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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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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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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이 시야를 가려서 한 치 앞도 보기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지만으로 강행하기엔 무리였다.

내일 대전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바깥일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미리 양측 인원들에게 방어 태세를 갖추라고 지시해뒀다. 최소한 산 아래엔 공중 정원의 지원이 있으니, 상황이 불리해지면 일단 산 아래로 철수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도 알파가 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승방으로 돌아와 잠시 숨을 돌리려는 순간, 낡은 목문 뒤에서 똑똑 소리가 들려왔다.

거의 동시에 알파가 지휘관의 코앞을 스치듯 지나가더니 칼을 뽑아 문 앞을 가로막았다. 총알도 갈라낼 수 있는 칼날이 문 안쪽의 인간과 불과 몇 센티미터 거리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하얀 머리카락이 얼굴을 스쳤고,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웠다.

대장님! 저희예요! 안에 계세요?

시간이 늦어서 배고프실 것 같아, 먹을 걸 좀 만들어왔어요.

알파는 문을 막은 채, 대답할 생각도, 문을 열어줄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배불리 먹지도 못하는 게 일상이지만, 구걸만 하며 살고 싶진 않아요. 유랑민으로 사는 것도 비참한데, 여기저기서 구걸까지 하다 보면 결국 자존심마저 잃게 될 테니까요.

저... 저희는 대단한 소원 같은 건 없어요. 그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에요. 부처님한테 기도하든 신께 빌든, 아무도 우릴 구해주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대장님, 그때 저희를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감, 감사합니다. 이렇게 많이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반 사람들이었다. 이 넓은 세상에서 작은 불빛 하나에 불과할지라도, 그들은 고난을 견디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었다.

문밖 발소리가 조금씩 멀어졌고, 알파도 긴장을 풀었다. 지휘관은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 했다.

흥.

난 약한 인간을 애완동물처럼 키우는 취미 같은 건 없어.

아직 내 흥미를 끌지 못해.

나도 대부분의 구조체보다 강한 인간을 본 적이 있어.

알파는 손을 거두고 칼을 칼집에 넣더니, 익숙한 듯 장작을 하나 더 넣고 와서 앉았다.

지휘관은 불안정한 자세를 바로잡은 뒤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야채 우동 두 그릇이 놓여 있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 어디서 재료를 구했는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더욱 귀하게 느껴졌다.

낡고 소박한 그릇과 젓가락이었지만, 향긋한 냄새만은 계속 코끝을 자극했다. 고명 하나 없는 담백한 우동이라 쫄깃하고 부드러운 면발의 식감이 더 뚜렷하게 살아났다.

음식의 온기는 이렇게 차가운 날씨 속에서 더없이 귀중한 위안이 되었다.

어쩌면 타인이 베푼 선의를 직접 느껴보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알파는 면 그릇을 한참 쳐다보며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지휘관은 그런 알파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란 걸 알고는 있지?

쳇.

……

지휘관의 예상이 정확했다.

눈 오는 날의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은 정말 맛있었다. 이렇게 대접해 준 것도 고마운 일이었다..

알파는 실없이 웃고 있는 지휘관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쏘았고, 지휘관은 얼른 시선을 돌려 앞에 있는 우동을 후루룩 먹으며 시범을 보였다.

부드러운 면발이 입안으로 넘어가니 담백하고 순한 맛이 퍼졌다. 배가 만족스러워지니 하루 종일 긴장했던 신경도 서서히 풀어지는 것만 같았다.

지휘관은 반대편 어설픈 젓가락질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필요 없어.

시시하군.

그녀는 힘겹게 젓가락을 쓰며 맛을 보더니, 아무런 평가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알파한테서 참 보기 드문 모습을 보게 된다니, 살아 있다는 건 참 흥미로운 일이었다.

알파의 입꼬리가 살짝 움직였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기 그릇을 지휘관 쪽으로 밀었다. 맑은 면 국물이 출렁였지만,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낭비하지 말라며.

마음이 바뀌었어. 유명한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이 나와 함께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는 게 꽤 재미있군.

한 사람 몫이 넘는 음식을 겨우 다 먹고 나니, 드물게 느끼는 포만감에 졸음이 몰려왔다.

방금 긴장감 넘치는 그 협상을 겪고 나서 안전한 곳에 돌아와서 그런지, 아드레날린이 빠지면서 피로가 밀려들었다.

바람과 눈이 더욱 거세지면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쾅쾅 울렸고, 하늘은 계속 어둡기만 해서 시간이 흐르는 것조차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마 이미 깊은 밤인 듯했다.

꿈에서조차 이런 광경을 상상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밖은 눈으로 산이 막혀 있고 사방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 작은 승방은 하얀 설원이라는 거센 파도 속에서 지휘관과 알파 단둘만을 태운 작은 배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운명 공동체였다.

알파는 고개를 돌려 밖에서 춤추듯 날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깜빡이는 어두운 등불 아래 알파의 옆모습이 비쳤다.

강인하고, 아름다우면서, 의지가 확고한 모습. 그것이 바로 유일무이한 알파였다.

알파는 지휘관의 시선을 눈치채고 정확히 눈을 마주쳤다. 왼쪽 눈에 깃든 불꽃이 평소와는 달리 유난히 부드러워 보였다.

알파

좋군. 경계해야 할 상대를 항상 주시하고 있다니.

하지만 지금은 이 폭풍우가 멈출 때까지 잠시 쉬는 게 좋을 거야.

잠시 말을 잃고 알파를 바라보며 망설이자, 그녀는 지휘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흥미롭다는 듯이 턱을 괴었다.

알파

안심해. 네가 잠들어도 공격하지는 않을 테니까.

알파

걱정 마. 내가 밤을 지킬 테니.

너와는 달리, 난 수면이 필요하지 않아.

깊게 생각하지 마. 서로 경계하는 게 피곤해서 그래.

그냥... 지금은 꿈이라고 생각해. 할 말이 있다면, 푹 자고 나서 해도 돼.

이제 눈 감아.

알파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몸의 긴장을 푼 지휘관은 좁은 공간의 따뜻함을 조용히 느끼다 보니 어느새 온기가 있는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이 소중한 순간을 좀 더 간직하고 싶었지만, 어느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