에 석양이 비치자, 한적한 테라스에 그녀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피처럼 빨간 석양은 함영의 손에 물들었던 빨간 피를 상기시켜 줬다.

몇십 년 전, 함영의 두 손은 "곡 님"의 순환액으로 물들었었다.

그날 밤, 이 색깔이 가져다준 건 웃음, 비명, 신생 그리고 죽음이었다.

함영.

네.

이 산에 "요람"이 무슨 짓을 했는지 상상이 안 가네요.

인간을 죽이고, 인간의 기억과 데이터를 추출해 데이터화된 인간을 만들었고, 그 데이터를 로봇에 입히는 건... 지옥이 따로 없네요.

그 인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나요?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죽었다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방금 만났던 로봇은 구룡 사람들의 말투와 행동 방식 그리고 기억이 모두 살아 있는 인간 그 자체였어요.

스프너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어쩌면 이건 매우 잔혹한 사실일지도 몰라요. 그래도 우리가 잔인한 이가 되지 않기 위해선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모든 이야기가 해피 엔딩으로 끝날 순 없으니까요. 지금 시대에선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어쩌면, 율리시스도...

스프너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함영은 현실이 스프너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깨달았다.

"자네들이 찾고 싶은 건 여기서 다 찾을 수 있을 걸세."

노인의 말대로라면 함영이 찾고 있던 유유는 산 정상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프너가 찾고 있는 "율리시스"는 아직 찾지 못했다. 마지막에 율리시스를 만나게 될 거라면, 그는 아마도...

죄송해요. 스프너. 전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세요?

"이건 자네에게 있어 잔인한 일일지도 몰라."

아쉬움? 후회? 아니면 죄를 지어서일까?

나한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난 이런 거짓된 꿈속에 머물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곳을 나가기 위해선 더욱 잔혹한 현실에 직면해야만 해.

이 모든 것이 정말 가치가 있을까?

함영은 자신도 모르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아 있는 목덜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날 밤, 함영은 유유에게 상처를 입히고, 기만하고, 무기를 겨눴다.

마찬가지로 그날 밤, 함영은 유유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

함영은 그저 보통 로봇이자, 보잘것없는 무희일 뿐이었다.

모든 인간을 지킬 수 없는 함영은 이기적으로 자신의 "희망"을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함영은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길, 유유가 살아갈 수 있길 바랐다.

함영은 희망 때문에 죽었다.

그 꿈속에서 함영은 줄곧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함영은 깨어나는 그날까지 그 꿈속에서 계속 "살고" 있었다.

난 내가 했던 일을 부정할 생각이 없어.

애초에 꿈은 시와 노래에서 표현된 것처럼 아름답지 않아. 이렇게 잔혹한 사실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면, 나도 그에 맞는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됐어.

사실이 어떻든, 인간이든, 로봇이든, 살든, 죽든 난 각오가 돼 있어.

석양과 구름바다를 뒤로한 함영이 마지막 길에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