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주인님?
눈을 뜬 밤비나타는 예상처럼 바네사의 주위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기억 데이터엔 지금 있는 방에 대한 기록이 없었고, 이곳으로 온 과정도 없었다.
이상 데이터에 갇혔을 때, 누군가가 함부로 기체를 이곳으로 이동시켰나? 그리고 주인님은 안전한 상황일까?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할 때와 달리 주인 곁에서 분리됐다는 불안에 사로잡힌 밤비나타의 의식의 바다엔 공포라는 감정이 떠돌고 있었다.
혹시 주인님은 밤비나타가 도움이 되지 않아서, 이곳에 버리고 가신 걸까?
주인의 상태를 확인하고 마음속의 의심을 멈추기 위해, 밤비나타는 곧바로 바네사의 단말기에 연락 메시지를 보내려고 시도를 했다. 바로 그때, 밤비나타는 어떤 교란으로 자신의 기체를 제어할 수 없다는 걸 발견했다.
가까스로 자신을 진정시킨 밤비나타는 자신이 처한 환경을 살피기 시작했다. 전에 수색했던 방에 비하면 이곳은 예배당처럼 컸다. 촛불, 조명, 불빛, 각기 다른 작은 범위의 빛들이 방안 여기저기를 비추는 바람에 일부분만 확인할 수 있었다.
연산 능력을 조절하여 시각 모듈을 향상하는 데 실패한 밤비나타는 밝은 구역에서 탈출할 수 있는 계기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동생이 깨어났어요.
밤비나타가 어떻게든 전투태세를 취하려 할 때, 보육사 복장 차림의 로봇이 갑자기 등 뒤에 나타났다. 그리고 로봇의 커다란 그림자가 밤비나타를 완전히 덮었다.
아이야, 내 아이가... 되렴.
착한 아이야, 반드시, 가족이 되자.
토레스, 도티, 함께.
침식체? 아니, 고농도 퍼니싱은 감지되지 않았는데...
침식되지 않은 로봇과 초기 실험형 구조체인가요? 당신들은...
토레스, 어머니의 말씀에 똑바로 대답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쁜 아이가 된단 말이야.
언니로서 네가 그렇게 되는 걸 원치 않아, 나와 어머니가 슬퍼할 거라고.
나쁜 아이, 벌, 받아야지.
착한 아이야, 가족이... 되는 거야. 토레스.
보육사 로봇이 팔을 돌려 밤비나타의 턱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평소 주인이 이 기체를 섬세하게 다루는 모습을 떠올린 구조체는 자신의 소속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낯선 손바닥을 극도로 멀리하고 싶었다.
"밤비나타"란 이름은 주인님이 입력한 이름이에요. 이 이름만큼은 그 누구도 변경할 수 없어요!
밤비나타는 다시 통신을 시도했지만, 신호가 깊은 골짜기에 떨어진 것처럼, 전달하려던 소리가 모두 잠식돼 버렸다.
토레스,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
아니요. 주인님의 명령은 밤비나타가 존재하는 의미예요!
토레스, 규칙... 불합격.
퍼니싱?! 어째서...
밤비나타의 말이 역원 장치에서 비롯된 극심한 고통 때문에 중단됐다. 거대한 쇠못이 마취 없이 머리뼈에 박힌 듯한 아픔에 밤비나타는 사고와 연산을 할 수 없었다.
역원 장치의 작동을 거의 느낄 수 없었고, 퍼니싱은 마음대로 밤비나타의 이성을 수많은 조각으로 찢어서 의식의 바다 아래로 던져버렸다.
침몰은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잠식해, 시각도 청각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아무도 탐색할 수 없는 의식의 바다 심층엔 고통과 걱정도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서 산발적으로 솟아오르는 고치 모양의 물건들이 조금씩 많아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천천히 자신을 에워싸고, 잡히기를 기다리는 듯 닿을 수 있는 위치에서 떠다녔다.
옆에 있는 작은 걸 하나 찌르니 고치 속에 있던 낯선 기억 데이터가 밤비나타를 감쌌다.
입양 준비가 시작된 뒤부터 실험에서 혼자 격리된 밤비나타에게 전담 인력을 파견해 조정을 진행했다.
널 입양한 사람은 훌륭한 박사님이신데, 그의 아내와 우린 한때 동료였어. 그러니 그들의 도움으로 언젠가 네 기억상실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을 거야.
더 이상 기억을 잃지 않는다는 건가요?
그래. 어느 순간 갑자기 자신이 누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어.
괜찮아요. 연구원 아저씨, 이모들이 밤비나타에게 알려줄 거잖아요. 기억상실이 나아지면 아무도 밤비나타를 돌봐주지 않게 되는 건가요?
인생은 기나긴 시간이란다, 구조체는 더 길지도 모르지. 그러니 혼자서 마주해야 하는 상황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어. 네가 기억을 할 수 있다면 넌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이런, 내가 괜히 너한테 이런 말을 해버렸네... 이해하기 어려울 텐데.
적어도 네 미래의 엄마 아빠는 공중 정원 사람이니, 이곳의 실험 구조체처럼 폐기될 때까지 연구용으로 쓰이진 않을 거야.
그럼... 밤비나타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죠?
어떻게 하긴...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면 돼.
하지만 바네사 언니는 왜 밤비나타를 싫어하는 걸까?
난 네가 싫어!
네가 온 이후로 엄마 아빠는 너하고만 있어. 난 분명 동생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는데!
엄마 아빠는 너로 날 대체하려는 걸까? 내가 말 안 들어서?
아니면 저번 시험에서 1등 하지 못해서?
하지만 난 많이 노력했단 말이야. 다들 3등도 좋은 성적이라고 했는데... 흑흑, 거짓말쟁이...
바네사는 생각나는 대로 한바탕 말한 뒤, 흐느껴 울며 점차 주저앉았다.
언니처럼 사랑받고, 누군가가 모든 것을 계획해 주는 아이도 자신의 자리를 잃을까 봐 두려운 걸까?
언니도 밤비나타처럼 언젠가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면 가치가 없어지게 될까?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지 밤비나타는 엄마가 자기 머리를 쓰다듬던 기억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팔에 고개를 묻은 바네사의 머리 위로 손을 내밀었다.
뭐 하는 거야! 네 동정 따윈 필요 없어!
죄송해요. 이렇게 하면 바네사 언니가 조금 편해질 것 같아서요.
……
바네사의 심정은 알 수 없었지만, 계속 거부하지 않는 바네사를 보고 밤비나타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엄마 아빠는 정말 내가 싫어진 걸까?
아닐 거예요. 오늘 엄마 아빠는 바네사 언니를 훌륭한 박사로 키우고 싶다고 하셨어요!
엄마는 밤비나타의 실험에 진전이 있으면, 아빠를 도와 의식의 바다와 역원 장치의 비밀을 밝혀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러면 바네사 언니에게 밝은 미래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도 말씀하셨어요.
밤비나타는 바네사 언니의 엄마 아빠를 빼앗으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밤비나타는 일부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이곳에 온 거예요.
바네사 언니의 앞길을 위해 필요한 가치라고 할 수 있으니까... 밤비나타는 바네사 언니를 위한 존재인걸요.
정말? 난 그... 무슨 바다와 무슨 장치 같은 건 몰라. 아니다! 너 지금 오늘도 엄마 아빠랑 하루 종일 있었다고 자랑하는 거지?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흥, 됐어! 그럼 손가락 걸어. 오늘 내가 울었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밤비나타는 바네사가 내민 새끼손가락을 보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손가락 걸 줄도 몰라? 바보.
바네사가 밤비나타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인간의 새끼손가락을 로봇의 새끼손가락에 건 뒤, 몇 번이고 흔들었다.
손가락 걸고, 복사, 스캔, 사인 완료! 됐어. 너 말하지 않기로 동의했다. 알았지? 밤비나타.
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요. 바네사 언니.
그러고 보니 바네사가 처음으로 밤비나타의 이름을 불러준 것도 이때였다.
생체공학 코팅에는 아직도 낯선 촉감이 남아있었다. 밤비나타는 본 적 없는 "의식"에 절대로 바네사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겠다고 몰래 맹세했었다.
큰일 났어. 어서 깨진 액자를 치워, 아니면 혼나게 될 거야! 얼른 청소기 가져와!
앗, 네!
……
기억의 화면이 무엇에 의해 절단이라도 된 듯 여기서 툭 끊겼다. 그리고 선명한 화면이 조금씩 퇴색되면서 적막한 어둠으로 돌아갔다.
방금 전과 같이 의식이 떠다니게 된 밤비나타에게 크고 작은 데이터 고치들이 또다시 몰려왔다.
데이터 고치... 기억상실증 때문에 일관성 없는 모양으로 절단이 된 걸까?
낯선 기대감을 가지고 다른 고치를 터치하자 다음 추억이 상영됐다.
가동에 성공했어. 밤비나타, 엄마의 손가락을 보렴.
좋아. 시각 기능 정상이고 의식도 또렷하네.
밤비나타, 무슨 느낌이니? 어디 불편하거나 이상하진 않니?
……
당신은... 누구인가요?
네 이름은 밤비나타고, 우린 네 엄마 아빠란다. 너한테 문제가 생겨서 엄마 아빠가 그 원인을 찾고 있는 중이야.
밤비... 나타...
어린 여자아이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 것 같았다. 밤비나타는 겁먹은 기색 하나 없이 알려준 메시지를 중얼거릴 뿐이었다.
칩 실행은 어때?
실행 상황은 좋아. 바로 데이터 스냅을 도출해서 백업할게.
밤비나타, 이제부터 뒤통수가 조금 뜨거워질 거야. 하지만 그건 정상적인 현상이야.
네.
두려워할 필요 없어. 기억 데이터를 저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칩을 연결하려고 하는 것이니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데이터 스냅을 도출해 냈어. 여기.
이 실행 효율은 아직 최적화할 여지가 많네. 초판 모델이라고는 하지만 예상 결과와는 아직 거리가 있어.
이전 테스트는 의식의 바다 안정성에 초점을 맞추고 진행했었어. 기억 저장 칩은 임시로 연구 결정을 한 거라 연산 모형 자체가 초기 데이터와 편차가 있는 건 어쩔 수 없지.
그들이 제공한 실험 기록도 완전하지 않아. 이런 데이터양은 모형의 정확도에 영향을 미치니 이후 상황에 따라 개선해야겠어. 그리고 지금은 데이터 수집을 보조할 수만 있으면 되니, 더 가치 있는 문제에 집중하는 게 좋겠어.
기체가 정지되는 원인도 찾았어. 이전 테스트에서 남긴 충돌 문제인데 지금은 모두 조정을 마쳤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기체에 칩을 탑재한 뒤, 일정한 시간 실행되는 걸 관찰하자.
자, 밤비나타, 일어나.
기구와 기기들을 모두 정리한 후 페트라는 실험실 문을 열었다. 문밖에 있던 바네사가 깜짝 놀라더니 지나가는 길인 척 연기를 했다.
네사야, 지금은 공부할 시간이 아니니?
아빠, 오늘 해야 할 몫은 다 끝냈어요.
다했으면 추가로 좀 더 해야지? 휴식 시간까지 20분이나 남았잖니.
너란 아이는 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거니? 스미스 집 아들은 너와 비슷한 나이였을 때, 이미 자타 공인 천재라고 불렸다.
그래. 네사야. 네 어머니 말이 맞아. 공부 시간에는 빈둥빈둥 놀면 안 되지.
놀러 다닌 거 아니에요.
뭐라고 변명하려던 바네사는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참, 밤비나타한테 바네사에 대한 데이터를 다시 기록해야 하네. 밤비나타. 이쪽은 바네사, 네 언니란다.
다시 기록한다고요?
바네사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고, 페트라와 레이먼드는 그 말을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바네사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밤비나타를 훑어보며, 답을 찾으려고 시도했고 밤비나타는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네사 언니, 안녕하세요.
날... 기억 못 하는 거야?
미안해요.
기억 안 나면 더 좋고, 난 네 사과 따위 필요 없어.
말을 마친 바네사는 그길로 방을 향해 뛰어갔다.
밤비나타가 뭐 잘못 말했나요?
바네사는 원래 성질이 그렇단다. 그러니 다음 순간에 바네사가 뭘 할지도 전혀 예측할 수가 없지. 바네사도 너처럼 말 잘 들었으면 얼마나 좋아.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바네사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걸 언제쯤이면 이해해 주려나.
밤비나타는 페트라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아빠와 엄마가 한 모든 것이 언니를 위한 것이라면, "착한 아이"로서 언니를 위해 모든 걸 바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언니 방금 그 모습은... 혹시 그전에 밤비나타가 뭔가를 잘못한 걸까?
곧 점심시간이네. 소파에서 잠시 쉬고 있어.
네, 엄마.
아직 지치진 않았지만, 밤비나타는 페트라의 명령에 따라 소파 한구석에서 자세를 바로잡고 앉아 있었다.
점심 준비를 마친 페트라가 가족들을 일일이 식탁으로 불러 모았다.
2층에서 천천히 내려온 레이먼드가 식탁 옆 의자를 당겨 앉았다. 연산에 열중하고 있던 레이먼드는 손가락으로 식탁 위에서 뭔가를 계속 계산하고 있었다.
페트라의 세 번째 노크에 마지못해 방에서 나온 바네사는 소파 위에 앉아 있는 밤비나타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밤비나타, 구조체는 식사하지 않아도 돼.
페트라가 다가오는 걸 눈치챈 밤비나타는 자신도 모르게 등을 꼿꼿이 세웠다.
네.
그러니 우리가 식사하는 동안 편하게 집을 둘러보렴. 피곤하면 소파에 있어도 돼.
네. 밤비나타는 여기 앉아 있을게요.
그래. 그럼, 바네사가 밥 다 먹으면 같이 낮잠 자렴. 이론적으로 휴면해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충분한 휴면을 취해도 나쁠 건 없을 거야.
밤비나타와 바네사의 생활 패턴이 같아지게 된다면,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아. 어찌 됐든 지금은 자매니까.
말을 마친 페트라가 밤비나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 돌아서서 식탁으로 향했다.
시선이 페트라를 쫓던 밤비나타는 바네사의 훔쳐보는 눈빛을 포착했다. 하지만 밤비나타의 시선을 느낀 바네사는 고개를 다시 돌린 채, 밤비나타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바네사 언니는 밤비나타를 싫어하는 것 같다. 오늘부터 더 이상 언니가 싫어하는 일을 하면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한 밤비나타는 고개를 돌리고 식탁 쪽을 보지 않았다.
점심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바네사가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밤비나타는 단정하게 소파 구석에 앉아 있었다.
페트라가 식기를 정리하고 나서야 밤비나타는 방에 가서 낮잠 자라는 명령을 받고 자리를 떴다.
연회색의 침실 문에는 바네사의 이름이 자석 장식으로 붙어있었다. 바네사의 개인적 공간이었던 곳을 들어가게 된다는 생각에 밤비나타는 긴장해서 문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리고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커다란 침대 한가운데 이불 뭉치가 엉망으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밤비나타가 어디에 누워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이불 속에 있던 바네사가 침대의 한쪽으로 굴러서, 다른 한쪽의 자리를 내줬다.
……
바네사에게 영향 주지 않기 위해 밤비나타는 천천히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밤비나타는 바네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은 것에 놀라 두 걸음 뒤로 물러나게 됐다.
좀 빨리 누울 수 없어? 너무 느리잖아!
말을 마친 바네사는 다시 누워 몸을 돌렸다.
밤비나타는 허락을 받은 듯, 바네사가 내어준 자리에 똑바로 누웠다.
휴면에 들어가기 전, 바네사가 던진 이불 한쪽이 밤비나타의 몸을 덮었다.
엄마가 잠잘 때, 배를 잘 덮지 않으면 감기 걸린다고 했어. 넌 말도 잘 들으니까 잊지 않았겠지?
엄마는 밤비나타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없어요. 구조체는 감기에 걸리지 않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덮고 있어!
네. 잘 덮었어요. 바네사 언니.
돌아보지 않은 바네사가 입 벌리지 않은 채, 콧소리만 내어 응답했다.
밤비나타는 바네사가 조금 편안해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줄곧 긴장돼 있던 기체가 묘하게 편안해졌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존재의 의미는 명령이고, 밤비나타는 누군가의 명령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받아본 그 어떤 명령과도 다르게, 바네사의 강한 말투를 더 부드러운 것이 감싸고 있었다.
밤비나타는 말속의 무언가를 잡은 듯 부드러운 이불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근데 너...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미안해요.
계속 사과만 하지 말고,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줘.
엄마 아빠는 밤비나타의 기체에 기억을 도와주는 물건을 넣었다고만 했어요. 다른 건 기억나지 않아요.
넌 두렵지도 않아?
두려움? 처음에는 두려웠을 수도 있었지만, 그 기억은 이제 이 기체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반복되는 리셋 속에서 밤비나타는 의미를 부여해 줄 사람을 찾기만 한다면, 행동의 방향을 찾을 수 있고 모든 걸 잃는다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괜찮아요. 아빠와 엄마가 알려줄 거예요. 밤비나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요. 언니도 그럴 거죠?
누가 알려준대?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30분 후에 일어나야 해. 얼른 자!
네. 밤비나타가 기억해 뒀어요.
새끼손가락도 걸었으면서, 기억도 못 하고...
휴면에 들어가려는 순간 바네사가 옆에서 뭐라고 중얼거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작은 목소리를 귀담아들을 겨를도 없이 밤비나타의 의식은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