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롱한 의식 속에서 깨어나 보니 새하얀 모래사장 위에 누워있었다.
지휘관님!
천천히 고개를 들자 루시아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에 남는 통증으로 보아 아무래도 조금 전까지 응급 처치를 받은 것 같았다.
지금까지 의료 방면의 작업은 리브에게 맡겼기 때문에 루시아도 이런 처치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걸 잠깐 잊었다.
하지만 구조체라면 당연히 집중 훈련을 받을 것이고 루시아가 응급 처치를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했다.
저 여기 있어요.
지휘관님, 지금은 좀 괜찮으세요?
물에 빠졌기 때문에 폐에 염증이 생길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정밀검사는 불가능해요. 리브가 있었다면...
주위를 둘러보니 모래사장 주위는 온통 오락시설 폐허였다.
이 섬은 영화의 샛별와 흡사하지만 위치 정보로는 영화의 샛별과 180km 떨어진 곳인 것 같습니다.
이곳은 과거 영화의 샛별 소속이었고, 유사한 목적으로 지어진 독립된 휴양지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정말 무인도는 아닐 겁니다. 퍼니싱 농도를 분석했을 때 아직 움직일 수 있는 로봇과 구조 물자를 얻을 수 있을 확률이 아주 높아요. 스캐빈저들도 있을 수 있고요.
리브와 리를 호출해 보았지만 응답이 없어요.
여긴 신호가 아주 약하네요. 급류 때문에 단말기도 어느 정도 손상을 입었고요.
일단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교통수단부터 찾아야겠어요. 최대한 빨리 모두와 합류해야 하니까요.
아니요, 저에게 맡기세요.
전방 지역은 퍼니싱 농도가 낮아 안전해요. 지휘관님은 거기에서 대기하세요.
아직 의식이 회복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조금만 더 쉬세요.
안심하고 저한테 맡기세요.
네, 잠시 후에 봬요.
부드러운 모래사장을 벗어나 파도소리를 들으며 혼자 섬의 중심부로 향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곳은 황폐해진 광장이었다. 폐업한 오락시설은 안갯속에서 방문자를 기다리고 있었고 도로 양쪽에는 폐기된 기계 잔해와 무너진 건물 잔해들이 쌓여 있었다.
황폐한 광장 안을 잠시 순찰하던 중 루시아는 부품을 담은 커다란 봉지를 들고 돌아왔다.
손에는 팔딱이는 물고기 두 마리를 쥐어져 있었다.
죄송해요, 지휘관님. 쓸만한 배를 못 찾았어요.
그래도 사방에 배를 제작할 수 있는 재료들이 많이 있었어요. 엔진을 조립할 수 있는 부품을 가져왔습니다.
루시아는 팔딱이는 물고기를 무시하고 고개를 들어 파도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조립에 능숙하지는 않지만 충분한 시간을 두면 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루시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믿는다는 표현을 한 동시에 다른 문제를 생각했다.
그러게요. 배를 조립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리스크입니다.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물고기 두 마리를 움켜쥐었다.
이곳에 전문적인 도면이나 제작 도구가 없어요. 만든 배로 바다를 건너는 건 자신 있지만 그 후의 공격을 막는 건 힘들어요.
네.
이 근처 퍼니싱 농도가 낮은 편이네요. 아직 침식되지 않은 로봇이 건물 정비를 하고 있는 걸 보았어요.
그렇지만 그 밖의 지역에 침식도가 높은 곳이 있을지도 몰라요.
루시아의 말과 함께 한 소대의 로봇이 청소 도구를 들고 복도를 통과했다.
왜 그러세요?
이 구역을 탐색해 봤는데, 보급 물자는 거의 없었어요, 하지만 남아 있는 생활 설비들은 아주 다양하더라고요.
날도 저물었고, 지휘관님도 휴식과 영양 보충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왔어요. 조리하면 먹을 수 있을 거예요.
네.
앞으로의 여정이 힘들 수도 있으니, 지휘관님은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루시아는 광장을 둘러보며 서서히 저항을 멈추어 가는 물고기를 잡고 근처의 샛길을 가리켰다.
저기에 황폐한 공원이 있어요. 제가 탐색한 구역 중 퍼니싱 농도가 가장 낮았던 곳이에요.
우선 저기를 지나서 공원 뒤편에 있는 도서관으로 가요.
도서관 1층에 버려진 커피숍과 식당이 있어요. 거기에 있는 도구로 저녁을 만들면 될 거 같아요.
루시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도서관까지 걸어가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정돈되어 있었지만 곳곳에 파괴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섬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완전히 폐기되기 전에는 자주 전투가 벌어졌던 것 같아요.
부품을 찾는 도중에 곳곳에서 이런 흔적을 볼 수 있었어요.
그 외에도... 인간이 남긴 낙서나 글자를 새긴 흔적들이 남아있었어요.
즉, 누군가가 여기에 잠시 머물렀고, 어떤 표시를 남길 시간이 있었다는 말씀이신 건가요?
하지만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요.
가능성은 있어요. 나중에 다시 범위를 넓혀서 수색해 볼게요. 여기 있는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면 여기서 탈출하기 위한 정보도 획득할 수 있을 거에요.
하지만 지금은 일단 지휘관님의 영양보충이 우선입니다.
루시아는 폐기된 커피숍의 부엌으로 들어가 간단하게 식탁을 청소한 후 죽은 생선을 위에 올려놓았다.
이곳에 장비는 아직 쓸만하고 조미료도 남아있어요. 아마 침식되지 않은 로봇들이 관리한 것 같아요.
네.
정지 명령을 받기 전까지 그들은 예정대로 자신의 작업을 반복하게 됩니다.
루시아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조리 도구를 뒤졌다.
루시아의 요리 솜씨가 어떨지는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요리하는 과정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호기심과 생존 욕구가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럼 갈게요.
물고기와의 전투를 시작합니다.
지휘관님, 뒤로 물러나 안전한 곳에 계세요.
그 질문을 하는 순간 루시아가 무기를 꺼냈다.
부탁할 일이라도 있으세요?
네, 태도가 손에 익어서요.
그 말은 나의 요리 상식을 크게 벗어났지만 그녀가 어떻게 태도로 생선을 손질하는지 매우 궁금했다.
루시아는 내 눈빛을 읽고 뒤로 한 발 물러서더니 공격 준비를 시작했다.
다음 순간 그녀는 물고기 한 마리를 허공에 던지고 번개같이 빠른 기세로 연속해서 태도를 휘둘렀다. 물고기의 비늘은 물보라가 사방으로 튀는 것처럼 주위에 흩날렸다.
물고기는 루시아의 움직임에 맞춰 허공을 위아래로 날았다. 몸통이 떨어지려고 할 때마다 태도에 의해 들어 올려져 비늘이 벗겨졌다. 그렇게 수십 번 위아래로 날면서 무려 한 번도 식탁에 닿지 않고 계속 허공을 날았다.
황금시대의 요리사라도 이런 화려한 솜씨를 발휘한다면 유명 셰프 톱10 안에 들 것이다.
비늘이 거의 벗겨질 때쯤 루시아는 칼을 위로 쳐올리며 빠르게 배를 갈랐다. 그녀는 가녀린 손으로 물고기 내장을 꺼냈다.
물고기가 도마 위에 떨어졌을 때 생선 머리는 이미 그녀의 현란한 칼질로 인해 천장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짧은 곡선을 그리며 이쪽으로 날아와 내 머리 위로 떨어질 뻔했다.
이래서 안전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는 건가?
정신을 차려보니 주위의 테이블은 그녀의 칼에 의해 심하게 파괴되었고 온전히 남아 있는 곳은 물고기가 놓인 주위 구역뿐이었다.
예전에 받은 주방기구 배상 청구서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짧은 식칼요? 비록 태도의 길이에 익숙해졌지만 가끔 짧은 무기를 사용하는 것도 훈련이라고 생각하죠.
루시아는 내 눈빛을 읽고 옆에서 비수 모양의 식칼을 꺼냈다. 그리고는 뒤로 한발 물러서더니 공격 준비를 시작했다.
다음 순간 그녀는 물고기 한 마리를 허공에 던지고 번개같이 빠른 기세로 연속해서 식칼을 휘둘렀다. 물고기의 비늘은 물보라가 사방으로 튀는 것처럼 주위에 흩날렸다.
물고기는 루시아의 움직임에 맞춰 허공을 위아래로 날았다. 몸통이 떨어지려고 할 때마다 식칼에 의해 들어 올려져 비늘이 벗겨졌다. 그렇게 수십 번 위아래로 날면서 무려 한 번도 식탁에 닿지 않고 계속 허공을 날았다.
황금시대 요리 기록 자료에서도 이런 칼 솜씨는 상위 10위 안에 들었을 거다.
비늘이 거의 벗겨질 때쯤 루시아는 칼을 위로 쳐올리며 빠르게 배를 갈랐다. 그녀는 가녀린 손으로 물고기 내장을 꺼냈다.
물고기가 도마 위에 떨어졌을 때 생선 머리는 이미 그녀의 현란한 칼질로 인해 벽에 부딪혀 빨간 장미꽃을 남겼다.
이래서 안전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는 건가?
정신을 차려 보니 주위 식탁에는 그녀의 칼로 긁힌 자국이 가득했다. 하지만 식칼이 짧아서 그런지 그다지 파괴되지 않았다.
드디어 예전에 받은 주방기구 배상 청구서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알게 됐다. 어쩌면…… 루시아의 태도 사용을 막은 것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무슨 말을 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같은 방법으로 두 번째 물고기를 손질했다.
그 다음 생선을 물로 씻은 후 얇게 썰고 양념을 하고 익히면 먹을 수 있어요.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루시아가 알아채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휘관님, 어디 아프세요? 아쉽게도 여기에는 약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생선 스프를 완성하고 영양을 보충해 드리겠습니다.
루시아의 다음 동작을 차분히 지켜보았다. 마치 예전에 소문과 추억이 없었던 것처럼.
곧 생선 스프가 완성되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루시아는 안쪽에 있던 아직도 쓸 수 있는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받아서 정수기로 걸렀다.
그사이 그녀는 주변 식탁에서 수십 개의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조미료들은 찾았다.
물이 담긴 조리용기를 레인지 위에 올려놓고 루시아는 손질한 생선을 물에다 씻고 얕게 썰었다.
그녀가 바쁜 와중에 물이 끓자 루시아는 썰어 놓은 생선을 다시 한번 검사하고 끓는 물에 넣었다.
그리고 그녀는 수십 가지 조미료 통을 차례대로 열었는데...
방해하지 않고 그저 루시아가 각자 다른 냄새가 나는 조미료를... 모두 냄비 안에 넣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도 병에서 풍기는 냄새로부터 그것들 중에는 적어도 와인, 식초, 커피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깐. 왜 커피가 있지?
말리기엔 너무 늦었다. 놀란 나머지 잠시 굳어버렸고 잠시 후 루시아는 진한 갈색 수프를 내 앞에 가져왔다.
맛있지는 않지만 지금은 더 이상의 좋은 조건이 없으니 드셔보세요. 지휘관님.
거절하려고 했지만 확실히 지금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하지만 숟가락만 들어도 식초와 술 그리고 생선 비린내가 섞인 강렬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몰래 침을 삼키고 손을 떨면서 갈색 액체를 입에 넣었다.
치명적인... 짠맛이었다.
혀를 마비시키는 듯한 짠맛 이후 생선 비린내가 엄습했다. 이어서 커피의 쓴맛, 와인과 식초가 뒤섞여 죽음의 소나타를 연주했고 마치 한여름에 연달아 터지는 불꽃놀이처럼 미각을 폭발시켰다.
의식이 한순간 차가운 바다에 가라앉았고 눈을 떠도 끝없는 어둠과 외로움 밖에 보이지 않았다. 숨 막히는 답답함 속에서 귓가에 희미하게 종소리 같은 기도가 들렸다...
지금 이 순간에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인다면 분명 환상 속에서 많은 음식이 차려진 향연을 볼 수 있겠지.
의미 불명확한 이미지가 뇌리를 스치고 난 후에 의식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 갔다.
지휘관님!!
지휘관님! 지휘관님!
몽롱한 의식에서 깨어나 보니 위층 도서관에 누워 있었다.
지휘관님...
루시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제 요리 때문인가요?
바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루시아는 답을 안 것 같았다.
구조체는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어요. 먹어본 적 없어요.
방금... 지휘관님이 쓰러진 원인을 확인하기 위해 한 입 먹어봤어요.
맛없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너무 많나요?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생각에 잠겼다.
괜찮아요. 그냥 조미료 넣는 건데요 뭘.
루시아는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네.
루시아에게 다가가 그녀가 방금 개봉한 수십 개의 병, 캔과 봉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중에는 소금 한 통, 케첩, 와인, 커피, 봉지 설탕, 식초, 콩가루, 갈지 않은 후추... 라벨이 잘 보이지 않는 세 가지 외에 베이킹파우더까지 있었다.
황금시대에는 각종 저장법에 따라 식재료와 조미료의 유통기한이 대폭 연장됐을 텐데 어딘가 위험한 냄새가 난다.
몇 번이고 체크해서 아직 사용할 수 있는 조미료를 엄선하고 소량을 생선 수프에 넣었다.
이렇게 조금 넣는다고요?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았다.
짧은 기다림 끝에 그녀는 맑은 생선 탕을 한 그릇을 들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드셔보세요, 지휘관님.
침착하게 스푼을 들어 생선 스프를 먹었다...
워낙 열악한 조건이라 맛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무인도에서 며칠 동안 굶은 사람에게는 영양가와 따뜻함을 충분히 챙길 수 있는 요리였다.
구조체는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어요.
그럼...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스푼을 들어 한 입 먹었다.
나쁘지 않네요.
루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숟가락을 나에게 돌려주고 조용히 내가 그릇에 담긴 수프를 다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올라가서 쉬세요.
루시아와 함께 꼭대기 층의 도서관으로 걸어가서 모퉁이에서 쉴 곳을 찾았다.
휴식을 취하기 전 방금 루시아가 조미료에 대한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왜 그러세요?
네.
조미료는 음식을 더 맛있게 해줘요.
그래서 많이 넣은 만큼 음식도 맛있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죄송해요... 그건 아주 비정상적인 일인가요? 지휘관님.
웃는 것보다는 이럴 때일수록 왜 그런 인식을 가졌는지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요리에 대한 저의 기억은... 아주 어릴 적에 멈춰 있어요.
살아가려면 음식을 가려선 안됐어요.
특히 제가 처음 떠돌아 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너무 어려서 조미료를 구분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어요.
비수를 잘 쥐기 전까지 통조림과 과자를 주울 수 있는 날이 적어지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대부분 유통기한이 지났거나 더러운 식재료와 식물 심지어 흙밖에 없을 때도 있었어요.
소량의 소금으로도 삼키기 힘든 나뭇잎이 맛있을 정도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조미료는 귀한 물건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방랑는 동안 항상 굶었기 때문에 너무 많은 조미료는 오히려 음식을 맛이 없게 만든다는 것을 몰랐아요. 기억에 남는 것은 비축량이 부족하다는 두려움밖에 없어요.
구조체가 된 뒤, 공중 정원 부엌에 조미료가 잔뜩 쌓여 있는 걸 보고... 식재료나 조미료를 많이 썼어요.
그 일이 있은 후 사람들이 저보고 부엌에 접근하지 말라고 해서 개선할 기회도 많이 없었어요.
제가 원래 요리를 잘 못하는 탓도 있지만 조금만 더 연습하면 적어도...
루시아는 고개를 숙였고 가뜩이나 조용했던 도서관은 이 순간 더욱 조용해졌다.
요리 실력이 안 좋은 건 알았지만 그 이면에는 이런 이유가 있을 줄은 몰랐다.
네, 저 여기 있어요.
지, 지휘관님?!
다소 긴장한 루시아를 끌어안고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등을 두드렸다.
그러나 지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발버둥치고 있어요.
네...
네, 지휘관님을 믿어요!
루시아는 고개를 들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시간 늦었네요. 지휘관님, 주무시겠어요?
네.
그럼 저는 계속 쓸만한 물자를 찾아볼게요. 배 만드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요.
제가 할 일이 또 있나요?
지휘관님...
루시아는 잠시 진지하게 생각했다.
네, 확실히 경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겠네요.
책이요?
그녀는 약간 당황한 듯 주위의 책을 둘러보았다.
아니요. 책 볼 기회가 별로 없어서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어요.
네.
루시아는 책장 앞으로 가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책 한 권을 꺼냈다. 페이지가 약간 찢겨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그녀가 손에 쥔 책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나도 아직 읽지 않은 책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여기에 있는 책들이 대부분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절반 정도가 불 타버린 것도 있고, 오물이 묻은 것도 있고, 온통 낙서뿐인 것도 있고, 일기를 빼곡히 적은 것도 있었다.
대부분의 책에는 젖은 흔적이 있었고 식물이나 음식물의 얼룩이 묻어 있었다. 아마도 이 책들은 도서관에서 반출된 후 꼬마 로봇에 의해 회수된 것 같았다.
대충 읽어보니 글씨의 필체도 내용도 아주 다양했다. 유일한 공통점은 아주 오래된 물건이라는 것뿐이었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사람들이 섬에 모였고 놀랍게도 이곳의 침식도는 높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퍼니싱은 결국 폭발했고 일기에 적힌 이야기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보아하니 밖에 파괴된 흔적도 이것 때문이겠지.
책을 내려놓고 계속 책장에서 찾다가 문득 바닥 한구석에 잘 포장된 제목이 없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그 책을 열어보니 이것은 종이 서적이 아니라 접힌 단말기 같았다.
화면 제목을 터치하자 화면 위로 각종 동화 무대 영상이 투영되었다.
지휘관님?
그녀가 영상을 알아차리고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놓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녀는 책형 단말기를 받아들고 안의 목록과 내용을 자세히 확인했다.
동화 연극을 보여주는 단말기 같네요.
그리고 이 무대의 배경은 이 섬 같아요.
그게 뭔가요?
그렇군요.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관님, 이거 보세요.
이게 리브가 말한 그 《인어공주》인가요?
네.
루시아의 눈이 반짝였다. 자신의 코팅에 관한 이야기에 흥미진진한 모습이다.
네.
루시아는 책을 나에게 건네준 후 담요를 들고 왔다.
여름이지만 밤은 아직 추워요. 여기 담요 덮으세요.
—— 옛날 옛적에 바다 깊은 곳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바다 왕국이 있었어요.
루시아는 손 안의 단말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번화한 바다 궁전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 바다의 딸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고 그녀들은 물고기의 꼬리와 인간의 몸을 가졌으며 매우 아름다웠어요.
그중에서 막내 공주가 가장 아름다웠어요. 그녀의 피부는 장미 꽃잎처럼 윤기 나고 눈동자는 호수처럼 맑았답니다. 그녀가 노래하면 물고기 떼는 헤엄치는 속도를 줄여 그녀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단말기에서 부드러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노래는 확실히 듣기 좋네요.
—— 인어공주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 그녀는 할머니의 허락을 받아 바다 위로 올라가 파괴됐지만 아름다운 대지를 볼 수 있었어요.
그녀가 설레며 주위를 둘러볼 때 한 척의 호화로운 배가 그녀 곁으로 다가왔어요. 배에는 멋진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왕자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있었어요.
그때 어린 인어공주는 왕자와 그를 둘러싼 모든 것에 매료되었어요. 그녀는 언젠가 자신도 반드시 이 웅장하고 화려한 왕국에 들어가겠다고 다짐했어요.
육지에 오르기 위해 그녀는 동굴에 사는 바다 마녀를 찾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대가로 물고기 꼬리를 다리로 변하게 만드는 약을 받았어요.
원래는 어떤 이야기인가요?
이 이야기에서는 인어공주의 목적이 바뀌었다고요?
두 사람은 침묵에 빠졌다.
그러나 이 물약은 대가가 없었던 건 아니였습니다. 인어공주는 걸을 때마다 칼날 위를 걷는 듯한 극심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만약 왕자가 인어공주를 추방한다면 그녀는 그곳을 떠나기 전날 아침에... 바다의 거품이 되어버린다는 것이 물약의 대가였습니다.
그녀는 그 엄청난 대가에도 주저하지 않았어요. 가족과 작별을 고하고 약을 먹고 극심한 통증을 견디며 왕자가 사는 왕궁으로 향했어요.
비록 목소리는 나지 않아도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기 때문에 왕궁에 남아 있을 수 있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왕자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인어공주는 왕자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려 했지만 전할 수가 없었어요. 말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왕국에는 신분의 차이도 존재했답니다.
아무리 주변 사람들이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와 우아함에 매료돼도 왕자는 그녀를 단순한 무희로밖에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자는 호화로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어요. 돌아가는 길에 갑작스러운 폭풍우로 암초에 좌초된 배를 마주쳤습니다.
왕자는 열 명의 호위를 데리고 조난당한 사람들을 구했습니다.
구조된 사람들 중엔 한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습니다.
왕자는 그녀가 이웃나라의 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해 바로 약혼을 하게 되었어요.
왕자는 이웃나라 공주에게 자신의 유일무이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왕궁의 모든 무희를 궁 밖으로 내보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인어 공주는 어떻게든 왕궁에 남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발끝의 통증을 참으며 왕자와 공주에게 마지막 춤을 바쳤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자 어린 인어공주는 해변가로 가서 바다의 거품이 되기 위해 아침 해를 기다렸어요.
마치 인간의 신분을 버리고 구조체가 되기로 결정한 이야기 같네요.
부대에서 버림받고 더 이상 공중 정원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면 결국 이렇게 돼요.
그렇네요... 죄송해요. 갑자기 상관없는 이야기를 구조체로 연상시켜 버려서.
지휘관님이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 계시는 한, 저와 리브, 리 모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요.
네, 지휘관님이 그레이 레이븐 소대에 계시는 한 저와 리브, 리 모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요.
루시아는 미소를 지으며 단말기로 시선을 돌렸다.
—— 그녀가 아침 해를 기다리고 있을 때 바다에서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건 바로 공주의 언니들이었어요.
그녀들은 인어공주의 소문을 듣고 자신의 긴 머리를 바쳐서 바다 마녀에게서 비수 하나를 얻었습니다.
이 비수로 왕자를 죽이면 인어공주의 다리는 물고기 꼬리로 돌아와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
인어공주는 비수를 들고 왕자의 침실로 몰래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몇 번을 결심햇지만 끝내 왕자를 찌르지 못했어요.
갑자기 침실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인어공주는 서둘러 커튼 뒤로 숨었습니다.
공주는 두려움에 떨며, 커튼 사이로 시종이 두 익숙한 모습을 붙잡고, 왕자의 창 앞에 내던지는 것을 봤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왕자님.
괜찮아. 애초에 잠들지 않았으니까.
근처 바닷가에서 인어 두 마리를 잡았습니다. 왕자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래?
즉시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왕자는 시종이 보는 앞에서 잠깐 침묵하다 결국 창문에 걸린 검을 뽑아들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보고 인어공주는 견디다 못해 커튼 뒤에서 뛰쳐나와 슬픔과 분노를 담아 비수로 왕자의 가슴을 찔렀어요.
인어공주의 다리가 피로 물든 순간 큰 파도가 궁궐을 집어삼켰어요. 그녀의 두 다리는 원래의 물고기 꼬리로 돌아왔고 언니들과 함께 바다로 돌아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지휘관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완전히 원작에서 벗어난 것 같네요.
한 가지 수상한 부분이 있어요.
왕자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면 인어공주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거예요.
작가가 깜빡한 걸까요? 아니면 일부러 그런걸까요?
그럼... 오리지널 버전의 《인어공주》는 어떤 결말이에요?
루시아에게 말하려고 할 때 화면 아래쪽에 잘 보이지 않는 아이콘을 발견했다. 그 위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클래식 모드]
그것을 누르자 다시 동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오리지널 동화 같았다.
이야기의 시작은 수정판과 같았다. 인어공주는 15살 때 수면 위로 올라왔고 왕자와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연회 도중 폭풍이 배를 뒤집어버렸어요. 왕자와 사람들은 바다로 내던져 목숨을 잃을 뻔했을 때 인어공주가 필사적으로 그를 바다에서 구출해 모래사장에 눕혔습니다.
하지만 인간과 인어는 사는 세상이 다른 생물이에요. 그녀는 자신의 비밀을 숨기기 위해 왕자의 안전을 확인한 뒤 서둘러 바닷속으로 숨었습니다.
이후 한 젊은 소녀가 왕자를 발견해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왕자를 구했습니다. 왕자는 인어공주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그 소녀가 생명의 은인인 줄 착각했어요.
육지에서 왕자를 다시 만나기 위해 그녀는 동굴에 사는 바다 마녀를 찾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대가로 물고기 꼬리를 다리로 변하게 만드는 약을 받았어요. 그러나 이 물약은 대가가 없었던 건 아니에요. 인어공주는 걸을 때마다 칼날 위를 걷는 듯한 극심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만일 왕자가 인어 공주를 선택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약혼한다면 그녀는 약혼식 전날 아침에... 바다의 거품이 되어버린다는 것이 물약의 대가였습니다.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는 왕자에게 말을 걸지 못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녀의 춤과 미모에 매료돼도 왕자는 모래사장에서 그를 구해준 소녀를 사랑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국왕과 왕비는 왕자를 위해 신부를 선택했는데 이웃 나라의 공주였어요. 왕자가 배로 공주를 맞았을 때 그 공주가 그를 구한 그 소녀라는 걸 알게 됐어요.
두 사람은 즉시 약혼했고 곧 결혼하게 되었어요...
어둠이 깔리자 인어공주는 바닷가로 나와 자신을 거품으로 만들 아침 해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언니가 소식을 듣고 자신의 긴 머리를 바다 마녀에게서 비수로 교환했습니다. 인어공주가 그 비수로 왕자를 죽이면 공주의 다리는 물고기 꼬리로 돌아가 바다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어공주는 차마 자고 있는 왕자를 죽이지 못하고 비수를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아침 해가 떠올랐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어공주는 거품이 되어 바다로 돌아가게 되었어요.
수정판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결말인 것 같네요.
어떤 결말에서는 언니를 지키기 위해 왕자를 죽였고 또 다른 결말은 자신을 희생하고 왕자에게 사실을 밝히지 않았어요.
두 버전이 다 슬프네요... 하지만 전 오리지널 버전이 더 좋아요.
용기를 가지고 목표를 추구하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주인공…… 매우 용감하다고 생각해요.
네. 이 결말은 아쉽지만 그녀는 분명 후회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런 결말이요?
만약 제가 자신을 희생하기로 했다면.. 지휘관님은 슬퍼해 주실 건가요?
네, 저는 절대로 저를 희생하는 선택을 해서 지휘관님을 슬프게 하지 않아요.
물론 지휘관을 위태롭게 하는 결말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다른 길을 개척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 결말이 되지 않았어요. 단지 인생의 일부분일 뿐, 저의 인생 중에서도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시간이에요.
저는 그것 때문에 희생하지 않았어요. 지휘관님, 길을 조금 돌아갔지만 잘 돌아왔어요.
대답을 듣고도 루시아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고 해도 지휘관님이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요.
지구를 되찾는 것은 어렵고 긴 임무에요. 그 과정에서 반드시 희생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슬픔에 잠긴다면 사람은 과거에 머물러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못해요.
네, 지휘관님이 있어 주시는 한 저는 반드시 생명을 소중히 여길 거예요.
하루빨리 지구를 되찾기 위해서,도 지휘관님 곁에 더 오래 머물기 위해서도 스스로 제 자신을 지킬 거예요.
지구를 되찾는 임무를 완수하면 저희는 반드시 다시 만날 거예요.
알고 있어요. 오리지널 이야기처럼...
루시아의 미소는 옅은 씁쓸함을 띠고 있었다.
만약 지휘관님이 거품처럼 사라진다면... 전 바다가 될게요.
그런 날이 온다면, 지휘관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승리의 소식을 반복해서 전달해 주고 싶어요.
그러나 저에게 가장 좋은 미래는 지휘관님이 우리 곁에 있어야 이룰 수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 앞으로도 전력을 다해 지휘관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지휘관님이 어디에 계신지 아는 한 저는 길을 잃지 않을 거예요.
지구를 되찾는 그날을 기다리며 제가 지휘관님을 찾을 거예요.
그때가 되면 누구나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겠죠?
루시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시선을 단말기 화면으로 돌렸다.
하지만... 왜 원작 스토리를 이렇게 바꿨을까요?
황금시대의 기록에는 일부 상인들이 잘 알려진 이야기에 참신함을 주기 위해 일부러 원래의 이야기를 변경했다고 적혀 있어.
이 섬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잖아. 여기에 머문 어떤 사람이 스토리를 덮어쓰고 자신의 경험을 덧붙였을지도 몰라.
그렇군요... 확실히 그럴 가능성도 있겠네요.
음...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지휘관님, 어서 주무세요.
저요?
구조체는 쉴 필요가 없어요. 날이 밝을 때까지 지휘관님 곁에 있을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지휘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