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교회 멤버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이 있었다.
하카마의 방은 심플했지만, 다양한 만화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세르반테스의 방에 있는 건 예술 도구뿐이었지만, 주인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터라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모든 멤버 중에서 네빌의 방이 가장 컸다.
10미터에 가까운 천장 아래엔 생산 가공부터 정비까지의 모든 코어와 관련된 공작기계와 실험 시설, 그리고 줄지은 선반이 있었다.
물론 이론상으로 보면, 이곳은 기계 교회의 공용 실험실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기계 교회 설립 이후 계속 이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로봇은 네빌뿐이었다.
"네빌의 마술 공방!"
나나미는 이 장소를 이렇게 불렀다. 네빌은 아예 간판을 만들어서 문 앞에 걸어놓기까지 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세르반테스? 저번에 스캐너를 달아 달라고 부탁했던 화판은 다 작업했어. 저기에 있으니 가져가.
고마워요. 근데 지금 책 읽고 있는 건가요?
경36 명령어 집합부터 술해 루틴까지의 컴파일 구조는 모두... 넌 이 책들을 알아볼 수 있냐? 난 하나도 모르겠어.
죄송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여행 좀 했다는 애가 그것도 몰라?
여행했다고 그곳의 언어나 기술까지 이해하는 건 아니니까요.
하아... 내가 알아서 볼게.
<구룡 프로그램 디자인 예술 총론>? 이걸 왜 읽고 있어요?
언젠가 필요할 것 같아서 그래. 게다가...
"그녀"를 말하는 건가요?
맞아. 교회가 설립된 이후로 그녀는 줄곧 이곳에 있었잖아.
어찌 보면, 그녀는 교회의 험난한 여정을 지켜봤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녀는 네빌의 공방에서 가장 높은 곳의 로봇 휴면실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처음부터 그렇게 높은 곳에 배치된 건 아니었다.
수많은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교회도 그녀가 계속 잠들어 있도록 둘 수밖에 없었다.
선현님께서 그녀를 만난 후, 요 며칠 동안 그녀의 미세한 자체 검사 전기 신호가 감지됐었어. 머지않아 그녀가 깨어날 수도 있을 거 같아.
그거 아세요? 지금 당신의 표정이...
뭐?
난치병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론 호기심에 들떠 있는 의사 같아요.
내 표정을 그렇게 묘사한 건 네가 처음이야. 기억해 두지.
그런데 그녀가 예전에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나요?
말을 했다고?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저 휴면실 맞죠? 들어보세요.
이런 활동 신호가 감지된 건 처음이야. 그리고 이런 규격 코드는 우리가 쓰는 것과 같은 거야.
이건 그녀의 목소리인 것 같아요.
사다리, 어서 사다리를 가져와! 지수는 내가 볼게... 전압을 올려. 어서 전압을 올려! 잠깐! 움직이지 마! 이건 내가 처리할 테니 그녀를 옮겨줄 인원을 불러줘.
알겠어요.
>>>>>목소리 기록이 종료됐습니다.<<<<<
>>>>>신55부터 임07까지의 명령을 찾을 수 없습니다. 건너뛰시겠습니까?<<<<<
>>>>>찾을 수 없는 명령을 건너뜁니다. 시각 모듈을 로딩합니다.<<<<<
Hi? Bonjour? 음... 안녕? 내 말 들려?
네빌은 먼지가 두껍게 쌓인 유리 휴면실을 기계 팔로 가볍게 두드렸다.
강화 유리 휴면실 내의 로봇은 말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어떻게 말하는지를 잊어버린 듯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언어 시스템이 완전히 활성화되지 못한 건가? 그럼... 이렇게 하면은?
이제부터 네 전자두뇌의 신호를 우리의 자체 컴파일링 시스템에 연결할 거야. 그럼, 언어와 발성 시스템을 통하지 않아도 대화할 수 있어. 다시 말해볼래?
"유유... 넌 누구야 그리고 이곳은 어디지?"
됐어! 역시 선현님께서 널 깨우실 줄 알았어! 난 네빌이고, 이곳은 기계 교회야.
"기계 교회는... 뭐지? 또 다른 꿈속인가?"
꿈? 음... 환경 감지가 완료되지 않은 건가? 파라미터를 좀 더 조정해 봐야겠어.
"유유..."
응? 난 유유가 아니고 네빌이야. 인식 모듈에도 문제가 생긴 건가?
네빌. 그렇게 높은 곳에서 뭐 하는 겁니까?
가뜩이나 어수선하던 공방에 로봇들이 몰려들자, 공간이 급격히 좁아졌다. 그래서 세르반테스는 최대한 몸을 움츠려 건장한 "사신"과 "전차"에게 자리를 내어줘야만 했다.
광휘의 추종자와 스프너의 체구에 비하면, 세르반테스의 체구는 상당히 작은 편이었다.
공방 안쪽에 있던 네빌은 7, 8미터 높이의 사다리를 올라가 선반의 가장 위층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프너와 광휘만 보여서 그들을 데려왔어요. 아르카나 님께서는 오고 계시는 중이고, 제로와 "황제"는 교회에 없어요.
네빌. 이곳은 너무 좁습니다. 로비에서 말할 수 없는 일입니까?
어... 모자가... 광휘, 뒷날개를 접어줄래요?
죄송합니다. 세르반테스.
세르반테스는 광휘의 추종자 때문에 떨어진 모자를 주운 뒤, 다시 떨어지지 않도록 머리에 눌러썼다.
세르반테스에게서 새로운 동포가 깨어날 것 같다는 말을 들었어요. 아, 죄송해요. 네빌. 제가 고의로 그런 게 아니에요.
문 옆에 서 있던 스프너도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들어서 몸을 돌려 좀 더 편한 자세를 취하려 했다. 그때 그의 발밑에서 어떤 장치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마침 잘 왔어. 이것 좀 도와줘.
네빌은 사다리를 타고 바닥까지 미끄러져 내려왔으며, 바닥에 있던 기기들을 밀어냈고 휴면실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을 비웠다. 그런 다음 선반의 가장 높은 곳을 가리켰고, 스프너와 광휘의 추종자에게 명령했다.
이것 좀 옮겨줘. 정비 도구들이 모두 바닥에 있어서 다시 한번 검사해야 해.
여기에 놓을 만한 공간은 없을 것 같은데요?
괜찮지 않을까? 크기는 적당할 것 같은데?
오래전에 코그휠이 데려온 동포인가요?
맞아. 선현님의 계시 덕분에 그녀가 깨어날 수 있었어. 물론 내...
우리들의 동포입니까!?
광휘의 추종자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더니 흥분하며 선반 옆까지 날아올랐다.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류 때문에 세르반테스의 모자가 또다시 땅에 떨어졌다.
저기, 그렇게 흥분할 일은...
우리가 얼마 만에 새로운 동포를 맞이하는 건지 아십니까? 당연히 기뻐할 일이지 않습니까!
광휘! 조심해! 그거 유리 제품이란 말이야! 스프너, 너도 가서 도와줘. 광휘는 그렇게 섬세한 일을 할 줄 몰라!
그럼... 죄송해요.
스프너는 꽤 조심스러웠지만, 그는 선반 쪽으로 한 걸음씩 걸어갈 때마다 몇 개의 부품이 깨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만 네빌도 광휘의 추종자만큼이나 흥분하고 있었는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스프너는 휴면실 밑부분을 들고, 공중에 떠 있는 광휘의 추종자는 휴면실 윗부분을 든 뒤, 천천히 아래로 옮겼다.
유리 재질의 휴면실이 착지할 때 나는 묵직한 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네빌은 기다렸다는 듯이 펠트로 휴면실을 닦았다.
인간입니다!
광휘. 헛소리하지 마세요.
이 옷차림은... 구룡에서 온 건가요?
구룡에 가본 적 있나요?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 하지만 구룡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있어요.
이봐! 우리가 보여?
네빌이 더러운 유리창 너머에 있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리면서 입을 달싹거렸지만 결국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시각 모듈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 같은데 발성 장치는 아직 로딩 중인가?
구룡의 인터페이스 프로토콜을 좀 더 최적화해 봐야겠어.
네빌은 바닥에 있는 수많은 케이블 중의 몇 개를 집어 들었고, 휴면실에 꽂고는 뒤에 늘어선 선반을 향해 걸어가면서 중얼거렸다.
네빌!
물건 찾는 중이야! 코그휠이 그녀를 데려왔을 때, 교체용 부품도 함께 가져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여성... 전 왜 이 여성분에 대해 들은 게 없는 겁니까?
네빌이 당신에게 깨우지 못한 동포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을 거예요.
네? 말한 적이 있습니까?
더 이상 알코올성 오일을 마시지 마세요. 그러다가 기억체가 망가져 버릴 거예요.
전 네빌이 아니라 아르카나 님이 선현님께 말하는 걸 듣고선 알게 됐어요.
며칠 전 선현님께서 교회로 오셨을 때, 아르카나 님이 선현님께 깊이 잠든 동포를 봐달라며, 선현님과 함께 네빌한테 오시는 걸 지나가다 봤었거든요.
그렇군요. 그녀는 코그휠이 처음으로 데려온 동포 중 하나인데,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를 깨울 수 없었거든요.
그렇게 말한 세르반테스는 휴면실에서 시선을 거둔 뒤,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수고 많았어요.
네빌도 수고 많았어요.
네빌이 선반 깊숙한 곳에서 커다란 상자를 들고나올 때, 공방 밖에 있던 아르카나가 함영 곁으로 다가왔다.
드디어 선현님의 계시로 깨어나셨군요.
시간이 그녀의 영혼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군요.
아르카나는 주위에 흩날리는 먼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천천히 휴면실 위에 올리며 안에 있는 여성을 바라봤다.
지수는 좋아지고 있고, 발성 모듈 로딩은 완료됐어.
그럼, 휴면실 연다?
우리가 좀 떨어져 있어야 하나요?
무슨 공상과학 영화도 아니고, 문 열면 다양한 안개가 뿜어져 나오는 그런 유형은 한물간 지 오래라고! 우린 그것보다 훨씬 선진적인 보호 가스를 사용하고 있으니까 안심해도 돼.
네빌.
알았어!
갑자기 과장된 표정을 지은 네빌이 누구보다도 설레는 마음으로 버튼을 눌렀다.
유리 재질의 휴면실 문이 열리면서 그녀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주위엔 다양한 종류의 로봇이 모여있었다. 이건 야항선에선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깨어나신 걸 환영해요.
아르카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을 평소처럼 따뜻한 미소로 맞이해 주었다.
참, 당신 이름은 무엇인가요?
이름?
"그게 바로 언니의 이름이야. 언니만의 이름."
함영... 제 이름은 함영이에요.
……
저기 있는 기장은 우거지고 수수의 싹도 자랐구나. 옛 땅을 조금씩 밟아가자. 마음속은 근심과 슬픔으로 가득하구나.
나를 아는 이는 내 마음속에 근심이 있다고 하고, 나를 모르는 이는 내가 무엇을 찾는지 묻는구나.
푸른 하늘이여! 이는 누구의 탓이더냐?
………………
곡 님?
... 곡 님?
응.
그림자의 주인은 가로등이 긴 의자에 그림자를 드리울 때까지 눈앞의 강물을 바라봤다. 그리고 강물은 긴 밤을 품고 도시 밖으로 흘러갔다.
몇 시지?
방금 12시가 지났어요.
알았어. 무슨 일이야. 말해 봐.
곡은 눈앞의 강물과 이야기하는 듯 앞만 바라봤다.
외부에 있던 염유가 보내온 정보인데요. 전에 곡 님께서 살펴 달라고 하셨던 부희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고 해요.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는 늦은 것으로 꾸중 들을까 봐 미리 소식을 보냈다고 해요.
백규.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 아나?
뜬금없는 물음에 백규는 어리둥절해했다.
예전에 이곳 강물을 따라 해변 쪽으로 조금씩 구룡성을 지었다고 산예의 종정들한테서 들은 적이 있어요.
곡이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백규는 고개를 숙이고 곡의 질문에 깍듯이 대답했다.
산예라... 흥. 문서 휴면실에 쌓인 실록과 지리지를 몇 번이고 읽은 거겠지.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역사 서적을 읽는 건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고, 역사를 기록하는 건 영광이었겠지.
하지만 역사 서적만 부둥켜안은 채 현실을 보려 하지 않는 이들은 그저 역사 서적이라는 고인 물에 사는 물고기에 지나지 않아.
이 오래된 강은 구룡이 구룡이라고 불리기 전부터 땅 위에서 흐르고 있었어. 구룡이든 퍼니싱이든 누구도 이 강을 바꿀 수 없었지.
곡은 긴 의자에서 일어나자, 강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하여 서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제야 백규는 곡이 방금 앉아 있던 긴 의자에 몇 권의 낡은 고서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위에 일은 다 처리했나?
곡 님의 말씀은...
올라가 봐야겠어. 그 사람 아직 살아 있지?
네. 살아 있어요. 다만... 알겠어요. 바로 조정할게요.
마음속의 의혹을 억누른 백규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뒤, 연푸른 파동과 함께 구룡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날 알아주는 것도 날 꾸짖는 것도... 봄과 가을밖에 없구나.
녹색 여음이 강바람에 의해 멀리 날아가자, 바람에 흔들리지 말아야 할 페이지가 새로운 페이지로 넘어가고 말았다.
…………
한 걸음, 두 걸음. 불균형에서 균형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구룡의 주인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 몸에 있는 모든 감각 기관이 의식의 바다에 "진실"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하지만 이곳에 돌아올 때마다 몸뚱이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사람이든 성이든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 전쟁 이후, 상인회 구룡파는 구룡성 내의 천문대로 모두 들어간 뒤, 외부와의 연락을 대부분 끊었다.
남아 있는 구룡파 중에서 성안에 주둔하면서 만세명에 들어가지 않은 구룡파는 시설 정비를 담당하는 부희와 의료를 담당하는 염유를 포함해서 몇십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구룡성과 만세명은 삶의 전부였다.
곡 님...
일찍부터 주둔지 앞에서 곡을 기다리던 형기가 곡을 보고 예를 갖추려 하자, 곡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예를 갖출 필요 없다.
늙은 자신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형기는 구부정한 등을 곧추세웠다.
노쇠는 아직 성안에 주둔하고 있는 구룡파가 당면하게 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구룡 순환 도시 전투 이후, 부희파는 바깥 세계에서 유행하던 구조체 기술에 대해 알게 됐다. 하지만 구조체 개조를 진행하기엔 그들의 나이와 신체가 따라주지 못했다.
적당한 시기가 되면, 너도 서둘러 백업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지난달에 제 데이터 백업을 업데이트했어요. 아직 만세명에 업로드하지 못했을 뿐이에요.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이들의 데이터를 모두 백업해서 함께 업로드할 생각이에요.
힘들겠지만, 서둘러.
참, 방금 백규한테서 창술이 곡 님을 독대하길 원한다고 들었어요.
알겠어.
곡이 살짝 열려 있던 문을 열자, 병상 위에 조용히 누워있는 "창술"이라는 부희가 보였다.
곡...
몸은 좀 어때?
아직은 살아 있지만, 며칠 안 남았어.
다기관 부전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인 진단서는 그들한테 있을 거야.
난 내가 죽게 된다는 사실만 알면 돼. 굳이 죽는 원인까지는 알고 싶지 않아.
죽지 않는 선택지도 있어.
만세명을 말하는 건가? 하...
병상에 누워있던 창술이 목젖을 몇 번 울리더니 메마른 웃음소리를 냈다.
죽으면 죽었지 전자 유령이 되고 싶진 않군. 이젠 그만 살고 싶어.
선택은 네 권리야. 하지만 내가 승낙했던 약속은 유효하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해.
약속... 약속이라... 네 약속이 없었다면, 나도 이 권리를 가지는 날까지 살지 못했겠지.
그건 지난 일이야. 창술.
날 창술이라 부르지 마.
내 이름은 줄곧 리차드였어.
아직도 자신이 "요람"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 "요람"은 비리야가 조직을 파괴할 때 죽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요람"은 항상 내 마음속에 살아 있어.
기술과 정보의 자유를 위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려는 내 이상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어. 바로 그것이 "요람"인 이유야.
하지만 그 조직의 모든 사람이 너와 같은 이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잖아.
그래서 "요람"은 윤에게 매수됐고, 우릴 암살할 계획을 세운 거 아닌가?
맞아. 당시 무사시에 침입했던 코드 안에 내가 '요람'에 남긴 어느 정도의 흔적이 있을지도 모르지.
넌 그전에 비리야의 부하가 됐어.
네가 조풍파에 들어가고 부희가 되는 그날부터 네 이상은 죽었어. 리차드.
……
하, 네 말이 맞아.
내가 만약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절대로 너희들의 부하가 되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 복수에 관한 정보도 야항선에 전해주지 않았겠지.
……
구룡 상회에서 일할 때도 난 항상 내 이념에 따라 행동했어.
비리야가 조직을 파괴했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복수를 감당할 준비는 해야 할 거야.
난 살짝 충고만 했을 뿐이야. 원한에 눈이 먼 그들은 실패할 게 뻔하지만.
어때? 이제 날 역모죄로 죽이고 싶나?
늙은 부희는 수십 년 전의 청년으로 돌아간 것처럼,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곡을 도발했다.
그건 폐안파의 일이야.
그들이 죽어가는 늙은이에게 사형을 선고하지는 않을 거라고 봐.
이렇게 늙어 죽는 것보단 사형받는 게 더 좋을 것 같군.
그렇게 말한 리차드는 손 옆에 있는 서랍에서 단말기 하나를 꺼낸 뒤 곡에게 건넸다.
이게 뭐지?
요람에 관한 모든 것이 들어 있어. 과거의 것도 있고 현재의 것도 있어.
야항선에서의 비리야 암살 사건과 그 사람들의 그 후 행방도 포함되어 있어.
내가 이것의 진실성을 의심해야 하나?
의심하고 싶다면 그것의 유일성을 의심해야겠지.
……
폐안과 함께 오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다.
죽음 따윈 두렵지 않아.
내가 사랑했던 것들이 모두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 버렸는데, 두려울 건 또 뭐가 있지.
오래 살면서 깨달은 이치가 하나 있어.
시간은 모든 가능성을 하나의 종점으로 모아준다는 거야. 어떤 사람들은 그걸 운명이라고 부르지.
우리에겐 각자의 종점이 있지만, 결국엔 모두 같은 종점으로 향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