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를 붙잡아, 부글부글 거품이 나는 연못을 건넜다.
레이더 정밀 스캔이라는 부정 수단을 사용해 푸른 풀로 이뤄진 미궁을 통과했다.
심지어는 게의 등에 올라타 물살이 빠른 강을 건너기도 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지금...
더 깊은 곳을 탐색하게 되면서,
이 숲속의 순진함과 자유로움이 지휘관에게 끊임없이 펼쳐졌다.
말, 말하지 마세요.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선 그리움보다는 부끄러움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빨개진 얼굴을 손으로 가렸지만, 똑같이 빨개진 귀까지 함께 가릴 수는 없었다.
이곳은 숲에 있는 작은 공터였고, 일렬의 양들이 가로로 지휘관 앞에 서 있었다.
두꺼운 솜털은 이들을 구형으로 만들었지만, 행동 능력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
말안장이 양의 중앙에서 대열을 가로막고 있었고, 양이 안장을 뛰어넘을 때마다…
매에~
또 다른 양이 안장을 뛰어넘을 때...
매에에~
또 다른 양이 안장을 뛰어넘을 때…
매에에에~
양의 울음소리가 요란하면서도, 운율이 있는 게 경쾌한 동요 같았다.
맞, 맞아요.
부끄러움에서 정신을 차리게 된 리브는 앞에 있는 양 떼를 보며, 그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이렇게 양을 한 마리씩 셌어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리브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때때로 너무 진지해져서, 오히려 잠이 오지 않을 때도 있었죠.
지휘관님도 어렸을 때,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으세요?
어렸을 때, 수면의 질이 좋았던 지휘관은 별도의 방법으로 수면을 유도할 필요가 없었다.
그 후, 해결해야 할 고민은 졸음 억제보다 잠을 자제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기운이 넘쳐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럴 땐 숫자를 세면서 잠에 취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그 후, 해결해야 할 고민은 졸음 억제보다 잠을 자제하는 것이다.
보통은 염소 아니야?
양이 더 귀여우니까요.
제가 좋아하기도 하고, 어렸을 때 키운 적도 있어요.
서쪽 지평선에서 동쪽 지평선까지 이어진 양 떼들은 그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았다.
리브의 기체가 다시 뜨거워지는 증상을 피하고자, 지휘관은 이 말을 마음속에 묻어뒀다.
양을 다른 곳으로 몰아내려고도 해봤지만, 양들은 도망치기는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을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다른 길을 찾기 전에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얀과 파란 구름이 주황빛 구름으로 바뀌었으며, 저녁이 다가오고 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휘관님, 우선 휴식할 곳을 찾을까요?
의식 조각에 매핑된 광경에서 활동했을 뿐이라 할지라도, 쌓인 피로는 실제로 느껴졌다.
지휘관이 이런 계획을 하게 된 이유는 또 다른 고려 사항 때문이었다.
그건 귀를 기울이고, 쫓아가서, 먹이를 잡아먹는다.
어두운 숲에서 가장 무서운 사냥꾼으로 살아있는 모든 걸 사냥한다.
들어봐, 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입에서 침이 뚝뚝 떨어지면서 땅을 부식시킨다.
반짝이는 무서운 눈이 사냥감을 노리면 놓치지 않는다.
피하라, 멀리 도망 갈수록 좋다…
안전한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잠 자지 않는 아이를 잡아먹을 거야. 아우~~~~
상상했던 것과 달리, 야심한 밤에 나타난 사냥꾼은 무서운 이형이 아니라 귀여워 보이는 인형이었다.
난 하나도 무섭지 않아. 잠 자지 않는 아이를 잡아먹을 뿐이야. 아우~~~
상어 인형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본 지휘관과 리브는 덤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어, 지휘관님도요?
아이를 먹는 괴물이 제때 자지 않는 아이를 잡아먹는다…
어느 시대든 이런 "무서운 이야기"에는 큰 변화가 없는 모양이었다.
다만 보통 이런 이야기에서 나오는 사냥꾼은 무서운 모습의 이형이어서, 귀여운 모습의 인형과는 조금 달랐다.
겉모습 때문에 그것과 접촉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발견되는 순간, 상대방은 강한 공격성을 보였다.
지휘관님은 방금 그 인형을 말하는 건가요?
지휘관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자신이 어렸을 때 들었던 공포 이야기를 리브에게 말해줬다.
지휘관님도 무서웠나요?
그때, 뒤에서 익숙한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찾았다! 잠을 자지 않는 아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상대방의 숨김없는 발소리와 고함만으로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지휘관님, 흩어져서 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상어 인형과의 추격전에서 리브가 다시 똑같은 걸 제안했다.
당연하다는 듯 지휘관은 거절했다.
하지만 지금 제 상태로는 지휘관님을 발견되게 할 뿐이에요.
리브는 날개에서 뿜어져 나오는 형광을 가리켰다. 어둠 속에서의 형광은 등불처럼 밝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찍찍 소리와 함께 어깨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때리려는 반사 동작을 간신히 멈추고, 리브 날개의 형광을 빌어 어깨 위에 있는 작은 녀석을 자세히 봤다.
그리고 리브 어깨 위의 또 다른 털 뭉치도 봤다.
지금 엄청 위험해요. 빨리 숨어요... 저기로 가라는 건가요?
다람쥐는 작은 발을 내밀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지휘관과 리브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람쥐가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갔다.
사라졌다. 사라졌어. 아우~~~
상어 인형의 목소리가 옆을 지나치면서 멀리 사라져갔다.
은신처의 "대문"을 열자, 리브도 반대편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지휘관과 리브가 지금 숨어 있는 곳은 거대한 완두콩 꼬투리 속이었다.
다람쥐들은 어떻게 찾아왔을까요?
반딧불이를 쫓고 있는 두 뭉치의 모습을 가리켰다.
어둠 속 빛은 그 빛을 노리는 자를 이끌어 오는 동시에, 주위에서 작은 우정도 뭉쳐지게끔 했다.
그 두 다람쥐가 빛을 따라오지 않았다면, 지휘관님은 어떻게 할까요?
……
리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퉁명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여기는 쉬기 좋은 곳 같아요.
아니요. 전 그냥...
미리 준비해 둔 핑계를 댔다.
여긴 의식의 바다 안이라서 현실처럼 편하게 휴면 상태에 진입할 수 없어요.
리브가 있는 완두콩 꼬투리의 갈라진 틈은 지휘관이 있는 곳과 마주하고 있었다. 리브가 옆으로 눕자, 두 명의 시선이 마주치게 됐다.
그래도 지휘관님의 조언대로 수면을 취하도록 노력해 볼게요.
차가운 달빛은 밝지 않았지만, 리브의 눈 속에서 지휘관님의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시선을 돌리면 뭔가 "졌다"라는 기분이 들 것 같다. 이럴 때... 회피하면 안 돼!
게다가 오랜 세월 함께 지내다 보니, 서로에게 익숙해진 존재이 되었다.
지휘관님, 잠이 잘 안 오시나 봐요?
이전 임무 중에 지휘관님은 폭탄 구멍에서도 바로 잠들어 버렸잖아요.
각종 우발사고로 인해, 지휘관은 침대에서 잠자는 일이 드물게 됐다.
그래서 바람만 막아줄 수 있는 폐허, 낮은 폭탄 구멍, 버려진 차량 등에서 잠드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번 잠자리 환경은 이전보다 훨씬 쾌적했지만...
아직 아무것도 생각나지는 않지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적응이 된 거 같아요.
네. 지휘관님의 어린 시절은 어떠셨어요?
지휘관의 화제에 이어서 리브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어봤다.
친숙한 두 눈, 여전히 부드러운데 지휘관은 이 상황에서 다른 느낌을 받았다.
네. 알겠어요.
지휘관의 불편함을 눈치챈 듯, 리브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시선의 감각이 사라지면서, 고요함만 남게 됐다.
잠시 후, 리브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휘관님, 잠이 안 오세요?
동화의 숲이요. 그럼, 지휘관님의 어린 시절은 어떠셨어요?
약간 호기심 어린 리브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지휘관은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 들어가기 전의 일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오래된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이 기회에 리브와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희미했고,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를 스스로도 잘 모르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것만 이야기하기로 했다.
사실 지휘관은 어린 시절에 개구쟁이였다. 리브 마음속의 이미지를 파괴하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내기로 했다.
지휘관이 말하는 동안, 리브는 대부분 시간을 조용히 듣기만 했다. 그러다가 리브는 지휘관이 설명한 일부 이야기에 대해 조금씩 물어보기 시작했다. 리브의 질문을 듣게 된 지휘관은 거의 잊고 있었던 많은 기억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게 일방적인 이야기는 조금씩 주고받는 소통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둘은 한마디씩 이야기를 이어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이 조용해졌고, 어디에서나 들리던 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됐다. 어둠 속에서 속삭이던 리브와 지휘관은 조금씩 피곤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벼운 웃음, 대화 소리와 함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긴장이 풀리면서 졸음이 밀려왔다.
지휘관님에 대해 더 알고 싶지만, 잠잘 시간이 됐어요.
잠결에 들은 리브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말이 조금씩 더 어눌해지기 시작했다.
저요? 많은 일이 기억나지 않는데, 기억난다 해도 재미가 없을지도 몰라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림으로 그리지 않아도, 지금 잠고 있는 곳이 바로 리브의 어린 시절의 흔적일 테니까.
"내가 반드시 의식 조각을 되찾아 줄게. 그 후에 네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줘."
의식의 실타래가 끊어지기 전에 이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이미 기억나지 않았다.
낮에 경험했던 일들이 너무 환상적이었는지, 지휘관의 꿈도 환상적인 색깔로 물들었다.
양 떼를 따라 홀로 첨탑 앞에 왔다. 그것이 이번 임무의 목적이었다.
고개를 들자, 탑 끝이 새빨갛게 물들어 가는 것이 보였고, 그 속에서 약한 끌림을 느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자, 잔디밭을 넘어서 질퍽한 땅이 밟혔다.
그러자 이마가 따끔거리면서 피가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온순하던 양이 위장을 벗어던지고, 침식체의 모습을 드러냈다. 첨탑도 붕괴하며 붉은 그림자로 변형됐다.
이건 저번 구조 행동에서의 기억이었다.
밀물 같은 침식체를 뚫고 역주행하려 했지만, 붉은 그림자가 지휘관을 관통했다.
카오스와 무질서가 지휘관을 찢어놓기 전, 하얀 새가 점차 희미해지는 시선에서 유일하게 약한 빛이었다.
사건이 재연되자, 지휘관은 다른 단서를 발견하게 됐다.
하지만 무언가를 빠뜨린 것 같았다. 그리고 빛이 닿지 않는 구석에, 시야 밖에,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피로 물든 장검이 언제부터 지휘관의 몸에서 사라지게 된 것일까?
붉은 그림자는 또 어디로 갔을까?
지휘관과 하얀 새 뒤에 무언가 있는 것일까?
뒤를 돌아봤지만,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
지휘관은 알람이 없어도, 규칙적으로 일하고 쉬는 생활 습관으로 특정 시간에 깨어날 수 있었다.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이불이 중력에 의해 몸에서 미끄러졌다.
이불?
눈을 번쩍 떠보니, 주위는 완두콩 꼬투리가 아닌 아늑한 방이었다.
방 안에는 간단한 장식만 있었고, 리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조사할 겨를도 없이, 빠르게 문을 열어 리브의 흔적을 찾으려고 했다.
아... 좋은 아침, 잘 쉬었어?
나무 그릇을 든 낯선 여성이 복도에 서 있었다. 처음엔 갑자기 열린 문소리에 놀란 듯했지만,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상대방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는데, 의식의 바다에서의 직감은 맞는 경우가 많았다.
센티렐라라고 불러줘.
그 꼬마 아가씨 맞아? 건너편 방에 있어.
센티렐라가 맞은편의 방에 노크했지만, 안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센티렐라가 문을 다시 세게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잠을 깊게 자는 편인가?
대답을 들은 센티렐라는 잠시 생각한 뒤, 방문을 열었다.
방안 배치는 지휘관이 깨어났을 때의 방과 거의 일치했다. 리브는 지휘관을 등지고, 침대에 옆으로 누워있었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듯했다.
음...
리브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빨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고통스러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이건 은통이 나타났을 때의 증상이었다. 이런 상황에 매우 익숙한 지휘관은 조건반사로 연결선을 꺼내 심층 연결을 진행하려고 했지만, 문득 지금은 리브 의식의 바닷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 센티렐라는 식탁에 접시를 올려놓고, 서둘러 리브의 침대 옆에 가서 앉았다.
리브의 뺨을 가볍게 치켜든 센티렐라는 이마를 맞대고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희미한 빛깔이 센티렐라와 리브를 에워쌌고, 리브의 표정이 점차 좋아졌다.
한참 지난 후, 센티렐라는 리브를 베개 위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괜찮아졌어.
센티렐라가 일어섰지만, 표정이 좀 혼이 나가 보인다.
괜찮아. 머리가 조금 띵할 뿐이야.
센티렐라가 정신을 가다듬을 때쯤 리브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지휘관님. 이분은 누구인가요?
센티렐라라고 부르면 돼. 리브.
센티렐라는 지휘관과 리브에게 시선을 돌려 부드러운 눈빛으로 봤으며, 전에 비하면 조금 더 자애로운 느낌이 들었다.
지휘관은 리브에게 방금 일어난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센티렐라 아가씨. 도와줘서 고마워요.
괜찮아. 센티렐라라고 불러줘.
네. 알겠어요.
온화하고 포근한 미소를 머금은 여성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고비도 잘 넘겼으니, 시장하시겠네요? 완두콩 수프는 어떠세요?
센티렐라는 식탁에 놓인 식판을 가리키며, 기대하는 눈길로 지휘관과 리브를 바라봤다.
녹색 수프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그리고 수프 위에는 다진 양파, 잘게 썬 당근과 통통한 완두콩이 장식돼 있었다.
채소의 신선함과 버터의 우유향이 어우러져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먹고 싶게 만들었다.
방금 전, 센티렐라가 리브의 상태를 안정시켜 준 것으로 보아, 나쁜 마음을 품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음식의 안전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센티렐라의 눈에는 예상외의 패기가 있었다.
그 패기에는 연장자같은 느낌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방의 호의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어? 혹시 불편한 점 있어?
그럼 좀 먹여 줄게.
센티렐라는 그릇과 숟가락을 들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부드러운 눈빛에서 반박할 수 없는 기세를 느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센티렐라는 너희들이 배고프다고 생각한다."인 것 같았다.
저, 저도 혼자 먹을게요.
진한 수프를 나무 숟가락으로 떠, 입에 넣은 지휘관과 리브는 더욱 강한 향기를 느꼈다. 지휘관은 방금 맡은 냄새 외에, 양파의 달콤함과 후추의 약간 매운 향기도 맡을 수 있었다.
숟가락을 입에 넣자, 감싸고 있던 맛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각종 채소의 감칠맛이 혀끝에서 맴돌다가, 버터의 우유향과 양파의 달콤함이 이어서 느껴졌다.
그 후, 매운 후추와 뜨근뜨근한 수프가 함께 식도를 통과해 위에 들어가자, 온기가 온몸에 퍼졌다.
가장 놀라운 건 박하의 상쾌한 맛도 있다는 것이었다.
맛 괜찮지~
옆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친 센티렐라는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프 한 그릇을 다 마시니, 하루 종일 먹지 못해서 생긴 배고픈 감각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따뜻한 온기를 맛본 위장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후...
말하려는 순간, 옆에서 만족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긴 했지만, 리브도 지휘관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물론이죠. 양은 많으니 드시고 싶은 만큼 드세요.
센티렐라는 지휘관과 리브의 그릇에 완두콩 수프를 추가해 줬다.
제멋대로 준 건데, 한 그릇 더 괜찮지?
고, 고마워요.
물론이죠. 양은 많으니 드시고 싶은 만큼 드세요.
센티렐라는 지휘관과 리브의 그릇에 완두콩 수프를 추가해 줬다.
너희가 이렇게 좋아해 주다니 참 기쁘네~
이 야채들은 내가 새벽에 따 온 거야, 완두콩을 따러 가는 중에 너희들을 우연히 발견하게 됐어.
아, 맞아!
어제 너희들이 있었던 완두콩도 수프에 넣었는데, 맛있었어?
숟가락을 든 손이 갑자기 허공에 굳었다.
풉.
두의 반응을 본 센티렐라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어깨를 약간 떨었다. 그러자 웃음소리가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
죄송해요. 당신들이 너무 귀여워서 한번 놀려봤어요.
걱정 마, 너희들의 '임시 거처'는 뒷마당에 잘 두었어.
수프의 완두콩도 보통 완두콩이야. 보니까 크기도 보통이지?
센티렐라는 눈가에 나온 눈물을 닦고는 단정한 자태를 취했다.
오랜만에 다른 사람 본 거라서 좀 실례했네.
선경에 온 걸 환영해.
지휘관은 수프를 네 그릇이나 마셨다. 수프를 더 주고 싶다는 표정의 센티렐라는 국자를 다시 들고, 영원히 차 있을 것만 같은 완두콩 수프 냄비를 휘저었다.
더 추가할래?
음... 정말로 좀 더 마시지 않을래?
전에 없던 포만감을 느끼며, 진심으로 거절했다.
그럼 리브는...
저도 괜찮아요. 잘 먹었어요.
지휘관과 같은 양의 완두콩 수프를 마신 리브는 당황한 듯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미안해하면서 사양했다.
고개를 끄덕인 아쉬운 표정의 센티렐라가 냄비 가장자리를 숟가락으로 두드리자, 안에 있던 완두콩 수프가 바로 사라져 버렸다.
좀 정리하러 갈 테니까 잠시 실례할게.
근데 손님이 도와주면…
바로 그때, 리브는 이미 식기를 정리하고 접시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로, 감사 인사를 대신할 수 있게 해주세요.
센티렐라는 할 수 없다는 듯 웃은 뒤, 사랑이 가득 담긴 어투로 말했다.
그럼 다과를 준비할게, 청소는 뒷마당 시냇가에서 하면 돼.
조심스럽게 해.
지휘관은 발밑이 미끄러워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말했다.
음, 저도 지휘관님과 같은 생각이에요. 센티렐라 아가씨는 특별하지만, 우리가 찾는 의식 조각은 아닌 것 같아요.
센티렐라 아가씨는 열정적이니, 우리가 이곳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음... 참. 지휘관님 이쪽에 계신 거죠?
……
거품이 저절로 없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사방의 알록달록한 비눗방울이 지휘관을 완전히 묻어버렸다. 쉴 새 없이 뒤집히는 만화경에 던져진 듯 전혀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뒷마당에 처음으로 왔을 때 얕은 시냇물이 보였다. 대략 무릎까지 오는 깊이 정도로
보통 시냇물과 별 차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씻어야 할 식기를 시냇물에 넣자.
냇물은 어떤 물보라도 일으키지 않고, 하늘을 가리는 거품을 내뿜었다.
시선이 차단되면서, 발바닥이 미끄러워졌다. 한 걸음 내디디려고 했을 때...
물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냇물이 더 많은 거품을 뿜어냈다.
리브가 빠르게 냇물에 뛰어들어 지휘관을 찾으려고 했지만, 거품이 가로막아서 그럴 수 없었다. 시야와 목소리는 둘에게 정확한 방향을 알려주지 못했다.
지휘관도 몇 번이나 어긋난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걸 예상하고 손을 내밀어봤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지휘관님, 아직 계세요?
천천히 사라지는 거품을 보며 말했다.
어느 방향에서 인지 안도의 한숨이 들려왔다.
우리 계속 이야기해요. 안 그러면 조금 불안해질 것 같아요.
음, 예를 들면 지휘관님은 왜 파오스 학교를 선택하셨어요?
공중 정원의 대부분 사람이 이 길을 선택한다고는 하지만, 다른 선택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동경이요? 그때 제가 스스로 동원 신청을 한 것도...
지휘관과 리브 사이에 있는 수많은 알록달록한 거품 때문에, 리브의 중얼거림이 잘 들리지 않았다.
아, 아니에요.
하산 의장님께서 하실 법한 말을 지휘관님이 하는 것 같네요.
제가 보기에는 멋진데요.
어, 그런 거였어요?
리브의 말투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이루고 싶은 꿈 말인가요?
여기까지 말한 지휘관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지금까지 노력하고 계시잖아요?
……
지휘관님, 대체...
리브는 잠시 침묵한 뒤, 다소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려 했다. 이때, 강한 바람이 불어와 모든 거품을 날려버렸다.
미안 미안. 이 거품들을 조심하라고 말하는 걸 깜박했어.
……
어, 내가 일찍 온 것 같네.
센티렐라는 리브와 지휘관을 보며, 떠보는 듯 물었다.
그럼… 거품을 다시 불어올까?
먼저 다과로 하자... 어떤 어려운 문제가 생겼나?
옷을 말리면서 예전에 있던 방으로 돌아왔다.
문제가 생긴 지금, 돌파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찾아야 했다.
숲 중앙의 첨탑?
센티렐라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센티렐라는 리브와 지휘관을 번갈아 보더니, 지휘관에게서 시선이 멈췄다. 그리고 뭔가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니, 그냥 방금 뭔가를 오해한 것 같아.
전 그곳이 당신들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곳이 목적지였네요.
너희들은 숲 밖에서 온 거야, 맞지?
숲속의 생물에게는 그 첨탑은 금지된 곳이라고.
가끔 첨탑에 모르고 들어간 생물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결국 다시 나오지 못했어.
그래서 '탑에 가지 마라'는 게 숲 안에서 공감대야.
네. 말씀하신 대로 저흰 숲 밖에서 왔어요.
숲 밖은 어떤지 말해 줄 수 있어?
센티렐라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건...
센티렐라의 질문에 지휘관과 리브는 난처해했다. 현실 세계에서 왔고, 센티렐라는 리브의 의식 조각에 매핑된 인물이라는 걸 어떻게 설명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알려준 후에 나쁜 결과가 초래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음... 너희 표정을 보니, 뭐 어떤 이유 때문에 말하기 곤란한 건가?
미안해요.
사과할 필요 없어, 너희 입장에서 보면 그 정보를 알게 되면 나에게 나쁜 결과가 초래될 수 있겠지?
……
놀라지 마. 그렇지 않다면 너희들이 그렇게 난처한 표정을 짓지 않았을 거야.
조금 아쉬울 뿐이야.
찻잔을 손으로 가볍게 쓰다듬은 센티렐라는 이내 그녀의 한결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그 탑에 대해 이야기하자.
어젯밤 숲속에서 야영한 것도 낮에 숲에서 이동해 가는 것 때문이었지.
네. 중간에 방해를 받았어요.
방해를 언급한 리브는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는 양 떼가 떠올랐는지 우물쭈물했다.
지금은 우리도 어느 위치에 있는지 몰라요.
혹시 그 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나요?
경로요? 아쉽게도 그곳에 가는 정확한 경로는 저도 잘 몰라요.
정확히는 거기로 가는 길 자체가 없어.
네? 혹시 가는 도중에 넘을 수 없는 지형이 있어서 그런 건가요?
다른 이유가 있어.
설명보다는 직접 보는 게 더 직관적일 거야.
센티렐라는 일어서서 창문을 열었다.
너희들은 그냥 보면 이해해.
시선은 창문을 넘어, 넓은 숲의 수관을 봤다.
센티렐라의 거처는 어느 높은 언덕 위에 지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시선이 닿는 곳에선 첨탑의 실루엣을 발견하지 못했다.
곧 시작할 거야.
지휘관과 리브는 센티렐라가 가리킨 먼 곳을 바라봤다.
그것들은 이동하고 있는 건가요?
넓은 숲이 속도는 느리지만 두 발이 달린 듯, 무질서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게다가 숲이 뿌리를 내린 땅까지도 랜덤으로 변하고 있었다.
전 눈치채지도 못했어요.
숲의 사람들에게 있어 변화라는 건 발밑의 길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야.
지금 우리 위치도 변하고 있어.
센티렐라가 천천히 말하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래서 그 탑에 가려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
……
그래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을 거지?
우리에겐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아직 나한테 말해줄 수 없는 내용인가 보네.
……
그렇게 미안한 표정 짓지 마. 무질서의 숲이 너희들을 내곁으로 데려온 것은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터고. 아니면 어떤 희망을 바라는 것일 수도 있고.
너희 목표가 그 탑이라면, 그럼 그 탑의 유래를 이야기해 줄게.
그리고 그 탑의 예전 모습도.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숲속에 빠져든 여자아이는 겹겹이 쌓인 나무들 속에서 길을 잃었다.
어쩌면 여자아이의 마음속 깊은 곳에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여긴 어디지?
막막한 여자아이는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땅이었고, 뾰족한 높은 탑이 저 멀리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천천히 그 높은 탑에 다가가 나무로 된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낯선 아이, 누구를 찾는 거야?
나무 문에서 맑은 소리가 들렸지만,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려왔다.
와! 길... 길을 잃었어요. 당신은 누구세요?
저요? 전 이 첨탑의 주인이고, 모든 꿈을 이룰 수 있는 선녀예요.
꿈...
꿈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서, 세상 사람들이 찬양하죠.
이런 얘기는 이제 그만둬, 널 집으로 데려다 줄 거야.
잠깐만요!
뭐, 다른 생각이 있는 모양인데?
고개를 돌려, 자애로운 눈으로 여자아이를 바라본 선녀는 조용히 여자아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 전 친구를 많이 갖고 싶어요. 언니, 오빠들이 저와 놀아주기를 싫어해요. 이 꿈을 이룰 수 있나요?
바람이 새는 풍선처럼, 용기가 금세 사라진 여자아이의 말하는 목소리는 조금씩 낮아졌다.
이건 나에게는 쉬운 일이야, 하지만... 대가를 칠 준비가 되어 있는 거야?
대, 대가요? 무슨 대가인가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약간 위축됐다.
대가는 바로...
선녀가 손을 내밀자, 여자아이는 긴장한 채 눈을 감았다.
손바닥을 여자아이의 정수리에 놓은 후, 살짝 힘을 주자...
숲에서 걸어오며, 흐트러졌던 머리카락이 말끔히 정리됐다.
음, 이게 대가야.
선녀의 목소리는 매우 유쾌해 보였다.
어, 이러면 된 건가요?
선녀는 대답하지 않고, 알록달록한 지팡이를 꺼내 가볍게 흔들면서 중얼거렸다.
bibbidi-bobbidi-boo!
빛이 스쳤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기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손뼉을 세 번 쳐봐.
1, 2, 3,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와!
다람쥐들에게 파묻힌 여자아이는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이 귀여운 친구들을 좋아하나? 맞아, 너에게 줄 게 하나 더 있어.
선녀가 지팡이로 땅을 치자, 호박 차 한 대가 흙 속에서 "자라났다".
이거 타고 집에 가면 길 잃을 일 없을 거야.
그 후, 여자아이와 첨탑의 주인은 좋은 친구가 됐어요. 한 명은 소원을 빌고, 한 명은 소원을 들어주며 숲 전체를 꾸몄죠.
어둠을 쫓아내는 해파리, 잠 자지 못할 만큼 수많은 양 그리고 한 알만으로도 배가 부르는 거대한 완두콩...
이렇게 해서 시간이 흘러가며, 그 여자아이도 점점 크게 자라났어.
그 후 어떤 사건으로 인해 집을 떠나야 했어.
……
오랜만이네요. 저랑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일이 생겨서, 전 여기를 떠나야 해요.
……
첨탑의 주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숲 밖은 나에게 닿을 수 없는 세계야.
숲 안의 모든 것도 밖으로 가져갈 수 없어.
꼭 가야만 해?
네. 가야 해요.
소녀의 눈빛에 담긴 미련과 확고한 태도를 본 첨탑의 주인은 결국 만류하던 말을 부탁으로 바꿨다.
자주 들러 주세요.
묵직하게 잠긴 "보호소"의 대문이 열렸고, 소녀는 홀로 걸어 나갔다.
현실 앞에서 그녀는 과거의 꿈을 계속 부정하고 버려갔어.
과거의 꿈은 유치하고 시기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가끔 몰래 보는 것뿐이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선녀가 이 꿈들을 조심스럽게 간직했다는 것을 몰랐어.
어느 날까지...
진홍빛 불길이 땅에서 솟아오르며 세상을 찢어버렸어.
어, 벌써 이렇게 컸구나.
선녀의 말에서 그리움이 느껴졌다.
미안해요.
사과할 필요 없어, 널 다시 만나서 기쁘다니까…
그럼 이번에 원하는 건 뭐야?
전...
소녀가 자신의 "꿈"을 말했을 때, 첨탑 주인은 한참을 침묵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안 되나요?
이게 나한테는 조금 어려운 일이지만... 대가를 칠 준비가 되어 있니?
어떤 대가죠?
우리에 갇혀 하늘조차 보이지 않는 자유의 대가...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속에서 무한한 고통이 함께하는 고독의 대가...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오염되어 숲과 함께 불타버리는 침식의 대가...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미안한 눈길로 선녀를 보며,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소녀의 답은 한결같았다.
그건 소녀의 마지막 꿈인 날 수 있는 한 쌍의 날개였다.
추락을 위해 생긴 한 쌍의 날개였다.
결국 선녀는 소녀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주문은 서툴지 않았고, 초록빛을 받은 소녀는 알록달록한 나비로 변했다.
얇은 날개는 연약하고, 무기력해 보였지만, 흉악한 붉은빛을 막기엔 충분했다.
거센 침식체 물결에서 인간의 모습을 경계선으로 백색의 새는 인간의 앞길을 안내했다. 그리고 검은색의 나비는 인간이 보이지 않은 뒤에서 악의를 막았다.
모든 기적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모든 걸 걸었다.
결국 가녀린 그림자는 붉게 물든 그림자와 함께 공중에서 떨어져 첨탑을 들이받았다. 그렇게 첨탑이 그녀들만의 감옥으로 변한 게 된 것은 오래전 일이었다.
첨탑의 문이 닫히는 순간, 상대방은 물었다.
다른 소원이 더 있나?
리브.
……
없어요. 지금까지 돌봐주셔서 감사해요. 센티렐라.
울먹이는 말로 이별의 순간을 미룰 수는 없었다. 센티렐라는 마지막 순간이 돼서야 가슴에 쌓인 작별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그럼, 안녕…
그 이후, 난 간직했던 꿈들을 풀어주었고, 이 숲을 만들었어.
찻잔을 들어 올린 센티렐라는 지휘관과 리브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조용히 기다렸다.
누락된 퍼즐은 센티렐라의 이야기를 통해 보완됐다. 지휘관은 이 의식 조각의 유래를 마침내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단순한 연상도, 이야기가 기억에 남긴 흔적도 아니었다.
이 기이하고 오색찬란한 광경들과 상식에 맞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모습을 띠고 있는 사물들은 모두...
모두가 제 예전의 꿈이었군요.
맞아, 여기의 모든 것은 너로부터 나왔어.
네가 동화를 보며 빌었던 거...
네가 밤이 깊어질 때, 정원의 양들을 그리워하며 빌었던 거.
그리고...
여기까지 말한 센티렐라는 뭔가 재미있는 장면이 생각이라도 난 듯 가볍게 웃었다.
혼자 이불 속에 숨어 떨릴 정도로 무서워하면서도, 기대에 차서 빈 것도 있어요.
네가 다른 이들이 말하는 나쁜 아이를 잡아가는 괴물이 조금 더 귀엽게 변하길 원했어.
하지만 그렇게 원해도 그 괴물을 피하곤 했어, 그 괴물이 많이 속상했었어.
센티렐라는 온화한 시선을 리브에게 돌렸다.
이 모든 건 네가 잊어버린 꿈들이야.
널 만난 그 순간부터, 난 이 모든 걸 기억했어.
나비가 우리에서 벗어나, 첨탑을 탈출해, 숲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찾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마 너희 여행의 목적이었던 것 같아.
너는 감금된 나비가 아니야, 날개를 펼친 하얀 새야.
나는 여전히 예전처럼 널 최선을 다해 도울 준비가 되어 있지만…
하지만 당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이곳에 존재하는 저도 당신 꿈의 일부예요. 지금은 당신의 마음을 듣고 싶어요.
전, 저는 이미...
이미 다른 형식으로 꿈을 이뤄낸 건가?
센티렐라는 리브의 다음 말을 예상했다는 듯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그럼 원래의 꿈은요? 대체할 것을 찾았다면, 이런 예전의 꿈은 버려도 되지 않나요?
이 꿈들을 여전히 유치하고 시기에 맞지 않다고 여기는 건지?
예전처럼 그것들을 포기하고, 잊어버리는 선택을 하고 싶은 건가요?
이런 현식으로 성장을 택하려고 하는 건지? 네가 이전에 했던 것처럼 말이야.
센티렐라의 목소리는 평온하고 차분했다. 질문이었지만, 두려움보다는 용기를 주었다.
……
이런 꿈들은 유치해요.
가망이 없다고 할 정도로 아득하죠.
지휘관이 펴준, 옅은 상처가 있는 날개를 리브는 무의식적으로 만졌다.
날지는 못하지만,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한 쌍의 날개였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동경하는 한, 그것들은 추구할 가치가 충분히 있어요.
그렇다면 너는 이 꿈들을 실현하려고 하는 건가, 이런 상황에서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중요한 것은 꿈을 이룬 결과이지, 이루는 시간이 아니에요.
그래서 꿈은 유치하고, 어린 시절의 일시적인 발상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바로 이룬다는 것에 얽매이지 않아도 돼요. 미래에 이룰 수도 있으니까요. 왜냐하면 꿈은 항상 자신과 함께하는 일부분이니까요.
미래에 이룬다니, 일종의 핑계처럼 들리는데.
반대의 말을 하면서도 센티렐라의 얼굴엔 자애로운 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리브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이루지 못해서 우리가 계속 추구하는 건 아닐까요?
꿈을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사치스럽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미래에 남겨둔 거예요.
목표가 멀리 있으면 방황하지 않거든요.
해안의 등대나 하늘에 있는 북두성처럼, 계속 방향을 안내해 주죠.
지휘관을 본 리브는 확고한 눈빛으로 센티렐라의 푸른빛 눈동자를 직시했다.
성장은 버림과 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기억하고 지켜야 미래로 나아갈 수 있어요.
……
난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센티렐라는 시선을 리브에서 지휘관으로 옮겼다. 그리고 짙은 파란색 눈동자는 부드러우면서 매서웠다.
그렇다면, '그녀'를 구하러 가려는 거니?
어떤 위험에 빠져도?
그 위험이 리브가 절대로 보기 싫어할 만한 것이라도?
리브와 눈을 마주쳤다. 리브의 눈에는 걱정과 두려움이 있었지만 반대는 보이지 않았다.
혼자 위험에 뛰어드는 것만이 마음이 편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서로 부축하며, 미래로 나아가야 길이 넓어질 것이었다.
생각해야 할 건 "한 사람이 뭘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하면 뭘 할 수 있는지"였다.
상대방의 선택은 존중 받아야하며, 우린 그 횃불을 받아 계속 나아갈 것이었다.
그럼 난 안심하고 '그녀'를 네게 맡길 수 있겠어.
센티렐라는 일어서서 방문을 열었다.
따라와. 첨탑으로 가는 방법을 알려줄게.
거대한 호박 차가 숲의 가장자리에 주차돼 있었다. 반짝이는 장식은 퇴색됐고, 녹슨 바퀴엔 거미줄이 있었다. 베어링은 부러져 있었고, 말도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게 바로 첨탑으로 가는 방법이야.
길이 없어도 호박 차는 너희들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줄 거야.
하지만 사용할 수 없는 거 같은데요.
이때, 필요한 건 작은 마법뿐이야.
눈을 깜박인 센티렐라가 처음으로 약간 활기찬 기색을 띠었다.
센티렐라는 바퀴 옆에 뒀던, 먼지 묻은 지팡이를 들었다.
bibbidi-bobbidi-boo!
주문을 외우자, 무지개 같은 빛이 마차 전체를 뒤덮었다.
그러자 수정과 유리가 다시 빛을 발하고, 녹이 제거됐다. 부러진 부분은 서로 잘 붙으면서, 은색으로 칠한 면이 햇빛을 반사했다.
그런 뒤 숲속에서 힘차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매에~~~~
눈에 들어온 건, 상상 속의 백마가 아니라 백마와 똑같이 하얗고 털이 많은 양이었다.
하하, 내가 호박‘마’차라고 한 적은 없지?
양한테 안장 끈을 묶고, 문을 열자 화려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센티렐라는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리브의 손에 쥐여 줬다.
어?
그녀는 첨탑 밑부분에 있어. 너의 동행자가 가야 할 곳이야.
그리고 리브, 너는 탑 꼭대기로 가야 해, 거기에 갇혀있는 괴물이 있어.
한때 탈출했었던 사냥감에게…
고개를 돌려 지휘관을 바라본 센티렐라는 정중하게 말했다.
그 괴물은 모든 걸 무릅쓰고 다시 사냥하려 할 거야.
탑 전체를 파괴하지 않게, 누군가는 그걸 처치해야 해.
그래서 리브, 넌 나보다 이 마법 지팡이가 더 필요한 거야.
게다가... 나는 더 이상 그걸 쓸 일이 없을 거야.
센티렐라는 다소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리브를 차에 태우면서 센티렐라가 말했다.
이 곳은 꿈으로 이루어진 선경이지만, 나는 너에게 실현시켜줄 수 있는 건 숲 속의 꿈 뿐이야...
센티렐라는 다른 한 손으로 지휘관을 차에 태웠다.
이제 네게는 꿈을 안고 이 보호소를 떠날 힘과 용기를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 나눌 동반자도 생겼어.
문을 닫은 센티렐라는 옆으로 물러섰다.
매에~~~~
호박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센티렐라의 모습이 서서히 멀어졌다.
멀어져 가는 호박 차를 보며 센티렐라는 이게 진짜 마지막 이별이라는 것을 알았다.
첨탑에서 리브를 보던 순간, 이날이 올 거라고 마음의 준비를 했었다.
리브 앞에서 담담하고,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리브가 센티렐라의 "만능"에 더 이상 기대지 않을 때, 기쁨 이외에 다른 감정은 없을 줄 알았다.
조금 더...
머무를 수 있을 줄 알았다.
리브...
차창 너머로 아쉬운 듯 손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현실이 혹독하다고 해서, 꿈에 대한 갈망을 잃지 말고, 아름다움을 두려워하지도 마세요.
어슴푸레한 햇살 속에서, 여린 잠의 수호자가 비바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새싹에게 마지막 훈계를 하고 있었다.
기억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는 한, 꿈을 이루는 마법은 영원히 존재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