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날
이쪽으로 와!
이 세계는 이제 곧 무너질 거야.
그저 또 하나의 세계가, 다시 무너져 내리는 것뿐이야.
내 이름은 ■■■■이야. 시공간 여행자야.
아... 또 너구나.
그래, 역시 너구나.
인간은 이스마엘을 품에 안은 채, 괴물들을 베어내며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마침내 잠시 숨을 돌릴 만한 공간을 찾아냈다.
이스마엘의 손목과 발목은 삼베끈에 거칠게 쓸려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고, 인간은 차마 그녀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손목? 괜찮아. 내 몸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이스마엘은 설명하려다 망설이는 인간의 얼굴과 자신의 발목에 난 상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나를 "걱정"하는 거구나.
이스마엘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인간은 그것이 생각이 깊어질 때의 신호임을 알았다.
생각을 마친 이스마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인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응, 아파.
이스마엘은 눈을 감았다.
고통이 사고를 방해하지는 않았지만, 지독한 피로감은 달랐다. 방금 수많은 이들에게서 "인도"의 실을 거둬들인 탓에, 그녀의 가슴을 덮은 생물 질감의 껍질은 피가 떨어질 듯 짙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스마엘은 어깨에 기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항구는 왜?
이스마엘은 2초 동안 생각하다가, 그날 밤 받지 못했던 구조 전화를 떠올렸다.
슈트롤이 우리 둘을 위해 사 두었던 코린토스행 배표... 너, 정말 그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구나.
우리는 이미 이 "세계"를 자극했어. 이제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중이야. 테베뿐만 아니라 코린토스도, 사람도, 풀 한 포기까지 전부 사라지게 될 거야.
이제 도망칠 정토 따윈 없어. 세계를 구할 방법도 없고.
너는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여길 찾아왔지. 혹시라도 실패했다면...
이스마엘은 무언가 더 말하려다, 결국 긴 한숨으로 대신했다.
고마워.
이스마엘은 손을 들어 올리더니, 마지막에 머리 위에 솟은 웅장한 유리 탑을 가리켰다. 탑 중앙에 인간이 뚫어낸 거대한 구멍이 아직도 선명히 보였다.
탑 꼭대기로 가자. 우리가 처음으로 "제대로 만났던" 그곳으로.
"인도"의 힘은 대부분 거뒀지만, 그 충격으로 톱니바퀴들이 엉망이 됐어. 내가 가서 다시 맞춰 놔야 해.
이 세계는 나에게서 비롯됐으니, 내가 원래의 궤도로 되돌려 놔야지.
적어도 라스티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이사의 기사가 1면에 실리고, 라헤일의 발명품이 세상에 쓰이게는 해줘야 하잖아.
"전쟁"이나 "사랑" 같은 거창한 이야기는 너무 벅차. 내가 만든 디오라마 세계라 해도 너무 넓으니까.
내가 이 안에서 진심으로 아끼는 건, 조그마한 풍경과 몇몇 사람들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네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지.
자, 함께 가자. 아직 내가 맞춰야 할 톱니바퀴들이 많아. 탑이 높으니, 당분간 저 괴물들도 올라오지 못할 거야.
다시 탑 꼭대기의 문을 열자, 내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질서정연하던 톱니바퀴들은 모두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축에서 벗어나고, 닳아서 금이 가 있었다. 예상대로, 이 세계의 규칙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날 내려놔.
이스마엘은 인간의 품에서 벗어나, 부유하듯 톱니바퀴의 잔해 속으로 들어갔다.
이스마엘은 손을 뻗어 어긋난 톱니바퀴 하나를 붙잡아, 제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이건 세 아이들의 궤적이야. 이제 제대로 돌아왔네.
하지만 이 세계에서만큼은 네가 그 아이들을 지켜야 할 부모야. 내가 그렇게 "궤도"를 정해놨거든.
루시아, 리, 리브... 더는 떠돌지 않고 네 품에서 보호받으며, 제대로 교육받고, 제대로 자랄 거야. 군대나 조직에 끌려가는 일도 없이.
그 아이들은 그저 행복한, 평범한 사람이 될 거야.
이스마엘은 몸을 돌려 또 다른 톱니바퀴를 제자리에 맞췄다.
이건 슈트롤과 바렐리아의 궤적이야.
이 세계에선 더 이상 사랑을 포기할 필요도, 억지로 경찰이나 병사가 될 필요도 없어. 번영의 시대에만 피어나는 문학과 예술을 마음껏 누리며 오래도록 살 수 있지.
이건 나의 스승과 친구, 라헤일과 이사의 궤적이야.
이 세계를 마음에 들어 할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즐거워 보여.
탑·3T형 여사의 궤적, 라스티의 궤적, 사의 궤적까지...
이스마엘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톱니바퀴들은 하나씩 제자리를 찾고 다시 맞물리며 질서와 규칙을 되찾아갔다.
그리고... 이건 너의 궤적이야.
마지막 남은 거대한 톱니바퀴 하나가 다른 어떤 톱니바퀴와도 맞물리지 않은 채, 허공 한가운데서 외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상상해 본 적 있어? 퍼니싱도, 전쟁도 없는 세상에서...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이 아닌 너의 모습을.
원래 난 네 궤적도 정해놨었어. 평범한 문학 청년으로 살길 바랐지.
네가 책을 끼고 강의실에 들어가서, 교수님과 토론하고, 학교나 동네에서 친구를 사귀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
세상을 하나씩 배워가는 너를 지켜보는 것도 참 흐뭇했어. 책을 읽고, 게임도 하고, 어려운 글을 쓰거나 토론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의견이 달라 다투기도 하고.
그러다 조금씩 너를 내 곁으로, "교황"인 나의 곁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어. 그래서 네 톱니바퀴를 살짝 돌릴 생각이었지.
그런데 그때 알았어. 너의 "톱니바퀴"는 다르다는 걸.
내 힘으로는 거의 움직일 수가 없더군.
네 자유는 정말 끝이 없어. 너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 무엇에도 인도받지 않는 존재야.
이유는 나도 몰라. 하지만 그걸 알아내려던 참에... 일이 터지고 말았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너도 알잖아. "인도"의 힘이 점점 통제를 벗어나면서 전쟁과 암살이 이어졌지. 사실 어떤 문명이든 성장하다 보면 이런 일은 피할 수 없었을 거야. 디오라마 세계조차 예외는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서서 "인도"를 회수하려 했지만, 이 디오라마 세계가 날 거부했어. 그래서 그 다음 일들이 이어진 거고.
"교황의 장례식" 날, 네가 슈트롤에게 말했지. 우리가 뭘 해도 "소용없는 것" 같다고, 마치 누군가 "일부러 이끄는 것" 같다고. 바로 그때 깨달았어.
내가 이 "디오라마 세계"에 흩뿌린 "인도"의 힘이, 현실의 너까지 이 세계로 끌어들였다는 걸.
그래서 내가 너의 궤적에 손을 댈 수 없었던 거야.
이스마엘은 드물게도, 후련한 웃음을 터뜨렸다.
넌 역시, 특별한 변수였어.
이스마엘은 인간의 톱니바퀴에 가볍게 손을 얹어 마지막 조율을 끝낸 뒤, 다시 인간에게 돌아왔다.
원래는 "인도"의 힘만 회수하면 그만이었어.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었지. 불에 타 죽는다 해도 괜찮았어. 내가 만든 디오라마이니, 내 손으로 끝내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네가 나타나면서, 이 톱니바퀴들이 스스로 돌아가기 시작했어. 네가 축이 되어,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 거야.
봐. 덕분에 이 세계의 마지막에, 내가 결코 잊지 못할 장면들이 더해졌어.
이스마엘은 인간의 품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를 찾아, 가볍게 몸을 기댔다.
이제 모든 힘을 거두었어. 마지막으로... 곧 사라질 이 세계를 함께 보자. 나의 착한 그레이 레이븐.
그때, 우리가 엔디미온에서 함께 노을을 봤던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유리 탑 너머에는 엔디미온의 아름다운 노을은 없었다. 태양은 광기 어린 빛을 뿜어내며, 탑 아래의 괴물들을 위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햇빛이 지나치게 "밝아서", 하늘은 비현실적으로 짙은 푸른빛을 띠었다. 그래서 더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저기, 옥상 끝에 앉자.
이스마엘은 인간을 "이끌어" 전망이 좋은 자리에 앉혔다.
방금 그 톱니바퀴들 봤지? 나는 너희들 중 많은 이들에게 미련이 남았어. 그래서 일부러 이 "디오라마 세계"를 만들었던 거야.
사실 이런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야. 나는 항상 세상을 내려다보는 "자리"를 찾아왔거든.
예를 들면, 오랜 옛날 원시 부족의 벽사 사제나, 유리 탑 꼭대기에서 찬란한 세상을 바라보던 교황, 혹은 공중 정원의 감사원 같은 자리 말이야.
나는 언제나 객관적으로, 중립적으로, 공평하게 모든 이야기를 그저 내려다보고 싶었어.
미안. 사람은 누구나 헛된 꿈을 꾸잖아. 나도 예외는 아니었나 봐.
이기적이라고만 하지는 말아줘...
이스마엘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무게를 잃고 흩어질 듯 가벼웠다.
인간 문명의 종말을 막은 건 너와 수많은 사람들의 발버둥 덕분이었지. 네 날개가 달린 흰색 까마귀는 어땠을까? 우리도 수많은 동료를 잃었지만, 결국 결말을 바꾸지 못했어.
나는 열죽음을 피하고, 절망을 외면하며, 언제나 중립을 지켜왔어. 기나긴 시간의 강 속에서 격렬한 감정 따위는 버린 지 오래였지.
그런데 너희를 보면서... 인간 문명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에게도 결국 이런 욕망이 생기더군.
격렬한 전투 때문인지 시야가 흐려진 탓인지, 한순간 이스마엘의 몸이 투명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시 보니, 이스마엘은 그저 고개를 떨군 채 나직이 속삭이고 있을 뿐이었다.
나... 너무 외로워.
그녀의 속눈썹이 서서히 새하얗게 물들어 갔다. 가볍게 떨리는 흰 속눈썹은 인간의 눈에 그저 새하얀 얼룩으로 번져나갈 뿐이었다.
나도 결심했어. 이 힘을 더는 흩어지게 두지 않을 거야. 전부 거두고, 봉인해서... 다시는 제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할 거야.
분홍빛이 섞인 하얀 형체가 다가왔다. 이스마엘의 손이 인간의 두 뺨을 감싸고,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끌어당겼다.
먼저 내가 사과를...
인간은 이스마엘의 손을 맞잡고, 그녀의 눈을 진지하게 마주 보았다.
……
이스마엘은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
이 세계는 엉망진창이지만... 네가 있어서, 난 좋아.
이스마엘은 인간의 품에서 일어나, 푸른 하늘의 끝을 향해 걸어갔다.
끝내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인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대로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나는 본래 존재해선 안 될 힘의 집합체야. 나를 사랑하는 방법은... 나를 놓아주는 거야.
모든 "인도"의 힘을 거두어, 이스마엘은 다시 이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탑에 머물던 새들이 떼 지어 날아올라, 떨어지는 그녀의 옷자락을 물고 함께 하늘로 올랐다.
나는 흩어져서 이 세계에 스며들 거야. 하늘로 날아올라 해와 달이 되고, 이 세계 그 자체가 될 거야.
잘 있어. 분명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다시 만날 기회가 있겠지. 네가 전에 그랬잖아.
"우리는 절대 작별 인사를 하지 말자, 이건 내 부탁이야."
난 너랑 같이 엔디미온의 일몰을 봤고, 시간의 틈을 함께 지나왔어.
너랑 함께 나라의 탄생과 소멸, 행성의 멸망, 또 다른 항성의 탄생도 지켜봤어.
……
이제 더 많은 걸 기대해도 되겠지?
하지만…
다음엔 그냥 새 한 마리만 돼도, 난 그걸로 충분해.
이스마엘은 인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치맛자락은 이미 부서져 수많은 깃털이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날 기억해 줘. 제발...
하지만 이스마엘은 끝까지 말할 생각이 없었다.
마치 솜뭉치가 공중에서 사라지듯, 그녀는 떨어지며 흩어졌다.
요란한 날갯짓 소리가 인간의 귓가를 가득 채웠다. 이스마엘이 추락한 궤적을 따라 셀 수 없이 많은 새들이 쏟아져 나와 하늘을 뒤덮었다.
곧 새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너머로 다시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의식이 서서히 몸에서 빠져나가며, 곧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분홍빛이 감도는 하얀 하늘은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그것은 이스마엘을 꼭 닮았다.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흰빛. 하얀 태양과 하얀 달이 동시에 떠 있었다.
오래 전, 하늘에서 이런 눈동자를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언제, 어디였는지는 흐릿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태양과 달이 은은한 빛을 발하며,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것이, 이스마엘의 대답이었다.
한 달 후, 컨스텔레이션 가장 높은 곳.
인간은 단말기의 안내를 따라, 기계체가 운영하는 새로 생긴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에 분홍빛 실루엣이 앉아 있었다. 마치 밖의 분홍빛 석양과 하나가 된 듯했다.
초대한 사람이 들어오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이했다.
근처에서 임무 중이라고 들었어. 그래서 일부러 불렀지. 요즘은 좀 괜찮아?
최근의 네 일상이나 임무 기록을 쭉 지켜봤는데, 아무 문제 없어 보이던데?
이스마엘은 안심했다는 듯 웃으며, 스푼으로 잔 속을 가볍게 저었다.
커피. 우유는 조금 넣고, 설탕은 가득하게, 이게 제일 맛있거든.
네 눈을 보니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나한테 뭘 주려고?
인간은 주머니를 뒤져, 작은 오동나무 주사위를 꺼내 이스마엘에게 내밀었다.
주사위는 핏자국 하나 없이 말끔했다.
하지만 시선이 마주친 순간, 오직 둘만이 아는 그 은밀한 세계의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었다.
기념으로 네가 가져.
이스마엘은 다시 스푼으로 커피를 저어, 완벽한 원을 그려냈다.
아니, 임무는 없어. 아무 좌표나 찍고 온 것도 아니고.
여길 택한 건 우연이 아냐. 내 마음을 읽어봐, 그레이 레이븐.
스푼을 내려놓은 이스마엘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서로의 속눈썹을 셀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눈치챘어? 난 일부러 널 찾아온 거야.
온 세상을 너무 자유롭게 떠도는 그레이 레이븐 때문에... 내 발자취에도 일정한 궤적이 생겨버렸지.
이스마엘은 손가락을 들어 인간의 눈앞에 원을 그렸다.
내가 톱니바퀴라면 인정해야겠네. 지난 한 달, 네가 내 회전의 축이 됐으니까.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야. "깃털도 가지런하고, 기운도 되찾은 것 같네".
인간의 눈에서 원하는 대답을 읽어낸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댔다.
그렇게, 하나의 원이 완성되었다.
이스마엘은 자신 옆에 있는 의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번에는 우리 같은 풍경을 나란히 볼 수 있겠네.
위에서 그저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정말 이 세계 안에 스며들어 바라보는 거네. 이런 풍경을 보여줘서 고마워.
자, 이리 와. 내 옆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