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 축제 개막 첫날, 컨스텔레이션의 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거리 양쪽을 가득 채운 각종 소품을 파는 가판대와 간이 놀이기구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뿐만 아니라, 도시 건물 내의 여유 공간도 티켓 없이 참관할 수 있는 임시 전시관으로 개조됐다.
공중 정원에서 온 구조체와 스태프, 지상 곳곳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 구룡과 아딜레에서 온 방문객들 그리고 이 도시에 남아 있는 각성 로봇들이 낙원 축제에는 모였다.
다양한 군중들이 모여 새롭지만, 예상외로 조화로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은 하나였다. 바로 어렵게 얻은 여가를 마음껏 즐기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낯익은 얼굴들이 가끔 보였다.
리브. 먼저 "창의적 주방"이라는 곳에 가볼까요? 그곳에서 제공하는 재료로 특별한 요리에 도전해 볼 수 있다고 해요.
요즘 들어 제 요리 실력이 느는 것 같아요. 나중에 리브도 먹어보고 평가해 주세요.
루, 루시아!? 저... 전 루시아의 아이디어가 정말 좋다고 생각해요. 그럼, 제가 보조해 드릴게요.
아니면, 마지막 날에 리, 지휘관님과 합류한 뒤에 다 같이 도와드리는 건...
30분 후, 카드 게임 가게에서 리그전이 있다니... 이건 참을 수가 없군.
대장! 대장! 봐봐. 내가 저기서 뭘 찾았는지 알아? 세계 공용 장난감 회사의 섀도 TR-1200이야! 상태도 좋아! 그리고 작동도 잘 돼! 대장. 이것 봐봐!
카무이? 이제야... 방금까지 연락이 되지 않더니, 반즈도 널 찾고 있어.
반즈... 반즈? 어디 갔지?
30분 전부터 없었어.
카무이. 카무. 안내방송 센터에 한 번 더 가야겠어.
야. 지휘관. 거기서 멍하니 뭐 하고 있는 거야?
이제 세 개 부스만 더 보면 이 구역은 다 둘러보는 거야. 힘내!
왠지 너무 여유로워진 것 같은데.
각성 로봇이 운영하는 가판대에서 구입한 너트맛 아이스크림을 손에 꼭 쥔 카레니나가 지휘관에게 따라오라며 재촉했다.
지휘관 손에는 카레니나가 풍선 사격 게임에서 딴 인형과 장난감들로 가득 찬 선물 가방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안 오면 지휘관 혼자 여기에 남겨둔다? 어서 와.
외출하자고 제안한 건 너잖아?
빨리. 빨리. 늑장 부리면 이 위에 있는 기간 한정 임무를 못 끝낸다고.
카레니나가 손에 들고 있는 단말기를 흔들었다. 스크린에는 깜빡이는 카운트다운과 함께 카레니나의 오후 성과를 보여주는 전자 스탬프가 가득 찍혀 있었다.
아니면 방금 실수로 떨어뜨린 아이스크림을 아직도 신경 쓰는 거야?
그렇게 먹고 싶으면, 내 것 절반을 줄게.
사실 먹어보면 꽤 괜찮아. 냄새는 막 식힌 항공용 티탄 합금 같아. 그리고 탄소강을 좀 섞은 것 같기도 해.
쯧쯧. 맛을 모르는 녀석. 어쩔 수 없지. 불쌍한 널 위해 다음 음료 가게에서 내가 아이스크림 사줄게.
음?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
지휘관의 손가락이 닿았던 부분을 만져본 카레니나는 그제야 자기 얼굴에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이 묻어있다는 걸 발견했다.
너. 너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언제부터 이랬던 거야? 설마, 입가에 아이스크림을 묻힌 채 계속 거리를 돌아다닌 거야!?
지... 휘... 관!
카레니나가 기세등등하게 달려들었지만, 지휘관은 빠르게 몸을 돌려 카레니나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카레니나의 공격이 빗나가면서 그녀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 볼이 콘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더니, 결국 "퍽"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
물어내.
이때, 카레니나의 단말기에서 "삐삐"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건 기간 한정 임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해 카레니나가 설정해 둔 알림이었다.
이런! 확인 좀 해보자. 음료 가게를 지나면 최적 경로가 훨씬 길어져 버려.
오! 나쁘지 않네. 좋은 생각이야. 그럼, 부탁할게. 이번 임무에서 아이스크림 쿠폰을 받으면 절반은 너 줄게!
다 끝나면, 이 위치에서 만나자. 아이스크림 사고 나서 바로 여기로 와. 알았지?
카레니나는 지휘관에게 좌표를 보낸 뒤, 가장 가까운 가게로 서둘러 달려갔다.
카레니나가 노리는 건 경품이 아니었다. 낙원 축제의 스태프가 빈 전자 스탬프 카드를 그녀에게 건넬 때, 지휘관은 상황이 어떻게 될지 짐작할 수 있었다.
거리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얼룩을 조용히 치우고 난 후, 멀지 않은 곳의 가판대에서 마지막 손님 한 쌍이 음료를 들고 떠나는 것을 봤다.
상대방도 지휘관을 발견한 것 같았다. 인사하러 가야 할지 망설이던 중 예전에 했던 약속을 떠올린 지휘관은 일단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눈인사를 나눈 후, 가판대 주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잠시만 기다려 줘. 음... 재료가 부족하네. 다시 채워야겠어.
새로 만드는 데 10분 정도 걸릴 거야. 괜찮아?
계산 먼저 해줘.
미안. 요즘 외상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습관이 돼 버렸어.
지난번 불쾌한 거래 때문에 고품질 탄탈 철광을 40톤이나 잃어버렸거든. 그래서 상대방의 머리를 40개쯤 날려버렸어.
물론, 이 도시 사람들은 모두 믿을 만해. 그 점은 마음에 들어.
"낙원 축제"는 좋은 기념일이야. 쉽게 돈 벌 수 있는 기회를 정말 오랜만에 잡았으니까.
어. 이번 행사를 책임지고 있는 인원과 얘기를 좀 해봤는데, 아딜레 상업 연맹의 투자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하더라고.
가판대 열 때, 필요한 재료와 건축 재료를 우리가 공급하는 대신에 총매출액의 30%를 수익으로 가져가기로 했어. 아딜레 입장에선 확실한 이득인 셈이지.
참고로 우리가 제공하는 냉음료기도 공중 정원의 정비 부대에서 싸게 사 온 중고품이야. 그래서 임대료만으로도 본전을 뽑을 수 있어.
아딜레가 정비 부대를 이용해 이득을 챙겼다는 걸 카레니나가 알게 된다면, 망치를 들고 다른 이에게 "좋은 거래"가 무엇인지 직접 가르쳐 줬을 것이다.
상담을 무료로 할지, 유료로 할지 물어보고 싶지만, 지휘관을 봐서 아이스크림 사은품으로 해줄게. 뭘 알고 싶어?
고용해서 노래하거나 춤추게 하려고? 최대 얼마까지 줄 수 있는데?
그렇게 큰손이었어? 그럼, 가격은 문제가 되지 않겠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한테는 네가 필요한 그런 인원은 없어.
뭐든지 거래하려면, 가격부터 흥정해야 하는 거야. 그 거래가 자신이 할 수 없는 장사라 할지라도 말이야.
아딜레 내부에 적합한 인원은 없지만, 우리가 찾아줄 수는 있어. 서비스 비용만 조금 내면 일주일 내로 인원을 찾아서 데려다줄게.
소피아가 어딘가에서 종말의 방랑 댄서를 납치해 지휘관 집 문 앞에 데려오지는 않을 것이고, 아딜레가 필요한 인원을 찾아줄 능력도 충분히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주일은 너무 길었다. 그때쯤이면 낙원 축제는 이미 끝났을 것이다.
우선 아이라를 찾아 예술 협회 인원들의 상황을 물어볼지 고민하던 중, 가판대에 새로운 손님이 다가왔다.
실례지만 여기 밀크티 있나요?
구룡 옷차림의 젊은 여성이 셋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며칠 전 구룡에서 온 함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방문자였다.
팔아. 하지만 좀 기다려야 해.
안녕하세요. [player name] 님. 제 기억이 맞다면, 공중 정원의 지휘관님이시죠?
네. 그래도 오는 길은 비교적 안전했어요. 포뢰도 저보고 바깥 구경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함영은 주변을 둘러보며 거리 풍경을 감상했다. 보수 작업으로 새롭게 단장된 도심의 곳곳에서 인간과 각성 로봇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기를... 컨스텔레이션이라고 부르나요? 구룡성이나 야항선과는 달리, 이 도시만의색다른 아름다움이 숨어 있네요.
인간과 로봇이 함께 다니는 모습... 드문 광경이지만 정말 아름다운 풍경 같아요.
로봇이 운영하는 댄스 스튜디오를 발견했어요. 그곳에 그들이 만든 "댄싱 머신"이라는 게임기도 있었어요. 한번 시도해 봤는데 정말 재밌었어요.
지금까지 접해왔던 건 모두 인간의 동작을 기반으로 한 춤이었는데, 이번에 본 로봇 춤은 참신했어요. 제 동료도 이번에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그녀가 이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거든요.
지휘관은 뭔가를 깨달은 듯 손뼉을 쳤다. 지휘관의 표정을 본 소피아도 바로 알아챘다.
함영은 춤을 잘 추나 봐?
야항선에 있을 때, 조금 배웠었고 지금도 가끔 무대에 설 때가 있어요.
아니에요. 무연은 참으로 넓고 심오한 세계예요. 전 그냥 평범한 동작 몇 가지만 조금 아는 수준이에요.
정말? 잠시만 기다려 봐. 종이와 펜을 줄 테니 연락처 좀 남겨줄 수 있어? 아딜레가 나중에 비즈니스 협력으로 연락할 수 있게 말이야.
어? 잠깐만요.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음... 어디에 쓰면 될까요?
아니요. 별다른 일은 없어요.
함영은 소피아가 건넨 빈 엽서에 연락처를 적으면서 지휘관을 바라봤다.
아슬아슬했어. 그래도 드디어 다 끝냈네!
기분 좋은 전자음과 함께 마지막 스탬프가 카레니나의 단말기 스크린에 나타났다. 카레니나는 스탬프 카드를 슬라이드하며 자신이 노력한 결과를 감상했다.
하지만, 이 기쁨은 몇십 초가 안 돼서 조금씩 사라졌다. 스크린에는 새로운 상호작용 선택항 대신 "완료"라는 단어가 은은한 허전함을 전하고 있었다.
음...
그나저나 난 왜 이렇게 열심히 했던 거지? 경품이... 아이스크림 교환 쿠폰? 누가 이런 걸 원해?
이 목록에 있는 가게들을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했는데... 됐어. 나중에 지휘관이랑 합류한 다음 다시 돌아보면 되지.
마음이 차분해진 카레니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여기는 로봇들이 낙원 축제 기간에 연 잡화점으로, 선반 위에 진열된 상품들은 대부분 황금시대의 오래된 골동품이었다.
물론, 진정한 의미의 골동품이 아닌 낡은 가전제품, 장난감, 신문 잡지, 카세트테이프 그리고 몇몇 기이한 잡화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대부분은 소장 가치가 없었으며, 상태가 좋은 전자제품들도 현재의 파워 서플라이 프로토콜에 맞지 않아 실용성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 쓰레기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와... 백다이에서 인증한 플라스틱 조립 모형이네? 백 년 전에 출시된 디자인 아니야? 저건... 접이식 통신 단말기?
하지만 어릴 적부터 특별한 "쓰레기 더미"에서 살았던 카레니나에겐 이곳의 모든 것이 그녀의 깊은 곳에 있는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이 도시의 로봇들은 도대체 어디서 이런 희귀한 물건들을 구해올 수 있었던 거지? 잠깐. 저게 뭐야? 황금시대 음반이잖아? 이게 다 음반이네!
삐뚤삐뚤한 글씨로 "음악"이라고 적힌 플라스틱 표지판 앞에서 카레니나는 오래된 음반으로 진열된 선반을 발견했다.
이건 헬로윈의 <예리코의 성벽>이고... 이건 메탈리카의 <라이드 더 라이트닝>...
그리고 밴드 퀸의 <스톤 콜드 크레이지>도 있어!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던 밴드의 노래였었는데.
들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정말 아쉽다.
이 음반들은 모두 마모로 인해 재생할 수 없는 상태였고, 일부는 아예 둘로 갈라져 있었다. 그래서 다 벗겨진 표지만으로 내용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카레니나는 이 망가진 음반을 더미 채로 사 갈지 말지를 고민하면서 선반의 끝까지 걸어갔다.
이건...
맨 끝에 있는 물건은 오래된 턴테이블이었다. 그 턴테이블에는 큰 금이 있었고, 턴암도 두 동강이 나서 더 이상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곳에 있는 다른 오래된 물건들처럼, 이 턴테이블도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추억이었다.
하지만 이건 여기에 있는 다른 물품들과는 다른 의미가 있었다.
...
카레니나는 고장 난 턴테이블에 천천히 손을 뻗어 위에 쌓인 먼지를 가볍게 털어냈다.
할아버지. 이 노래 제목이 뭐야?
오? 이 곡 말이냐? 허허. 이 곡은 <캐논>이라고 해. 기억하기 쉽지? 할아버지 이름도 여기서 따왔을 거야.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이 곡이 학교에서 유행했었어. 그때 할아버지는 이 노래가 뭐가 좋은지 몰랐었어. 나이가 들고 나서야 그 아름다움을 깨달았단다.
캐논은 테이블 위에 놓인 낡은 턴테이블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회상에 잠겼다. 그건 캐논의 몇 안 되는 과거의 소장품이었다.
캐논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몇 가지 물건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리고 음악을 듣는 순간에만 그는 평소와 다른 평온함을 드러냈다.
할아버지. 이 작은 바늘이 디스크를 긁으면 왜 소리가 나? 첨단 기술이야?
하하. 그런 게 아니란다. 이건 19세기의 골동품이란다. 원리는 매우 간단해. 너 알고 싶다면 내일 할아버지가 실험을 통해 알려줄게.
그럼, 이 턴테이블도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거야? 저번에 나한테 만들어준 라디오처럼?
음... 허허. 할아버지가 만든 게 아니란다. 카레니나. 이건... 다른 사람이 할아버지한테 선물로 준 거란다.
할아버지가 아직 젊었을 때의 일이란다. 할아버지가 지금은 이렇게 보여도 그때는...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꾸나.
왜 말해 주지 않는 거야? 듣고 싶어. 이야기해 줘!
아이고... 이것 참 곤란하게 됐네. 어떤 일은 할아버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그렇단다.
캐논의 흐릿한 눈동자에 끝없이 돌아가는 듯한 턴테이블 바늘이 비쳤다. 그때의 카레니나는 어렸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눈빛이 전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일기를 열어보고 나서야, 그 턴테이블이 할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알게 됐다.
그건 한 젊은 여자가 할아버지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할아버지의 이름과 같은 그 음반에 담아 선물로 줬다.
하지만 그때 할아버지는 자신의 미래를 이미 정한 후였다. 공부를 마친 할아버지는 곧바로 과학 이사회에 들어가 한 기밀 프로젝트의 연구를 맡게 됐고, 그로 인해 외부와의 연락도 끊기게 됐다.
과학으로 인간에게 이로움을 선사하는 것이 꿈인 할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과학에 바쳤다.
그 과정에서 할아버지는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많은 것들을 포기했고, 늘 혼자였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그 소녀의 이름과 얼굴을 이미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레니나는그때 할아버지의 눈빛 속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건 마음 깊숙이 숨겨져 있어서, 신경 쓰지 않는다 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아쉬움"이었다.
왜 그랬어? 할아버지. 저 턴테이블은 할아버지한테 정말 중요한 거 아니었어!?
괜찮아. 괜찮아. 아무리 중요해도 우리 카레니나를 배불리 밥 먹이는 것보다 중요하진 않단다.
마침 할아버지 귀도 점점 어두워지고 있잖니. 턴테이블을 팔면 전기도 아끼고 좋지.
보렴. 할아버지가 모터도 미리 떼놨단다. 나중에 카레니나를 위해 다른 장난감을 만들어 줄게.
캐논은 손에 든 작은 모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건 그가 턴테이블을 판 뒤 남겨놓은 유일한 부품이었다.
하지만... 그건 할아버지가 평생 간직한 거잖아!? 어떻게 빵 몇 조각 때문에 그걸...
평생 간직했어도 쓸모없잖니. 하지만, 이 식량 덕분에 우리는 이번 달을 버틸 수 있게 됐어. 그때가 되면 할아버지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게.
하지만 그건 할아버지 유일한 취미잖아! 왜... 그것마저도 간직할 수 없는 거야?
울지 말거라. 카레니나. 할아버지는 이제... 이런 건 더 이상 필요 없단다.
아쉽긴 하지. 원래는 네 혼수로 남겨둘 생각이었거든.
요즘 세상에... 턴테이블... 허허. 전당포 사람들조차 그게 뭔지 모르더구나. 뜯어서 알람으로 쓸 수 있을 거로 생각했나 봐.
그 축하 카드에 세계 공용 장난감 회사의 3세대라고 적혀 있던 게 아직도 기억난단다.
세계 공용 장난감 회사의 3세대...
세계 공용 장난감 회사의 3세대 "레트로" 턴테이블. RTL730 모델. 젊은이들의 음악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세계 공용 장난감 회사의 오락 제품입니다.
출시 당시 연인들 사이에서 선물로 주고받은 비율이 무려 13.46%에 달했다고 합니다. 반응은 매우 성공적이었음에도 생산 라인이 중단돼 시장에 유통된 양은 3만 대를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독특한 목소리에 카레니나는 추억에서 빠져나왔다. 고개를 돌린 카레니나는 언제 옆에 와 있었는지 모를 키 작은 로봇을 바라봤다.
키스크?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밴드 리허설이 끝났습니다. 지금은 멤버들의 자유 활동 시간입니다.
카레니나. 그 턴테이블을 계속 쳐다보고 있으시던데, 관심 있으십니까?
어. 공중 정원에 올라가면 볼 기회가 없으니까.
지상으로 내려와서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찾으려고 했는데, 결국 못 찾았었어. 여기서 같은 모델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
그러고 보니, 그때부터 음악 관련 물건들을 모으기 시작했던 것 같아.
이 음반과 턴테이블은 세르반테스 님과 함께 여행을 다니던 중에 버려진 쇼핑몰에서 찾은 겁니다.
망가진 음반은 복원하기에 번거롭기 때문에 원래는 그냥 폐품으로 생각해 다른 부품으로 가공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미 상당히 낙후된 데이터 저장 방식이니까. 그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폴리염화비닐에 비하면 디지털 음악은 너무나도 편리한 방법이지.
하지만 세르반테스 님이 이건 간직할 가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언젠가는 필요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하다라... 혹시 이 턴테이블 수리해 봤어?
RTL730은 세계 공용 장난감 회사의 전용 틀로 만들어졌습니다. 바늘과 턴테이블 모두 같은 회사의 다른 모델 제품으로 대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장된 모터만은 그해 별도로 생산된 기념판이라 완벽하게 매칭되는 대체품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하. 너 이거에 대해 잘 알고 있구나. 역시 밴드 멤버는 다르네.
잠깐... 너 밴드 멤버라고!?
네. 전 선더 스파크 밴드의 메인 보컬 겸 기타리스트 키스크라고 합니다. 카레니나. 이 정보는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해당 정보를 얻은 시간은 세계 시간 837시간 전입니다. 카레니나는 우연히 하수구로 떨어진 저를...
쓸데없는 추억 타령은 그만해. 젠장. 왜 이제야 생각난 거지? 분명히 전문가는 널리고 널렸는데!
이 로봇들과 한동안 어울려 지내다 보니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이 줬던 강렬한 첫인상은 잊은 것 같았다.
이 컨스텔레이션이라는 도시에 널리고 널린 게 예술을 하는 로봇이었다.
키스크. 내가 고생해서 널 버려진 하수구에서 건져냈고, 정비 부대의 재고를 사용하면서까지 네 고장 난 센서 부품을 바꿔줬던 일은 잊지 않았겠지?
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특히 네가 날 끌고 함께 물에 빠지는 바람에 내가 세정 캡슐에서 사흘 밤낮 보냈던 일을 말이야!
음... 하지만 방금 쓸데없는 추억이라고...
쿨럭. 쿨럭!
카레니나는 키스크가 세상에서 세 번째로 존경하는 분입니다! 행동 프로토콜 제337조에 따라, 카레니나의 어떠한 요청도 키스크는 기꺼이 따를 것입니다!
좋아. 태도가 마음에 들어. 걱정하지 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거야. 음... 무료 아이스크림 교환 쿠폰이라도 줄까?
내가 지금 중요한 일을 준비하고 있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귀한 기회이니만큼, 최선을 다해서 해내고 싶어.
그 일은 오직 "낙원 축제"에서만 할 수 있는 겁니까?
맞아. "낙원 축제"는 많은 이의 노력으로 열리는 축제야. 정말 멋진 축제지. 퍼니싱이 날뛰고 있는 시대에선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니까.
기회는 항상 순식간에 지나가잖아? 이번에는 "아쉬움"을 남기지 않도록 노력하고 싶어.
적어도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땐 말이야.
카레니나가 어떤 묘한 예감에 이끌려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뭔가 발견한 거라도 있어? 지휘관.
지휘관의 표정을 본 상대방도 서로의 뜻을 알아챈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럼! 물론이지!
컨스텔레이션
예술 협회 임시 지부
공중 정원이 컨스텔레이션을 인수한 뒤, 정화 구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컨스텔레이션에 공중 정원의 직업 부문 지부를 설치하고자 했다.
이는 언젠가 컨스텔레이션이 공중 정원 외에 인류의 또 다른 주요 근거지가 되길 바라는 의도에서였다.
효율성을 고려해 컨스텔레이션 내에서 지부를 처음으로 건설한 건 재건 작업을 주도하는 예술 협회와 정비 부대였다.
예술 협회 지상 지부의 많은 인원들이 낙원 축제의 진행을 위해 바삐 활동하는 동안, 다소 이례적인 팀이 이곳에 모였다.
이곳에 이렇게 큰 녹음실이 있고, 가지고 있는 장비도 모두 최신 제품이라니... 예술 협회의 자금이 이렇게 많은 거야?
웬만한 시설은 다 갖춰져 있어서 조금은 사치스러워 보이기까지 한 내부를 바라본 카레니나는 이곳에 비하면 자신의 비밀 기지가 다소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이곳도 꽤 허름했어. 내가 돈을 들여서 다시 꾸민 거야. 유물의 감정과 보존은 상당히 엄격한 환경을 요구하니까, 꼭 필요한 투자인 셈이지.
이 장비들은... 보이는 김에 구입한 거야. 나중에 모든 인원에게 개방할 예정이라 최고 기준으로 맞췄지.
각성 로봇들도 많이 도와줬어. 재료의 대부분은 그들이 준비한 거야.
이런 환경에서라면, 카레니나의 소원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더 높아지지 않을까요?
맞아.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은 찾기 힘들 거야.
예술 협회에 더 이상 폐 끼치기 싫다고 말은 했지만...
결국 예술 협회에 도움을 청하게 됐네.
괜찮아. 괜찮아. 협회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뿐이야. 그리고 난 신규 코팅의 시각적 효과를 보고 싶었거든.
예술 협회의 아이라, 밴드 선더 스파크의 기타리스트이자 메인 보컬 키스크, 그리고 구룡 출신의 무용가 함영.
그러니까 제가 카레니나에게 안무를 가르치고, 키스크와 아이라가 노래와 구체적인 공연 효과를 개선하고, 지휘관님께서는 총괄을 맡으신다는 거죠?
괜찮습니다. 밴드 선더 스파크의 새 노래 리허설은 거의 끝났습니다. 이제 남은 건 켈리가 오일주에 손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없어요. 전 카레니나를 도와드리고 싶어요. 다만 이런 스타일의 음악에 맞는 춤을 만드는 건 처음이라, 부족한 점이 있을지도 모르니 너그러이 양해 부탁드려요.
난 아직 예술 협회와의 인수인계 작업이 좀 남아있어.
하지만 상관없어. 카레니나를 돕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
나머지 잡일은 시카와 레오니에게 맡기면 돼. 그녀들이 뭐라고 하진 않을 거야.
그럼,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다들 카레니나가 연습했던 영상부터 본 다음 의견을 모아보자.
응. 알았어... 아. 잠깐, 잠깐만...
아이라가 자신의 연습 영상이 담긴 디스크를 플레이어에 넣으려고 하자, 카레니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직 보지 마. 마음의 준비 좀 하고... 난 빠져 있을까? 정말 보고 싶지 않단 말이야!
안 돼. 한 장면도 놓치지 말고 프레임 단위로 다 봐야 해. 그래야 자신의 단점과 보완해야 할 부분을 제대로 파악해야지.
부끄러움도 이겨내야 해. 이 영상은 네가 부끄럼을 타지 않고 볼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서 재생할 거야.
아이라는 카레니나의 머리를 눌러 단말기 스크린 앞에 세워놓았다.
제발... 그만해...
이렇게 임시로 구성된 팀은 조금은 민망한 분위기로 시작하게 됐다.
그리고 낙원 축제의 마지막 날에 완벽한 마침표를 그린 그 끝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