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임무 보고서에 서명한 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위에 올려놓았다.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대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지휘관은 천장의 창백한 불빛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번 생일은 이렇게 지루하게 지나가는... 건가?
"쾅". 한탄하던 그 순간, 갑자기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거대한 화염구가 땅에 떨어지며, 이글거리는 열기가 얼굴을 덮쳤다.
하늘이 선택한 자, 얼른 도망쳐! 여긴 위험해!
폐허 속에서 작은 소녀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지금 상황을 보고도 모르겠어? 종말이야, 세계가 종말한다고!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그레이 레이븐 휴게실에 있어야 하는데?
얼른 가자고!
제타비는 다급하게 손을 흔들더니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다.
지휘관은 아무렇지 않은 척 제타비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평소엔 가만히 있지 못하던 꼬리가, 이 순간만은 마치 어딘가의 인터페이스에 연결된 것처럼, 얌전히 갈라진 대지 속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아야!!!
뭐 하는 거야?!
손을 잡으라고, 꼬리 말고!
아, 심심해.
종말의 광경이 사라지고, 눈앞에 다시 그레이 레이븐의 휴게실이 나타났다. 방금 전의 환각은 역시 제타비가 스마트 조명을 이용해 만든 연출이었다.
공중 정원... 그래, 공중 정원이 곧 추락해!
멀쩡할 때 빨리 도망쳐야 해. 진짜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땐 늦는다고.
방금 네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커다란 구체가 땅에 꽝 하고 부딪히는 거! 공중 정원이 지구랑 부딪히는 모습이라고!
제타비가 일부러 시뮬레이션해서, 너한테 보여준 거야!
그건...
제타비 데이터베이스에 미술 자료가 아직 부족해서 그래! 당장은 공중 정원처럼 복잡한 모델을 못 만드니까, 대충 느낌만 봐, 느낌만!
지휘관이 여전히 시큰둥해하자, 제타비가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슝" 하고 지휘관의 사무실 책상 위에 올라앉아, 심심한 듯 두 다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있잖아, 하늘이 선택한 자...
제타비는 턱을 괸 채 먼 곳을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여기 계속 있으면, 무섭지 않아?
높이 떠 있는 정원, 매일 똑같은 일상... 지루하고 답답해서, 가끔은 절망감이 들기도 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잖아.
제타비는 다른 곳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지휘관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이런 삶이야말로 "세계의 종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냥 살짝 자극해 본 거야. 안 그러면 이렇게 답답한 곳에만 있다가 무뎌져 버릴 테니까.
그래서 말인데... 단 하루만이라도 제타비랑 같이 도망가자. 우리 둘이, 아주 먼 곳으로...
...
"세계의 끝"으로.
그렇게 제타비는 지휘관을 공중 정원에서 "몰래" 빼내는 데 성공했다. 세계의 종말을 피해 세계의 끝으로 향하는, 둘만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수송기의 착륙 장치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며,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극지에 착륙했다.
제타비는 재빨리 두꺼운 방한복을 챙겨 입고는, 지휘관의 지퍼를 목 끝까지 "쭉"하고 올려주었다.
헤헷, 빵빵한 게 꼭 커다란 눈사람 같네.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보다 훨씬 귀여운데?
에이, 삐지기는. 멋있을 땐, 매번 전장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이렇게 칭찬할 틈도 없잖아.
당연히 좋지~ 서류 더미에 파묻혀 인상 쓰고 있는 것만 아니면 다 좋아.
자, 착하지~ 눈사람, 제타비랑 같이 가자. 이제 거의 다 왔어.
제타비는 방긋 웃으며 지휘관의 손을 이끌고 눈 덮인 설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쌓인 눈 위로 롱부츠가 깊고 얕은 발자국을 남겼다.
제타비는 지휘관의 손을 놓고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가끔은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어느 순간 불쑥 나타나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았다.
눈 안개를 헤치자, 마치 오래전부터 그곳에서 기다린 것처럼, 제타비가 다시 표지판 옆에 나타났다.
음... 이제 눈이 그치려나 봐~
제타비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니, 흩날리던 눈보라가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눈 벽의 틈새 사이로 살짝 비친 금빛이, 마치 물결처럼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그 빛의 물결은 점점 더 찬란하게 빛나며, 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커튼이 되어 눈앞에 드리워졌다.
오로라였다.
찬란한 빛이 제타비의 눈동자에 드리워져, 유리 빛깔의 보석처럼 영롱하게 반짝였다.
설원과 오로라, 그리고 소녀... 이 끝없는 적막 속에 제타비와 지휘관, 단 둘뿐이었다.
어때? 우리가 도망쳐 온 종착점, 나쁘지 않지?
왜 말이 없어? 눈앞의 광경에 넋을 잃었나 보네?
어떻게 했냐니... 그냥 데려오고 싶어서 데려온 거지.
제타비는 시선을 돌린 채, 괜히 발끝으로 쌓여있는 눈을 툭툭 찼다.
그야, 생일이잖아. 생일엔 늘 세계 종말이 찾아오니까.
있는 힘껏 도망쳐야지.
그래. 제타비 생일은 항상 운이 안 좋았으니까.
제타비가 태어난 날도, 또 제타비의 생일이던 날도, 매트릭스 속에서 "세계의 종말"이라 할 만큼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고난을 겪어야 했다.
내 곁엔 언제나 하늘이 선택한 자가 있었고, 매번 내 손을 잡고 아주 먼 곳으로 데려가 줬었잖아.
그래서 생각했어. 네 생일이 되면, 네가 내 손을 잡아주었던 것처럼 나도 너와 함께 도망갈 거라고.
그거 알아? 나 사실 오늘 공중 정원이 떨어질까 봐 엄청 걱정했어. 어디선가 갑자기 괴물이 튀어나오진 않을까, 어느 엔진이 갑자기 터지진 않을까 하고...
매트릭스에 있었을 때처럼, 생일만 되면 꼭 안 좋은 일이 터질 것만 같았거든.
그래서 바보처럼 구석구석을 확인하고 다녔어. 심지어 그 잔소리꾼
아무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어. 그러고 나서 휴게실에 널 찾으러 갔는데, 네가 서류 더미 앞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더라.
어쩌면 세계의 종말은 다른 모습으로 찾아올지도 몰라. 분명 그럴 거야.
응, 하루뿐이라 해도 상관없어. 나의 하늘이 선택한 자는, 오늘만큼은 행복한 일만 가득해야 하니까.
별빛 아래, 눈 위를 걸어오는 제타비는 아름다운 정령 같았다.
그곳에는 전장도, 임무도 없어. 오직 제타비와 하늘이 선택한 자, 둘만이 멍하니 시간을 보내며 웃고 떠들고,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하는 것뿐이야.
364일 동안 캄캄한 밤하늘 아래에 있었더라도, 결국 세계의 끝에서 우리만의 오로라를 찾게 될 거야. 그리고...
제타비는 한 걸음씩 다가와, 지휘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이 빛은 모든 별을 비추고, 나를 비추고, 또 너를 비춰줄 거야.
제타비는 지휘관의 품으로 파고들며, 두툼한 방한복에 얼굴을 묻었다.
생일 축하해, [player na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