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간의 우여곡절 끝에 물웅덩이와 멀지 않은 폐허 속에서 비앙카와 합류했다.
제때에 오셨어요. 고마워요. 혹시 혼자 오셨어요?
리는요? 같이 오지 않았나요?
지휘관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단말기를 봤다.
상황은 어떤가요?
북쪽...
아니요. 계속 추적하면 승격자를 만날 수도 있어요. 그들이 순순히 물러나진 않을 거예요. 일단은 시신부터 회수하고 신중하게 움직이라고 전해 주세요.
나머지는...
비앙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휘관 손에 있는 단말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
비앙카가 지켜보는 가운데 메시지를 열자, 한 줄뿐인 짧은 내용이 보였다.
그 예배당으로 오세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간결하네요.
이 설원은 제 고향이고, 북쪽에 제가 자란 예배당이 있어요.
상대방은 지휘관님이 저와 함께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지휘관님의 단말기에 보낸 것 같아요. 우리한테 "너희들의 일거수일투족과 과거를 잘 알고 있다"라는 걸 과시하고 싶은 거겠죠.
그때의 "웬"처럼.
함정이겠지만 상대는 우리의 행적을 알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공중 정원으로 돌아간다고 한들 그쪽에서 그만두진 않을 것 같아요.
레이난을 찾고 배후의 주모자가 누군지 캐내야겠어요. 승격자 외에도 배후가 더 있을 거예요.
몸을 지탱하고 있던 무기를 내려놓은 비앙카가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손을 내밀어 바닥에 있는 기체 복원 의료상자를 들어 올리려 했다.
괜찮아요. 이런 모습을 보인 것만으로도 죄송한데, 이런 사소한 일에까지 수고를 끼칠 수는...
그녀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앞으로 넘어졌다.
지휘관은 비앙카를 잡아 주려다가 함께 바닥에 넘어져 버렸고, 그제야 그녀의 치맛자락 밑에 숨겨진 심각한 상처들이 보였다.
지휘관님! 죄송해요.
비앙카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살며시 그녀가 뻗은 손을 잡은 뒤, 몸을 숙여 부품을 주웠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비앙카 옆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지휘관은 폐허 틈새로 들어오는 빛을 빌려, 그녀의 손상 여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
아니요. 전 지휘관님의 복원 기술을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비앙카는 자신을 정비하는 두 손을 보며 뭔가를 말하려다 말았다.
함정...? 방금 그 메시지가 온 것만으로도 설명이 부족한가요?
…………
물론이죠. 다만 제가 걱정하는 건 아무런 근거도 없는 악몽일 뿐이에요.
…………
지휘관이 비앙카를 한참 바라보자,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오늘 일어났었던 일과 똑같은 "꿈"을 꿨어요. 그 꿈속에서 저는 절 키워준 예배당으로 돌아갔어요.
그곳은 모든 만남과 이별, 신뢰와 배신, 용서와 증오가 일어난 곳이었다.
질서를 지켜야 할 정화 부대에서 배신자가 나타났고, 우린 곤경에 빠지게 됐죠.
꿈속의 전 무방비 상태에서 그들의 함정에 빠졌고, 중상을 입은 후 공중 정원과 연락도 끊겼어요.
현실의 전 어느 정도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꿈속에서처럼 곤경에 빠졌으니까요.
꿈속의 저는 최후의 수단으로 집행 부대에 지원을 신청했지만, 되려 승격자와 배신자의 음모에 지휘관님과 대원들을 말려들게 했어요.
그리고 한때는 동료였던 침식체를 보내 버린 저는 모든 힘을 소진하고 침식체의 일원이 돼 버렸어요.
침식체가 된 후 얼마나 떠돌아다녔는지 모르겠지만...
비앙카는 지휘관의 손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생각해 보니, 이 두 손은 항상 보호 장갑을 낀 채 군인다운 근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장갑 아래 손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미래와 영원한 겨울의 꿈속에서 비앙카는 이 두 손이 자신의 공격으로 찢어져 상처투성이가 되는 것을 봤다.
그리고 전 그 악몽의 끝에서 지휘관님을 만났어요.
과거의 동료와 은인에게 칼을 휘둘렀을 때부터 마음의 준비는 돼 있었어요.
정화 부대의 일원으로서 그런 결말을 예상 못 했던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지휘관님께서는 저에게 배신과 이별에 익숙해지지 말라고 하셨죠. 아마 지휘관님께서도 익숙해지지 않으셨기 때문이겠죠.
이별에 익숙해지지 않으셨기 때문에 과거 동료인 "절" 처단할 때도 잠깐 망설이셨어요.
그리고 "저"는 그 순간의 망설임을 기회로 삼아 지휘관님께 상처를 입혔어요.
비앙카의 말투엔 조금의 피로가 섞여 있었다. 그건 쌓인 눈이 흔들리듯 미세했지만, 눈사태의 전조를 알리는 것만 같았다.
꿈은 여기까지예요.
…………
맞아요. 이 꿈은 제가 바다에 가라앉았을 때, 근원 추적 장치가 수집한 데이터에서 비롯된 거예요.
아시모프 님과 베살리우스 아가씨는 이것이 승격 네트워크가 연산한 미래와 연관 있다고 생각했지만, 구체적인 발생 시기까지는 추측해 내지 못했어요.
재현을 통해 그 속에서 배신자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어요. 그 정보와 오늘에 있었던 일을 결합해 봤을 때...
그 예언이 가리키는 시기가 지금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제가 더 이상 지휘관님을 막을 수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마음속 어딘가에선 다른 결말을 기대하고 있어요.
"일이 어떻게 될지는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어"라고 봐야겠죠?
이야기요?
네. 마법을 소재로 한 영화에도 이런 장면이 있었어요. 악당은 7월에 태어난 아이가 자신을 죽일 거라는 예언을 믿고 행동에 나섰죠.
…………
지휘관님도 이렇게 남을 놀릴 때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한숨을 쉰 비앙카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지휘관을 바라봤다.
하지만 항상 자신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종종 타인의 인정과 격려가 필요한 법이죠.
사람들은 자신을 인정해 주고 격려해 줄 사람을 찾지 못했을 때, 신이나 예언자 혹은 점쟁이 등과 같은 존재가 자신에게 어떻게 하면 재앙에서 벗어나고 미래를 찾을 수 있는지 가르쳐 주길 바라죠.
지휘관님에게는 이것이 연약함의 표현인가요?
지휘관의 대답을 들은 비앙카가 폐허밖에 쌓인 눈을 보며, 한동안 침묵하다가 엉뚱한 말을 꺼냈다.
지휘관님께선 꽃을 좋아하시나요?
지휘관님 말씀을 들으니, 옛날 생각나서요.
시선을 내린 비앙카가 이 설원에서 있었던 추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 전 꽃을 좋아했어요. 꽃이 피고 시들어 가는 과정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거든요.
이 백합꽃을 키우고 싶니?
어느 겨울, 전 방랑자한테서 선물을 받았어요.
수녀님, 제 고해를 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이 백합 구근은 제 딸이 생전에 남기고 간 건데 부디 받아주시기를 바라요.
당신이 신뢰해 주시니 영광이에요. 하지만 선물은 그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그럼, 이 백합을... 활짝 피어야 할 꽃들을 구해주실 수 있을까요? 떠돌이 신세인 전 아무리 앞으로 가도 이 백합을 활짝 피게 할 수 없어요.
꽃이 피고 싶어서 씨앗을 품었을 텐데, 저와 함께 방랑하면 피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제발...
설원은 백합을 심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어요. 미사에 참여했을 때, 백합을 본 적이 있지만, 대부분은 생체공학 꽃이었죠.
꽃을 좋아하기도 했고, 그 방랑자의 말이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 있기도 해서 모래 속에 있는 백합 구근을 받았어요. 그리고 난방시설이 있고, 온도 조절이 가능한 방에 몇 번을 걸쳐서 나눠 심었죠.
전 백합에 적합한 흙과 정화된 물, 적당한 비료를 주며 건강하게 자라기를 매일 기도했지만 결국...
꽃봉오리가 돋아난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망가졌어요.
심지어 이 꽃들이 침식체에 의해 파괴된 건지, 아니면 굶주린 사람들이 송두리째 뽑아간 건지 알 수 없었어요.
전 이 꽃들을 돌볼 능력이 없었어요. 아무리 노력하고 기도해 봐도 결국엔 망가졌죠.
내 아이야. 네가 그 꽃들을 사랑하고 또 꽃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애를 썼는진 나도 잘 안단다. 신의 축복 아래 생명은 대지로 돌아갔지만, 다른 형태로 네 곁에 머물 것이야.
하지만 전 이렇게 빨리 대지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어요. 그 꽃은 만개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스노우 신부님. 전 더 이상 남은 백합을 키우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네 마음은 울고 있는 것 같구나. 내 아이야. 억지로 사랑을 포기할 필요는 없단다.
사랑하기 때문에 포기하는 거예요. 전 그것들을 지킬 수 없을 거 같아요.
신부는 비앙카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신께서 이 꽃들을 키우라고 하신다면 넌 어떻게 하겠니?
내 아이야. 난 하늘의 소리를 들었단다. 신께선 네가 이 꽃들을 계속 보살펴 주길 바라시는 것 같더구나.
왜죠?
백합들은 네 옆에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단다. 그리고 지켜 준다면 언젠간 우리 자신도 보호하게 되는 거란다.
신부님께서는 제가 자신이 좋아하는 꽃을 버리지 않도록 선의의 거짓말을 하셨어요.
늘 신부님을 믿던 전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고, 그분이 인정한 저라면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어요.
하지만 그 백합들은 계속해서 시들었어요. 결국 마지막에 저는 얼마 남지 않은 구근을 식량 교환하러 가는 밀에게 넘겨줬어요.
정말로 그렇게 할 거니?
전 결정했어요. 이걸로 모두가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조금이나마 더 교환할 수 있고, 백합도 보호받을 수 있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돼요.
네 선택을 존중한다만 운명은 항상 변덕스럽고,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하렴.
언젠가 시들어 버릴 백합이라면, 네 곁에 있는 게 좋을 거 같구나.
백합이 어떻게 감정이 가지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이번엔 신부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어요.
하지만 스노우 신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운명은 언제나 변덕스러웠어요. 밀이 식량 교환하러 떠나서 살아 돌아오지 못하게 된 거죠.
그 백합 구근들은 먹을 수 없는 품종이었어요. 때문에 종말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에겐 아무런 가치가 없었고 식량과도 교환할 수 없었으니... 아마도 어딘가에 버려졌겠죠.
백합들은 어떤 결말이 좋을지 말하지 않더라도, 이런 결말은 저에게 있어서 좋은 결과가 아니었어요.
그때... 끔찍한 생각이 제 마음속을 스쳤죠. "그 백합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아이였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제가 자신을 믿지 못하고 아이들을 내보냈다가 아이들이 그 때문에 죽었다면... 전 제 나약함과 어떻게 마주해야 했을까요?
제가 선택을 잘못했어요.
내 아이야. 너무 자책하지 말거라. 우리의 마음은 연약해서 곤경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용감하게 사랑하고 행동할 수 있단다.
사람이 두려움에 눈이 멀게 되면, 가다가 반드시 실패할 거라는 생각에 포기하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거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신께 기도해야 한단다. 기도 안에서 신께서 걸어오신 길을 보고, 앞으로 나아갈 과정 중에 용기를 얻는 거란다.
기도하거라. 기도 안에서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걸 지키며, 포기하지 않는 용기를 얻거라.
처음으로 "믿음"이라는 감정 속에 담겨 있는 힘을 느낀 순간이었어요. 그건 이성적이고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의 선택을 뒤바꿀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때 자신을 믿지 못한 저는 신부님께 의견을 구했고 선의의 거짓말을 믿어서 백합을 키웠어요. 그리고 그 말을 더 이상 믿지 않았을 땐 꽃을 보냈죠.
아마 이야기 속의 왕, 또는 "적음신계"처럼 신앙이나 점에 의존하는 사람들도...
자신을 믿을 수 없는 때가 있기에 선택과 미래를 "예언"에 의존하는 거겠죠.
맞아요. 우린 같아요.
정화 부대에서도 이런 비극은 수없이 봐왔어요. 더 이상 자신을 믿지 않으며 무력감에 타협하는 자도 있었고, 과도하게 자신을 믿으며 욕망을 절제할 생각이 없는 자도 있었어요.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은 어떤 "외부인"은 발버둥 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전 제 결정으로 잃었던 그 백합들을 영원히 잊을 수 없어요. 작은 일이지만 사람 마음의 연약함을 간과하지 말라고 항상 저를 일깨워 주고 있거든요.
맞아요.
믿을게요. 다만 조건이 있어요.
지휘관님. 제 쪽으로 손을 들어주시겠어요?
네.
인간의 두 손을 보며 비앙카는 옅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에게 맹세를 해주시겠어요?
이건 정화 부대 대원들이 서로에게 하는 "약속"이라고 볼 수 있죠. 이 맹세를 바탕으로 우리가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지 스스로 선택하는 거예요.
어느 날 제가 침식체로 변한다면 주저하지 말고 죽여주세요. 절대로 제게 지휘관님을 해칠 기회를 주지 마세요.
저보다 지휘관님께서 이별에 더 익숙하지 않고, 익숙해져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더더욱 제가 지휘관님에 대한 신뢰와 의존이 미래의 어느 날 지휘관님의 약점이 되지 않길 바라요.
그럼, 지휘관님을 믿을게요.
그럴게요.
지휘관님의 맹세를 받았다고 해서 지휘관님의 슬픈 얼굴까지 보고 싶은 건 아니니까요.
설원의 눈처럼 하얀 성녀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 두 손을 꼭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