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의 준마가 눈밭을 내달리며 혜성의 꼬리처럼 눈보라를 휘날렸다.
유성이 떨어지듯 빠르게 달리고 있었지만, 말 위의 기수는 여전히 속도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더 빨리... 반드시 더 빨리 달려야만 했다...
희미해져 가는 전파를 따라잡기를 간절히 바라며...
수신기의 신호음이 점점 약해지자, 타티아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채찍을 높이 들어 올려 다시 한번 내리쳤다.
비켜!
분노를 담은 칼날이 무겁게 내리꽂혔고, 그 한 번의 일격에는 초조함과 증오가 모두 실려 있었다.
침식체의 외피가 요란한 포효와 함께 산산조각 났고, 타티아나는 조금 전까지 비명을 지르던 소녀를 재빨리 끌어안아 죽음의 마수로부터 구해냈다.
구조 신호를 보냈지만 실제로 도움이 올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소녀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감사함이 뒤섞여 있었다.
움직이지 마. 뒤쪽에서 침식체가 쫓아오고 있어.
네, 네!
타티아나는 전투마를 내어주어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생존자들을 태워 떠나보냈다.
그러고는 낡은 사냥총을 꺼내 들어 멀리서 달려오는 침식체의 다리를 정확히 명중시켰다.
크으으윽!
균형을 잃은 침식체들이 차례로 눈밭 위로 무겁게 쓰러져 내렸다.
대, 대단하네요...
뛰어난 사격 실력에 여전히 공포에 질려있던 소녀마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지금이야, 어서 도망쳐! 늦으면 또 잡힐 거야!
쓰러진 침식체들을 확인한 타티아나는 서둘러 소녀의 손을 잡고 신소피아시를 향해 달렸다.
지평선 끝에서 도시의 높은 첨탑이 보였다. 전에는 아득하기만 했던 삶의 희망이 이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비교적 안전한 곳에 도착해 다른 난민들과 합류하고 나서야, 숨을 고르던 소녀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말을 건넬 용기를 냈다.
후후, 감, 감사합니다...
저희는 이곳에 신소피아라는 새로운 도시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모든 난민을 차별 없이 받아준다고 해서, 한번 찾아가 보자는 심정으로 이쪽으로 온 거예요...
하지만 실제로 누군가가 저희를 구해주리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이런 일은 처음이거든요.
예전에는 저희가 도움을 요청해도, 대부분 무시당하거나 짐처럼 취급당하기만 했거든요...
여기까지 말하자 간신히 가라앉았던 소녀의 목소리에 다시 흐느낌이 배어났다.
말하기 힘들면 무리하지 마. 먼저 쉬어도 좋아.
타티아나는 여전히 숨을 고르지 못하는 소녀에게 보온병을 건넸다. 뚜껑을 열자 피어오른 따뜻한 김이 소녀의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렸다.
죄송해요. 저는 그저 그 소문이 진실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처음에는 한 무리의 유랑민들이 저희를 받아준다고 했었는데, 결국 식량만 빼앗고 저희를 내팽개쳤거든요...
소녀는 보온병을 건네받았지만, 타티아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여전히 떨쳐낼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사기를 당한 뒤로 그들은 눈보라 속에서 헤매며 오랫동안 고통받아 왔다. 이번에도 거절당한다면 모두가 살아남을 마지막 희망마저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냉혹한 세상에 난민을 부담으로 여기지 않고 조건 없이 받아들여 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런 의문을 품으면서도, 자신이 너무 허황한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도착했어!
타티아나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소녀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그들 앞으로 끝없이 펼쳐진 은빛 설원 위로, 하얀 거대한 도시가 우뚝 솟아있었다.
짙푸른 맑은 하늘과 거대 도시 위로 찬란하게 비치는 태양이 그들을 환영하듯 빛나며, 소녀의 마음속 작은 두려움을 모두 녹여버렸다.
말 뒷자리에 앉아 있던 소녀는 눈앞의 장엄한 광경에 절로 탄성을 내뱉었다.
이토록 웅장한 도시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퍼니싱 폭발 이후의 시대에 태어난 그녀는 지금까지 구시대의 폐허만을 보며 자랐기에, 오늘 이전까지는 이런 거대한 도시가 실존한다는 사실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마치 구시대의 신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웅장한 도시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신소피아에 온 것을 환영해. 여기가 우리의 천혜의 도시란다.
금발의 여성은 환영의 의미를 담아 그녀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곳에서는 신분의 차이도, 종족 간의 차별도 없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아가고 있지.
이 땅에서 함께 우리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 나가자.
눈이 녹는 봄이 오자, 신소피아의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난민들의 수가 날로 늘어났다.
이들은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난민들로, 대부분이 원래 극지 주민은 아니었다. 퍼니싱 폭발 이후 극지의 퍼니싱 농도가 낮다는 소문을 듣고 생존을 위해 이곳으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신소피아시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이를 받아들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도시는 점차 체계를 갖춘 대도시로 성장했고, 각 구역이 제 모습을 갖추며 번영하기 시작했다.
부장님, 돌아오셨네요.
타티아나가 국경 협회 후방 지원부에 복귀한 뒤, 새로운 거주민들의 정착지를 준비하는 일상 업무를 보던 중에 발레리가 찾아왔다.
후방 지원부는 이제 신소피아시에서 이름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업무는 다른 기관들에 분산되었고, 타티아나는 이들 기관을 연결하는 중추적 역할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후방 지원부의 부사장이라는 직함만 가진 발레리는 지금 한가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전부터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만, 이제 신소피아도 안정을 찾았습니다.
저도 이제 은퇴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갑자기 은퇴라니...
항상 최전선에서 일하겠다던 발레리가 이런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타티아나는 하던 일을 멈추었다.
왜 그리 놀라시나요? 애초에 개척 기간만 함께하기로 했었잖아요. 이 늙은이를 계속 붙잡아두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물론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말은 미처 끝맺지 못한 채 멈추고 말았다.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뎠을 때의 목표는 이미 오래전에 이루어졌다. 아니, 모두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성과를 이룩했다. 이제는 더 이상 이 백발의 노인을 붙잡아둘 명분이 없었다.
이제 이 도시의 미래는 타티아나와 같은 "젊은 세대"가 이끌어 나갈 차례였다.
네 말이 맞아, 발레리. 영광스러운 은퇴를 축하해.
타티아나는 깊은 존경을 담아 발레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후방 지원부는 발레리가 이룩한 업적들을 영원히 감사하고 기억할 거야.
모든 인수인계를 마친 후, 타티아나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곳은 "집"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허름한 임시 숙소에 가까웠다. 배에서 가져온 짐들은 정리할 겨를도 없이 바닥에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어수선한 공간 속에서 오직 아버지가 남겨준 사진만이 벽난로 위에 정성스레 걸려 있었다. 이것은 그들 가문의 변함없는 전통이었다.
벽난로에 걸린 낡은 사진을 내리는 순간, 그동안 의식적으로 억눌러왔던 기억들이 밀물처럼 마음속으로 밀려들었다.
아버지, 저는 이제... 아버지의 "이상"을 이룬 걸까요?
흐릿해진 흑백사진 속 얼굴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타티아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모든 기억을 마음속에서 되살려보았다.
타티아나, 누구에게나 스스로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온단다.
네가 아직 세상의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을 수도 있어. 하지만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는, 피하거나 망설일 시간조차 없단다.
그렇다면... 지금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도 아버지의 선택이었나요?
아버지의 따뜻하고 큰 손이 타티아나의 이마를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맞아.
싫어요! 아버지... 절대로 죽으러 가시면 안 돼요!
왜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일을 우리가 해야만 하나요? 저는 무슨 부장이 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 무거운 사명감 같은 건... 짊어지고 싶지 않아요.
전 그저... 아버지가 살아계시기만 하면 돼요!
울며 아버지의 팔을 꽉 붙잡은 타티아나는, 지금 이 순간 느끼는 손의 온기마저 곧 사라질까 봐 두려운 듯 더욱 세게 매달렸다.
큰 키의 아버지가 천천히 몸을 낮추어 타티아나의 가녀린 모습을 품에 안았다. 그도 이별의 아픔을 딸에게 남기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부드럽게 그녀를 설득하고자 했다.
내가 선택한 거란다... 내 목숨으로 네 생명을 지키기로.
키아란타의 요구대로 이주 부대를 이끌고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나서는 조건으로, 그들이 우리 마을에 계속 식량을 지원하기로 했단다.
그리고 내 위치에선 이 사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구나.
널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자리를 네게 물려줘야만 한다. 내가 떠난 뒤에도 네가 그들과 대등하게 협상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
오늘부터 넌 평범한 "소녀"가 아닌, 후방 지원부의 "부장"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떠나면 후방 지원부 사람들이 널 도와줄 거야. 어려운 일이 있으면 리사나 아리나, 발레리에게 조언을 구하렴.
그들은 모두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야. 분명 최선을 다해 널 도와줄 거야.
전 이해하고 있어요... 하지만 싫어요.
어머니를 잃은 것만으로도 힘든데 아버지마저...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 뒤, 아버지는 한 사람 몫의 배급품밖에 받지 못해 늘 걱정이 많았다. 그래도 처음엔 자신이 건강하니 조금 적게 먹어도 괜찮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중병에 걸린 이후로 아버지의 표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더 많은 식량을 구하려고 안간힘을 썼고, 그 음침한 이방인들과도 거래를 시도했지만, 모든 노력이 허사였다.
식량은 늘 모자랐고, 타티아나의 배고픔은 계속됐으며, 아버지의 얼굴은 나날이 더 수척해졌다.
오늘 아침, 아버지가 갑작스레 작별 인사를 했다. 이주 부대에 합류한다면서, 타티아나가 자신을 대신해 후방 지원부의 "부장"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타티아나는 잘 알고 있었다. 끝없이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키아란타는 거주지 이전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상은 이주 과정에서 많은 생명을 "희생"시키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누가 봐도 불순한 의도가 담긴 이런 제안을... 타티아나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동의한 것일까?
이렇게 똑똑하고 강인한 아버지였기에, 이것이 함정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결국 <phonetic=자신>타티아나</phonetic>를 위해 이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네가 자라면 이해하게 될 거야.
이 "선택"이 치러야 할 대가가 아무리 크더라도,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단다.
타티아나, 나에게는 네가 바로 그 이유란다.
아버지의 포옹은 따뜻하고 힘이 있었다. 그의 품속은 이 세상의 모든 눈보라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안전한 공간이었다.
우리의 생명은 너를 통해 이어질 거고, 우리가 품은 "이상"도 네가 물려받게 될 거야.
우리를 대신해 이 길을 계속 걸어가 주렴... 이 긴 혹한의 시기도 반드시 끝이 날 거고, 우리도 그 땅으로 돌아갈 날이 올 거야.
그때가 오면, 네가 나를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아버지로서, 난 네가 그 밝은 미래를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문득 들려온 규칙적인 노크 소리에, 타티아나는 긴 시간의 회상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익숙한 방문객이 현관에 서 있었다. 방문객의 얼굴에는 변함없이 다정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내일 밤에 발레리를 위한 퇴임식을 준비했어, 같이 와줄래?
오늘 새로 합류한 친구들이 모두 도와주겠다고 나서서, 굳이 말리지 않았어. 이곳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준비 작업을 미리 나눠줬지.
그녀는 분명 타티아나의 마음을 헤아려 이런 제안을 한 것일 터였다. 이를 깨달은 타티아나의 마음속에 형언할 수 없는 감사함이 가득 차올랐다.
그래, 잠시만. 물건 정리하고 갈게.
밤바다는 얼음창고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검은 파도가 끊임없이 육지를 덮쳐왔고, 쓸쓸하고 황량한 대기 속에는 천 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이어진 조수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등대 정상에서 쏟아진 빛줄기가 바다를 비추고 있었다. 그 빛은 거대한 창처럼 어두운 바닷속을 관통했다.
등대가 세워진 이후, 숲을 지키는 자들이 교대로 바다를 감시해 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기계 외뿔고래들은 더 이상 해안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이 건물이 자신들을 감시하기 위한 것임을 알기라도 한 듯, 기계 외뿔고래들은 소리 없이 자취를 감췄다. 얼음으로 뒤덮인 바다 어딘가로 사라진 것이다.
도시 주민들은 점차 이 등대의 본래 목적을 잊어갔다. 대신 어부들에게는 귀항을 알리는 이정표가 되었고, 그들은 수많은 밤, 이 빛줄기를 따라 도시로 돌아왔다.
타티아나 언니, 다이아나 언니, 오셨네요!
오늘 아침, 눈밭에서 구조한 소녀가 그녀들을 보더니 반가운 얼굴로 달려왔다.
큰 집도 마련해 주시고, 먹고살 수 있는 일자리까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는 정말 저희가 살던 곳과는 달라요. 외지인이든 현지인이든, 어른이든 아이든 차별 없이 모두에게 집과 일자리가 주어지니까요...
내일부터 저도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게 됐어요. 이제는 제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살았던 모든 곳 중에서 이곳이 가장 좋아요!
사실 후방 지원부가 마련한 임시 거처는 개척 시기의 낡은 캠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 유랑민들의 눈에는 꿈에서도 못 본 호화로운 집으로 비쳤다.
다행이네. 그런데... 하룻밤 푹 쉬고 내일부터 도와주는 건 어때?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제가 먼저 돕겠다고 약속드렸으니까요. 빨리 보답하고 싶어요.
선배님의 퇴임식이라고 들었는데, 미룰 수는 없죠.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에게 맡겨주세요. 언니들을 위해 꼼꼼하게 준비할게요!
소녀는 언니들에게 손을 흔들고 임시 거처로 달려갔다.
소녀와 헤어진 후, 그녀들은 모임이 열릴 장소인 등대 꼭대기로 향했다.
등대 꼭대기에 오르자 짭짤한 바닷바람이 그녀들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등대 아래로 펼쳐진 수많은 불빛은 도시의 등불이었다. 하나하나의 불빛은 각각의 가정과 정성껏 보살펴온 희망을 담고 있었다.
여기가 정말 아름답네... 이곳에서 퇴임식을 하게 되면, 특별한 기억이 될 것 같아.
이런 풍경이야말로 우리가 늘 보고 싶어 했던 거잖아.
그래, 이러면 발레리도 안심하고 일선에서 물러나서 나머지 일을 우리에게 맡길 수 있겠지.
타티아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이아나, 너도 피할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 했던 때가 있었어?
만약 다른 사람이 전해준 "선택"을 이어받아 그들의 기대를 안고 계속 나아가야 한다면...
어느 순간, 의문이 들지 않니? "어디까지가 충분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잖아.
마치 이런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다이아나는 전혀 놀라지 않는 표정으로 바닷바람을 맞으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당연하지.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여러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것도, 누군가가 나를 위해 선택해 주었기에 가능한 거지.
하지만 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끝없는 것처럼 느껴져. 어디까지 해내도 자꾸만 스스로를 의심하게 돼.
내가 지금 하는 일이 과연 충분한 걸까? 만약 다른 선택을 했다면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었을까?
우리는 결국 다 같은 "평범한 존재"야. 그래서 타티아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 이해할 수 있지.
그렇군... 네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타티아나는 한숨을 쉬며 방금 전부터 계속 긴장하고 있던 어깨의 힘을 풀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어.
물론 모두가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야. 신소피아시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힘든 시기를 견디는 희망이 되었고, 나는 이 도시가 자랑스러워.
하지만 오늘처럼 생사의 갈림길에서 도망친 난민들을 구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자책하게 돼.
왜 매번 비극이 일어난 뒤에야 도움을 줄 수 있는 걸까?
이런 일들은 애초에 일어나지 말아야 했어. 그들이 겪는 일은 불공평해. 그들은 모두 용감하고 선한 사람들인데, 나쁜 의도를 가진 자들에게 속고 이용당하기를 반복하고 있어.
이 땅의 오래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더 많은 비극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막고 싶어. 이제는 더 이상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속아서 떠돌아다니지 않았으면 해.
이런 생각이 너무 이상적이라는 걸 알아. 현실을 모르는 내 바람이 공허하게 들리겠지.
하지만 오늘 그 소녀와 대화를 나눈 후 확신이 들었어. 난 여전히 "이 꿈을 이루고 싶어". 평생을 바쳐도 "후회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하거든.
타티아나는 깊은숨을 한번 고르고 용기를 모아, 말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었다.
다이아나, 내가... 정말 해낼 수 있을까?
다이아나는 그 말을 듣고 천진난만하게 웃음을 지었다.
겉모습은 또래 자매처럼 보였지만, 사실 다이아나는 타티아나보다 두 배가 넘는 세월을 살아온 터였다.
그래서 다이아나에게 이 질문은 과거의 자신이 던지는 물음처럼 느껴졌다.
그건 말이지, 네가 "선택"을 한 순간부터 이미 중요하지 않았어.
실패할지도 모르면서도, 넌 여전히 그 길을 선택하겠지.
방관할 이유가 없으니까. 오늘처럼 홀로 있더라도, 도움을 청하는 신호만 들리면 그곳으로 달려가겠지.
그렇네.
다이아나가 속마음을 간파하자 타티아나는 쑥스러운 듯 바닷바람에 붉어진 코끝을 문질렀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다이아나가 자신을 깊이 이해하는 진정한 동료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멈추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결말이 아니야.
우리에게 고통을 주었던 "불공평"은 사라진 게 아니야. 얼음바다 아래 잠시 가라앉아 있을 뿐이지.
지금도 얼음 평원 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금자리를 잃은 채 떠돌고 있어. 편견과 두려움에 내몰리고, 다른 이들의 생존을 위해 추방당하고 있지.
내가 온 힘을 다해서 이루고 싶은 "이상"은 명확해. 이런 아픔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
세상에서 이런 부당한 이유로 목숨을 잃는 이도, 부모와 아이가 헤어지는 비극도 사라져야 해.
그들 모두를 위한 평화로운 "낙원"을 만들겠어. 노력하면 반드시 보답받을 수 있고, 이 세상에도 공평함이 살아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어.
나는 이 세상에서 이런 비극을 모두 지워내고 말 거야.
타티아나의 이야기가 끝나자, 다이아나는 평소의 침착함을 잊은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진심 어린 열정적인 모습에 그녀의 가슴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과 같은 원대한 바람이군.
하지만 난 전혀 놀랍지 않아. 나 역시 오래전 누군가에게 같은 말을 들었으니까.
불과 얼마 전까지는 지극히 평범한 소망이었는데, 왜 지금 내게는 이토록 큰 욕심으로 느껴지는 걸까?
시간이 흐르며 나도 한때 당연했던 많은 것들을 잊어가고 있었던 걸까.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바라보는 다이아나의 눈빛에는 지난날의 기억을 되새기는 듯한 그리움이 깃들어 있었다.
타티아나의 말은 다이아나에게 인간이었던 시절, 그토록 오랫동안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기억을 일깨웠다.
이상주의자라 비웃는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과거의 꿈을 소중히 품는 것이 어떻게 잘못될 수 있단 말인가?
꿈처럼 빛났던 그때의 기억들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이 암울한 현실 속에서 이미 오래전에 모든 투쟁의 의지를 잃었을 것이다.
현실이 절망적일수록, 더욱 강하게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결심했다. 나도 이 여정에 동참하겠어. 이제 이건 우리가 공유하는 하나의 "이상"이 된 거야.
다이아나가 돌아서서, 금빛 머리의 타티아나에게 운명을 함께할 손을 내밀었다.
네가 그려낸 이상처럼 이곳을 변화시키고 싶어. 네가 품은 모든 꿈을 반드시 현실로 만들어낼 거야.
비록 지금은 공상에 불과한 "이상"일지라도, 나는 확신해. 이 꿈이 현실을 바꿀 힘을 가졌다는 것을.
우리의 "이상"이 현실이 되는 그날, 반드시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과 활기찬 거리를 보며, 우리의 꿈이 하나둘 현실이 된 모습을 함께 되새겨보자.
그날의 성취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 될 테지.
바다에 비친 무수한 별빛이 등대의 광선과 함께 어둠 속에서 파도를 따라 일렁이고 있었다.
빛나는 바다 위에는 나란히 선 두 실루엣만이 고요히 비치고 있었다.
잠시 서로의 눈을 마주 보던 그녀들은 따뜻한 미소를 나누었다.
이 순간, 우리의 약속을 영원히 간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