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가 끝난 뒤, 무서운 괴물은 사라졌지만, 주변의 적조는 가라앉지 않았다.
카운트다운이 0이 되자,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흉측한 적색에 잠식되어 절망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제타비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그녀의 작은 몸이 하늘이 선택한 자의 품에 안겼다.
품에 안긴 제타비의 하얀 얼굴이 어느새 적색의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모습은 마치 조각난 것 같았다.
제타비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상처는 화살 공격을 받았을 때 생긴 것처럼 보였다.
지금 나 많이 못생겨졌지? 매번 이런 모습이 되어서 짜증 나.
넌 여전히 친절하구나. 항상 그랬어. 그래서 정말 짜증 나.
하늘이 선택한 자야. 미안해. 이번에도 실패했어.
격리 구역을 마련할 시간이 없었고, 모방 백신도 만들 수 없었어.
퍼니싱이 거의 모든 모듈과 링크를 침식했어.
이 세계를 무너뜨리고 파괴한 걸 말하는 거야.
대행자로 위장하여 순식간에 방화벽을 뚫고 들어왔어. 정말 끔찍한 괴물들이야.
방어 명령이 아직 유효했지만, 어떤 연명 치료도 소용없어 보였어.
지금은 설명할 때가 아니야.
내가 말했잖아. 카운트다운이 0이 되면, 세계는 종말의 지점으로 가게 돼 있다고.
핵심 아이템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폐쇄된 공간을 벗어날 수 없어.
권한을 지닌 비밀 열쇠야.
짧은 두통이 하늘이 선택한 자를 덮치자, 순간 기시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color=#ff0e0e>열쇠</color>. 탈출구를 여는 핵심이자, 매우 중요한 것.
예전 여러 번의 헛된 윤회 속에서 하늘이 선택한 자와 제타비는 그것을 잡지 못했다.
이제 조금씩 기억나?
제타비의 몸이 점점 굳어갔고, 그녀는 힘겹게 손을 뻗어 하늘이 선택한 자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불행한 거품아. 흐음흐음.
제타비는 이 세계의 종말과 함께 거품이 될 거야.
짧지만, 아름다운 여정이었어. 하지만 우리는 진정한 시간을 함께 보냈어.
수없이 지나친 풍경도 지루하지 않았잖아? 그렇지?
내가 또 혼자 말하고 있네. 모습이 정말 엉망이야. 정신이 서서히 혼미해지기 시작했어.
내가 전에 말했듯이, 하늘이 선택한 자야, 우리는 아직 진 게 아니야.
다음에는 좀 더 빨리 달리고, 팔을 더 멀리 뻗을 수 있을 거야.
다음에 또 제타비를 만나게 되면, 너무 잘해주지 마.
그러면 지금처럼 아쉬운 이별이 될 거야.
정말이지.
제타비가 하늘이 선택한 자의 손을 놓고, 천천히 가슴으로 가져갔다.
리본 같은 적색 광선 여러 가닥이 제타비의 가슴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자 팔을 벌린 채, 가볍게 몸이 떠오른 제타비는 추악한 세계를 향해 따뜻한 포옹을 선사했다.
모든 연산 능력을 동원해 내부부터 메인 시스템을 재설정할게.
내 몸을 링크를 여는 열쇠로 다시 한번 사용해.
제발... 복원 프로그램 강제 가동!
안녕. 하늘이 선택한 자.
제타비의 작별 인사와 함께, 그녀의 모습이 화려한 빛 속에서 사라졌다.
그 후, 하늘 가장자리에 베일로 가려진 검은 구역이 나타났다.
검은 구역은 조금씩 주변으로 확장돼 나가면서, 덩굴처럼 생긴 넝쿨이 세계를 잠식하는 적조를 붙잡아 허공으로 끌어당겼다.
온 세상이 순식간에 붕괴하였고, 하늘이 선택한 자의 존재도 쓸쓸한 검은 빛에 휩싸이게 됐다.
익숙한 어둠의 바다로 돌아온 하늘이 선택한 자는 이 언덕에서 나는 잔향을 들을 수 있었고, 저 언덕에서 흔들리는 등불을 볼 수 있었다.
하늘이 선택한 자는 의식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 허무에 둘러싸인 요람을 발견했다.
그 안에 있는 존재가 깨어나기 시작했고, 가까운 미래에 새로운 가능성이 될 것이다.
하늘이 선택한 자의 삶이 상대와 융합하기 전, 하늘이 선택한 자의 마음은 여전히 이 세계를 향한 애정으로 가득했다.
하늘이 선택한 자는 아직 태아 상태에 있는 가능성을 부드러운 말로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