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앙카의 초대로 그녀의 방에 들어섰다. 며칠간의 임무로 지친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자, 오랜만에 느껴지는 편안함이 온몸을 감쌌다.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향기에 이끌려 고개를 돌리자, 테이블 위에 정교하게 놓인 유리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병 안의 액체들은 저마다 다른 빛깔을 띠고 있었다.
지휘관님, 향이 느껴지시나요? 물론 아직 "향수"라고 부르기엔 부족하지만요.
상업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DIY 향수 키트"예요. 점원이 여기 있는 여러 향을 섞어서 자신만의 향수를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원래라면 제가 미리 생일 선물을 준비했겠지만, 이번만큼은 지휘관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비앙카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한 듯 인간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휘관님만의 특별한 향에... 지휘관님과 함께한 추억을 담고 싶어서요.
설명서에 따르면 향수에는 보통 톱, 미들, 베이스 노트가 있고, 시간에 따라 단계별로 다른 향이 느껴진다고 해요.
지휘관님과 함께 마음에 드는 향 세 가지를 골라,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향수를 완성하고 싶어요.
인간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앙카가 조용히 등 뒤로 다가왔다. 무얼 하려는 건지 묻기도 전에, 부드러운 천이 눈앞을 스치며 시야를 가렸다.
그녀는 매듭의 강도를 세심하게 조절해,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면서도 불편하지 않게 해주었다.
하나의 감각이 차단되면, 다른 감각이 더욱 예민해지는 법이죠. 잠시만 눈을 감고 향에 집중해 보세요.
향 이름이 무엇인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저 온전히 느끼신 다음... 마음에 드는지만 알려주세요.
비앙카가 말한 대로, 눈을 감자 귀에 들려오는 그녀의 움직임이 한층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시향 지에 병 속의 향수를 조심스럽게 묻히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비앙카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옷감이 스치는 미세한 소리도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몸을 돌려 살며시 다가오는 기척까지도 느껴졌다.
차갑고 서늘하지만 맑고 깨끗한 느낌이었다. 마치 새하얀 설원 위로 눈송이가 소복이 쌓이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향이었다.
지휘관님,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무엇이든 괜찮으니, 첫인상을 그대로 말씀해 주세요.
맞아요. 라벨에 "눈"이라고 적혀 있어요. 역시 예리하시네요. 저도 참 좋아하는 향이에요.
"톱 노트"는 향기의 첫인상을 좌우지하죠. "톱 노트"의 향을 제대로 느꼈으니, 다음은... 가장 중요한 "미들 노트" 차례예요.
"톱 노트"가 짧게 스치고 나면, "미들 노트"의 향이 몇 시간 동안 지휘관님 곁을 감싸게 될 거예요.
비앙카의 말과 함께, 공기 중에 새로운 향이 스며들었다.
앞서 느꼈던 "눈"의 차가운 향과는 전혀 다른, 맑고 은은하면서도 생명력이 넘치는 향이었다.
곧 머릿속에 따스한 봄날 아침 햇살 아래, 들판 가득 피어난 백합들이 서로 경쟁하듯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모습이 떠올랐다. 이어 나뭇잎과 꽃잎들이 산들바람에 살랑이는 광경도 함께 그려졌다.
지휘관님, 이번에는 또 어떤 새로운 느낌이 드시나요?
백합꽃 향이 마음에 드시나 보군요. 저도 참 좋아하는 향이에요. 한겨울이 지나 눈이 녹으면, 봄에 백합꽃이 피어나죠.
이제 마지막으로 이 향수의 "베이스 노트"를 고를 차례예요.
향수 키트 설명서에 따르면 "베이스 노트"는 음악의 여운과 같아서, 며칠이고 향이 남아 쉽게 잊히지 않는다고 해요.
비앙카의 미세한 움직임에서, 그녀가 마지막 향기를 망설이며 고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여러 개의 병뚜껑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는 걸 보니, 쉽게 하나를 고르지 못하는 듯했다.
잠시 후 옷자락이 새로운 향기를 싣고 곁으로 다가왔다. 마침내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방금 전보다 훨씬 가까이 다가온 비앙카의 머리카락이 인간의 뺨을 스치며, 그녀만의 향기를 남겼다.
따스한 숨결 사이로, 시향 지를 든 손에서 새로운 향이 느껴졌다.
앞서 두 번 맡았던 단순하고 뚜렷한 향과 달리, 이번 향은 한층 묵직하면서도 조화로웠다. 여러 가지 향이 어우러져, 순간적으로 입체적인 장면이 떠올랐다.
벽난로에서 소나무 장작이 타닥거리며 내는 은은한 향, 흔들리는 촛불의 독특한 향, 그리고 그사이를 파고드는 고소한 음식 냄새까지 느껴졌다.
이 다양한 향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가운데, 유독 뚜렷하게 다가온 건,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누군가의 따스한 온기였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이건... 제가 나름대로 조합해 본 향이에요. 이제 눈을 가린 천을 풀어 드릴게요.
죄송해요. 묶을 때 매듭이 조금 복잡하게 엉킨 모양이에요. 잠시만요... 금방 풀어 드릴게요.
뺨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비앙카의 손끝이 살며시 귓가를 스치더니, 머리 뒤에 묶여 있던 매듭을 천천히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잠시 후, 눈을 가렸던 천이 마침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을 뜨자, 비앙카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잠시 흠칫했다.
둘은 한동안 서로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윽고 비앙카가 시선을 거두며, 살짝 붉어진 뺨 위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지휘관님... 제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향수를 만들어 드릴게요. 오직 지휘관님의 생일을 위한 특별한 추억이 될 수 있게요.
비앙카는 조금 전 인간이 고른 향수를 절차에 따라 섞어 나갔다. 그녀의 손길에 따라, 전혀 다른 새로운 향이 방 안을 서서히 채워나갔다.
잠시 후, 비앙카가 다시 인간의 눈앞에 섰다. 그녀의 손에 든 병 속 맑고 투명한 호박색 액체는, 이 순간 인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와 같았다.
비앙카는 손끝에 향수를 묻혀 인간의 손목과 귓불, 그리고 목덜미에 조심스럽게 발라주었다. 그녀의 따스한 손길을 따라, 은은한 향기가 두 사람의 곁을 오래도록 맴돌았다.
인간은 눈을 감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한 이 순간의 분위기에 온전히 몸을 맡겼다. 그때, 귓가에 비앙카의 나직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평소보다 한층 더 깊고 진심 어린 목소리였다.
생일 축하드려요, 지휘관님. 선물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이 향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지휘관님과 함께한,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오늘… 그리고 앞으로 함께할 모든 날은 제 마음속에 깊이 새겨질 거예요.
항상 지휘관님과 함께할 수 있다면... 저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