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약속하는 거야
함영 언니와 유유는... 손가락 걸고, 복사, 스캔, 사인 완료!
…………
함영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보이는 건 야항선의 갑판도,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잔도도 아닌 낯선 절벽이었다.
(이건... 또 다른 꿈인가?)
매우 현실적인 야항선의 광경이었지만, 함영은 그것이 꿈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 거리에서 함영은 유유의 손을 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유유는 뒤돌아보면서 언니인 함영에게 미소를 지었어야 했다.
하지만 함영은 유유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두려움, 후회, 불안, 슬픔 어떤 말로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유유...
…………
스프너 님.
데이터 파동과 함께 스프너도 함영의 곁에 나타났다.
심각한 눈빛을 한 스프너가 눈앞의 길을 묵묵히 바라봤다.
방금 그건 또 다른 꿈이죠?
네.
함영. 제가 찾는 이도 이 산속에 있는 것 같아요.
말씀했던 그 친구 말인가요?
네. 방금 전의 꿈속에서 그의 그림자를 봤어요.
콜로세움에서 도망치던 그날 밤이 보였고, 그의 이름이 들렸어요.
율리시스...
이름뿐인가요? 아니면 그의 모습을 보셨나요?
조금 전에 우리가 그를 만났을지도 모르잖아요.
고개를 저은 스프너는 끝없는 생각에 잠긴 듯 심각한 표정을 계속 짓고 있었다.
아니요. 이름만 기억날 뿐 보지는 못했어요.
율리시스라는 이름은 콜로세움의 인간이 그에게 붙여준 거예요. 스프너라는 이름처럼요.
살육이 거듭되는 날들로부터 우리를 구해준 건 율리시스였어요. 그가 우리를 데리고 문을 부쉈고, 지하 콜로세움의 모든 로봇을 구했죠.
하지만 그날 밤,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우린 서로의 얼굴조차 확인할 수 없었어요. 게다가 추격을 피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이름만 교환하고 뿔뿔이 흩어졌죠.
방금 전, 다시 그날 밤으로 돌아간 것 같았어요.
저도 방금 전에 예전의 야항선으로 돌아간 것 같았어요.
일부는 유유와 관련된 내용이었지만, 유유를 만나지는 못했어요.
사고 회로에 논리적 문제가 생겨 자신을 파멸시키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렇게 죽은 로봇의 대부분은 구할 수 없어요.
함영은 세르반테스가 말해준 로봇이 자신을 파멸시키려는 경향에 관한 내용이 생각났다.
자신을 파멸시키려는 경향이 있는 로봇들은 모두 해결할 수 없는 자아 모순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꿈" 때문에 로봇이 현실과 가상을 분간할 수 없게 된다면...
스프너 님. 그건 꿈이에요. 이미 일어났던 과거라고 할지라도 그건 현실이 아니에요.
우린 지금 꿈과 비슷한 가상 환경 속에 있는 거예요. 스프너 님!
함영은 생각에 잠긴 스프너가 정신 차리도록 그의 몸을 흔들었다.
이상하네요. 전 단 한 번도 꿈을 꿔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일리 있는 말이네요.
스프너 님의 친구분이 구룡에 왔다고 했던 거 같은데 맞나요?
네. 다른 로봇들한테서 들은 소문이지만요.
제 예감이 맞다면, 이곳에 있을 거예요.
함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오는 길에 만난 로봇들의 상태로 봤을 때, 스프너의 친구가 이곳에 있다면 무사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게다가 오는 길에 스프너와 비슷한 휴머노이드 로봇은 본 적이 없었다.
"율리시스" 님도 이 산속에 있다면, 꼭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허허허, 너희들 무사했구나?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 다 각자의 답을 찾은 것 같구먼.
그쪽은 대체... 누구인가요?
좋은 질문이군. 하지만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방금 전 꿈에서 말이야.
때때론 질문이 답보다 중요하지.
답이 없는 질문은 때에 따라선 잔혹할 수도 있어. 하지만 답은 있고 질문이 없다면 공허만 남게 되지.
우릴 꿈꾸게 만든 게 어르신인가요?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하지.
이 가상 공간을 조종하는 사람이 어르신이라는 말이군요.
아니. 나한테 그런 권한이 없네.
알고 있겠지만, 그 권리는 "요람" 스스로 제어하고 있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걸 꺼리는 아이들이지.
대체 누구시죠?
꿈속에 있는 저희에게 다른 꿈을 보여줄 수 있으면서도, "요람"의 멤버는 아닌 것 같았어요.
전에도 말했지만, 난 그저 한낱 늙은이일 뿐일세.
그럼... 어르신도 "요람"의 일원인가요?
아니네. 물론 믿고 안 믿고는 너 자신에게 달렸지.
함영 앞에 있는 노인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렇게 계속해서 물어본다 해도 별다른 답을 얻지 못할 것 같았다.
혹시 "율리시스"라는 로봇을 본 적이 있나요?
음... 자네가 찾는 이는 "유유"가 아니었던가?
율리시스는 제 친구가 찾는 이에요.
"율리시스"라... "스프너"처럼 이국적인 이름이구나.
그를 보신 적이 있나요?
유감스럽지만, 이 늙은이는 "율리시스"라는 이를 모르네.
대답을 들은 스프너는 다소 맥이 빠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네가 그런 꿈을 꿨다면, 이 산에서 꼭 이룰 수 있을 걸세.
"절망하는 자, 이 안에서 희망을 얻게 되리라."가 이 산에 "그들"이 부여한 신념이니까.
둥... 둥...
또 싸워야 하는 건가요?
종소리를 들은 함영과 스프너는 전투태세를 바로 갖췄지만, 노인은 경계할 필요 없다며 손을 저었다.
오. 그가 왔나 보군.
저쪽이야. 그를 따라가자꾸나.
잔도 전방에 로봇 하나가 조용히 서 있었다.
또 로봇이네요.
허허.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건가? 뭐, 상관없지. 그를 따라가자꾸나. "그들"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앞에 "요람"이 있는 건가요?
"그들"은 "요람"이 아니야.
노인은 주머니에서 작은 씨앗 하나를 꺼내서 함영의 손에 쥐여줬다.
여기서부터는 이걸 자네에게 넘김세.
나무 씨앗인가요?
맞아. 언젠간 쓸모가 있을 걸세.
둥... 둥...
그래. 알았다!
늙은이가 잠시 이야기한 것 가지고... 급하기는...
노인은 조금 전에 한 말이 종소리에 대한 대답이라는 듯 웃었다.
가자꾸나. 행백리자반구십이니깐.
이 말을 명심하게. 앞으로 자네들 앞에 나타나는 것이 진실이든 허구든 모두 부드럽게 대해주길 바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