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관은 루시아의 손을 잡은 채, 하얀 모래와 파도를 밟으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둘은 밤하늘의 별빛을 두르고, 해안가의 춤추는 사람들을 가로질렀다.
달빛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나뭇가지를 헤치며 우거진 숲을 지나자, 반쯤 허물어진 유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물어진 대리석 기둥들이 평지 위에 늘어서 있었고, 그 뒤로는 웅장한 신전이 우뚝 솟아있었다.
달빛이 반사된 유리창은 번영했던 고대 문명의 석양빛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기둥들 사이를 거닐던 중, 누군가의 제안으로 지휘관과 루시아는 자연스럽게 숨바꼭질을 시작했다.
8, 7, 6, 5...
4, 3, 2, 1!
지휘관님, 다 숨으셨나요?
루시아가 눈을 떴을 때는 달이 구름에 가려져 있었고, 주위는 깊은 정적에 잠겼다.
신전의 낡은 정문에서 시작해, 루시아는 밤의 장막이 드리운 유적을 둘러보며 지휘관을 찾아다녔다.
지휘관님이라면...
루시아는 발소리를 죽여가며, 한 대리석 기둥 앞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여기 계실 것 같네요!
루시아가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았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건 뭐지?
돌벽에는 하트 문양과 두 줄의 고대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고대의 연인들이 남긴 이름 같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더 많은 하트가 눈에 들어왔다. 여러 시대의 사람들이 이 돌기둥에 자신과 연인의 이름을 새겨놓은 것이었다.
이끼로 뒤덮인 그 이름들은 카타니아의 오랜 역사와 함께해왔다.
루시아가 그것들을 유심히 바라보는 사이, 먹구름 속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루시아의 뒤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한 루시아는 긴장을 살짝 풀었다.
갑자기 루시아의 시야가 캄캄해졌다.
지휘관님...
익숙한 온기가 뺨에 닿자, 루시아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지휘관의 손목을 잡았다.
어디로 가는 거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루시아는 지휘관의 안내에 따라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소리가 멈췄고 공기 속엔 은은한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걷히자, 눈앞에는 바람에 춤추는 센토레아 꽃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
꽃바다 한가운데 선 루시아의 입가엔 어느새 미소가 번졌다.
루시아가 옆을 돌아보니, 지휘관도 그녀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폐허 속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루시아는 허리를 숙여 파란 꽃잎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들판에 피어난 파란 정령 같은 꽃들이 루시아의 손끝을 따라 물결치듯 춤추었다.
콰르릉.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카타니아의 변덕스러운 하늘에서 요란한 천둥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굵은 빗방울이 꽃바다를 덮치자, 루시아는 지휘관의 손을 잡고 저 멀리 보이는 신전을 가리켰다.
지휘관님, 저기로 가요!
다행히 둘은 예복이 완전히 젖기 전에 낡은 대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녹슨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자, 화려한 예배당이 눈앞에 펼쳐졌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달빛이 돔 천장을 타고 쏟아져 내리며, 웅장한 기둥들을 은은히 비추었다.
석화, 종교화, 천사상, 그리고 발밑에 비친 스테인드글라스의 문양까지... 이 신성한 공간은 자연이 칠해준 아름다운 색채로 점점 물들어갔다.
지휘관과 루시아는 화려한 빛을 받으며, 나선형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밖에서 봤을 땐 더 오래된 신전처럼 보였는데...
안에는 중세 시대의 예배당으로 개조되어 있을 줄은 몰랐네요.
맞아요, 지휘관님. 저기 보세요.
루시아가 돔 천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채로운 빛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냈고, 그 그림의 아래쪽에는 검을 뽑아 든 기사가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곧이어 시선을 위로 옮기자, 웨딩드레스 차림의 소녀가 높은 성벽에서 던진 면사포가 기사의 머리를 덮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림 위쪽에는 올리브 가지를 문 흰 비둘기들이 성모를 에워싸고 있었고, 성모의 가슴팍에는 로마 숫자 "Ⅻ"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제 추측이 맞다면... 이 그림은 루키아의 결혼식을 그린 걸 거예요.
루키아는 나폴리 왕국의 공주였어요. 그리고 그녀의 애인은 신분이 낮긴 했지만, 누구보다 용맹한 백전백승의 기사였죠.
둘은 서로 깊이 사랑했으나, 결국 신분의 벽에 부딪혀 부부가 될 수 없는 운명이었어요.
루시아의 이야기가 고요한 예배당 안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지난 천 년 동안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수많은 여행자와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왔을 것이었다.
어느 날, 적국의 사신이 나폴리를 찾아왔어요. 그리고 그 사신은 가는 곳마다 오만방자하게 굴며 백성들을 괴롭혔고, 심지어는 루키아까지 모욕하여, 나폴리 전체가 크게 분노했죠.
이에 루키아의 연인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사신과 결투를 벌였고, 그에게 큰 상처를 입혔지만… 왕국의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황제에게 사형을 선고받았죠.
루키아는 연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처형장에 나타났어요. 그러고는 자신의 면사포를 기사에게 던지며, 모든 이 앞에서 그의 신부가 되겠다고 선언했어요.
루시아는 은은한 달빛이 비친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 속, 루키아가 던진 면사포를 올려다보았다.
나폴리의 오랜 전통에 따르면, 12시의 종소리가 울리게 되면, 황제는 공주의 결혼식에서 그녀의 소원 하나를 들어줘야 했어요. 이에 루키아는 아버지께 애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했죠.
그렇게 종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기사의 죄가 사면되었고, 나폴리의 백성들은 루키아에서 처형장의 결혼을 축하하며 큰 축제를 벌였어요.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혹시 눈치채셨나요? 이 예배당에는 여섯 개의 아치형 문과 열두 개의 기둥이 있어요.
기둥 하나하나마다 천사 조각이 새겨져 있고요.
건물 내부를 둘러보니, 루시아의 말처럼 여섯 개의 아치형 문과 열두 개의 기둥이 거대한 공간을 받치고 있었다.
밖에 있는 고대 광장에도 열두 개의 거대한 돌기둥이 남아있어요.
네, 카타니아 사람들은 "12시"에 대해 종교적인 열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혹시... 루키아의 전설이 이 땅에 큰 영향을 준 건 아닐까요?
저도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지휘관님과 같은 생각이었어요.
결국... 이건 단지 하나의 전설일 뿐이니까요. 이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거예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건 아마 그 이야기 속에 담긴 정신과 의미였겠죠. 그래서 이 이야기가 이곳에 오래도록 전해져 내려온 게 아닐까요?
잔잔한 빗소리가 이어지던 그때, 루키아에 관한 두 전설이 머릿속에서 서서히 맞물려졌다.
화려한 빛이 루시아의 얼굴을 비추는 가운데, 지휘관과 마주 보던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루키아는 청혼이라는 해결책을 통해 처형장의 애인을 구했다는 말씀이죠?
네, 그때 지휘관님의 대답은...
......
그녀는 조용히 지휘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둘이 나눈 이야기는 일종의 트롤리 딜레마와도 같았다. 레버를 당길지 말지 저울질하는 상황 그 자체였다.
이는 빠져날 구멍이 없는 역설이었으며, 한 번 휘말리면 끝없는 논쟁의 늪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이는 단순한 사고 실험에 불과할 뿐, 현실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터였다.
선택에 대해 고뇌하는 순간, 이미 생명의 가치에 경중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인 셈인 것이다.
둘은 선택의 기로에서 끝없이 고민하고 논쟁하면서도, 정작 이 곤경을 만든 진짜 원흉은 놓쳐버렸다.
루키아와 거래한 악마 말씀인가요?
......
루시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 조금 알 것 같아요.
선택의 옳고 그름이나 득실을 따지기보다, 그것을 뛰어넘어서 이 난제를 만든 근원에 맞서야 한다는 말씀이죠?
지휘관의 대답을 들은 루시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극작가와 시인들이 머리를 짜내며, 루키아의 전설에 새로운 결말을 써내려 했어요.
저는 지금 들은 이 결말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감사해요. 지휘관님.
그 후 지휘관과 루시아는 예배당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나간 추억,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상상을 주고받으며, 이야기꽃을 피워나갔다.
평온한 분위기에 젖어 들다 보니 어느새 피곤이 밀려왔고, 귓가의 대화 소리도 희미해졌다.
포근히 감싸는 느낌에 지휘관의 의식은 새하얀 깃털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귓가에는 희미한 속삭임만이 들려왔다.
지휘관님?
루시아가 옆을 바라보니, 지휘관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돌벽에 기대어 있었다.
......
이에 루시아는 조용히 다가가 <M>그</M><W>그녀</W>의 어깨에 기대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지휘관님.
빗방울이 잦아들고,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은하수도 어느새 달콤한 꿈속으로 스며들었다.
......
의식이 흐릿해진 루시아는...
꿈속에서 아득히 먼 과거의 오후로 되돌아간 듯했다.
언니, 여기 예쁜 드레스가 있어!
그날 집으로 돌아가던 길, 루시아의 여동생이 문득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우와, 반짝반짝 빛나!
눈부신 쇼윈도 안에는 새하얀 드레스가 있었다.
처음 그 드레스를 마주했을 때, 루시아는 마음속에서 작은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예쁘다.
동화 속 공주님이 입는 옷이 바로 이런 거겠지?
언니, 안에 더 많은 옷들이 있어!
루나,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돼!
여동생이 루시아를 이끌고 가게 문을 열었다.
우와!
눈앞에 펼쳐진 건 새하얗게 빛나는 세상이었다.
마치 꿈에서나 나올법한 궁전 같았으며, 곳곳에 방금 본 드레스들과 닮은 옷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 어머, 귀여운 꼬마 손님들이네, 안녕.
안녕하세요. 여기 옷들이 너무 예뻐요.
히히, 나도 엄마 아빠한테 이런 드레스 사달라고 할래!
주변을 둘러보던 루시아의 시선이 한 진열장에 멈춰 섰다.
천천히 다가서자, 투명한 유리창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조명 아래, 분홍빛 복숭아꽃으로 장식된 면사포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이건 웨딩드레스란다. 너희 같은 공주님들이 결혼할 때 입는 아주 특별한 옷이야.
웨딩드레스요?
문득, 어젯밤 어머니가 들려준 "웨딩드레스" 이야기가 떠올랐다.
주인공이 애인을 구하기 위해, 처형장의 높은 벽 위에서 자신의 면사포를 던진 이야기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만약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그녀처럼 용감할 수 있었을까?
결혼은... 엄마 아빠처럼, 동화 속의 왕자와 공주처럼 되는 건가요?
맞아. 웨딩드레스는 신성한 결혼을 의미하고,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하나 되는 걸 상징한단다.
여자아이에겐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순간을 위한 특별한 옷이지.
일생에 단 한 번...
점원의 설명을 듣던 루나가 결혼식에 대해 계속 물어봤다.
그건 말이지,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을 찾아야 해.
어떻게 "잘 맞는 사람"인지 알 수 있나요?
루시아의 질문에 점원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다른 빛을 지니고 있어. 어떤 빛은 희미하고, 어떤 건 눈부시게 반짝여.
그리고 아주 가끔, 무지개처럼 찬란한 빛을 내뿜는 사람이 네 세상에 나타날 거야.
그런 반짝이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지금 내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될 거야.
......
루시아는 유리창 너머의 드레스를 바라보며,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사랑, 연인, 결혼... 이런 말들은 아직 멀게만 느껴져.
하지만...
<i>언젠가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올까?</i>
<i>미래의 어느 날, 나도 이렇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게 될까?</i>
<i>미래의 어느 날...</i>
<i>나도 무지개처럼 빛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i>
<i>그때가 오기 전까지, 하고 싶은 말들은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게.</i>
<i>미래의 넌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고 있을까?</i>
<i>네가 어디 있든, 하루하루가 행복으로 넘치길 바라.</i>
<i>앞으로 나는 너의 빛을 찾아 나설 거야.</i>
<i>언젠가 내가 너의 세상을 지나가게 되면, 부디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줘.</i>
<i>내 이름은 루시아야.</i>
<i>우리, 미래에서 다시 만나자.</i>
여명이 밝아오며, 카타니아에 황금빛 새벽이 찾아왔다.
울창한 숲은 밤새 내린 비로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고, 그 위로 퍼지는 햇살에 영롱하게 빛났다.
폐허는 확인했나?
전부 찾아봤지만 없었습니다.
인원을 더 데리고 수로 근처를 수색해.
알겠습니다.
잠깐.
센토레아 꽃밭 사이, 희미하게 남은 발자국이 프랭크의 눈에 들어왔다.
프랭크는 흐릿한 발자국을 따라가, 성녀 루키아 예배당의 대문을 열었다.
예배당의 계단에는 지휘관과 루시아가 서로 기댄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
대모님, 대자녀님을 찾았습니다.
두 분 모두 안전하십니다. 네, 즉시 모시고 돌아가겠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프랭크는 지휘관과 루시아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그저 차가운 로봇처럼 대모님의 지시를 묵묵히 수행할 뿐이었다.
저택에 도착하자, 루시아의 거듭된 간청에 [player name](은)는 침대에 몸을 누였고, 이내 깊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지휘관이 잠든 걸 확인한 루시아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방을 나서며, 문을 조용히 닫았다.
<M>그</M><W>그녀</W>는 잠들었나?
문 앞에는 뜻밖에도 올리비아가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네.
너는?
제 기체에는 최신 기술이 탑재되어 있어서, 휴면 상태로 체력을 보충할 필요가 없어요.
잠이란 주님이 수고로운 생명들에게 내리신 자비야. 복잡한 일상 속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영혼과 독대할 시간이 필요해. 구조체라고 예외는 아니지.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대모님.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냉담한 표정은 변치 않았다.
다음에 나갈 때는 날씨를 확인하고, 우산 챙기는 것도 잊지 마.
마음대로 행동해서 죄송해요.
괜찮아, 이해해.
올리비아는 루시아의 예상과 달리, 어젯밤 둘이 갑자기 떠난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저와 지휘관님은...
뭐, 갈 만한 곳이 어디 있겠어? 화산, 예배당, 신전, 미로... 너희가 어디를 갔든 다 내가 젊었을 때 살다시피 했던 곳이지.
올리비아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젊으셨을 때요?
따라와 볼래?
대모가 외투 위로 어깨를 툭툭 털며,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로 가시려는 거죠?
카타니아의 신부라면 배워야 할 기술을 하나 알려줄까 해.
루시아는 대모를 따라 가문의 넓고 따스한 주방으로 향했다.
아침 햇살이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며 주방을 은은하게 밝히고, 각종 조리 도구들은 반짝반짝 빛났다.
가지 좀 잘게 썰어봐. 스틱처럼.
네, 스틱 모양으로 썰게요.
조리대 위에는 카타니아의 특색 있는 식재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올리비아는 노련한 솜씨로 칼을 다루며 화려하고 정교한 요리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루시아는 그녀 곁에서 아침 식사 준비를 도왔다.
평소 지휘관과 함께한 "요리 특훈" 덕분에 이런 간단한 작업들은 루시아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모님은 평소에도 직접 요리하시나요?
왜, 내가 손 하나 까딱 안 할 것 같은 귀족 아가씨처럼 보여?
아뇨, 그저...
올리비아가 몸을 돌려 접시에 음식을 담는 찰나, 루시아는 그녀의 목뒤에 있는 기계 구조를 발견했다.
...?
한눈에 봐도, 그것은 후면형 역원 장치였다.
구조체이시군요.
루시아의 경계심 가득한 질문에도 올리비아의 평온한 표정은 변함없었다.
긴장할 필요 없어. 전역한 지 오래야.
올리비아는 루시아가 썰어놓은 가지를 받아, 다른 재료들과 함께 뜨거운 기름에 부었다.
내 무기는 진작에 반납했어. 그건 그렇고, 어젯밤 축제는 어땠어?
올리비아가 담담하게 화제를 돌렸다.
루시아는 공중 정원에서 받은 임무 내용을 떠올리며, 상대가 적의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어느 정도 경계를 풀었다.
지휘관님과 함께 춤도 추고, 불꽃놀이도 봤어요.
그럼 성녀 루키아의 조각상도 봤겠네.
네, 지휘관님께 그분의 이야기도 들려드렸어요.
오, 지휘관은 뭐라고 평가하던?
결국 이야기일 뿐이라며, 허구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하셨어요.
선택지에 현혹되어선 안 되며, 배후에 숨어있는 원흉인 악마야말로 진정한 루키아의 적이라고도 말씀하셨어요.
올리비아는 잠시 말이 없었지만, 손은 쉬지 않고 요리를 이어갔다.
그럼 넌 어떻게 생각해?
저는... 지휘관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올리비아가 냄비 뚜껑을 열자, 노릇노릇 튀겨진 가지가 고소한 향을 풍기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것들을 접시 위에 옮겼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올리비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 한 소녀가 있었어.
13가문의 품에서 태어난 그 아이의 아버지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가문의 수장이었지.
가업을 이어받을 후계자로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격투술, 독술 그리고 고리대금 등에 대해 엄격한 교육을 받았어.
그리고 점차 깨달았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강요하고 있다는걸.
올리비아는 고개를 숙인 채 능숙하게 식재료를 다루었고, 그 사이에서 문장이 새겨진 반지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래서 그녀는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몰래 군대에 지원했어. 자유를 구속하는 모든 것들을 떨쳐내기 위해, 홀로 공중 정원으로 간 거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군인의 의무도 함께 짊어지는 거잖아요.
전장은 확실히 처절하고 잔인했지. 하지만 적어도 그곳에선 병사들에게 무기를 선택할 자유라도 있었어.
게다가, 그녀는 믿고 의지할 만한 지휘관도 만났고.
순간 올리비아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전장을 함께 헤쳐나가며 둘은 서로에게 감정이 생겼고, 심지어는 결혼까지 생각했어. 그땐 정말, 둘이 함께라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러던 어느 날, 임무 수행 중 갑작스러운 통신 두절과 함께, 차량 행렬이 기습을 받았어.
그녀의 아버지와 피로 얽힌 원한을 가진 가문들이 마침내 그녀의 행방을 찾아낸 거야.
그들은 소녀와 지휘관 몸에 폭탄을 감아, 퍼니싱이 들끓는 밀실에 던져버렸어.
둘은 출구를 찾지 못했어. 유일한 탈출 방법은 자신에게 감겨있는 폭탄을 터트려서, 상대에게 통로를 만들어주는 것뿐이었지.
......
침식체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들에겐 다른 답을 찾을 시간이 없었어. 그 소녀는 자신을 희생해서 지휘관을 살리려 했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건지 망설이고 말았지.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지휘관이 먼저 움직였어. 그녀를 밀쳐낸 뒤, 기폭 장치를 들고 벽을 향해 달려갔어. 단 한 마디 유언도 없이.
올리비아는 처음 꺼내는 이야기 같으면서도 수없이 되새긴 듯한 말투로 담담하게 이어갔다.
그럼, 그 소녀는 탈출했나요?
오랫동안 모두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했어. 분노에 눈이 먼 그녀의 아버지는 온갖 수단을 써서 원수들에게 보복했고, 그는 결국 "평범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
한참 뒤, 지옥에서 탈출한 그 소녀는 카타니아로 돌아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모든 이들을 직접 처단했어.
적과 가족이 모두 사라지고 나니, 그녀는 결국, 텅 빈 껍데기만 남게 됐지. 비극은 평생을 들여 치유해야 할 상흔으로 남았고.
만약 그때 망설이지 않았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 거야. 어쩌면 그녀의 지휘관이 이 망가진 세상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
올리비아가 파스타를 접시에 담아 루시아에게 건넸다.
카타니아 사람들은 축제의 밤을 자신의 마지막 날로 여겨. 그래서 새벽이 오기 전까지 온 힘을 다해 춤을 추고, 종말 전의 마지막 만찬을 즐기지.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믿기에, 인생이 짧고 매 순간이 마지막이 될 수 있음을 알아. 마지막 순간에는 절대로 망설임과 후회를 남겨선 안 돼.
루키아의 곤경을 하나의 사고 실험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에게는 실제로 일어난 현실이었어.
심판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누구도 그녀에게 다른 답을 생각할 틈을 허락하지 않았어.
그러니 그 전에 미리 답을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도망치지도, 후회하지도 않게.
올리비아는 루시아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말처럼 차갑고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
전설에서 나온 명제에 대해, 지휘관과 대모는 상반된 답을 제시했다.
두 가지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뒤엉키면서, 루시아는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루시아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향긋한 요리들을 식탁 위에 정성스레 올려놓았다.
지휘관님?
다이닝 룸 입구에 익숙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대모님과 함께 아침 식사를 준비했어요.
식탁 위에는 가지각색의 요리들이 차려져 있었고, 루시아는 가장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지휘관 앞으로 슬쩍 밀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하루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감사드리며, 지금 이 순간에도 굶주림 속에서 양식을 구하는 이들을 잊고 사는 저희를 용서하소서.
주님께서 이 두 애인의 사랑이 변치 아니하며, 약속하신 성혈을 무사히 가져올 수 있도록 은총을 내리실 것을 굳게 믿나이다.
간단한 기도를 마친 올리비아는 나란히 앉은 구조체와 인간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식사를 마치면, 프랭크가 차로 마을까지 데려다줄 거야. 너희는 극장에 가서 결혼식에 쓸 성찬주를 가져오면 돼.
우선은 식사를 즐기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