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이 황량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무조건 다른 길로 가야 한다."
……
눈앞의 광경이 다시 한번 흔들리며 변화가 생겼다.
마치 공연이 막바지에 이른 것처럼 장소를 옮기고 사용했던 소품들을 슬그머니 철거시킨 다음 신규 세트로 황급히 교체되는 듯했다.
승산이 없는 사투, 시체가 널브러진 도로, 부서진 꽃.
모든 것은 광상곡의 음조가 하강되고 변주하듯 급전직하했고 차가운 어둠이 밀려왔다.
뼈를 찌르는 눈물과 피가 생생하게 눈앞에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이중합 코어의 조각을 들고 계속 앞으로 달려갔다.
이것을 공중 정원으로 돌려보낼 수만 있다면…… 아니, 무조건 공중 정원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선실에는 살아남은 구조체 동료들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반드시 구조를 요청해서 살아남은 동료 모두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누군가 눈앞에서 쓰러지는 걸 보고 있지 않을 것이고 꼭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어떤 고통도 참을 수 있고 그 어떠한 대가도 아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막다른 골목이었고 그녀와 미친 코롤료프 사이에는 문 하나만 남았다.
그녀는 재빨리 손을 들어 이중합 코어의 조각을 자기 가슴에 찔러 넣었다.
지나치게 익숙해 보이는 그 움직임...... 마치 수없이 시도해 본 것처럼 말이다.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를 다시 감쌌다.
……
기체에 모든 연산은 역원 장치 작동을 유지하는 데 사용됐고 그녀의 감각기능은 순환액 손실로 인해 점차 약해졌다.
제일 먼저 후각을 잃었다. 대량의 순환액이 몸 밖으로 흘러나오는 냄새와 생체공학 코팅이 타서 풍기는 냄새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다음은 청각. 우주 정거장을 떠돌던 침식체가 지면을 스칠 때 나는 기분 나쁜 소리도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리고 시각. 눈앞의 모든 색깔은 이미 핏빛으로 흐려졌고, 그녀는 우주 정거장 단말기와의 연결만으로 간신히 주변의 모든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오감이 점차 사라지고 의식의 바다 깊은 곳의 고통이 더욱 뚜렷해졌다.
책형을 당한 신의 아이처럼 피와 살의 껍데기는 "독수리"에게 잠식당했고 유일하게 남겨진 것은 도망갈 곳 없는 영혼뿐이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얼마나 기다렸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오랫동안 침묵에 휩싸였던 우주 정거장은 드디어 여러 명의 "손님"을 맞이했다.
익숙한 핑크색 그림자가 일렁이는 폭풍우를 쫓아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깨웠다.
세레나…… 참 다행이야…… 아직 살아있어서.
아이라.
한편 그레이 레이븐이라는 소대가 끈질기게 싸우고 있었다. 그들을 연결시키는 중심은 인간 지휘관이었다.
"파손된 구조체"는 단말기에서 동기화된 정보를 통해 그 인간 지휘관의 이름을 확인했다.
[player name].
……[player name].
매우 중요한 이름인 것 같았지만 현재로서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아주 중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정체됐던 생각 회로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식의 바닷 속 위태로운 생각의 실을 끌어당겨 그녀로 하여금 끝나지 않은 임무를 떠올리게 했다.
사운드 유닛이 완전히 손상됐다. 알아들을 수 없는 괴이한 소리를 내는 것이 그녀의 한계였다.
그녀는 단말기를 통해 자신이 수집한 모든 자료들, 그리고 우주 정거장에 관한 모든 진실을 제일 믿음직한 절친에게 전달했다.
제발 저 사람들을 도와줘.
하지만 이곳의 통신 설비는 이미......
제발 저 사람들을 도와줘......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음의 땅에 발을 내딛는다면 그들을 기다리는 건 자신과 같은 결말일 것 같았다.
알겠어!
금방 돌아올게, 기다려.
"파손된 구조체"는 거의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두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또 여러 차례 긴 고통의 굴레를 경험했다.
그녀는 오래전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잃었다. 심장을 찌르는 날카로운 순간적인 고통과 영원히 뼈가 깎이는 고통...... 그녀에게는 다를 바가 없었다.
영원한 잠의 심해에 가라앉기 직전, 누군가의 손길이 그녀의 조각난 의식을 붙잡았다.
누가 날 구해준 건가?
체력과 전신의 감각이 점차 회복되면서 그녀는 누군가의 품에 꼬옥 안겨 보호받고 있음을 느꼈다.
든든하고 온기가 있는 팔, 헤어지기 아쉬운 품은 시간의 깊은 곳에서 함께 춤을 춘 것 같다가도 찰나의 환상에 잠겨진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간절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주위의 환경이 끊임없이 흔들리며 변화하고 있었고, 그녀는 그 지옥 같은 우주 정거장을 떠나 수송기의 휴면실에 안전하게 안치되었다.
누군가 그녀의 곁을 지키며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입가에 그 사람의 이름이 맴도는 듯했지만 정작 부를 수가 없었다.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으나 이미 부식돼 버린 의식의 바다에는 조심스레 보관되어 있어야 할 기억도 침식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녀는 주위의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었지만, 유독 그 사람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들렸으나 그 사람의 부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막연한 안개에 차단되고 수면 아래로 깊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인가?
의혹은 마치 검은 뱀처럼 그녀를 움켜쥐고 조여왔다.
과거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한편씩 지나갔다.
웅장한 오페라 극장 무대에서 그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고 등불이 환한 무도회장에서는 지척 지간의 거리에서 서로를 응시했다.
기억의 조각에 담긴 얼굴을 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헛수고였다. 그 사람의 얼굴은 영원히 밤안개에 가려져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도 뻔한 사실을 애써 외면한 채, 그녀는 도피에 가까운 행복에 빠져 있었다.
폭우에 흩어지고 산산조각 났지만 그녀는 열심히 조각을 모으려고 노력했고 다시 소장해왔다.
그것은 그녀가 연주한 짤막한 환상이었다.
뜻밖에도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기억을 되찾았다.
사실 두 사람은 실제로 만난 적이 없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그 순간 눈앞에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의지할 곳을 잃고 꽃받침에서 떨어진 꽃잎처럼 자신을 끌어당기는 약한 중력에 이끌려 심연 속으로 추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