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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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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03-04 과거의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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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나타난 적을 모두 쓰러뜨릴 무렵, 복고풍의 건물 하나가 가로수길 끝자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정교한 플라워 타일로 수놓은 복고풍의 석조 벽과 뾰족한 지붕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소외감은 주지 않았다. 갈색과 초록색의 에나멜 배색도 황금시대 유행했던 복고풍의 배색을 참고한 것 같았다.

후에 이 복지 시설이 쿠로노 소속이 됐지만, 쿠로노가 인수하기 전에 이곳을 따뜻한 양옥으로 만들려는 건축자의 설계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복지 시설. 그때 밤비나타가 바네사의 부모님에게 입양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밤비나타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바네사는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밤비나타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오후 두 시였다. 탄소 섬유 소재의 블라인드는 설정된 시간에 따라 자동으로 올라가면서, 밝지만 눈부시지 않은 인공 태양 빛을 거실로 들여보냈다.

원래대로라면, 두 시에 낮잠에서 깨어나야 할 바네사가 오늘은 일찍 일어나게 되면서 몸단장을 다시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잔소리에 어린이용 커피 우유를 한 잔 마셨다.

바네사는 일부러 큰소리를 내며 도자기 컵을 내려놨지만, 예상과 다르게 어른들은 그 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삐진 바네사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짜증 내는 듯 가느다란 두 다리를 흔들어 댔다.

바네사, 왜 아직도 소파에 앉아 있니?

엄마, 난 그 애가 우리 집에 안 왔으면 좋겠어!

바네사, 그 문제는 전에도 얘기했잖니. 그들이 곧 도착할 거야. 그러니 지금은 셔츠 정리나 하렴. 집안 망신시키지 말고.

아빠...

바네사, 이리 오거라.

거울을 보며 자기 옷깃을 단정하게 정리한 레이먼드가 허리를 굽혀 바네사의 튀어나온 셔츠 자락을 잡아줬다.

이렇게 정리하는 게 훨씬 낫지? 이 일은 일주일 전에 엄마가 너한테 말해줬잖아. 맞지?

곧 여동생이 생기는데 좋아해야지. 더군다나 네 동생은... 어쨌든 우린 다 널 위해서야 그런 거야.

시간이 다 됐네. 그들은 들어올 수 없으니, 우리가 주택가 입구로 마중 나가야 해.

바네사, 예의를 갖춰야 한다. 내가 평소에 했던 말들을 잊은 거니?

하지만 난 여동생 따윈 필요 없어!

지금 상황에서 화내게 하지 말렴.

정성껏 화장한 엄마의 얼굴이 금세 냉철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들어 엄마의 표정을 확인할 용기가 없었던 바네사가 주눅이 든 채 입술을 깨물었다.

가자.

다가오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아이가 얼굴에 불쾌한 티를 냈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드러낸 부정적인 감정은 일정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고, 결국 어른과 함께 갖고 싶지도 않은 "여동생"을 향해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민함으로 설계된 공중 정원은 당연하게도 주택가를 사치스럽게 디자인하지 않았다. 특히 공중 정원의 기능이 인간 방주로 변한 후, 주택가의 쾌적함은 입주민 수와 걸맞게 돼 있었다.

하지만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은 눈앞의 홀로그램 수영장과 광 투과율이 자동으로 조절되는 건물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연구원은 다 같은 디자인의 단순한 거처인데도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침을 삼킬 때, 익숙한 얼굴이 멀리 있는 유리문 안에서 나타났다. 연구원은 넋을 놓고 홀로그램 수영장을 바라보는 여자아이의 어깨를 툭툭 쳐서 정신을 차리게 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어떤가요? 현재 연구는 잘 진행되고 있나요?

그럭저럭해요. 페트라 씨가 떠날 때와 비교하면 눈에 띄는 진전은커녕, 오히려 다른 문제들이 더 생겼어요. 예를 들면, 여기 이 아이는 기억상실증에 걸렸어요.

이런 의식 질환에 관해서 내부에 참고할 만한 데이터가 있나요?

네, 레이먼드 박사님. 밤비나타에 대한 일부 실험 데이터를 백업해서 수화물에 같이 넣어 놨어요.

밤비나타,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이리 와. 앞으로 네 아빠와 엄마가 되실 분이야.

연구원은 등 뒤에서 밤비나타를 앞으로 데려왔다. 어른들이 보는 가운데 여자아이는 새끼 사슴처럼 얌전했다.

어머나, 중요한 걸 잊을 뻔했네. 이름이 밤비나타 맞지?

네... 엄마.

착하네. 어서 바네사 언니와 인사해야지. 바네사, 이리 오렴.

페트라와 레이먼드 뒤에 계속 있던 여자아이가 마지못해 앞으로 나왔다. 여자아이는 뚱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채 밤비나타의 눈을 보려 하지 않았다.

바네사 언니...

싫은 티를 숨기지 않는 바네사는 연구원 뒤로 숨으려고 하다가 버티는 밤비나타의 모습에 더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흥.

바네사 언니가 금방 잠에서 깨어나 기분이 안 좋은가 봐.

바네사, 버릇없이 굴지 말고 밤비나타한테 똑바로 인사해야지?

바네사는 고개를 돌린 채, 마지못해 밤비나타의 손을 잡고 악수하는 셈 치고 흔들었다.

하하하, 어린애잖아요. 낮잠 자다 깨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죠.

밤비나타, 넌 앞으로 아빠, 엄마 그리고 언니와 함께 공중 정원에서 살게 될 거야. 이건 많은 사람이 원해도 얻을 수 없는 행운이야. 그러니 말 잘 듣는 아이가 돼야 한다. 알았지?

네. 아저씨는 지금 떠나는 건가요?

그래. 넌 이제 돌아가서 실험에 참여할 필요 없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밤비나타는 아쉬움이 눈에서 흘러나오기 전에 고갤 숙여 불필요한 감정을 숨겼다.

밤비나타는 말을 제일 잘 듣는 아이예요. 그러니 박사님들도 안심하세요.

추후 연구에 진전이나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 박사님과 같은 전문가께서 협력해 주시니 저희 측에서도 기대가 커요.

어른들이 인수에 관해 이야기하는 동안 바네사는 옆에 있는 "여동생"을 곁눈질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손이 많이 가는 땋은 머리, 가련한 표정, 편한 옷... 하지만 엄마, 아빠는 밤비나타를 다정하게 대했다.

얄미워. 일부러 말 듣는 척하면서 엄마, 아빠에게서 관심을 빼앗아 가려는 게 틀림없어.

으악, 이쪽을 봤어! 짜증 나. 날 보지 마!

참, 밤비나타도 왔는데, 가족사진 좀 찍어 주시겠어요?

좋아요. 여기서 찍을까요?

이쪽 배경이 좀 더 이쁘니까 여기서 찍어주세요. 아이들아, 여기로 오렴.

밤비나타, 내 앞에 서렴.

온화한 미소의 레이먼드가 인내심을 가지고 손을 내민 뒤, 여자아이가 반응하길 기다렸다.

말을 듣고 레이먼드 앞으로 다가간 밤비나타가 카메라 쪽을 바라보며 자세를 취했다.

바네사를 밤비나타 옆에 세운 페트라가 카메라를 보라는 듯 바네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찍습니다. 3, 2, 1, 스마일~

아무리 원치 않아도 바네사는 밤비나타가 가족의 일원이 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일주일 동안 레이먼드와 페트라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이 늘어났지만, 낮에는 예외 없이 밤비나타와 함께 있었다.

바네사는 문틈으로 그들을 훔쳐봤다. 아빠는 일부 기기 인터페이스를 밤비나타의 뒤통수에서 부드럽게 떼어냈고, 엄마는 칭찬하듯 밤비나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격한 페트라한테서 그런 미소는 보기 드물었다.

실험실에서 보내는 낮이 끝나고 가족을 위한 밤이 됐다. 날이 갈수록 제멋대로 굴던 바네사는 자주 혼이 났다.

레이먼드와 페트라는 실험이 추진돼서 기뻤다. 밤비나타의 협조적인 태도는 앞으로의 연구가 더 순조롭게 진행될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게 만들었다.

전문 영역의 난제를 해결한다는 쾌감에 빠진 그들은 과학 분야 외에 생기는 균열을 알아차릴 겨를이 없었다.

퍽!!!

바네사

야! 나랑 엄마 아빠의 사진을 왜 마음대로 바꿔?

방금 거실로 들어온 바네사는 밤비나타가 4인 가족사진으로 바뀐 액자를 테이블에 다시 올려놓는 걸 봤다.

밤비나타가 없는 3인 가족사진이 온데간데없어졌다.

속에서 분노가 들끓어 오른 바네사는 밤비나타가 품에 안고 있던 액자를 힘껏 밀었다. 그러자 액자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졌다.

땅에 밀쳐진 밤비나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바네사를 바라봤다. 얄미운 밤비나타의 불쌍한 표정을 보며 바네사는 다시 한번 질문을 반복했다.

바네사

내가 묻고 있잖아! 나랑 엄마 아빠의 사진을 왜 마음대로 바꾸냐고?

밤비나타

엄마가 새로운 사진을 넣으라고... 그래서...

바네사

잘 들어. 난 널 내 동생으로 인정한 적 없어. 내 엄마 아빠를 빼앗지 마!

누가 너처럼 말 잘 듣는대? 엄마 아빠는 네가 연기하는 모습에 속고 있는 거야!

난 네가 싫어!

그때의 밤비나타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놀라운 표정? 어쩔 줄 모르는 표정? 아니면 가엽게 울 것만 같은 표정?

바네사는 머릿속에서 그때의 밤비나타 모습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뿌연 안개가 낀 듯 기억나지 않았다.

야, 정신 차려!

멍 때리지 마, 예정 지점에 도착했어. 백로 소대는 어떻게 하나같이 제정신인 애가 없는 거지?

곧바로 단말기를 들어 확인에 들어간 바네사는 때아닌 추억을 머릿속에서 쫓아내려고 애썼다.

행동 중에 발생하게 될 리스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야. 긴급 상황이 생기면 난 누구한테 후방 엄호를 맡길까? 한번 맞춰보지 않을래?

밤비나타, 네 주인이 널 부르잖아.

주인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정문은 피하고 저쪽 창문으로 내부 상황을 관찰해.

바네사에게 한 방 먹인 베라는 가볍게 웃으며, 부서진 유리 창문을 향해 앞장서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