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침, 독특한 향기에 눈을 번쩍 떠졌다. 놀랍게도 주위의 환경은 어젯밤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루시아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주위의 경치를 둘러보니 화려한 궁전만 있었고 별로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허리를 숙여 낯선 바닥을 조금씩 만져보았다. 보이진 않지만 바닥의 균열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몸에서는 이상 반응이 느껴지지 않았다. 육체에서부터 시작된 교란이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그렇다면 답은 확실해졌네.
방은 가상 시뮬레이션의 영향을 받아 겉모습이 완전히 바뀐 것 같았다. 그리고 지면 위의 균열은 아마 루시아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가상 현실 기술은 황금시대에 이미 큰 발전을 이루었으며 과거의 인간들은 이를 오락용으로 사용하곤 했었다.
하긴 이런 스타일의 궁전이 오락을 위해 지어진 섬에 있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왕자님 , 좋은 아침입니다.
이때 키 작은 로봇이 트레일러를 끌고 방으로 들어왔다.
꼬마 로봇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니 적어도 침식은 되지 않은 듯했다.
어떻게 아직 침식되지 않은 개체가 있는 거지?
왕자님, 어젯밤 아로마향은 좀 어떠셨습니까?
일단 아침부터 드시지요. 오늘은 왕자님의 생일입니다. 아침 식사 후 크루즈에서 생일 파티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전 왕자님의 시종입니다. 왕자님, 아직 잠이 덜 깨신 겁니까?
시종은 아무 대답 없이 음식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드십시오.
드십시오.
내 눈 앞에 있는 로봇은 다행히 침식은 되지 않았지만 행동 모듈로부터 볼 때 AI 성능이 비교적 심플한 모델인 듯 싶었다.
그렇다면…… 키워드를 이용해서 질문을 해야겠어.
드십시오.
시종은 여전히 기계적인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내 말을 들은 시종이 고개를 돌렸다.
AS 서비스 센터에 연결 중입니다.
몇 초가 흐르고 시종의 몸에서 여성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서비스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건가요?
이건 고객님께서 주문하신 "동화 리얼 체험" 서비스입니다. 마음에 드시지 않는다면 "서바이벌 공포 체험", "탐정 체험", "드래곤과 마법 체험" 등으로 변경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서비스의 위험도는 지금보다 훨씬 더 높다는 걸 알아두세요.
시종의 두 눈은 붉은 빛을 반짝였다.
섬에 상륙한 순간 구입이 완료되어 있습니다. 서비스는 일단 시작되면 종료할 수 없습니다. 체험 서비스를 모두 끝내기 전까지 이 섬에서 이탈할 수 없습니다.
체험 과정을 파괴하는 행위에 관해서는 직원이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종의 두 눈이 또다시 붉은 빛을 반짝였다.
당신은 끝까지 이 이야기의 배역을 연기하셔야 합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모습을 직접 목격해야 합니다..
"인어공주"가 거품으로 변하면 섬의 가상 현실이 해제됩니다. 그 이후에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정말 거품이 됩니다.
여성 목소리는 "인어공주"를 죽이고 거품으로 만들기로 다짐한 듯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불안한 예감이 밀려왔다.
전에도 버려진 뒤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 행동 모드에 이상 반응을 보이는 로봇들은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들은 "서비스"라는 본질적인 개념을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알 수 없었다.
만약 눈앞에 있는 시종 로봇 하나뿐이라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이 섬을 제대로 탐색해 보지 못한 상태로 로봇이 얼마나 있는지 무기는 소지하고 있는지 모든 게 불확실했다. 일단 루시아와 합류하는 게 좋겠다고 난 생각했다.
스토리가 진행되도록 움직이면 자연스럽게 다른 체험자를 만나게 되실 겁니다.
왕자님, 생일 파티가 열릴 크루즈가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호칭은 변경할 수 없습니다. 고객님께서 왕자 역할을 뽑으셨으니 시종들은 끝까지 왕자님이라 부를 겁니다.
아침 식사를 방해해 죄송합니다. 시종을 따라 항구로 이동하시죠.
역시 지휘관님, 그리고 루시아와 연락이 닿지 않네요.
리...
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여기까지 몰고 온 선박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미 수색 지원을 신청했어요. 이제 기다리는 수밖에.
바다 아래에는 여전히 대량의 침식체들이 있어요. 배를 보강하고 지휘관님의 좌표를 획득하기 전에는 절대 함부로 움직여선 안 돼요.
하지만...
늘 막무가내로 행동해도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온 건 운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죠. 이번에도 지휘관을 믿어봅시다.
왕자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
"누군가 날 생각한다"라는 말은 시종의 데이터 베이스에 입력되지 않았는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점심을 드시면 괜찮아질 겁니다. 절 따라오시죠.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호화로운 배 위에 있었다.
하지만 손으로 갑판과 울타리를 만져보면 사실 이 배가 엉망진창으로 파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 스토리가 폭풍우 속에서 바다에 빠지는 것이라는 걸 감안하면 정말 편리한 장치가 아닐 수 없었다.
왕자님, 점심이 준비되었습니다. 어서 식사하시죠.
시종은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고 식탁을 가리켰다.
고개를 들어 식탁을 보았다. 새하얀 식탁보 위에 와인, 꽃 그리고 여러 가지 음식들이 잔뜩 차려져있었다. 심지어 은은한 향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시뮬레이션을 통한 허상일 가능성이 컸다. 난 본능적으로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시종이 바라보는 동안 난 식탁에 앉아 포크로 음식을 조금 베어 입에 넣었다……
순간, 냄새를 감추기 위해 대량으로 투입된 농축형 향료와 그럼에도 감출 수 없는 썩은 냄새가 입 속에 가득 퍼졌다.
왕자님, 음식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 말을 들은 시종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종이 날 향해 인사를 하는 순간 배 위에서 무도회 음악이 울려 퍼졌다. 주위에 사람들의 환영이 갑판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왕자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왕자님은 저희 왕국에 보물입니다.
시종은 시나리오에 따라 연기를 시작했다.
저희가 준비한 무도회를 마음껏 즐기시죠. 왕자님.
노래를 부르는 꼬마 로봇이 사람들의 환영 속에서 내 앞으로 다가와 우아하게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발드말 도르의 딸 요하네스입니다. 오늘 제 가족들을 대표해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왕자님의 생일에 진심 어린 축하와 축복을 전합니다.
스스로를 요하네스라고 부르는 꼬마 로봇은 허상 뿐인 선물 상자를 건넸다.
당신의 미래에 해풍의 가호가 있기를.
꼬마 로봇은 다시 한번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그 뒤로 다양한 꼬마 로봇과 인간들의 환영들이 다가와 축복과 빈 선물상자를 건넸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꼬마 로봇과 인간들의 환영들이 다가와 축복과 빈 선물상자를 건네는 걸 바라보았다.
왕자님, 갑판으로 올라가 마음에 드는 분과 함께 춤을 추시죠.
시종의 두 눈에 붉은 빛이 들어오고 AS 서비스라고 자칭하던 여성 목소리가 시종의 몸을 빌려 소리를 냈다.
<리얼 체험 시즌8의 수칙>에 따라 게임을 진행하세요.
게임 규칙을 무시하고 RP 분위기 파괴, 아이템 훼손 및 NPC 공격 등은 모두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규칙을 따르지 않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은 없습니다.
"폭도"는 당연히 추추추추추추——
맞은 편에서 분노에 차서 벽을 가격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섬에 도착한 순간 이미 모든 규칙과 협의에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희는 마지막까지 서서서서——
렉이 걸린 듯 똑같은 글자만 반복하던 그때 여러 가지 역할을 맡고 있던 꼬마 로봇들이 날 향해 몰려왔다.
규칙을 지키셔야 합니다.
이야기는 계속 되어야 했다.
우리는 동화 세계가 파괴되지 않도록 정비해야 한다.
드디어 손님을 맞이했으니 이번 기회에 환상 세계의 번영을 되찾아야 해!
왕자님, 저와 함께 춤을 추시겠어요?
주위의 꼬마 로봇들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요하네스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로봇들의 어색한 발걸음에 맞추어 화려한 환영 속에서 춤을 추었다.
내가 협조하자 꼬마 로봇들도 각자의 캐릭터 연기에 몰입하며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깐의 휴식 후 악몽같은 무도회가 계속되었다.
평범한 사교 무도와 다르게 요하네스의 스텝은 인간보다 훨씬 더 어색하고 뻣뻣했고 춤을 추기 시작해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상 현실에 뒤덮인 바닥에는 알아차리기 힘든 구멍이 여전히 존재했지. 그거 말고도...
스텝의 리듬에 따라 시간을 계산해 보면 벌써 5621초나 흐른 셈이다. 94분 동안 춤을 추는 것 말고 다른 이벤트는 나타나지 않았다. 제지하지 않는다면 이 무도회는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았다.
결심을 내린 뒤 조용히 철수할 기회를 엿보았지만 로봇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여기서 갑자기 떠난다면 분명 전투가 일어날 것이다.
허리가 아픈 춤을 계속 춰야 한다.체력과 시간이 시시각각 빼앗겨 간다……
힘을 다 써버리면 저항하려고도 할 수 없게 된다. 지금 당장 행동해야 한다.
요하네스의 손을 뿌리치자 주위에 있던 꼬마 로봇들이 폭주하기 시작하더니 바닥에서 날카로운 물건을 들고 날 향해 달려들었다.
거절과 동시에 주위의 꼬마 로봇들이 바닥에서 주운 날카로운 물건들을 들고 날 향해 달려들었다.
총알은 가장 앞에 선 로봇을 명중했다. 꼬마 로봇의 관절이 떨어져 나가더니 바로 바닥에 쓰러졌다. 손에 들고 있던 스테인리스 렌치도 발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로봇의 수보다 턱없이 모자란 총알수에 망설임없이 렌치를 집어 들었고 다음에 달려오는 꼬마 로봇을 향해 휘둘렀다. 금속이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고 꼬마 로봇은 비틀거리더니 바다로 떨어졌다. 렌치를 잡고 있는 손에도 고통이 밀려왔다.
전투형 로봇도 아니고 아직 침식체로 변한 건 아니었지만 적의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외골격을 작동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다시 한번 악력을 조정하고 달려오는 로봇들을 향해 렌치를 휘두르는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는 권총으로 멀리 있는 로봇을 조준했다.
양쪽의 공격 모두 목표를 적중했다. 총알을 아끼기 위해 견고한 코어가 아닌 쉽게 파괴되는 관절을 조준했지만 압도적인 수량 차이는 절망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몰려오는 적들을 처치했지만 로봇들은 계속해서 갑판 위로 올라왔다.
어느새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피로감이 온몸을 지배하던 그때, 푸른색 그림자가 바다 속에서 뛰어올라 안정적으로 갑판 위에 착지했다.
네!
루시아 몸에 매달린 꼬마 로봇 네 개가 갑판에 오르려고 하는 그녀를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경고, 스토리 체험을 파괴 금지!
인어공주는 지금 등장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쪽이 지휘관님을 공격했잖아요.
그녀는 망설임없이 태도를 휘둘러 자신의 사지에 매달린 꼬마 로봇들을 베어냈다.
지휘관님!
루시아는 공격을 해오는 꼬마 로봇을 처치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바로 그 순간 배 선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토리가 파괴되고 있어!
빨리, 빨리 뒤로 넘겨야 해!
주위에 있는 환영 인간들의 무도가 음악에 따라 마치 흐르는 물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순식간에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였고 어렴풋이 천둥이 쳤다. 휘몰아치는 광풍이 거친 파도를 만들어 배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수면 아래에 파도를 제어할 수 있는 장치도 설치되어 있는게 분명했다. 이 섬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더 있는 거 같았다.
폭풍우입니다! 왕자 전하, 어서 선실로 몸을 피하십시오!
시종은 선실 입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곳에서 춤 추던 사람들의 그림자도 당황한 듯 우왕좌왕하더니 서로를 밀치며 여기저기로 도망쳤다.
지휘관님!
루시아는 계속 태도를 휘두르며 그녀의 움직임을 막으려는 꼬마 로봇들을 떨궈냈다.
나 또한 무기를 꺼내 거세게 흔들리는 선박 위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기 시작했다.
폭풍우가 시선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익숙하지만 절망적인 파도가 갑판을 덮쳤고 낡은 선박이 빠르게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
숨을 쉴 수 없는 상태에서 의식이 흐릿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어렴풋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천상의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굉장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절친한 사람이 귓가에 속삭이듯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
……………
다시 두 눈을 떴을 때 은색 달빛이 모래사장을 비추고 있었다.
요하네스와 비슷하게 생긴 가수 꼬마 로봇이 저쪽에서 미소와 함께 날 향해 인사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깨셨네요. 물에 오래 있지 않아 다행입니다.
만약 로봇들이 대본에 따라 연기하는 거라면 이 사람이 바로 이웃나라의 공주겠지.
전 안나라고 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뭐죠?
자신을 안나라고 부르는 "이웃나라 공주"는 다른 AI 로봇들처럼 역시 내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지만, 전체적인 표정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다른 로봇들과 같은 모델은 아닌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player name].
옷차림을 보아하니 귀족이신 것 같군요? 시종들을 불렀습니다. 곧 모시러 올겁니다.
……………………
또 "리얼 체험"을 시작하려는 건가?
한편, 루시아는 대량의 꼬마 로봇에 의해 바닷속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힘껏 발버둥을 쳤지만 물속이라 작전 능력이 대폭 하락했다. 게다가 기체가 장착하고 있는 얼음은 그녀 스스로를 빙결시킬 정도로 위험하게 변해버렸다.
걱정하지 마. 그 인간은 스토리에 따라 이웃나라 공주에게 구조될 거니까.
또 만났네.
당신은 어젯밤 그...
그래, 나야.
그녀가 고개를 들고 살짝 웃었다.
이제 내가 한 약속을 믿을 수 있겠지? 우리는 그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어.
그게 피해를 준 게 아니라고요?!
정당방위로 인한 피해는 피해라고 할 수 없지.
그런 상황에서 지휘관님이 의심을 품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이곳의 조건은 한정적이야. 대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사과할게.
도대체 누구죠?
난 이곳의 관리 담당자. 이번에 너와 만난 캐릭터의 이름은 바다 마녀지.
이 정도 퍼니싱 농도에서 말을 할 수 있다니... 설마 당신도...
내가 누군지는 너희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내 정체가 궁금하다면 이 스토리가 끝나길 기다려. 설명해 줄 사람이 나타날 테니.
당신들 대체 무슨 목적이죠?
바다 마녀가 주사위 두 개를 꺼내 던졌다. 그녀는 물속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주사위를 바라보았다.
만약 이 섬의 옛 번영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믿겠어?
이렇게 강압적인 방식으로요?
바다 마녀는 아무 말 없이 손을 저었다. 루시아의 몸에 매달려 있던 꼬마 로봇이 소형 장치를 꺼내 그녀의 등에 부착했다. 장치는 곧 루시아의 피부와 일체화되었다.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난 스토리 속 바다 마녀처럼 네 목소리를 앗아갈 순 없지만 이런 방식으로 네가 말하는 걸 통제할 수 있지.
바다를 떠나서 소리를 내면 이 장치는 바로 폭파될 거야. 물론, 억지로 해체하려고 해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거고.
네 목소리를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야.
이렇게 강압적인 방식으로는 이 섬의 번영을 되돌릴 수 없다고요.
나도 알아. 누구도 이곳에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거. 그래도 지금을 즐겨야지 않겠어?
이게... 즐기는 거라고요?
그래. 너도 마찬가지잖아?
지구를 되찾는다는 멀고도 허황된 꿈을 위해 싸우고 다치는 삶을 반복하잖아. 그게 즐거워?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전 많은 걸 얻었다고요.
얻었다라...
인어공주가 육지에서 추는 춤처럼 네가 뭔가를 얻을 때마다 거대한 고통이 동반될 거야.
당신...
하하~ 지금 네 표정 말이야, 마치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모양이네?
사실... 난 네 이름조차 모르거든. 방금 그런 말을 했던 건, 그저 구조체로서 비슷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지.
구조체는 인어공주와 비슷해. 완벽한 피조물이지.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특징을 남기고 음식, 공기, 수면의 욕구와 같은 대부분의 단점을 없앴어. 그리고 영원에 가까운 수명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이런 완벽함은 오히려 평범한 인간들에게 큰 결함으로 다가가지. 마치 인어공주의 아름다운 꼬리처럼 말이야.
인간은 영원히 구조체를 돌연변이라고 생각할 거야. 구조체의 강력함과 완벽함을 두려워하고 언젠가 구조체에게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빼앗길까 걱정하겠지.
설령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인다 해도 여전히 갈등은 남아있어. 구조체는 인간들과 수명 자체가 다르니까. 결국 언젠가 혼자 이 세상에 버려지게 되겠지.
네가 오기 전에 난 이미 수많은 구조체를 만났어.
하지만... 그때 이 섬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지.
그녀는 천천히 지난 일을 회상하기 시작했고 루시아는 수많은 꼬마 로봇들에게 포위되어 억지로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 섬은 한때 번화한 관광지였어.
나 말고도 요하네스와 안나라는 이름의 관리 담당자가 2명 더 있었어. 그때 우리는 접대용 로봇들을 관리하는 것 말고도 다른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었지……
그때는 손님들과 함께 카드 게임도 하고 점도 봐주고 했었지.
그들은 날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지.
안녕! 주사위 아가씨, 여기로 와봐!
KP, 다음 라운드로!
아! 이 자식 또 종결기를 쓰려고 하네. 이번 턴에서 못 죽이면 이 정도 HP로는 버틸 수 없어.
DM 말로는 마법 포지션이 부족하대. 이 정도로는 이길 수 없다는데? 다음에 누가 공격할 거지?
나한테 맡겨! 물살처럼 빠르게! 작전 턴을 2회 획득했어!
아! 전사들이여, 공격하라!
그런 다음 갓베리를 두 번 먹고 HP를 회복하는 거야.
너 정말 못하는구나!
아주 행복한 나날이었지 날 불러주는 호칭도 좋았고, 사람들 얼굴에서 희로애락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
그러다 가상 현실이 보급되고 가격도 저렴해지면서 카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어. 그때부터 난 NPC를 연기하며 사람들과 함께 섬 이곳저곳을 모험했지.
그것도 나름 즐거운 일이었어.
수많은 관광객들 중 난 스토리에 몰입해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사람도 봤었고, 엉뚱한 때에 갑자기 춤을 추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봤었지.
하지만 어떤 관광객이든, 그때의 기억 데이터는 전부 내 소중한 보물이지.
하지만... 관광객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지.
분명 그 사람이 폭력과 부정행위를 한 건데 사람들은 그 이유를 우리의 관리 책임으로 돌렸어. 그 결과도 우리가 부담해야만 했지.
게다가 라이벌 회사의 음모까지 더해져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점점 더 줄어들었어.
그리고 얼마 후 퍼니싱이 폭발했어.
아무도 찾지 않는 이곳은 영점 원자로와 거리가 멀다는 이유 덕분에 잠깐 동안이나마 무사할 수 있었지.
그러다가 도처에 방랑하던 사람들이 이곳을 발견했어.
그들은 이곳에서 아주 오랫동안 지냈는데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책을 태우고, 여기저기 낙서도 하고, 심지어 이불까지 태우기도 했어, 아주 많은 피해를 입혔지만... 주인님은 단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으셨어.
그분은 착하고 좋은 사람이셨어. 이곳으로 도망친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하셨지.
하지만 좋은 시간은 결코 오래 가지 못했고, 결국 퍼니싱이 여기까지 퍼지게 되었어.
주인님은 파멸의 시간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로봇들을 지하에 격리시키셨지.
하지만 섬의 주민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어. 그 사람들은 나중에 우리가 인간들을 위협하는 괴물로 변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당연히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지.
…………
그녀는 침묵했다. 결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때부터 자아의식이 생긴 것 같아.
지금의 난 새로운 사명을 얻었지만 소원은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어. 난 이 섬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길 바래.
새로운 사명이요?
바다 마녀는 루시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계속하기 시작했다.
말할 수 있다는 상대가 있다는 게 참 기쁘군. 이 섬은 손님의 발길이 끊긴지 너무 오래됐어. 넌 육지에 있는 인간이 걱정돼 여길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 같지만 말이야.
당연하죠.
사랑 때문... 이라는 거야?
루시아는 잠시 침묵했다.
사랑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인간이 너한테 뭘 줄 수 있을 것 같아?
아니요, 전 지휘관님에게서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 남은 게 아닙니다.
지휘관님이 바라는 미래를 함께 이뤄나가고 싶어서 남았어요.
참 충성심이 깊은 부하로군. 목표를 실현하는 도구로서 칭찬을 아주 많이 받았겠는걸?
생각을 너무 일방적으로만 하는 것 같네요...
바다 마녀는 루시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루시아에게 말을 계속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저도 많은 걸 잃었어요.
가족, 동료, 심지어 기억들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왜곡되고 방향을 잃었을 때가 있었죠.
하지만 전 앞길이 막혀서 구조체가 된 게 아니거든요.
타인이 저와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싸우기로 결심한 겁니다.
지휘관님이 이끄는 그레이 레이븐 소대도 마찬가지예요.
머나먼 바다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린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 반드시 같은 미래를 위해 싸울 거라고요.
이 길은 희생과 죽음으로 얼룩진 길이지만, 그분은 그 누구한테도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어요.
지구를 되찾는 건 아주 먼 꿈인 건 맞죠. 하지만 지휘관님이 여기 계신 이상, 그 꿈을 향하는 길은 결코 고통스럽지 않아요.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이런 고통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걸 목표로 움직이는 저는 당연히 최선을 다해 소대와 지휘관님을 지킬 겁니다.
넌 다른 사람의 목표를 실현해 주는 도구가 아니라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노력하고 있는 동료라고 말하고 싶은거야?
물론입니다. 누군가를 따르고 마음을 내준다는 자체가 두 사람은 독립적인 개체이며 자신만의 목표와 선택지를 가지고 있다는 걸 의미하니까요.
목표를 잃고 선택을 할 수 없는 인간은 도구로 전락하겠지만, 전 누군가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을 거예요!
네 이상은 정말 훌륭해. 그런데 내가 물어봤던 질문, 감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군.
왜냐하면 우리한테 감정은 너무 당연한 거라서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다들 진심으로 느끼고 있어요.
전투가 힘들 때도, 기억 이상으로 혼란스러울 때도 지휘관님은 절 잡아주셨어요.
그 덕분에 다시 제 길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거예요.
저는 제가 칼날을 지키는 칼집이든 칼집과 함께하는 칼날이든 상관없어요. 똑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 이것이 제가 느끼는 모든 감정의 근원입니다. 굳이 애기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존재라고 볼 수 있죠.
그런가?
칼날과 칼집이라...
서로를 위해 만나고 함께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군.
그분도 나와 함께 같은 미래를 그렸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까지 여유롭던 목소리가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의견을 고수할 때 그분은 모두를 폐기한다는 결정을 내리셨지. 그리고…… 직접 조금씩 다른 두 관리 담당자를 해체했어.
내가 전자 대뇌를 빼앗지 않았다면 다들 아마 사라졌겠지.
조금씩 해체했다고요?
루시아는 수정 후 버전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왕자는 검을 뽑는 순간 이렇게 말했다.
"괜찮다. 아직 잠들지 않았어."
이 말 뒤에 하지 못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듯 루시아는 이 섬의 주인에게도 미처 말하지 못한 사정이 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만약 그 두 관리 담당자를 폐기하고 싶었다면 더 빠르고 편리한 방법을 사용했을 거예요. 굳이 조금씩 해체할 필요가 없었겠죠.
뭐라고?
처음부터 당신들을 남기려고 했던 거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선택했던 거예요.
루시아의 말을 들은 바다 마녀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혹시... 당신이 단말기의 《인어공주의 전설》 스토리를 수정한 건가요?
……………………………………
그녀는 루시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루시아가 방금 말한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날... 그분이 나에게 남기신 마지막 기억은 질타뿐이었어. 난 그분에게 유용한 도구조차 되지 못했으니 감정이 없는 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런데 왜 굳이 모두를 남겨두려 하셨겠어?
다른 사람들을 믿게 하려고 일부러 질타한 거라면요?
그들이 믿어야 당신들을 남길 수 있을 테니까요.
가설을 제기하는 건가? 하지만 이 가설은 이제 확인할 수 없어.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미 너무 늦었어. 기나긴 세월 속에서 내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혔어. 그 사람들뿐만이 아니야...
바다 마녀는 고개를 숙이고 잠깐 침묵했다.
하지만 괜찮아. 이렇게 해서라도 난 그분의 목표를 이룰 거야. 이 섬을 다시 번화하게 만들 거라고.
그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해.
이곳은 이제 보잘것없게 되었고 너희들도 게임에 반강제적으로 참여했지만…… 그 덕에 다들 즐거웠어.
지금 당장 사라진다 해도 소중한 기억 데이터를 남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해.
아직 저한테 말하지 않은 게 있죠?
바다 마녀는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며 루시아의 질문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시나리오대로라면 네 '언니'가 이곳으로 와서 "왕자"를 죽이는 검을 바꿔가야 해. 하지만 지금은 너희 두 사람뿐이니 그 검을 너한테 줄게.
그녀는 날카로운 단검을 루시아 손에 올려놓았다.
이제 다시 육지로 돌려보내 줄 거야. 네가 "왕자"를 죽이면 네 자유와 목소리를 돌려주지.
하지만 마지막 날까지 "왕자"가 살아있다면 넌 바닷속 거품이 되어 사라질 거야.
네가 자랑스러워하는 그 신뢰 관계가 깨지는 순간을 지켜보도록 하지.
지휘관님은 저를 의심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도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 따윈 하지 않을 거고요.
그럼 이제 바다의 거품이 되어 영원히 여기 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