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여름의 오후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예정보다 일찍 임무를 완료했기 때문에 다른 소대와 합류하기까지 3시간이나 남았다.
모두 임시 거점 그늘에 앉아 긴장을 풀고, 답답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3시간 동안 기다려야 된다고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요.
마냥 기다리는 게 아니죠. 누군가로부터 긴급 구조 신호를 받으면 출동해야 하니까요.
이번 잠입 토벌 임무에서 그레이 레이븐 소대는 가장 위험한 지역에 배정됐다. 적은 강력했으나 수가 적었기 때문에 전투는 빠르게 끝날 수 있었다.
기타 집행 부대 대원들도 아직 근처에 있었는데, 수량이 많지만 전투력이 저하한 침식체와 싸우고 있었다.
그 지역에는 미탐지 구역이 많아서 잠입 조사를 할 필요가 있긴 하죠. 그렇지만 지금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그들이 정한 임무 계획을 망쳐버릴 수도 있어요.
모두가 무사히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안심해요.
대다수 인원에게 주어지는 임무는 안전한 편입니다. 임시로 특수 상황이 발생하면 다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난도가 높은 임무는 엘리트 소대에만 주어집니다.
리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다시 침묵에 빠져 지구 특유의 무더위를 느끼고 있었다.
지휘관님, 체온이 너무 높아요. 이대로라면 더위 먹을 수도 있으니 겉옷을 벗고 물 좀 드세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리브는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겉옷을 벗고 물 좀 드세요, 지휘관님. 기온이 40도가 넘어요. 이러다가 더위 먹을 수도 있어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루시아는 손을 뻗어 뒤쪽에 있는 분사기를 잡았다.
어? 루시아의 분사 장치로 온도를 낮춰볼까요?
얼음 분사 범위는 제어할 수 있어요. 비록 지속 시간이 길지 않지만 어느 정도 식힐 수는 있습니다.
네.
……
…………
주변이 루시아의 얼음으로 뒤덮이면서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더웠지만 지금은 참지 못하고 재채기를 했다.
주변이 얼음으로 뒤덮이면서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더웠지만 지금은 참지 못하고 재채기를 했다.
지휘관님이 아직 상의를 벗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죄송해요. 많이 추우세요?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고 있어요.
기온이 급격히 하락하면 순간적으로 자극이 되지만, 루시아가 잘 조절해서 괜찮을 거예요.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다시 긴장을 풀고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먼 해변가에서 파도가 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하늘은 어두컴컴해서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았다.
이게 여름인가...
언젠가 지구가 평화를 되찾는다면 우리도 이런 여유로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마 다른 할 일이 생기겠죠?
다른 전투가 있다고요?
지금 공중 정원에서 안전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과 같은 거죠.
전투가 필요 없게 된다고 해도 끝없는 일과 재건 사업 때문에 바쁘겠죠.
네.
그렇다면 제대로 된 휴가를 보낼 수 있겠네요.
제대로 된 휴가는 어떤 걸까요?
글쎄요. 즐겁고 설레는 일을 하는 게 아닐까요?
좋아하는 장소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코팅을 입고... 전투와 임무를 걱정하지 않는 거겠죠?
그런 거예요? 그런 환경에 있으면 기분이 참 좋고 즐겁겠네요.
그런 날을 일찍 맞이하기 위해,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중요한 거죠.
루시아는 이번 임무를 떠올리며 다시금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중요한 일인만큼 가끔씩 긴장을 풀 필요가 있다고요. 그래야 만반의 상태로 계속 전투에 참여할 수 있잖아요.
가끔 긴장을 푼다...
맞아요. 그러고 보니 루시아는 한동안 코팅을 바꾸지 않았군요.
코팅은 전투에 영향을 주지 않으니, 딱히 신경 쓰지 않았어요.
음... 역시 예상했던 대답이네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긴장을 풀기 위한 것이라 생각해요.
코팅 배급 정원도 제한이 있다고 들었어요.
네, 전에 지휘관님께서 절 찾아와 의논한 적이 있었죠.
코팅에 대해 의논한 건가요?
네, 지원금을 받으셨다고 루시아에게 새로운 코팅을 선물하려고 했어요.
저에게요?
네. 하지만 저랑 지휘관님이 의논한 결과...
생각해 보니 루시아는 평소에 코팅 취향을 언급한 적이 없었더라고요.
그래서 루시아가 직접 고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리브는 자신의 단말기를 꺼내 루시아 앞에 펼쳐놓았다. 그 위에는 수십 세트의 코팅 샘플이 표시되어 있었다.
저랑 지휘관님이 신청한 샘플들이에요. 이 중에서 루시아가 좋아하는 걸 한번 골라봐요.
루시아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리브의 단말기를 슬쩍 들여다보더니 리브의 열정적인 권유에 미리 보기 이미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번 코팅에는 드레스도 있어요!
그녀는 로코코풍의 드레스를 모티브로 한 코팅을 가리켰다. 매우 화려하고 중후해 보였다.
전투하기엔 너무 불편해 보이는데요.
리브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그럼 이건 어때요? 심플한 교복과 치마. 색깔도 빨간색이에요.
앗... 근데 기존 코팅과 너무 비슷하네요.
그러게요.
두 사람은 비슷한 콘셉트의 코팅을 몇 세트를 빠르게 넘겼다.
루시아, 혹시 세일러복 좋아해요? 이것도 여름에 딱 어울리네요.
세일러복이요? 이거랑 핑크색을 조합한 게 저한테는 좀...
루시아는 여명 기체로 변경했던 그때처럼, 코팅 디자인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여름 느낌만큼은 참 좋네요.
그럼 이거는요? 어때요?
리브는 웃으면서 시원해 보이는 수영복을 가리켰고 루시아는 곧바로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요, 이건 됐어요.
그녀는 허둥지둥 그 페이지를 넘겼고 계속해서 미리보기 이미지에서 찾고 있었다.
이건... 어때요?
루시아는 푸른색 여름 코팅 세트를 가리켰다. 옷자락은 물고기 꼬리처럼 부드럽게 휘어졌고 밑단은 바닷물이 모래사장 위에 떠 있는 흔적을 본떠 만들었다.
너무 예뻐요. 입어볼까요?
지금요?
네.
…………
………………
루시아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지만 묻고 싶은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 그래요?
루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저도 너무 예쁘다고 생각해요. 루시아!
안 이뻐'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리브가 재빨리 영양 젤리를 내 입에 찔러 넣었다.
지휘관님! 루시아의 선택을 따르기로 했잖아요?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고 내 귀에다 말했다.
그리고 분명 너무 예쁘잖아요...
그녀는 돌아서서 걱정스러운 듯 당황한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루시아가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지휘관님의 평가에 매우 신경 쓰고 있거든요. 이럴 때 이상한 농담은 하지 마세요.
왜 그러세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냥 루시아를 놀리려는 것뿐입니다.
루시아! 너무 예뻐요!
저의 선택이요?
그녀는 살며시 손을 들어 부드러운 옷자락과 어깨에 걸친 머리카락을 보았다.
이 헤어스타일도 참 그립네요.
묶는 게 더 편하지 않으세요?
괜찮아요. 최초의 기체도 항상 이런 상태로 전투에 투입해서 이미 익숙해졌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그럼 선택이 확정된 거죠? 이 코팅 세트로 신청할게요.
여기 설명을 보면, 이 코팅은 《인어공주》를 모티브로 제작했다고 하네요.
《인어공주》?
네, 정말 로맨틱하고 슬픈 이야기예요.
아주 먼 옛날에...
리브는 《인어공주》 이야기를 하려다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지휘관님, 남쪽 18km 지점에서 보내온 구조 신호를 접수했습니다. 발신처는 불명입니다.
기타 부대 대원들이 오면서 위험에 부닥친 걸까요?
신호상의 오류일 수도 있어요.
네, 목표 지점은 해상이에요. 그쪽으로 이동하려면 집결 시 사용했던 보트가 필요할 거 같아요.
그레이 레이븐 소대, 지금 출발합시다.
천둥소리가 짙은 구름층 속에서 희미하게 울려 퍼지며 폭우가 쏟아질 것을 예고했다.
서둘러야 합니다.
폭풍이 오기 전에 일행들은 구조 신호를 쫓으러 낡은 요트에 올랐다.
구조를 신청한 자는 어느 쪽에 있죠?
탐색 중입니다.
현재 확인된 활동 목표는 남아있는 침식체뿐이에요.
이 배가 수상한 것 같습니다.
루시아는 리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조종석에는 젖은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방금 누군가 이곳에 왔던 게 분명합니다.
그녀는 성큼성큼 조종실 안으로 들어가 주위을 자세히 살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배 같은데, 누군가가 갑자기 이곳에 와서 구조 신호를 보냈어요.
그녀가 주위를 조사하고 있을 때 조종석에 있는 침식체가 이쪽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서서히 모여들었다.
전투 준비합시다.
침식체들이 낡았고 움직임도 둔해서 전투는 오래가지 않아 끝이 났다.
적군의 반응이 완전히 멈춰졌어요.
모든 침식체를 다 처치했지만 이 배에는 아무도 없네요. 대체 누가 구조 경보를 보냈을까요?
저희가 너무 늦게 도착한 걸까요?
아니요. 잠시 철수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리브, 계속 주변의 활동 반응을 탐색해 봐요.
네.
리브는 눈을 감고 자신의 탐색 모드를 강화했다.
조심해요!!
해수면 아래에서 대량의 침식체가 이곳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이정도 수량은... 저희만으로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말이 떨어지기도 바쁘게...
낡은 갑판에 거대한 파도가 밀려왔고 그와 동시에 대량의 침식체가 대원들 시선에 나타났다.
주저하지 않고 권총을 뽑아 들어 몰려드는 침식체를 향해 쏴서 우측에서 전투하는 3명을 엄호했다.
그러나 이때 폭우가 쏟아졌다. 낡은 요트는 파도와 많은 침식체에 이끌려 크게 기울어졌다.
저항할 사이도 없이 심하게 흔들리는 갑판에 의해 몸이 바닷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아직 전투 중인 세 사람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침식체의 두 다리를 잡고 그들을 갑판에서 끌어내려 길동무로 삼는 거였다.
지휘관님!!
루시아는 태도로 원을 그리며 몰려드는 침식체를 물리치고 길을 열었지만 이미 그곳에는 지휘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서 보트에 올라타요. 최소한의 철수 수단은 확보해야 됩니다!
그렇게 말하고 난 뒤, 루시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갑시다.
그러나 리브와 리가 요트 갑판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거대한 파도가 연이어 몰아쳤다.
쯧!
지휘관님의 신호는 확인됐나요?
활동 신호가 혼란스러워요. 지휘관님을 놓쳤어요! 우선...
우선 철수해요! 보트를 확보하는 게 우선입니다! 지휘관님이 없는 상황에서 바다에 뛰어들면 침식체에게 둘러싸일 게 뻔합니다!
하지만!
루시아를 믿어요! 우리는 그녀를 위해 반드시 침식체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해야 합니다!
……!
이 말을 듣고 리브는 리를 따라 보트 갑판에 뛰어들어 무수한 파도와 침식체의 추격으로부터 길을 열었다.
폭풍과 폭우의 혼란 속에서 푸른 그림자의 바닷속에서 나타나 품 안에 안고 있던 인간을 너덜너덜한 널빤지 위에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