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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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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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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가 눈을 떴을 때, 오랜만에 눈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낯선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이곳이 에덴에서 본 적 없는 낯선 건물이라는 것도 곧 깨달았다.

응. 나 얼마나 잤어?

온몸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고, 의식을 잃기 직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제야 루나는 자신이 그때 기절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인간 세계"?

두 번째 연세의 이름인가?

당시 루나가 극심한 고통으로 기절하면서 상황이 한때 혼란스러워졌다.

다행히도 첼시아와 루시퍼가 다음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계시록이 작동하면서 지휘관과 루나를 두 번째 연세로 이동시켰다.

갑자기 눈 부신 빛이 나타났고, 그 후 지휘관과 루나는 낯선 건물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에덴이 개발되지 않은 원시림 같았다면, 두 번째 연세는 인간 문명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집과 사원, 비석과 다리, 심지어 웅장한 궁전까지 즐비했다.

지금 있는 곳은 신전인 듯했다. 넓은 전당 한가운데 분수대가 자리 잡고 있었고, 사방에 촛불이 켜져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가장 높은 곳에는 화려한 의자가 있었고, 양옆으로는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의자 위에는 이미 푸른빛으로 변해버린 "신의 마음"이 놓여 있었다.

기운이 좀 없긴 한데, 에덴에서 생긴 일 때문일 거야. 별거 아니야.

일단 해야 할 일부터 하자.

이 세계의 규칙은 어느 정도 파악했어?

루나의 시야가 완전히 돌아온 것을 확인한 지휘관은 계시록을 건네주었다.

"인간 세계의 주인으로서 백성을 재난에서 구하고 나라를 잘 다스려라.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게 되면, 그들의 신앙이 신의 심장과 하나 되어 신의 빛을 되살릴 것이다."

지도자가 되어 백성들의 신뢰를 얻고, 그걸 "신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에너지로 쓴다는 거네.

근데 "재난"이라는 건 뭘 말하는 거야?

"신의 마음"은 상태가 어때?

지휘관이 곁에 있던 사과를 루나에게 건네주려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

루나가 "신의 마음"에 손을 대자마자, 불씨에 불이 붙은 듯 불꽃이 치솟았다. 그 불꽃은 루나의 손을 태우며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루나의 피부에 보랏빛을 띤 검은 결정체와 문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악마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젠장.

루나는 고통을 참으며 제어불능 상태를 억누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몸을 웅크린 채 침대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지휘관은 급히 달려가 불을 끄려 했고, 다급한 마음에 루나의 다친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 불꽃은 의지가 있는 듯 맞잡은 손을 타고 지휘관의 몸으로 옮겨붙었다.

너까지?!

루나는 반사적으로 지휘관이 다치지 않게 손을 빼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지휘관은 자신도 불길에 휘말리면서까지 이 정체불명의 업화를 끄려 했다.

[player name], 놓으라고!

불에 타는 고통을 겪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상하게도 이 불꽃은 루나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지휘관은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조금 진정하고 보니, 지휘관이 루나와 접촉한 뒤로 불길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루나도 통증이 줄어드는 걸 느끼며 점차 정신을 차렸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불꽃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둘이 분위기가 나름 훈훈하네~

첼시아가 갑자기 방 안에 나타났는데, 의외로 사과나 루나를 공격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첼시아... 뻔뻔하게도 또 나타났네.

당장 꺼져.

루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싸울 자세를 취했지만, 조금 전 불길에 휘말린 탓에 기력이 떨어져, 피로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괜히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지 마. 난 그냥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보러 온 거야.

내가 말했잖아. 지난번 일은 내 잘못이 아니야. 심판의 대가를 치르는 건 정해진 규칙이라고.

마침 내가 "깜빡하고" 얘기를 안 했을 뿐이지.

안 꺼지겠다는 거야?

내가 가버린다면, 반작용을 막아줄 사람이 없을 텐데?

당연하지. 모든 심판의 대가를 치르고 나서, 루나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거든.

"신의 마음"은 점점 강해지는데, 루나는 자꾸 약해지고 있잖아. 이 힘을 감당 못 해서 반작용이 일어난 거지.

소녀는 환하게 웃으며 루나 곁으로 다가섰다.

어때? 날 받아들이지 않을래? 네가 힘만 회복하면 이런 반작용도 싹 사라질 텐데 말이야.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 참기 힘들잖아?

루나가 순식간에 첼시아를 공격했지만, 그녀는 춤추듯 가볍게 피했다.

헛된 망상이군.

흐음.

첼시아는 실망한 기색 없이 신전 밖으로 날아갔다.

난 급하지 않아. 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가 되면, 결국 내 제안을 받아들이게 될 거니까.

첼시아가 이 말을 남기고 사라지자, 방 안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래.

사실 루나는 이미 할 말을 마음속에 정해두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너무 약해진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전체적인 상황을 위해서라도 이번만큼은 주도권을 넘기고 다른 해결책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아니면 다른 방안이라도 좋았다. 둘의 계획에 지장만 주지 않고 자신의 반작용이 진행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어떤 타협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휘관이 그런 약속까지 한 이상, 미리 준비해 뒀던 말들이 목구멍에서 맴돌기만 할 뿐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난 아직도 기억을 되찾지 못했어.

그래서 둘이 함께했던 과거도 여전히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에덴에서 보낸 그 시간만큼은...

널 한번 믿어보고 싶어, [player name].

"인간 세계"의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계시록은 루나를 "영주"로 임명했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도시를 다스릴 권한을 얻게 됐다. 하지만 반작용으로 인해 루나는 매일 밤 업화의 고통에 시달렸고, 가끔 드러나는 보랏빛 결정체와 어둠의 문양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래서 루나는 자신을 대신해 정무를 처리할 "사제" 자리를 새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모든 게 계획 대로였다. 둘이 함께 있으면 반작용이 줄어들었고, 루나도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신앙의 에너지만 빨리 모을 수 있다면, "신의 마음"이 다시 변화하면서 루나의 힘도 강해질 테고, 반작용 문제도 자연스레 해결될 터였다.

하지만... 세상일이 뜻대로만 되진 않는 법이었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업화가 나타나 루나를 괴롭혔다. 예전엔 둘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증상이 완화됐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소용없어졌다.

반작용이 일어날 때마다 루나는 점점 더 통제력을 잃어갔다. 이제는 지휘관의 동행도 거부한 채, 밤이 되면 신전 깊숙한 밀실로 들어가 홀로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또다시 해가 저물 무렵이 됐다. 이번에는 루나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싶어 찾아왔지만, 문안에서 들려오는 신음과 낮은 포효 소리에 결국 들어 올리려던 손을 멈추고 말았다.

사, 사제장님

신전의 시종이 지휘관의 뒤에서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지휘관은 재빨리 몸을 돌려 시종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급하게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그만... 죄송합니다!

시종은 신전을 샅샅이 뒤졌지만, 사제장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출입 금지된 밀실밖에 남지 않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게다가 그 소문들이... 사실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어쩌면 진실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 신탁이 또 나타났습니다. 저희가 막기도 전에 이미 소문이 퍼져버렸습니다.

백성들 사이에선 온갖 소문들이 돌고 있고, 신전 시종 중에서도 몇 명이나 더 도망쳐버렸습니다.

루나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건 최근 퍼진 소문 때문이었다.

루시퍼는 에덴에서 정체를 드러낸 이후에도 인간 세계에선 정면 승부를 피했다. 대신 교황이란 신분으로 나타나, 영주가 악마에 씌었으며 자신이야말로 신의 진정한 사자라고 떠들고 다녔다.

심지어 거짓 신탁을 만들어내 루나가 은둔한 것을 증거로 삼아, 영주가 이미 악마에게 홀려 백성 앞에 나설 수 없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지휘관은 계속해서 소문을 잠재우려 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백성들은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 갈팡질팡했고, 신앙의 에너지가 몇 번이나 루시퍼 쪽으로 기울었다. 이는 루나의 힘을 더욱 빠르게 앗아갔고, 그녀는 점점 약해져 몸이 투명해지기까지 했다.

지금의 루나는 낮에도 모습을 드러낼 수 없게 되었고, 이 때문에 백성들은 신탁의 진실성을 더욱 굳게 믿게 되었다. 게다가 루시퍼는 계속해서 새로운 신탁을 내리며, 은밀히 소문을 부추겼고, 상황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전에 의관님께 전해드린 약초를 그들이 시험해 봤는데, 기존 처방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다고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새 처방은 백성들에게 공개했습니다.

역병 퇴치를 위해 시행하신 여러 정책 덕분에, 백성들이 정말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전 앞에 모여 사제님께 직접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 한다고 전해왔습니다.

드디어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원래는 루나와 함께 반작용을 완화할 다른 방법을 찾으려 했지만, 상황이 악화한 뒤로는 루나가 만남 자체를 거부했다. 게다가 아무리 찾아봐도 실마리가 없어서, 지휘관은 일단 신앙의 에너지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그동안의 노력으로 민심도 되찾았고... 이제 신앙의 에너지도 거의 다 모았다. 루시퍼도 더 이상 큰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

방금 밀실에서 들려온 소리가 떠올랐다. 이 기쁜 소식을 루나에게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종을 돌려보내고 밀실 앞으로 돌아오니, 안에서 대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러다간 업화에 완전히 잠식될 거야.

그만 발버둥 쳐. 날 선택하면 당장이라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

꿈도 꾸지 마.

[player name]이(가) 약속했어... 꼭 돌아온다고.

난 [player name]을(를) 믿어.

신앙의 에너지를 다 모아서 돌아온들 뭐 해? 이미 늦었어. 지금 네 상태론 이 불길을 감당할 수 없어. 포기해.

이 말을 듣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지휘관은 루나의 당부도 잊은 채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밀실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문을 열자, 첼시아가 한쪽에 구경하듯 서 있었고, 그 옆에는 루나가 쓰러져 있었다. 루나를 휘감은 불길은 지금까지 본 그 어느 때보다도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지휘관은 황급히 달려가 루나를 안아 들고 상태를 살폈다. 보랏빛 결정체와 어둠의 문양이 루나의 몸을 거의 집어삼킬 지경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상태가 훨씬 심각했고, 이번에는 의식까지 잃은 상태였다.

루나는 이미 한계에 달했다.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혼미한 의식을 뚫고 루나의 신경을 자극했다. 마치 그 사람의 부름이 강제로 그녀를 현실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힘겹게 눈을 뜨자 그의 애타는 표정이 보였다.

시끄러워서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조용히 좀 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면 손을 뻗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걱정하지 말라고, 괜찮다고 다독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으윽...

불길이 다시 거세게 일어나 루나의 영혼 깊숙이 파고들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이 그녀를 재로 만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 그녀가 낼 수 있는 소리라곤 끊어질 듯한 신음뿐이었다.

지휘관은 루나를 점점 더 세게 끌어안으며 이 고통을 자신이 대신 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불길은 오직 루나만을 태우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녀의 고통을 나눌 수조차 없었다.

갈라진 목소리로 내지르는 소녀의 비명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몸부림치는 와중에 "신의 마음"이 바닥에 떨어졌다. 문득 계시록의 힌트와, 이 세계에 들어온 뒤로 느껴온 희미한 감응이 떠올랐다.

지휘관은 루나를 품에 안은 채 바닥에 앉아, 그 사과를 다시 한번 사용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player name]... 너 도대체 무슨 짓을...

루나는 자신의 고통이 서서히 사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자신을 안고 있는 그 사람이 오히려 업화에 휩싸이는 모습에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반작용의 고통이 온몸을 짓누르고, 심장이 찢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안 돼... 그건...

난 아직 그 정도로 약해지진 않았어. 누군가의 도움 따윈...

그 말을 들었을 때 사실 가슴 한편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이내 쓰라린 감정이 북받쳐 올라 결국 거절의 말을 뱉고 말았다.

그 사람마저 이런 고통 속에 빠뜨릴 순 없었다.

반작용이 완전히 옮겨가지 않아서, 남은 통증이 아직도 허약한 루나의 몸을 괴롭혔다. 그때 누군가가 다시 그녀의 두 손을 꼭 잡는 것이 느껴졌다.

지휘관은 루나의 손을 살며시 잡아 자기 가슴에 가져다 댔다.

이런 건...

나도 똑같이... 으윽!?

미처 다 전하지 못한 말들이 불길 속으로 사라져 갔다. 이제 이 불길은 둘의 몸을 함께 태우며, 기억을 갈라놓고 그사이에 결코 지울 수 없는 흔적을 깊이 새겼다.

점차 무언가가 부서져 나갔다. 그와 그녀 사이의 연결 속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다.

폭우가 지나간 뒤, 답답했던 땅에 작은 틈이 생기듯, 깊이 묻혀 있던 씨앗이 서서히 숨을 쉬기 시작했고, 신선한 공기가 흙 속으로 스며들며, 폐허 위에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맹렬한 불길이 과거의 황폐했던 대지를 깨끗이 태워버렸다. 그 불길은 점점 마음과 몸을 가득 채우며, 둘 사이 공감의 연결로 뻗어나가 더욱 선명하고 강렬해졌다.

서로가 하나가 되어, 떨어질 수 없었다.

성물로 여겨지던 사과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둘 사이로 떠올라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듯했다.

이번에는 이전의 푸른빛에서 업화처럼 선명하고 열렬한 붉은빛으로 변했다.

둘이 함께 불길을 견디는 순간, 계시록이 다시 한번 눈 부신 빛을 발했다. 책장이 넘어가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size=50><i>"나는 어처구니없게도 두 단어를 혼동하기 시작했다. '나'와 '너'."</i></si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