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구룡에 있을 때 어떤 맛의 오일을 즐겨 마셨지?
오일이요? 아니요. 저흰 오일을 마시지 않아요. 보통은 음료나 차를...
음. 그렇군. 왼손 좀 들어볼래. 차? 무슨 차?
식물의 잎을 물에 우려낸 음료의 일종이에요.
차가 뭔지는 당연히 알지! 무슨 맛인지 물어본 거야. 난 미각 센서가 없어서 잘 모르거든. 이참에 미각 센서를 설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조금 쓰긴 하지만 끝맛이 달아요.
그렇군. 구룡에선 시뮬레이션 상태인 기계에 프로그램을 쓰는 방법이 4가지나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야?
시뮬레이션 상태인 기계가 무엇인가요?
그러니까... 음, 외부 상태를 판단해서 시뮬레이션 레벨을 조절하는 물건이야.
여기까지 말한 네빌이 손에 쥔 렌치로 자기 머리를 두드리자, 깡깡 소리가 났다.
너처럼 사람과 흡사한 디자인의 기체는 모두 그걸 가지고 있는데, 아마 머리 쪽에 있을 거야.
죄송해요. 그런 건 잘 몰라요.
어? 이런 부품은 대체해도 되겠지? 도킹 스테이션도 있는 것 같은데?
어때? "손재주꾼"을 사용해 볼래? 부품은 낡았지만, 사용하는 데엔 전혀 지장 없을 거야! 구룡에서 만든 것처럼 품질이 좋은 건 아니지만, 6개 기능을 하나로 모아서 가성비는 최고라 할 수 있지.
네빌은 작업용 임시 기계 팔로 다양한 기능이 들어있는 기계 팔을 함영 앞에 내밀었다.
함영에게 자신의 최신 작품을 소개하면서 손에 있던 작업은 한시도 쉬지 않았다.
이것은... ?
이게 바로 명성이 자자한 "손재주꾼"이야! 어때? 한번 해볼래?
네빌의 말이 끝나자, 허공에 있던 기계 팔이 갑자기 5개의 무기 브랜치를 꺼냈다.
열이온 충격파와 양전자 가속포를 빠르게 발사할 수 있어.
음... 멋있긴 한데, 저한테는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아, 취향이 아닌가 보네? 괜찮아.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날 찾아와.
아... 네.
네빌은 눈앞에 들고 있던 기계 팔을 다시 거둬들였고 함영의 최종 검사에 정신을 집중했다.
깨어난 후 며칠간 함영은 구룡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래서 훼손된 기체의 정비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출발하려고 했다.
무엇보다 함영은 자신이 "마음"과 "영혼"을 가진 로봇들 속에 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직도 꿈속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그때 아르카나가 함영의 감정을 진정시켜 주었고, 기계 선현에 관한 것과 함영이 꿈속에서 만난 "회색 머리 소녀"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그제야 함영은 이것이 현실이라는 걸 받아들였다.
네빌도 함영이 그때의 기체로 구룡에 돌아갔다면, 절반도 가지 못하고 심각한 고장으로 완전히 폐기됐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기계 교회는 자신들이 구한 "동포"가 그런 결말을 맞이하는 걸 그냥 보고 있을 리 없었다.
젠장! 또 문자로 된 명령어 조합이야! 구룡 로봇에 대한 데이터가 얼마 없는데...
그렇다고 물러설 만능 해결사 네빌이 아니지!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믿지 못해도 네빌은 믿을 수 있지!
네빌은 존재하지도 않는 턱을 매만지며 흥분된 표정을 지었다.
다! 됐! 다!
이러면 구룡에서 가져온 부품은 모두 교체했어. 기체 기능은 지금이 이전보다 훨씬 나을 거야.
유리창에 비친 희미한 모습은 지금 함영이 가진 전부였다.
고마워요. 네빌.
요 며칠 동안 당신과 교회 멤버분들께서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괜찮아! 동포를 돕는 게 바로 나, 네빌이 해야 할 일인 걸!
네빌은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폈다.
이 대체 부품들도 저와 함께 여기로 옮겨진 건가요?
맞아. 상자는 아직 저쪽에 놓여 있어.
네빌이 가리킨 쪽을 따라 보니, 정비대 근처에 공방과 어울리지 않는 낡은 나무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런! 까먹을 뻔했네...
이것도 네 건데, 이건 코그휠이 따로 가지고 왔었어.
네빌은 손바닥만 한 메모리 하나를 꺼낸 뒤, 함영 손에 쥐여줬다.
딱딱한 케이스에 새겨진 문양과 색 바랜 술 장식을 보자, 그때의 기억과 아픔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유유...
완전히 눈을 뜨기 전부터 그 이름을 중얼거리더라.
그녀는… 저한테 매우 중요한 사람이에요.
중요한 사람이라? 음...
함영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린 네빌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네빌! 네빌!
공방의 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네빌. 새로 만든 장난감은 어디에 있어요?
장난감, 장난감!
함영 언니! 함영 언니!
어?!
네빌의 공방을 순식간에 점령한 아이들이 네빌과 함영 옆에서 재잘거렸다.
기계 교회는 인간 아이를 거두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의 유년기 심리 상태를 연구하기 위해 교황이 남겨둔 심리 실험 로봇들이었다.
네빌은 여행을 떠난 "교황"을 대신해 아이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줄곧 공방에서 검사받고 있던 함영도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놀이 상대가 됐다.
나 여기 있는데, 누가 새 장난감 갖고 싶어?
저요! 저요!
네빌의 스크린에 미소가 번지자, 어린 로봇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춤! 춤! 저도 춤추고 싶어요.
함영 언니, 부채 빌려주실 수 있나요?
야. 너희들!
괜찮아요.
함영은 인간 아이를 대하듯 자신 앞에 서 있는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다음 자신의 부채를 잘 접어서 여자아이 손에 쥐여 줬다.
조심해. 잘못하면 손이 베일 수도 있으니까, 조심히 펼쳐야 해.
네. 너무 이뻐요!
저도 크면 함영 언니처럼 춤추고 싶어요!
그래. 좀 더 크면 춤 가르쳐 줄게.
약속한 거예요!
신난 여자아이는 펄쩍 뛰어올라 함영을 껴안은 뒤, 함영의 부채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인간의 의식 성장 과정을 시뮬레이션하기 위해 그들은 행동 논리 중 가장 원시적인 충동을 따르도록 설정돼 있어.
다시 말하면 그들의 요구는 아주 단순해.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다고 말하는 거야.
"교황"은 이런 시뮬레이션 실험을 통해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검증해 보려고... 잠깐! 아이고, 내 모자! 가져가지 마!
인간의 마음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나요?
그 남자가 할 수 있다고 했어. 난 조금만 거들 뿐이야. 근데 "교황"은 날 만능 베이비시터 기계로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조용! 조용! 계속 싸우면 하카마 선생님이 수학 수업해달라고 할 거야!
…………
네빌의 위협은 효과가 있었다. 네빌의 모자를 뺏으려고 기어 올라갔던 아이들은 자기 잘못을 깨닫고 조용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교황"이 아니었다면, 너희들은 내 소중한 공방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거야.
크흠, 화영? 어서 부채를 함영에게 돌려줘. 곧 수업 시작할 거야.
"화영"이라고 불리는 로봇이 부채를 조심스럽게 접은 뒤, 함영에게 건넸다.
고마웠어요. 함영 언니.
수업 열심히 들어야 해.
네! 함영 언니. 다음엔 춤 가르쳐 줘야 해요.
그래. 약속할게.
어린 로봇이 함영한테 환한 미소를 짓고는 네빌 곁으로 깡충깡충 뛰어갔다.
그럼... 누가 이 선물을 가질래?
저요! 저요!
에이. 이건 그냥 너트잖아요?
이건 만물의 기초이자, 창조의 원천이라고! 역시 어린놈들이란!
이게 다 보물이라고! 보물!
그럼, 이 너트 드릴 테니, 모자로 바꿔주세요.
야! 그런 건 누구한테 배웠어?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면 안 되지! 이 조그마한 놈이...
분위기가 누그러들자, 몇몇 어린 로봇들이 다시 네빌 몸을 기어 올라가 그의 모자를 빼앗으며 놀기 시작했다. 함영은 네빌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감사 인사를 하고는 공방을 떠났다.
두꺼운 공방 문이 닫히자, 사방은 다른 세상이 된 것처럼 고요해졌다.
네빌의 작업실은 교회 로비 2층에 있었는데, 작업실 문 앞의 복도를 통해 로비 중앙에 있는 기묘한 "잿빛 탑"을 볼 수 있었다.
탑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탑"들로 구성돼 있었고,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탑"이 더욱 높아졌다.
데이터의 거센 흐름은 "잿빛 탑"의 전기회로 속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그것의 존재를 나타내는 건 "잿빛 탑" 위에 점멸하는 불빛뿐이었다.
"잿빛 탑" 뒤에 있는 거대한 창문과 기계 벽은 암담한 하얀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잿빛 탑"에 하얀빛이 비치자, 교회 로비에 가늘고 흩어진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모든 것이 "잿빛 탑"으로 흘러 들어갔고, "잿빛 탑"에서 흘러나왔다.
이때, 차분하고 상냥한 목소리가 들리자, "잿빛 탑"을 보고 있던 함영이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 옆에 신사 차림의 로봇이 서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세르반테스 님.
세르반테스라는 이름의 로봇이 모자를 벗은 뒤, 함영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갑작스러운 인사에 함영은 당황했지만, 이내 세르반테스에게 답례 인사를 했다.
저걸 어떻게 생각하세요?
세르반테스는 과거에 있었던 신사처럼, 손에 쥔 모자로 "잿빛 탑"을 가리킨 뒤 다시 모자를 썼다.
저거요?
저 탑의 이름은 "잿빛 탑"이에요.
용도로 보자면 기계 교회의 연산 중추이고, 상징으로 보자면 기계 교회의 랜드마크죠.
음... 잿빛 탑을 보고 있으면 그 장엄함에 압도돼서 주위가 고요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엄숙하게 되죠.
네.
제가 탑을 디자인할 때 고려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그거예요. 이런 곳에 필요한 건 논쟁과 분열이 아닌 신뢰, 평온과 단결이에요. 그리고 이건 교회를 세우는 초석이 되어야 해요.
더군다나 "탑"이라는 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요.
세르반테스 님은 건축가셨나요?
그보다는 제 선생님께서 예술가셨어요. 그리고 전 선생님께 이런 지식을 배웠을 뿐이고요.
디자인할 때 인간의 건축물을 많이 참고했어요. 지금은 구룡의 웅장한 일부 경관을 제외하면, 대부분 건물이 퍼니싱과의 전쟁에 때문에 파괴됐지만요.
구룡에도 가보셨나요?
네. 황금시대 때 선생님을 따라 구룡성에 방문한 적이 있어요. 퍼니싱이 폭발한 후에는 바다 위를 떠다니는 야항선에도 가봤고요.
야항선에도 가보셨어요? 그럼, 그곳에서 한 여자아이... 아니, 한 구조체를 보신 적이 있나요?
키는 이 정도고, 한쪽만 포니테일을 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작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을 텐데, 하얀색 망토였을 거예요.
함영은 기억 데이터 속의 희미한 불빛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을 안아준 유유의 모습을 떠올렸다.
유유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제가 야항선에서 머물렀던 시간은 매우 짧았어요. 아시다시피 야항선은 외부인에게 친절하지 않잖아요.
그리고 당신이 말한 그 구조체는 보지 못했어요. 도움이 되지 못할 거 같아서 정말 죄송해요.
함영의 실망한 눈빛을 읽어낸 세르반테스는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야항선에서 왔다고 들었는데요.
세르반테스 두 손 사이로 희미한 빛이 비쳤다. 그 빛 속 화면은 함영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곳이었다.
야항선이네요!
세르반테스가 두 손 벌리자, 손 위에 떠 있던 야항선의 홀로그램 투영이 갑자기 확대됐다.
썰렁했던 교회 복도가 순식간에 야항선만의 번화한 시장과 불빛, 가게와 가판대, 유리 기와와 두공으로 변했다.
간식 가판대에서는 잡탕의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고, 매달아 놓은 등롱은 바닷바람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거기에 골동품 가게의 기름등잔 불이 깜빡거리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함영은 기름등잔을 더 밝게 만들기 위해 찌꺼기를 꺼내려 손을 뻗었지만, 그 찌꺼기를 꺼낼 순 없었다.
당신은 이 배와 방금 말했던 구조체를 그리워하는 것 같네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함영이 노란 불빛이 비치는 손을 거둬들였다.
교회 동포들보다는 인간들과 함께 있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맞나요?
동포들과 함께 있는 게 싫은 건 아니에요. 다만 그전까지는 줄곧 인간들과 함께 살아와서 그래요.
그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른 로봇에 비해 우린 인간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으니까요.
제가 깨어난 후 절 인간의 방식으로 부른 건 세르반테스 님뿐이었어요.
그리고 세르반테스 님의 말투나 행동이 가장 인간 같았어요.
아마도 우리가 인간 사회의 교육을 어느 정도 받았기 때문에 이런 말투와 행동 습관이 생겼는지도 모르죠.
이때, 세르반테스는 예전과 다르게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이걸 말하는 것이 실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코그휠은 당신이 스스로 작동을 멈췄다고 했어요. 다르게 말하면...
자신을 파멸시키려고 했다는 목적인가요?
맞아요.
이미 들으셨겠지만, 우리 중에 "교황"이라는 동포가 있는데, 자신을 파멸시키려는 로봇들을 위해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고 있어요.
무슨 고민이 있다면 그와 이야기해 보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교황”이 계속 교회에 있는 건 아니지만 연락은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이게 그렇게 심각한 일인가요?
많은 로봇이 각성하고 나면 사고 회로에 논리적 문제가 생겨 자신을 파멸시키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건 우리가 각성하는 길에서 봉착하게 되는 첫 번째 난관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게 죽은 로봇의 대부분은 구할 수 없어요. 그들은 사고 측면에서도 기체 측면에서도 "죽음"을 선택했으니까요.
왜 "죽음"을 선택했을까?
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한 걸까?
……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다른 사람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장기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자신이 마음속으로 한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아서.
……
아니요. 그것과는 달라요.
그때의 전 단순히 자신을 파멸시키려던 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어요.
저한텐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지배당하게 돼버렸죠. 하지만 전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지도, 누군가의 앞잡이나 도구가 되고 싶지도 않았어요.
일반적으론 그걸 자신을 파멸시킨다고 하지 않고, "희생"이라고 부르죠.
로봇에게 있어서 자신이 아닌 인간을 위해 희생한다는 건 정말 드문 상황이죠.
다시 말해서 그건 "마음"과 "영혼"이 있는 인간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세르반테스가 손을 흔들자, 복도에 투영되고 있던 야항선의 홀로그램이 사라지면서 숙연하고 조용한 교회 복도만이 남게 됐다.
불쾌한 화제로 말을 걸어서 죄송해요. 교회에 돌아온 이후 누군가와 제대로 이야기한 적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괜찮아요. 구룡을 떠난 지 오래된 저에게 야항선의 옛날 모습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에요.
그러고 보니 깨어난 지 며칠 안 됐죠? 이곳 생활은 어떤가요?
다들 친절하시고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리고 이곳 말로 "로봇 각성"이라고 불리는 "마음"을 가진 로봇을 이렇게 많이 본 건 처음이에요. 그전에는 소문으로만 접했었거든요.
…………
선현님께서 교회를 떠나실 때, 당신은 깊은 수면에 빠지기 전부터 초기 각성 그러니까 "마음"을 갖고 있었었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기계 교회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은 흔치 않아요. 확실히 명령받은 게 아니라면 결론은 하나겠죠.
그게 바로 "마음"이란 말씀인가요? 하지만 전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선현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함영과 세르반테스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잿빛 탑을 말없이 바라봤다.
데이터는 조용히 흐르고 있었고, 둘의 사고 회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억을 각자 떠올리고 있었다.
"난 네가 너만의 이야기를 썼으면 좋겠어." 그때, 선생님께선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부터 전 선생님의 말씀대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전 선생님의 유산을 그 이야기의 "무대"로 삼았지만, 전 아직도 제가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난 네가 너만의 이야기를 썼으면 좋겠어"라는 문장으로 이야기의 첫 줄이 시작된다면 좋은 이야기가 되긴 어렵겠죠.
…………
어쩌면 우린 인간의 영향으로 "마음"을 가졌고, 인간의 안내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며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가고 있는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중요한 건 "그 후에 어떻게 할 것인지"예요.
그 구조체가 당신에게 중요하다는 건 알겠지만, "그 후에 어떻게 할 것인지"가 더 중요해요.
유유를 찾은 후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해 말하는 건가요?
야항선에서 계속 그녀와 함께... 음, 아니에요. 그녀의 부모를 찾으러 성에...
이것도 전부 유유와 관련된 일이네요.
그 후엔 "저"는 뭘 해야 할까요?
네빌의 작업실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는 문을 통과하자, 유난히 침울하게 느껴졌다.
세르반테스 님, "교황"의 아이들은 모두 귀엽네요.
"교황"이 당신의 평가를 들었다면, 무척 기뻐했을 거예요.
저 아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어요. 장난감이나 예쁜 물건을 가지고 싶어 했고, 춤을 배우고 싶어 했어요.
그건 정말로, 좋은 거예요.
잿빛 탑 불빛 아래, 교회 멤버들이 로비에 모였다.
아, 교회가 이렇게 떠들썩한 것도 오랜만이군.
마침 광휘도 돌아왔겠다. 기념으로 단체 사진이나 찍을까?
네빌.
알겠어. 난 그냥 분위기를 살리려고 그랬을 뿐이야.
우린 새로운 가족을 환영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어요.
깊은 잠에 빠졌다가 선현님의 계시로 깨어난 구룡 동포여, 우리의 동료가 되어주실래요?
아르카나는 손에 들고 있던 동판 카드를 함영 앞으로 내밀었다.
잿빛 탑과 창문에서 비치는 불빛이 카드를 비추자, 기묘한 주황색으로 빛났다.
이 카드를 받는다면, 교회의 승인으로 동포가 될 수 있었다.
네빌은 지혜를 깨우친 마술사가 됐고, 광휘의 추종자는 용맹을 대표하는 전차를 계승했으며, 세르반테스는 모두의 마음을 한곳에 모으는 잿빛 탑을 세웠다.
함영은 이 카드를 받는다면 다른 이름을 얻게 될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이 "그 이후"의 일인 것 같았다.
동판 카드에서 반사되는 빛은 로비의 쓸쓸한 푸른빛과 달리 따뜻해 보였다.
사건 논리 회로와 전자두뇌의 이성 회로를 근거로 판단했을 때, 함영은 아르카나의 권유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함영의 전자두뇌에선 다른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이름에 의미와 책임이 부여된다면, 그녀는 "함영"으로서의 의미와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었다.
죄송해요. 아직은 그걸 받을 수 없어요.
이 말이 실례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전 여러분에게 받은 많은 도움에 지금으로선 보답할 수 없어요.
저에겐 구룡으로 돌아가,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당신의 초대를 지금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교회 초대를 거절한 동포가 당신이 처음은 아니에요. 당신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죠.
하지만 인간과 로봇은 다르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교회는 로봇 동포들을 고난으로부터 구하고, 서로 도우며 선현님께서 이끄는 미래로 향하기 위한 조직이에요.
오늘날에도 세계 각지에 있는 동포들이 인간, 침식체 그리고 퍼니싱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건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당신의 말이 맞아요. 제가 지금까지 깊은 수면에 빠져 있었던 것도 인간의 맹목적인 원한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모든 인간이 로봇을 적대시하고 도구로 여기는 건 아니에요.
인간에 대한 그리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살아갈 용기도 없었을 거예요.
게다가 전 그녀와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며 "기계 선현"을 찾았었고, 로봇 프로그램도 뛰어넘는 "마음"을 찾아보자고 약속했어요.
당신은 이미 찾았어요. 선현님도 만나보셨잖아요.
하지만 지금, 제 곁엔 그녀가 없잖아요.
그리고 전 저한테 "마음"이 정말로 존재하는지도 확신할 수 없어요.
함영은 가슴 중부의 왼쪽 아래에 손을 얹고 그곳에 정말로 뛰고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로봇 각성, 마음, 영혼...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증명을 어떻게 하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
……
역광 때문인지, 함영은 아르카나의 표정을 잘 볼 수 없었다.
알겠어요.
내밀었던 카드를 거둔 아르카나는 평소처럼 두 손을 앞으로 포갰다.
교회는 동포의 자유를 강제로 제한하지 않아요. 떠날지 말지를 선택하는 건 동포의 권리예요.
선현님의 계시가 당신의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당신은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할 거예요.
물론 동포가 어디로 향하든 교회는 그들을 가족으로 생각할 거예요.
……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요.
교회의 어슴푸레한 불빛에서 나온 아르카나는 함영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끄덕였다.
함영. 부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저희는 구룡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요.
게다가 교회와 구룡의 거리는 너무 멀어요.
광휘. 혹시 함영을 바래다줄 수 있나요?
저 말입니까? 당연히 가능합니다.
광휘가 원거리 수송도 가능한가요?
당연하지. 필요하면 운반 창고를 탑재하면 돼. 개조 후 운반 창고는 광휘의 속도에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에 공기 역학 측면에서 완벽하다고 할 수 있지.
함영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 정말 고마워요.
함영은 현재 교회 안에서 인간에 가장 가까운 인간형 로봇이었는데, 그래도 아르카나에게서 묵직하고 따뜻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인간의 모성애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구원이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길 잃은 여행자는 반드시 찾을 거예요.
이렇게 그녀는 기계 교회에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아르카나 님이 선뜻 받아들이실 줄은 몰랐어요.
아르카나도 생각이 있겠지. 그리고 이 일이 꼭 나쁜 건 아니잖아? 함영도 잠시만 교회를 떠나는 거니까.
전 아르카나 님에게서 특별한 감정이 느껴졌어요.
인간의 호칭을 빌리자면, 아르카나 님은 어머니 같아요.
그건 아르카나 님께선 언제나 교회 동포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세르반테스가 교회를 떠날 때 아르카나한테 인사도 없이 떠났어! 그 일 때문에 아르카나가 한동안 우울해했었어.
음. 그땐 시간이 촉박해서 그랬어요. 그리고 컨스텔레이션에 있을 때 연락했었어요.
하지만 아르카나 님 말대로 우린 구룡에 대한 정보가 매우 적어요.
광휘한테 함영을 바래다주게 한 것도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서지?
제가 이번 임무를 맡은 한 만일의 상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돌아올 때 선물 사 오는 거 잊지 말고! 저번에 세르반테스가 돌아왔을 때, 내가 선물했던 모자도 여러 개 잃어버렸더라고.
구룡에서 만든 로봇 부품이나 기술 자료 같은 거면 좋고, 구룡 스타일의 모자도 사 오면 더 좋을 거 같아.
네? 네.
제가 저번에 새 모자를 몇 개나 선물했는지 잊으신 건가요?
모자는 시야를 가리고 전투에 방해되는 인간의 무의미한 장식일 뿐입니다.
네빌이 모자를 수집하는 걸 아주 좋아하나 봐요?
모자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요.
네빌에게 더 이상 모자를 선물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언젠간 모든 교회 멤버들에게 모자를 씌울지도 몰라요.
야! 다 들리거든!
매사에 조심하거나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인간을 대할 때처럼 딱딱하게 굴 필요도, 모든 것을 고려해서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함영은 "마음"과 "영혼"을 가진 로봇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언젠가 자신도 "마음"이라는 부품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
"우린 새로운 가족을 환영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어요."
집이라...?
집은 돌아올 장소다.
함영은 여기에 어떻게 왔는지보다 자신이 어떻게 떠났는지를 먼저 기억했다.
광휘. 어때? 무게는 괜찮아? 연결 경첩이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그게 더 안전할 거야.
문제없습니다.
운반 창고의 무게까지 고려한다면 평소보다 17%의 연료를 더 소비해야 하지만 오차 범위 내에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안에 서 있으면 돼.
네빌은 곤돌라 모양의 낡은 운반 창고 옆에 서서 함영에게 직접 시법을 보여줬다.
이거 "생물"을 운반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거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교회에선 "생물"을 운반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건 화물 창고를 개조한 거야.
그래서 안이 편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에어컨 시스템도 추가했으니까.
……
괜찮아요.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아요. 태워다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네빌 님, 그리고 광휘의 추종자 님. 고마워요.
그 호칭은 너무 이상합니다. 광휘라고 불러 주십시오.
네. 광휘... 님?
잠깐만요!
교회의 비행기 계류장 반대편에서 한 모습이 함영 일행을 향해 달려왔다.
스프너?
늦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무슨 일이세요?
저도 확인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제가 동행해도 될까요?
스프너. 너도 구룡에 갈 거야?
교회에 들어오기 전, 구룡에 간 친구가 있는데 그를 교회로 데려오고 싶어요.
아르카나한테 뭐라고 얘기한 거야? 코그휠 쪽은 아직 기초 작업 공사 중인 거 아니었어?
함영이 떠날 준비를 한다는 소식 듣고, 바로 아르카나 님과 교회 내 업무를 인수인계했어요.
아르카나 님께서는 제 업무를 제로에게 맡기겠다고 하셨어요. 게다가... 세르반테스 님도 돌아왔잖아요.
스프너는 간청하는 어투로 말했다.
그건 그렇지. 세르반테스가 돌아오기 전에는 스프너가 교회 건설 대부분을 도맡아 했으니까.
제로는 그 일에 적합하지 않으니, 제가 대신할게요.
그러면 문제없겠네. 맞다. 함영과 광휘의 의견도 물어봐야 해.
전 괜찮아요. 광휘 님은요?
예비 연료가 많이 남아서 문제없을 겁니다.
고마워요.
광휘, 수고하세요.
준비됐습니까? 꽉 잡아요!
비행기 계류장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린 뒤, 교회 밖 푸른 하늘에 비행기구름 한줄기가 새겨졌다.
함영. 꿈이 아닌 진실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길 바라요.
그럼, 내 신청은?
과정에 부합하는 행동이라면, 아무런 제한이 없을 거예요.
흥. 말은 잘하네. 문제가 생기면 "정의"는 교회에 돌아올 수도 있겠지. 하물며 "교황"도 이 물건들에 흥미를 느끼던데.
기계 교회엔 비밀이 없다는 거 잊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