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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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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03-09 거울 속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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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외력이 이 물결 없는 바다를 휘젓지 않았다.

지금까지 끊어진 추억들만 속속 던져졌을 뿐, 그것들을 엮을 실마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건 바다 밑에 가라앉은 진주 같기도 했다. 그렇게 우연한 오류 속에 진주의 주인은 잠시 그것들을 주워 올릴 기회가 생겼다.

자, 여러분 리듬에 맞춰 다시 한번 해볼까요? 준비, 음악에 맞춰야 돼요.

노아, 이쯤에선 곧게 펴야 해요! 틀렸어요. 힘이 안 들어갔잖아요.

제니도 틀렸어요. 자, 일단 멈추세요.

밤비나타, 앞으로 나와서 모두에게 시범을 보여주세요.

네. 선생님.

……

다들 잘 보세요. 밤비나타의 동작이 표준 동작이에요. 특히 손목 부위의 디테일을 주의 깊게 보세요.

의식의 바다에 익숙한 음악이 다시 울려 퍼지자, 밤비나타는 눈을 감고 음악의 리듬에 맞춰 우아하게 몸짓했다.

이 "춤"은 열두 가지 기본 동작을 연결한 것에 불과하지만, 밤비나타는 이를 세밀하게 짠 것처럼 표현했다.

곡이 끝나자, 밤비나타의 몸짓은 마지막 음표와 함께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소녀가 다시 두 눈을 뜨자,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은 것 같았다.

아주 훌륭해요. 밤비나타, 제자리로 돌아가세요.

밤비나타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린 선생님의 눈빛에는 인정과 총애로 가득 찼다.

발레 선생님에게 있어 구조체 학생을 가르치는 건 밤비나타가 처음이었다.

밤비나타가 발레 교실에 오기 전, 페트라 여사께서 밤비나타의 특수성에 대해 미리 설명했었다.

하지만 선생님으로서 밤비나타를 바라보는 견해가 기이함에서 인정으로 변하고, 또 발레의 "재능"을 발견하기까지 나름 긴 시간이 걸렸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밤비나타를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사적으로 토론하는 아이들의 생각을 인도하기 위해 발레 시간 이외에도 많은 걸 신경 써야 했다.

첫 수업에서 말했듯이 훌륭한 발레리나가 되려면 기본기도 중요하지만, 몸에 있는 아우라와 기질도 매우 중요해요.

오늘은 이번 학기의 마지막 수업이에요. 규칙적으로 연습을 반복하는 것 외에도 여러분은 음악에 더 익숙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디테일을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지 시간을 들여 생각해 보세요.

그럼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연습하고 끝내도록 할게요. 집중하고 준비...

연습이 끝난 후, 아이들이 떠나기 전 선생님은 각자 집중적으로 연습해야 할 부분을 말해줬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교실을 떠난 뒤, 마지막으로 바네사와 밤비나타의 차례가 됐다.

바네사의 실력은 수업마다 발전하고 있어요. 선생님으로서 참으로 자랑스러워요.

바네사의 기본기는 반에서도 손꼽힐 정도예요. 다만 발레 수업 시간 외에도 음악을 많이 감상해봤으면 좋겠네요. 멜로디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바네사 네가 음악을 감상하고, 춤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을 찾기 위한 거예요.

그리고 밤비나타, 선생님은 밤비나타가 신체적인 우위가 있다는 걸 알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밤비나타에게 발레가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여건이 된다면 꼭 끝까지 해보길 바라요.

자, 옷 갈아입고 집으로 가세요. 나갈 때 연습실 문 닫는 걸 잊지 말고요.

선생님은 손을 흔들며 인사를 마친 후, 자료를 들고 교실을 나갔다.

……

바네사 언니, 오늘도 두 시간 더 연습하다 갈 건가요?

연습 끝나면 부를게.

바네사는 선생님의 인정을 받았지만,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선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늘든 선생님의 마음속에서 밤비나타를 능가할 수 없었다.

바네사는 한숨을 내쉰 후, 손잡이를 잡고 첫 동작부터 연습하기 시작했다.

밤비나타는 평소처럼 바네사의 모든 움직임을 옆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야... 뭘 좀 물어볼 게 있어.

네?

너... 혹시 무슨 비결이라도 있어?

비결이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잠시 생각하던 밤비나타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더 잘 추는 방법이 있을 거 아냐?

밤비나타는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밤비나타! 나한테 알려주기 싫어서 일부러 숨기는 거지?

내가 너한테 물어보는 게 우스운 거야? 그렇지! 처음엔 내가 시범까지 보여줬었는데 지금은 반대니까.

아니에요! 밤비나타가 알고 있다면, 무엇이든 바네사 언니에게 알려줄 거예요. 하지만 실력을 늘리는 방법은... 아무도 그것을 생각하라고 명령한 사람이 없어서...

밤비나타가 구조체라서... 그런게 아닐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너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기본기를 연습했어. 하지만 방금 선생님은 너의 신체적 우위 외에도 발레가 잘 "어울린다"라고 말씀하셨어.

그럼, 춤출 때, 예를 들면 방금 선생님께서 너한테 시범 보여주라고 할 때,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했어? 음악의 리듬?

그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요령에 연연하지 않고, 음악의 흐름에 따라 빛을 받는 모습을 쫓았다.

뭐?

순서대로 동작을 떠올리지 않았다는 거야?

그렇게 하진 않았어요...

이런... 그런데 왜 네가 나보다 더 잘하는 거야. 짜증 나.

잠깐... 너 설마 발레를 좋아하는 거야? 내 말이 맞지?

밤비나타가 대답하기도 전에 바네사는 이 답이 꼭 맞아야 한다는 듯 밤비나타를 대신해 결론을 내렸다.

분명 그래서일 거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나보다 더 잘하는지 설명이 안 되잖아.

너 발레 좋아하는구나. 어쩐지 나처럼 좋아하지 않는 사람보다 아주 조금 더 잘하더라니... 흥.

바네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연습에 몰두했다.

그런가? 밤비나타는... 발레를 좋아하는 건가?

하지만 좋아한다는 건...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리고 누구 때문에 밤비나타가 발레를 좋아하게 된 걸까?

생소한 단어는 아니지만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밤비나타는 의식의 바다에 저장된 기억 데이터에서 "좋아요"에 관한 내용을 검색했다. 하지만 밤비나타는 이런 추상적인 설명에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어떤 것을 좋아하라는 명령을 받은 기억이 없기 때문에 이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인해 조금의 공황을 느끼게 됐다.

소녀는 어쩔 바를 몰랐다.

밤비나타는 거울에 비친 바네사를 봤다. 바네사의 뒤에는 꼼짝도 하지 않는 자신이 보였다.

밤비나타는 처음으로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좋아할 땐, 이런 표정을 짓는 건가?

평소와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것은 명령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일까?

잘 모르겠다.

발레를 좋아하게 되면 전에 그렸던 그림의 공백 인간을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을까?

밤비나타는 이러한 질문들을 대답할 수 없었다.

3일 후.

이런 취미 과목에서도 1등을 하지 못하면, 넌 앞으로 뭘 가지고 강한 자들과 경쟁할 거니?

난 나중에 발레리나가 될 생각이 없는데.

지금 환경에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게 어디 있니?

널 발레 교실에 보낸 건, 이후에 누굴 만났을 때,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는 장점이 한 가지 더 있으라고 그러는 거야. 지금 공중 정원에서 지위가 있는 분들의 자녀들은 모두 크고 작은 카드를 쥐고 있단 말이다.

나와 네 아버지는 네 미래를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어. 이건 다 네 손에 더 큰 가치를 쥐여주려고 그러는 거라고. 바네사, 이제 어린애도 아닌데, 대체 언제 철들 거니?

……

그때, 밤비나타를 함께 보낸 건 너 혼자서 외로울 것 같아 그랬던 건데, 선생님은 밤비나타가 반에서 가장 재능이 있다고 하더구나.

여기까지 말한 페트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있던 밤비나타는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아무도 쳐다보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심혈을 기울였던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네...

지난 시간에 선생님께서는 분명 내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하셨어. 혹시 그 얘기는 안 하셨어?

실력이 늘면 뭐해? 다 못하는 애들을 위로하려고 했던 말에 불과해.

훌륭한 사람은 모두가 심복하여 인정할 수 있는 결과를 내놓아야 한단다. 받은 게 위로 한마디뿐이라면 네 결과가 아직은 평범하다는 거야.

하지만 선생님도 인정하셨고, 엄마도 방금 이건 그냥 취미에 불과하...

넌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구나. 바네사. 그동안, 네 생활이 너무 행복했던 모양이구나.

넌 바깥세상이 어떤지 모르지? 운 좋으면 기계로 개조되어 전장에 나갈 수 있지만, 운이 나쁘면 언제 죽어도 이상할게 없어.

네가 공중 정원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된 건 모두 엄마 아빠의 가치 때문이야. 그러니 네 이후의 인생을 안전하게 살려면, 너도 대우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가치를 내놓아야 해.

나와 네 아버지처럼 과학 연구의 길을 걷는 게 제일 안전해. 최전선의 위험을 직면하지 않아도 되고, 연구 결과로 명성과 돈도 모두 얻을 수 있지.

사교적 자리에서 지위 높은 사람과 친분을 맺고, 필요에 따라 그들이 소유한 가치도 너에게로 돌릴 수 있어.

그러니 하나만 기억하렴. 좋은 결과가 있어야 과정도 의미가 있는 법이고, 그렇지 않으면 기회비용만 낭비하는 셈이야.

엄마가 말한 냉혹한 현실에 더 강력한 반박 이유를 찾지 못한 바네사는 하고 싶었던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때, 문을 여는 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깼다. 요즘 연구에 집중하느라 집에 돌아오지 못했던 레이먼드가 드디어 하루의 휴가를 얻고 돌아왔다.

다녀왔어... 음?

페트라는 레이먼드에게 바네사와 밤비나타의 발레 평가 결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네사...

아빠, 저번에 더 이상 그 호칭을 부르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아직도 절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단 말이에요.

레이먼드는 연구에 몰두하다 종종 바네사의 성장 순간을 많이 놓쳐버렸다. 어쩌면 레이먼드 자신도 딸이 왜 애칭을 싫어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학 연구 분야의 문제 풀기를 즐기는 박사로서 이런 문제는 그의 필수 연구 범위에 속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과 관련된 대부분 문제는 가정사를 담당하는 구성원인 페트라가 도맡았다.

하하, 아빠가 잊어버렸네. 무슨 일인지 알겠어.

바네사, 네가 전에 그랬었지, 엄마 아빠가 네 의견을 안 듣는다고. 그렇다면 이번엔 네가 결정해. 발레가 싫으면 당장 그만둬도 좋아.

그럼 한 학기를 낭비한 거잖아?

실험 방향이 틀렸으면, 바로 수정하는 게 좋겠지? 발레 말고도 다른 취미를 가질 수 있어.

그럼 밤비나타는?

밤비나타? 당연히 너와 함께 다른 취미 수업을 듣겠지?

하지만 선생님은 밤비나타에게 재능이 있다고 말씀하셨어! 밤비나타는 1등까지 했는데, 엄마 아빠는 기쁘지도 않아?

바네사는 2초 동안 망설이다가 발레 교실에 있던 밤비나타의 모습을 떠올리며 작은 소리로 자신이 추측했던 걸 털어놓았다.

그리고... 밤비나타도 발레를 좋아한단 말이야.

밤비나타처럼 말 잘 듣는 아이는 당연히 부모의 의견을 따를 거야.

페트라는 담담한 말투로 사실을 말하는 듯했지만, 어김없이 눈길을 밤비나타에게 돌리며 복종자가 순종의 결심을 보여주길 기다렸다.

밤비나타는 자신의 처지를 결정하는 건 당연히 이 집안의 지배자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바네사 언니의 기대는 이 "당연함"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밤비나타는 자신이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선택을 말했다.

네... 엄마.

그럼 그렇게 하자. 애들은 가서 쉬렴. 페트라, 날 도와서 실험 모형 좀 봐줘.

레이먼드와 페트라는 아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토론하며 실험실로 향했다. 하지만 거실에 드리운 안개는 어른이 떠난다고 해서 금방 걷히지 않았다.

방금 왜 발레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어?

밤비나타는... 확신할 수 없었어요.

바네사가 화낼 거라는 걸 예측했었음에도, 그 말을 들은 밤비나타는 순간 몸을 떨었다.

난 지금도 네가 이러는 게... 너무 싫어.

혹시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건가요?

너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게... 잘못된 거야.

네?

밤비나타는 최선을 다해 바네사의 말을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옳은 일을 한다"라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

지금 이게 뭐냐고... 넌 계속 춤출 수 없게 됐어. 방금 네가 발레를 좋아한다고 말했으면 엄마 아빠는 너더러 계속 배우라고 했을지도 몰라.

선생님도 너에게 재능이 있다고 하셨잖아.

그럼, 바네사 언니는요?

나? 난 재능이 없으니까, 다른 방향으로 바꿔야지. 어쨌든 다음번엔 꼭 1등 할 거야.

그럼, 밤비나타도 다음엔...

또, 또! 넌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야? 아니면 엄마 아빠가 했던 말 때문에 억지로 나랑 같이 있는 거야?

자신이 원하든, 명령이든... 어차피 같은 결과인데, 과연 차이가 있을까?

하지만 금방 화낼 것 같은 바네사의 모습을 보자, 밤비나타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밤비나타는 언니 옆에 있고 싶어요.

나 참... 널 이해할 수가 없어. 내 옆에 있고 싶어서 네가 좋아하는 일을 희생한다는 거야?

어휴. 그래도 다음엔 너한테 지지 않을 거야! 알겠어?

네!

바네사 주위를 맴돌던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걸 느끼자, 밤비나타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