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병 교대 시간에 맞춰 일행은 용사의 방 창문 쪽으로 몰래 접근했다.
창위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창문을 넘은 그레이 레이븐 일행은 용사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장면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먹고 마시며 장물을 세어보고 있을 줄 알았던 떠돌이 마법사가 밧줄로 기둥에 묶인 채 속박돼 있었다.
손과 발 묶여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누구세요?
한때 이름 없는 현자였던 그는 조금의 소음에도 바로 경계하기 시작했다.
눈을 가늘게 뜬 떠돌이 마법사는 구석에 숨어 있는 그레이 레이븐 일행을 자세히 보려 했다.
여러분이세요? 몇 년 전 갑자기 사라진 용사님들요?
한눈에 알아보시다니...
예전에 우리를 어린아이로 만든 바로 그 사람이었죠?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이 세상에서 우리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거예요.
하지만 떠돌이 마법사는 이번 만남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주변의 속삭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밧줄에 묶여 속박당한 상태에서 계속 팔다리를 움직여 기둥을 두드릴 뿐이었다.
용사님. 용사님. 정말 보고 싶었어요.
그 사람들이 절 묶어놓을 때마다, 용사님이 제 곁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었어요.
지휘관의 질문을 들은 떠돌이 마법사는 무언가가 떠오른 듯, 기둥을 세게 차며 말했다.
말하려고 하니 화가 치밀어 오르네요.
용들의 고향에 또 문제가 생겼나 봐요. 그래서 왕이 용사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사라진 용사님들을 찾지 못하니까 결국 절 데려왔어요.
하지만... 용사가 되려면 관련된 스킬이 필요하지 않나요?
아? 오.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용사님들이 오시기 전에, 저도 한때 용사였어요.
그래서 지금은 퇴직이 지연된 거라고 할 수 있겠네요. 퇴직 후 다시 일자리를 구한 거죠.
게다가 저 바보 같은 왕에게 강제로 납치당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이렇게 말한 떠돌이 마법사는 다시 분노에 찬 발길질을 했다.
용사님.
한때 일행을 속이고 농락했던 마법사는 이 순간 간절한 태도로 변해 눈시울이 젖은 채 그레이 레이븐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지휘관의 명령 한 마디에 리브, 리, 루시아 세 명의 대원은 즉시 구석으로 이동해 작은 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고개를 맞댄 뒤 상의하기 시작했다.
보니까, 정말 곤경에 처한 것 같아요.
하지만 제 기억으로는 동반자가 있었던 거 같아요. 용사의 동반자라면 함께 불려 왔을 거예요.
루시아가 말한 것처럼, 동반자들이 없다면 사기일 가능성이 커요.
잠시만요. 제 반사기 대응 데이터베이스를 찾아볼게요.
거짓말 탐지 테스트를 해볼까요?
아이라... 아니, 최고의 여신은 분명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마법사가 한 말과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시나리오와 얼마나 유사한지는 비교해 볼 수 있어요.
용사님?
수다스러운 논의가 몇 분간 이어진 후, 결론이 도출되자 일행은 다시 기둥 앞으로 돌아왔다.
오. 간단해요.
용사님들은 절 풀어주시기만 하면 돼요. 그러면 제가 왕에게 여러분의 복귀를 보고한 뒤, 여러분을 용들의 고향으로 안내해 드릴 수 있어요.
장난하지 마세요. 지금 우리 상황을 보세요. 이런 상태로 어떻게 용들의 고향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어요.
아. 그냥 어린아이로 변한 마법일 뿐이잖아요. 예전에 제가 여러분을 이런 마법에서 해방해 드렸었잖아요.
그동안 제 능력도 많이 향상됐어요. 매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횟수도 크게 늘었으니, 이런 문제는 사소한 일에 불과해요.
혹시 왕에게 보고한 후 보상을 혼자 챙기려는 건 아니겠죠?
그, 그럴 리가요.
예전에 리브님의 가르침을 받고 전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어요.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 시작했죠.
그러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한 번 조사해 봐야겠네요. 당신 말이 사실인지를요.
말을 마친 리가 나머지 일행에게 눈짓했다. 그리고 리의 이끌림을 따라 그레이 레이븐 일행은 곧장 걸음을 옮겼다.
이러지 마세요. 용사님. 정말로 속이는 게 아니에요.
그럼, 보상을 반반 나누면 어때요? 네?
용사님. 절 그냥 내버려두지 마세요. 도와주세요. 용사님!
쉿, 조용히 좀 해요. 초병 불러들이지 말고요.
복도에서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초병이 의자에서 일어난 소리 같았다.
루시아는 통을 창가로 옮겨 그 위에 올라선 뒤, 창문을 열어 후퇴 경로를 확보했다.
리브는 지휘관의 신호에 따라, 떠돌이 마법사에게 할 말을 준비했다.
음... 떠돌이 마법사님은 이 세계에서 우리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시죠?
그래서 우리는... 입막음 같은 걸 할지 생각해 봤어요.
게임 세계 밖에서 아이라가 제어 프로그램을 통해 주사위를 던졌다. 주사위가 나온 결과와 리브의 게임 캐릭터 속성이 결합하여 이번 위협이 성공할지가 결정될 거였다.
최고 난도. 계산 결과는... 짜잔~ 성공이네. 리브는 운이 참 좋아.
리브는 승리를 상징하는 손짓을 한 후,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떠돌이 마법사는 리브의 위협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이라도 그에게 주사위를 던져 그가 이대로 포기할지를 결정했다.
어라...? 떠돌이 마법사가 갑자기 빛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어.
이상하네요. 용사님께서 이런 일을 하신다는 건 차치하고, 용사님의 지금 상태에서 어떻게 제 입을 막으실 수 있다는 거죠?
저, 전...
리브는 주변을 둘러보며 사용할 수 있는 물품을 찾았다. 하지만 방 안에는 떠돌이 마법사가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물건은 다 치웠는지, 마땅한 물건을 찾을 수 없었다.
문 옆에 서서 밖의 소리를 듣고 있던 리가 떠돌이 마법사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작아진 리의 주먹은 귀엽기만 했다.
초병! 초병! 왕께 보고해요! 제가 긴히 할 말이 있다고요!
떠돌이 마법사는 주저하지 않고 최대한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밖에서 바삐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지휘관님. 소리로 봐서 적어도 10명은 되는 것 같아요.
그냥 원래 길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요? 그래서 창위에게 도움을 요청해 도시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생각해 보시죠.
후퇴 경로는 이미 확인해 놨어요. 당장은 안전하니, 지금 이동하는 게 좋겠어요.
지휘관님?
지휘관은 그레이 레이븐 대원들을 손짓으로 불러 모은 뒤,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지휘관님.
정말 이렇게 해야 할까요?
저, 전 아직 이런 걸 시도해 본 적이 없어요.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던 일행은 뭔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격려하는 시간이 끝난 후의 다음, 문제는 누가 먼저 나서서 시작할지였다.
용사님, 여신님의 이름으로. 또 무슨 일인가요?
한숨을 쉰 초병 대장이 문의 잠금장치를 풀면서 나타났다. 얼굴에 힘없는 표정이 역력한 것이 이런 일이 자주 있었던 거 같았다.
음? 이상하군. 한 사람의 기운이 아닌데? 전원 경계 태세.
하지만 초병 대장이 무슨 일인지 묻으려 할 때, 리브가 먼저 대장 앞으로 걸어갔다.
깊은숨을 들이쉬고, 마음의 준비를 한 다음 고개를 들어 상대를 똑바로 바라봤다.
큰언니. 큰언니. 저 사람이 초상화 속의 용사님 맞아요?
……
이 아이는 누구네 아이지? 정말 귀엽네.
하?!
리브가 조심스럽게 치마 끝을 잡고 물어보자, 초병 대장의 얼굴에 가득 찼던 어두운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맞아. 그가 바로 공고판에 나온 용사님이야. 아이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시아가 통을 밀다가 “실수로” 주목을 끄는 소리를 냈다.
초병들의 시선을 받은 루시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모습은 들키고 싶지 않은 걸 들킨 듯, 완전히 실패한 모습이었다.
오빠. 큰언니. 우리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루시아의 "서투른" "성동격서"는 초병들을 웃게 했다.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루시아는 조금 경계하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 행동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효과가 발생했다.
아니에요! 그들이...
쉿, 소리 좀 줄이세요. 아이들을 놀라게 하지 마세요.
네?
말을 마친 초병 대장이 루시아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웠다.
얘야. 여기는 몰래 들어와서 놀 곳이 아니란다. 너희들 모두 몇 명이야?
4명?
초병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구석에 숨어 있는 리를 발견했다.
여기 또 한 명 있네. 무슨 일이니? 꼬마야.
고개를 숙인 리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초병이 무기를 거두고 다가갔다.
리가 이런 일에 서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그를 구석에 세워 기회를 엿보게 하려고 했었다.
루시아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중간에 한 여성 초병이 루시아를 낚아챘다. 상대방은 루시아가 제멋대로 어디론가 도망가려는 것으로 오해한 것 같았다.
……
음? 어디 다친 데라도 있어?
음...
꼬마야?
초병이 조금씩 다가가자, 리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구석에 있던 리는 곧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힘내세요. 리.)
리. 할 수 있어.
(제발 좀... 강요하지 마세요.)
(으으. 빠져나갈 수도, 내려갈 수도 없어요.)
꼬마야.
조심하세요. 그 애한테는 둔기가 있어요!
둔기?
깊게 숨을 들이쉰 리가 다리를 벌려 허리에 찬 커다란 소라 껍데기를 꺼냈다. 그리고 초병들의 놀란 눈길을 받으며 소라 껍데기를 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런 뒤, 리는 주저하지 않고 소라를 불어댔다.
뚜... 웅...
갑작스러운 소리에 초병은 놀라 반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뒤에 있던 동료가 어깨를 잡아주며 몸을 지탱해 줬다.
그 사이, 아이라도 주사위를 던졌다.
이상하게 보일 법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리의 순수하고 흠 없는 큰 눈동자를 보게 된 두 번째 초병은 자신이 가졌던 모든 의심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됐어. 됐어. 이 아이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 만약 더 했다간 소라 껍데기 속에서 소라 요정이 나와 주먹질할지도 모르잖아.
이 아이, 내 조카랑 꽤 닮은 것 같아. 낯을 많이 가리네.
대장님. 보아하니 그냥 평범한 어린아이 같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어린아이도 있어? 참나, 이런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거야.
이 개구쟁이들, 용사님이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창문을 통해 들어왔어?
음... 전설 속의 용사님을 한 번 보고 싶어서요.
아. 정말 옛날 생각나네. 내가 너희 나이 때에도 이런 거 좋아했었단다.
하지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건 아주 위험하단다.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마. 알겠지?
네~
에이~ 착하네.
애정 어린 표정으로 리브를 어깨에 앉아 올린 초병 대장은 기둥에 묶인 채 멍하니 있는 떠돌이 마법사를 힐끗 쳐다봤다.
이 아이들처럼 누구도 순종적이면 좋겠네요.
떠돌이 마법사 표정 변화에는 세상의 모든 미스터리가 한데 모여 복잡하게 얽혀 있는 듯, 다양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아이라가 18번째 주사위를 던질 때가 되자 멈춰버린 뇌가 드디어 재가동에 성공했다고 선언했다.
잠깐만요. 이 아이들이 제가 보고하려던 내용이에요.
용사님이 왕께 아이들이 침입했다고 보고하려는 건가요?
아니요. 이 아이들은 보통 아이들이 아니에요. 바로 지난번 용들의 고향에서 돌아온 용사들이에요. 이런 모습인 건 어린아이화 마법을 사용해서 그런 거예요.
어린아이화 마법이요?
초병 대장은 자기 어깨 위에 있는 리브를 바라봤다. 초병 대장의 시선을 의식한 리브는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초병 대장은 눈짓으로 초병 한 명에게 오라고 신호를 보냈다. 일행은 초병의 손에 들린 마법 지팡이를 본 후에야 초병대 안에 전문 마법사가 있음을 알게 됐다.
조용히 밝아오기 시작한 제거 마법의 빛이 조금씩 일행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지휘관이 주사위를 던졌는데, 벗어나기에 실패했어.
상황을 인지한 리브는 즉시 주변을 살펴서 초병들의 위치를 모두 기억하려 했다.
루시아는 잠시 몸부림치며 자세를 바꿨다. 도망치기 위함이 아니라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면 바로 초병이 허리에 찬 검을 빼앗기 위해서였다.
여유롭게 소라 껍데기를 만지작거린 리는 가끔 입에 대고 아무렇지도 않게 연주했다.
……
하지만 빛이 사라지고 반짝이는 입자들이 바람에 쓸려 갔을 때, 일행의 몸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 있지 않았다.
[시공도피자의 회중시계]가 작동되면 사용자의 시간을 되돌려 모든 상처와 저주를 없앨 수 있어요.
이건 저주나 마법 같은 건 아니에요. 저도 풀 수 없는 효과죠.
마법이 제대로 발동됐나? 결론이 뭐지?
음... 효과가 없다는 건 마법이나 저주가 아니라는 거예요.
후... 이제 한숨을 돌릴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더 고급스러운 무언가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어요. 진짜 용사님이시라면...
이런... 끝난 게 끝난 게 아니었다.
못 참겠다. 비켜.
아? 네...
아이들. 다들 언니 봐봐.
묶여 있는... 아니. 기둥에 기대고 있는 이 용사님을 예전에 만난 적이 있니?
초병 대장에게 대답한 것은 네 쌍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큰 눈이었다. 일행은 "음음"하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흔들었다.
알았어. 이걸로 끝내자.
단호하게 손가락을 튕긴 대장은 숙련된 솜씨로 빵 한 조각을 떠돌이 마법사의 입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다시 길을 떠나야 할 때가 됐지?
아. 좀 더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돼버리다니...
얘들아. 한 번 더 언니라고 부르는 걸로 보상해 줘.
언니...
아~ 언니는 이제 다 회복됐어.
좋아. 됐어. 너희 둘, 용사님을 마차에 실어. 그리고 이번엔 좀 더 꽉 묶어.
으으윽! 으으! 으으!
아아? 뭐라고 하시는지 잘 들리지 않아요. 미안해요. 용사님. 어서 옮겨요.
말이 끝나자마자, 떠돌이 마법사는 초병에 의해 능숙하게 내려졌다. 하지만 이어서 수많은 밧줄로 "애벌레"처럼 빡빡하게 묶였다.
두 명의 초병이 앞뒤로 떠돌이 마법사를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가는 리는 손에 든 소라 껍데기를 더욱 크게 불기 시작했다.
뚜웅. 뚜웅. 뿌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