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한 번도 신앙을 가져본 적 없는 자의 충성을 그대에게 바칠 것이다."</i>
똑딱, 똑딱... 너무나 고요한 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로비에 울려 퍼졌지만, 창밖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있었다. 평범한 낮과 밤의 흐름대로라면 지금쯤 한낮의 태양이 가장 뜨거울 시간이었다.
루나가 날개를 접으며 공중에서 내려와 로비로 들어섰다.
아직도 해가 뜰 기미가 보이지 않네.
신의 마음이 두 번째 변화를 겪은 후, 지휘관과 루나는 계시록의 힘으로 세 번째 연세, 이상향으로 들어왔다.
신이 사라지자 태양도 그를 따라갔다 세계는 잠들어 영원한 밤의 어둠에 빠졌으니 만물은 자라기를 멈추고 영혼은 보호를 잃었다 길 잃은 여행자여 멈춰버린 사과를 다시 자라게 하고 싶다면 신의 유적을 찾아 그를 전당으로 돌아오게 하라
이것이 계시록이 보여준 지침이었다.
확인도 했으니 계시록 내용대로 움직이자.
네 상태는 어때?
"인간 세계"의 마지막 순간, 그 업화가 둘의 몸에 상처를 남겼다. 이상향에 온 지 꽤 됐는데도 지휘관만 유독 회복이 더뎠다.
난 벌써 다 나았어.
아마도 악마의 힘이 원래 어둠에서 비롯되기 때문일 거야.
다 나을 때까진 무리하지 마. 이번엔... 내가 할게.
이번엔 내가 널 지킬게.
루나는 이 말을 마음속 깊이 숨겨두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팔에서 갑자기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업화로 입은 상처가 정체 모를 힘에 의해 찢어지며, 피와 살이 엉망이 되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겨우 싹을 틔웠던 검은 식물이 틈을 타 위로 자라나며 살갗을 뚫고 나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루나는 지금까지 이 이상한 상처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눈썹을 찌푸린 채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쯧, 무시무시한 상처네.
첼시아가 또 어느새 숨어서 모든 걸 지켜보다가 때를 노려 나타났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루나의 공격에 밀려났다.
젠장... 네가 한 짓이야?!
루나는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첼시아에게 당했던 모든 일들이 떠오르며, 그동안 쌓아두었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player name]의 상처는 업화에 데어서 생긴 거야. 나한테 화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난 너희를 돕고 있는 거라고. 상처를 째서 열어주지 않으면, 그 가시가 뼈를 타고 심장까지 자라날 거야. 그러다 결국 숨 막혀 죽게 될걸~
근데...
첼시아는 루나의 등 뒤로 돌아가, 일부러 귓가에 바짝 붙어서 희롱하듯 속삭였다. 루나가 분노할수록, 첼시아는 이런 상황을 더욱 즐기는 듯했다.
지금도 별로 좋은 상태는 아니야.
햇빛이 없으면 가시는 미친 듯이 자라나서 점점 더 휘감길 거야. 결국엔 [player name]의 몸을 완전히 감아서... 모조리 집어삼킬 텐데.
첼시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루나가 더욱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한 번 한 번의 공격에 전력을 다했고, 악마 소녀를 쓰러뜨리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 쓰레기...
그렇다면 네 목숨으로 그 가시가 자라나는 걸 막아볼까.
첼시아는 전혀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루나의 욕망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떻게 회피해야 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 죽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이 가시는 "신의 마음"이 계속해서 썩어가면서 생기는 결과라고.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넌 [player name]이(가) 죽어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을 거야.
그 말을 듣자, 루나는 공격을 멈추었다. 더 이상의 무의미한 전투를 포기하고 날아가 새로 생긴 상처를 살펴보았다.
확실히 "신의 마음"과 같은 기운이 느껴져.
첼시아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신의 마음"은 연결된 둘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마지막 업화 속에서 "신의 마음"도 함께 불타 손상되었고, 햇빛이 닿지 않는 이상향에 들어오자마자 서서히 썩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내 몸에는 아무 이상도 없어.
밤은 원래 악마의 영역이잖아? 게다가 네 상처는 이미 다 나았는데, 다른 이상이 있을 리가 없지.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다 알려줬는데... 감동적이지 않아?
또 무슨 속셈이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날 받아들여, 루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줄 테니까.
[player name]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면서도 그냥 보고만 있을 거야?
처음부터 그게 우리 계획이었으니까.
루나가 동의하듯 말을 보탰다.
참 고집불통이네.
그럼 한번 해보던가... 네가 성공할 수 있다면 말이야.
첼시아는 당장 결과를 몰아붙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대신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사라졌다.
그 뒤로도 원래 계획대로 일을 진행했다. 어차피 유적을 찾는 건 처음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단 하나 예상치 못했던 건... 가시가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자라난다는 거였다. 그만큼 남은 시간도 빠듯해졌다.
먼지를 닦아보니 이런 무늬가 나왔어. 이건 분명 유적과 관련이 있을 거야.
루나가 비석의 표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거기 새겨진 문양은 그녀가 수집한 고서에서 본 적이 있었다. 신전의 결계를 알리는 표식이었다.
오래 찾아 헤맨 끝에 드디어 실마리가 잡혔다. 처음엔 아무런 단서도 없어서 둘이서 무작정 수색만 해왔고, 루나는 쉬는 시간에도 홀로 나가서 계속 찾아다녔다.
다행히 최근에 신과 관련된 성물, 그리고 서적을 몇 개 발견하면서 방향이 잡혔고, 수색도 훨씬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됐다.
책에 따르면 이정표는 신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다른 비석만 하나 더 찾으면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 있을 텐데...
[player name]?
생각에 빠져있던 루나는 뒤늦게 옆 사람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다. 이름을 부르며 돌아보자 지휘관이 나무에 기대어 반쯤 쪼그려 있었다.
상처가 또 악화한 거야?
루나가 급히 다가가 상처를 살폈다. 검은 가시나무가 전보다 더 빠르게 자라고 있었다.
이제는 [player name]의 한쪽 팔을 완전히 휘감았고, 다른 부위로도 퍼져나가려는 조짐이 보였다.
가시가 이렇게 자랄 때까지 왜 아무 말도 안 했던 거야?
루나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 전 상처를 봤을 땐 이 정도가 아니었다. 오는 길에 가끔 말이 없었던 걸 보면, 아마도 그때 발작이 왔던 모양인데, [player name]은(는) 그저 참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일단 여기서 쉬고 있어. 내가 다른 비석을 찾아볼게.
네 상처랑 그 가시한테나 물어봐. 그것들이 쉴 생각이나 있는지.
루나는 결국 다정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기에, 걱정과 조급함이 전부 날카로운 말이 되어 튀어나왔다.
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고,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진작에 말해주지, 왜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끝내 말을 아꼈던 걸까? 왜... 왜 자신 때문에 이런 고통을 겪어야 했던 걸까?
지휘관이 루나의 꽉 쥔 손을 펼쳐보니, 방금 가시를 자르느라 손바닥에 상처가 나 있었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잘라낸 가시가 곧 다시 자라날 거란 걸 뻔히 알면서도, 그녀는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시도했다. 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차라리 이 가시가 내 살을 찔렀으면 좋겠어.
내가 겪어야 할 고통인데... 네게 옮겨가면 안 되는 거였어.
자신의 시련을 남에게 떠넘기는 건 약자나 하는 짓이야.
믿음이라...
루나는 악마인 자신에겐 그런 감정이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함께 보낸 시간이 그녀의 마음을 조금씩 흔들어놓고 있었다.
오직 눈앞의 이 사람만이, 루나에게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잠시 고민하다 루나는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이대로 고집을 부려봤자 이 사람은 말을 들을 리 없었고, 오히려 더 무리할 게 뻔했다.
정말 상태가 더 나빠지기라도 하면, 환자 간호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알았어, 이번엔 돌아가자.
네 상태가 좋지 않으니까, 이리 와. 내가 부축해 줄게.
조용히 해.
계속 시끄럽게 굴면 혼자 여기 내버려두고 갈 거야.
인내심이 바닥난 루나는 먼저 다가가 지휘관의 손을 잡았다.
키 큰 덤불을 지나던 중 옷자락이 가시에 걸렸다. 루나는 걸린 부분을 떼어내려고 몸을 숙였고, 그 순간 덤불 속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player name], 이거 봐.
루나가 덤불 속에서 찢어진 천 조각을 꺼냈다. 흰 바탕에 금색 무늬가 새겨진 게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았다.
그의 기운이 남아있어.
이건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이런 외진 곳에는 보통 아무도 오지 않는데, 루시퍼가 다녀간 흔적이 있다는 건, 그도 신의 유적을 찾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응. 그동안 그는 늘 "신의 마음"과 관련된 쪽으로 접근했지.
이번에도 비슷한 수를 쓸 거야.
하지만 "신의 마음"은 지금 지휘관이 통제하고 있고, 부패해서 다른 용도로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루시퍼는 어떤 수를 쓸까?
어때? 둘 다 도움이라도 필요해?
어둠 속에 숨어있던 첼시아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처럼 보였다.
[player name], 전투 준비해.
그렇게 경계할 것 없어. 싸우러 온 게 아니라니까.
너희가 고민하고 있는 그 문제 말이야... 내가 답을 알고 있긴 한데.
말을 마친 첼시아의 손끝에서 핏빛을 띤 어두운 기운이 흘러나와 곧장 "신의 마음" 속으로 스며들었다.
"신의 마음"에 뭘 한 거야?!
조바심 내지 마, 이번엔 건드릴 생각 없어.
그저 문을 열 수 있게 힌트를 준 것뿐이야. 나머진... 너희가 알아서 답을 찾겠지.
곧... 내가 기다리던 결말이 다가오고 있어.
틀림없이 아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될 것 같은데?
첫 번째 비석을 발견한 건 큰 진전이었다. 그 후로 루나와 지휘관은 더 많은 중요한 단서들을 찾아냈다. 곳곳에서 루시퍼의 흔적도 발견됐지만, 나쁜 소식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끔은 그 흔적들 덕분에 탐색 방향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가시는 점점 더 거세게 자라났고, "신의 마음"의 부패도 심각해졌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기야.
찾고 있던 건물을 발견하자 루나의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듯했다. 둘은 마침내 신전 유적의 입구를 찾아냈다. 이곳만 통과하면 사라진 신의 행방을 알 수 있을 터였다.
루나는 가시에 시달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옆 사람을 바라봤다. 이제 정말 끝이 보였다.
입구는 별다른 장애물 없이 열려 있었다. 짧은 돌길을 지나자,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스며든 허물어진 돌벽과, 사방에 흩어진 잔해들 속에서 신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정보에 따르면 신전 안에 신의 초상화가 있대. 그게 신을 찾을 유일한 단서가 될 거야.
가보자.
둘은 함께 신전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마지막 방에 들어서려던 순간, 루나는 가슴을 찌르는 듯한 고통에 휘청이며 열린 문 앞에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루나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 문 안쪽을 들여다보려 했지만... 그 위치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마... 크윽, 빨리 문을 열어.
내 본능이...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
지휘관이 서둘러 루나의 말대로 방문을 열자, 루나의 고통도 사라졌다. 조금 전의 이상한 감각이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그녀는 일어나 지휘관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천장의 무지개 창문은 이미 부서져 있었고, 깨진 조각들이 제단 위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안팎의 횃불 빛이 유리 조각에 반사되어 음산한 빛의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원래 벽에 걸려있던 신의 초상화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화폭을 찢어놓아 그림 속 인물이 일그러져 보였다.
이럴 수가!
그림 속 소녀는 순백의 옷을 입고 있었고, 태양보다도 더 눈부시고 성스러웠다.
하지만 그 똑같은 얼굴이 지금은 어둠의 보랏빛에 휩싸여 있고, 악마의 날개까지 달고 있었다. 보석처럼 빛나던 붉은 눈동자는 이제 피처럼 붉어져서, 놀란 듯한 표정으로 그림 속 자신의 눈과 마주 보고 있었다.
흥, 타락한 영혼이여, 감히 과거의 순수했던 그 눈동자와 마주할 수 있겠습니까?
어둠이 짙게 깔린 방구석에서 루시퍼가 걸어 나왔다. 보아하니 먼저 이곳에 도착해, 오랫동안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통스러운가요? 그건 당신이 버린 심장이 당신을 질책하는 소리입니다.
타락하고 부패하지만 않았어도... 본래의 당신은 이 초상화처럼 높은 곳에서 만인의 경배를 받았겠지요.
지금처럼... 잊히고, 찢기고, 차가운 바닥에 버려져 어둠에 삼켜지지는 않았을 텐데요.
당연하죠... 저는 신의 가장 충실한 신자였으니까요. 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모든 것을 신께 바쳤음에도, 신은 저를 버렸습니다.
루시퍼는 분노에 찬 눈으로 루나를 가리키며 참았던 감정을 터뜨렸다.
온갖 고생 끝에 신의 행방을 찾았지만, 신은 이미 타락해 있었습니다. 모든 걸 버리고 악마가 되어 사악한 유혹에 빠져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았죠.
더는 신의 자격이 없습니다.
이미 자격을 잃었는데, 제가 새로운 신이 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저만큼 독실한 신앙을 가진 자는 없습니다. 이 자리에 저보다 더 적합한 자는 없을 것입니다.
이 세계는 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제가 필요합니다. 아니, 이 세상 모두가 저를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루시퍼의 눈빛에서는 이제 탐욕과 광기를 감출 수 없었다.
난 너의 헛된 기대에 부응할 책임 없어.
네가 원하는 게 힘이라면...
그렇다면 나랑 붙어보자. 네가 말하는 그 "자격"이란 게 진짜로 있는지... 승부로 증명해 봐.
이제 "신"의 정체가 밝혀졌으니, 당장 시급한 건 영원한 밤과 "신의 마음"의 부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통제를 잃은 루시퍼는 그에 비하면 문제도 아니었다.
흥, 도망치시겠다? 이미 당신들에겐 퇴로가 없습니다.
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면 제단, 성물, 성수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되는데, 그것들은...
당신들이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제가 전부 파괴해 버렸습니다. 다시는 복구할 수 없게 말입니다.
역시 루시퍼가 다시 나타난 건 단순히 루나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었다. 다른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상처는 이제 한계에 달했을 것입니다.
보세요. 이 검은 가시들이 당신의 심장을 찌를 듯 파고들었잖습니까? 시간이 더 지나면 목숨을 잃으실 겁니다.
루시퍼의 시선이 루나를 향했다.
당신이 이 사람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또 치료 방법을 찾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제 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지만, 제가 그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신의 힘을 저에게 주시면, 새로운 신이 되어 이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이제 와서...
네 말을 내가 믿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으십니까? 이 사람을 포기할 수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
루시퍼의 입가에 기괴한 미소가 번졌다. 마치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루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먼저 맹세해. 네 말이 진심이란 걸 증명하라고.
새로운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겠습니다.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이 정도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서... 어서 신의 힘을 주세요.
루시퍼의 목소리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내 힘은 전부 "신의 마음" 안에 봉인되어 있어. 가지고 싶다면, 가져가.
루나가 손에 든 사과를 던지자, 루시퍼는 황급히 손을 뻗어 받았다. 그 바람에 넘어졌지만 개의치 않는 듯했다.
"신의 마음", 드디어 이 힘이...
이제 제가... 제가 진정한 신이 되는 겁니다! 하하하...
그는 이미 속까지 썩어버린 사과를 보물처럼 들어 올리며, 그것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하지만 루시퍼의 예상과 달리, 그의 눈에 꿈같던 이 사과는 순식간에 그의 몸을 부식해 버렸다.
으아악...
새카만 연기가 그의 썩어가는 상처에서 뿜어져 나와 썩은 사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루시퍼는 개미 떼가 살을 파먹는 것처럼 육체와 영혼이 잠식되는 고통을 느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그 썩은 사과를 놓지 않았다. 다음 순간 무덤으로 들어가더라도 그 사과만은 함께 가져가겠다는 듯했다.
당신들... 이건 당신들의 음모였군요! 처음부터 사악한 힘으로 제 신의 힘을 빼앗으려고 계획했던 거네요!
"신의 마음"은 악한 마음을 품은 생명체를 삼켜버리지. 악의가 강할수록, 더 빨리 잠식되는 법이야.
자업자득이야.
"신의 마음"의 잠식 속도가 너무 빨라서, 루시퍼는 다음 말을 꺼내지도 못한 채 영체가 검은 연기로 변해 사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음~ 정말 멋진 구경이었어.
첼시아가 나타나 눈앞의 광경에 박수를 쳤다.
어때? 내가 너희에게 준 이 선물, 마음에 들어?
넌 처음부터 루시퍼가 저지른 모든 짓을 알고 있었던 거네.
당연하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왜 해결책을 알려줬겠어?
소녀는 미소를 지으며 공중으로 떠올라 느긋하게 누었다.
왜 그렇게 "신"이 되고 싶어 했는지 모르겠네. 봐, 해가 없는 이 어둠도 나름 매력적이지 않아?
아, 맞다. 깜빡했네... [player name]한텐 그다지 달갑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첼시아가 상처에서 미친 듯이 자라나는 검은 가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부 네 계획이었잖아. 그것들을 파괴한 것도, 내 과거를 알게 만든 것도.
내 모든 퇴로를 막으려고 한 거잖아.
이 모든 걸 해결하려면, 신을 되찾아 태양이 다시 떠오르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의 정체를 알게 됐음에도 돌아갈 수 없다면, 이건 그저 막다른 길이나 다름없었다.
난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
내 손이 피와 진흙으로 더럽혀졌다면, 네가 날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니까.
화내지 마, 아직 길이 하나 남아있잖아... 바로 너희 앞에.
날 받아들여, 루나. 네가 원하는 힘을 줄게. "신의 마음"을 위해서도, [player name]을(를) 위해서도.
난 "빛"이 필요해. "어둠"이 아니라.
"빛"으로 가는 길은 이미 다 사라졌잖아. 차라리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건 어때?
네가 원하는 사람만 데려간다면, 어둠도 최고의 축제가 될 수 있을 텐데.
어둠의 영향으로 가시가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다. 점점 더 거세지는 통증이 심장을 파고들었고,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때? [player name]도 이제 한계인 것 같은데.
......
소녀의 손이 잡혔다. 이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기이한 어둠 속에서, 오직 이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만이 진실되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루나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런 감각은 그녀에게 많은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과거 실명했던 시절, 혼수 상태에 빠졌던 순간들, 그리고 혼돈과 영원한 밤...
하지만 이제는 어둠 속에서도 함께 걸어갈 든든한 버팀목이 생겼다.
바로 그것들 덕분에 루나는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고, 그 이후의 길고 긴 여정도 걸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꼭 잡을 수 있게 된 그 손 덕분에 그녀의 세상은 다시 빛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제, 루나가 이 세계에 그 빛을 들여올 차례였다.
난 "달"이 되기로 했어.
더는 태양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햇빛을 과거에 묻어두겠어.
달빛으로도 충분히 이 어둠을 밝힐 수 있으니까.
고고하게 떠 있거나 고독할지라도,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둠을 품고 영원한 밤과 화해하기로 했다.
일하는 사람들, 자라나는 식물들, 숲과 들판을 달리는 짐승들은 달이 떴다는 걸 신기해할까? 아니면 사라진 태양을 그리워할까?
더 이상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 세계는 곧 어둠 속에 떠오른 이 맑은 달빛에 익숙해지고, 루나의 부드러운 빛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달은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자신이 빛나기 전, 다른 이들이 인정하기 전, 그 하얀 빛을 처음으로 알아봐 주고,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준 그 사람을.
그것이야말로 루나의 영원한 밤 속에서 비추는 유일한 빛이 될 것이다.
잃어버렸던 순백이 다시 보름달로 차오르듯, 루나는 끝없이 밀려오는 기억의 조각들을 느끼며 심장이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메마른 가지에 봄빛이 스며들듯, 썩어가던 사과에도 다시 생기가 깃들었다.
마침내, 황금빛으로 빛나는 "신의 마음"이 떠올랐고, 계시록도 마지막 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신전이 황폐해져도 여전히 제단인 듯, 조각상이 무너져도 신은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