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죠?
그 사람 아직도 살아 있나요?
그건 당시 수장이었던 비리야 님의 지시였어.
그 사건이 있고 난 뒤, 죄가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은 몇몇 협력자 외에 야항선에서 잠복하고 있던 요람 조직의 모든 멤버가 검거됐었어.
하지만 비리야 님은 그들을 가두라고 지시했을 뿐, 처단하실 생각은 없는 것 같았어.
그 사건 이후로 20여 년이나 지났군. 지금 살아 있는 건 그때 우두머리였던 해커뿐이야.
왜 그들을 살려둔 걸까요?
그건 우리도 잘 몰라. 하지만 그들은 잡힌 후에 스스로 너와 포뢰에 관한 일을 자백했어.
그가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도 네 신분을 쉽사리 믿지 못했을 거야.
이때, 조금 열려 있는 문을 형식적으로 노크하고 들어온 이가 조풍의 귓가에 몇 마디 속삭이고는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 "요람"이 포뢰를 만나고 싶다는군.
포뢰가 배에 없다는 걸 아직은 모르는 것 같은데, 무슨 꿍꿍인지를 모르겠어.
복수일까요?
……
로봇은 어디까지나 로봇일 뿐이야. 그녀들의 존재 가치는 그저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야.
이번엔 반드시 비리야에게서 우리가 잃은 걸 원금에 이자까지 쳐서 얻어내고야 말겠어.
네 존재 가치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 봐.
……
그 남자를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왜?
유유가 그의 말 때문에 배를 떠난 거라면, 그에게서 유유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함영의 말을 곰곰이 생각한 조풍은 드물게 머뭇거리는 기색이 보였다.
알았어.
고마워요.
하지만 요람한테서 괜찮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어. 그때 그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못한 건 너 때문이니까.
게다가 그 남자에겐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 없어.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취한 조풍은 함영과 함께 구룡파의 밀실을 나왔다.
밀실 밖에는 어둡지만, 깨끗한 복도가 있었다. 콘크리트 벽에 붉은 페인트로 쓴 몇 글자가 매우 낮은 밝기의 HID 램프 불빛에 비쳐서 어렴풋이 보였다. 하지만 이미 대부분이 벗겨져 있었다.
함영과 조풍은 밝은 갑판을 떠나 어둡고 음침한 감옥으로 향했다. 야항선에서 몇 년 동안 살았던 함영이라도, 배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온 건 처음이었다.
암담한 비상탈출등과 조풍이 들고 있던 등롱만이 주위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등롱의 빛은 형체가 희미한 창살을 지나, 빈 감옥의 벽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다.
여기가 야항선의 감옥인가요?
맞아. 우린 육지에 도착한 후 많은 사람을 석방했어.
배에서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대부분 바다에 던져 버렸거든. 이곳에 갇힌 건 좀도둑 같은 것들뿐이라서 확실하게 교육한 다음 석방해 줬어.
석방된 뒤, 또다시 나쁜 짓을 하면 어떡해요?
흥. 야항선이나 성안은 한가한 사람을 키우지 않아. 가둬두는 것도 돈이 드니까. 이참에 개과천선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게 나아. 특별한 시기인 만큼 무조건 옛날 규칙을 따르라고 하는 거면 융통성이 없는 거지.
석방됐다가 또다시 나쁜 짓을 한다면,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백성들이 알아서 내쫓을 거야.
그리고 어떤 죄라도 속죄를 끝내는 날이 올 거야... 다 왔어.
함영과 조풍 앞에 일반 감옥의 창살과 다른 철문이 나타났다.
조풍은 손에 든 등롱을 흔든 뒤, 감옥 문의 자물쇠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바로 옆에 있는 관리실에서 지켜보고 있을게.
가둔 게 해커다 보니 이곳엔 전자 시설이 아무것도 없어. 문제가 발생하면 소리쳐.
무거운 문이 천천히 열리자, 함영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 꼬맹이 말고 다른 사람은 안 만난다고 말했...
희미한 햇빛이 감방 창문을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그림자 속에 있던 범인은 그 빛을 통해 방문객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오, 너구나?
절 기억하시는군요.
물론 기억하지. 몇십 년이 지났는데도 네 모습은 그대로구나.
세월은 그의 목소리와 모습에 고스란히 흔적을 남겼지만, 말투 속에 있는 교활함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24년이나 지났어. 난 이렇게 늙었는데, 로봇은 늙지도 않고 외형도 바꿨어.
네가 아직도 배에서 쫓겨나지 않고, 이렇게 잘 실행되고 있을 줄은 몰랐네.
당신과 회포나 풀려고 온 게 아니에요.
제가 왜 왔는지 알고 계시죠?
응? 그 꼬맹이가 배에 없나 보군. 허허.
…………
비리야 님과 야항선에 그때의 진실을 자백했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유유에 대한 일을 사실대로 말해준다면, 상황을 만회할 여지가...
"요람"은 갑자기 큰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곧 심한 기침이 터져 나왔고, 한참 후에야 진정할 수 있었다.
넌 참 재밌어. 혹시 항쇄를 제거할 때 전자두뇌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만회? 이 모든 것에 내가 참회하거나 만회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비리야가 죽는 순간을 보지 못한 게 한이라면 한이겠지.
그게 아니면, 내 손으로 직접 죽이지 못한 게 한이라고 할 수 있겠어.
요람은 의도적으로 함영을 도발하고 있었다.
그것참 유감이군요.
뭐라고?
직접 비리야 님을 죽이지 못한 아쉬움을 무덤까지 가져가야 한다는 건 분명 해소하기 어려운 고통일 테니까요.
서너 미터밖에 되지 않는 거리지만, 함영과 요람은 서로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차이가 났다.
함영은 그늘에 가려진 요람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요람은 햇빛에 비친 함영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요람이 예상했던 표정이 없었다.
재밌군. 우리 얘기나 계속해 볼까? 혹시 알아? 날 기쁘게 해주면, 나머지 일들과 꼬맹이의 행방을 알려줄지.
저와 야항선은 당신 같은 사람과 타협할 필요 없어요.
물론 그럴 필요는 없지. 하지만 넌 하게 될 거야.
뭐,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까.
요람은 함영이 손에 약간 힘을 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야항선 암살 사건을 계획하기 전에 구룡 지도자를 겨냥한 암살을 주도했다고 들었어요.
돈 받은 만큼 일한 것뿐이야.
그 소동 이후, 우리 조직을 파괴했으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복수를 감당할 준비가 돼 있었어야지.
원한은 원한으로 갚는 거 아니겠어.
나로선 내가 한 모든 것이 정의였기 때문에 내 행동에 후회는 없어.
내 친구를 죽이고, 내 집을 파괴하고, 내 모든 것을 빼앗아 갔는데 내가 어떻게 비리야와 악수하며 화해하겠어?
그건 그렇네요.
하지만 당신의 조직이 파괴된 건 당신들이 치러야 할 대가였어요. 그건 비리야가 당신들에게 한 복수니까요.
허허, 다음은 "복수를 복수로 갚으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다." 뭐 이런 진부한 말로 날 비난할 건가?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 복수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걸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요?
함영의 말에 요람은 한동안 침묵했다.
뜻밖이네. 허허, 참 흥미롭구나.
상냥한 얼굴로 독한 말을 잘도 하는구나.
만약 비리야가 너와 같은 마음가짐이었다면, 지금쯤 난 이 세상에 없었겠지. 물론, 그때 우리의 복수가 성공했다면, 너도 이 세상에 없을 거야.
이런 시대에선 그것을 존중하는 이들만 용서받을 자격이 있어요.
이제 복수할 준비가 됐나?
전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저뿐만 아니라 제가 아끼는 사람에게까지 상처를 입혔어요.
아, 20년 전, 꼬맹이 몸에 칼을 휘둘렀던 놈을 말하는 건가? 그놈이라면 잡혀 온 날 바로 처형당했어.
그건 그가 치러야 할 대가였어요.
그러면 여기서 날 죽이겠다는 건가? 이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어디 한번 해 봐.
살인 도구로서의 네 의무와 사명을 수행해.
요람이 고개를 흔드는 순간, 함영은 그의 얼굴을 똑똑히 봤다.
요람의 입가에 떠오른 광기 어린 미소와 뼈까지 얼어버릴 듯한 눈빛은 새하얀 머리와 수염 그리고 주름투성이인 얼굴로도 가릴 순 없었다.
제가 당신과 같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무슨 뜻이지?
전 당신을 죽이지 않을 거예요.
요람의 웃는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응?
전 당신처럼 복수를 위해 살아가는 기계가 아니에요.
억울함을 품은 채 고독하게 죽는 것이 당신이 가진 유일한 결말이에요.
그게 바로 제가 선택한 복수예요.
…………
하하, 그래.
요람은 웃음을 터뜨리며 무거운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됐어, 피곤하군.
꼬맹이는 순환 도시 북서쪽, 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부오산으로 갔어.
부오산이요?
구룡파한테서 지도를 받으면, 어딘지 알 수 있을 거야.
유유는 왜 그렇게 먼 곳에 간 거죠?
그 산이 우리의 마지막 근거지였거든.
꼬맹이가 그 산의 좌표를 가져와서 물어보길래 말해줬을 뿐이야. 누군가가 그쪽에서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고 꼬맹이가 조사하러 간다고 했거든.
그쪽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당신들의 기지였잖아요.
내가 어떻게 알아? 전자 시설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감옥에서 20년 넘게 지내고 있는데.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복수인 거겠지.
너도, 이 구룡성도, 이 배도 여전히 이곳에 있잖아?
전에도 말했듯이 저, 야항선, 구룡 모두 당신에게 타협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당신은 자신이 생각하는 "복수"를 계속할 생각인가요?
약자를 잡아먹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시대에 가치 없는 복수란 없어.
하긴 지금 젊은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진 나도 잘 모르겠지만.
내가 이걸 너에게 말해줄 의무가 없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리고 애초에 난 이 정도밖에 몰라.
몇 번 요란하게 기침한 요람은 고개를 돌려, 감옥에 있는 창문을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캐낼 수 있는 정보가 없다는 걸 깨달은 함영은 일어서서 떠나려고 했다.
넌 아직 시간이 남긴 상처가 뼈저리게 느껴지지 않는가 보군.
어떻게 생각해?
그녀들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녀를 믿는다고?
믿을 수 없는 이유라도 있나요?
아니.
그럼, 문제없어요. 중요한 일이 있으니, 우리도 가죠.
제가 적정선을 잘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모두 계획대로 되고 있으니까요.
흥. 계획이라...
그냥 큰 도박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