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다차원 연출 / 재앙의 파도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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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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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색 덩어리가 조금씩 뭉쳐지면서 모양을 만들었다. 눈을 깜빡이니, 따뜻한 액체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목청을 가다듬었지만, 입에서는 의미 없는 중얼거림만 나왔다.

정신 차리셨어요?

시끄러운 소리가 하나둘씩 내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조금씩 누적되자 이 세계가 느껴졌다.

보육 구역의 임시 진료소에요. 회복은 잘되고 있나요? 침식이 심하게 된 거 같지는 않네요.

30분 후에 혈청 하나 더 주사해서, 몸 상태가 어떤지 볼게요. 문제없다면, 이틀 후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을 거에요.

왜 그러세요. 설마 자신이 누군지 기억나지 않나요?

이상하군요. 이런 증상의 선례는 처음인 것 같은데요.

전에도 적조와 접촉했던 사람을 구했는데, 그 사람이 딴 사람처럼 성격이 변했다는 소문도 있었어요.

어떤 스위치를 켠 것처럼, 기억이 새롭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어? 이제 정신이 들었나 보네요?

어떤 사람은 적조에서 기이한 광경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해요. 의식이 방금 회복돼서, 기억이 혼란스러운 것뿐일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나아질 거예요.

참, 당신이 무엇 때문에 적조를 접촉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을 구해준 공중 정원의 집행 부대가 아직 보육 구역에 있어요. 질문이 있다면, 그들에게 물어보세요.

겸사겸사 감사 인사도 하시고요. 적조를 접촉했는데도 목숨을 건졌다는 건, 정말 운이 좋은 거예요.

말을 마친 의료진이 자리를 떠났다.

머리를 감싸 쥔 난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침대 머리맡에는 낡아빠진 숄더백이 하나 있었는데, 안에는 모두 내 물건인 것 같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물건이 많지는 않았다. 곰팡이가 필 것 같은 건빵 몇 통, 반쯤 남은 붕대, 다 쓴 알코올 병, 만년필 하나, 잉크병 그리고 겹겹이 쌓인 원고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소설이자, 내가 수년간 꾸준히 만들어 온 이야기였다.

후계시록의 세계관, "파도 소리"라는 이름의 재난, 잃어버린 고대의 지혜, 나락으로 가는 여정...

쓸데없는 소리와 심오한 척하는 표현도 내 버릇이었다. 그래서 나 말고도 인내심을 가지고, 소설을 끝까지 읽는 독자가 없었다.

원고지들을 훑어보자, 기억이 더욱 선명해졌다.

솔직히 말해, 그 여정에 관한 대부분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자고 일어나면 잊혀지는 꿈처럼 말이다.

난 작가가 아니다. 지금의 지상에서는 작가가 필요 없다고 할 수도 있었다.

창작은 단지 몇 년 동안 계속된 취미일 뿐이었다. 재능이 없는 사람의 자기만족이라 하더라도 나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이대로 괜찮나요?

누군가가 당신의 이야기를 읽고, 당신의 생각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나요?

진정으로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길 원하지 않으시나요?

머릿속 깊은 곳에 한 줄기 소리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정신 차리세요.

전에 이야기를 나눴던 의료진이 마침 돌아왔다. 그리고 내가 제정신이 아닌 걸 알아챘다.

오랫동안 영양을 섭취하지 않아서 그런 건가? 잠시만요. 다 쓰지 않은 포도당이 있는지 찾아볼게요. 만약 있으면 놔줄게요.

내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그 의료진은 부랴부랴 다른 곳으로 갔다.

반쯤 들어 올린 손을 내린 뒤, 다시 한번 내 침대 위에 펼쳐진 원고지를 들여다봤다.

만년필의 뚜껑을 돌려, 빈 원고지를 꺼내 쓰기 시작했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은 낯선 마을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자신이 유일하게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선택된 자라는 말을 듣게 됐다.

황금시대에 수많은 작품에서 사용됐던 뻔한 클리셰였다. 나 자신이 그 클리셰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물방울이 갑자기 마음속에서 튀어 오르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영감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주인공이 홀로 여정에 오르는 건 너무 외로운 것 같았다.

주인공을 지지해 주고, 이해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주인공을 올바른 길로 안내해주고, 주인공을 잘 아는 동료가 필요했다.

세계는 당신 같은 사람이 재앙을 막아줘야 해요.

그래서 당신이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어요.

여기서 쓸만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마을에 잠깐 들르시겠어요?

심해의 수호자님, 그녀를 쓰러뜨려야만 나아갈 수...

여정의 종점이 바로 앞에 있어요.

이렇게 되면 당신과 저의 사명은 끝났어요.

주인공에게 항상 관심을 가지면서도, 신비한 느낌을 주는 소녀여야 했다.

당신을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로서,

전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릴게요.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에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