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살이 비치고 거리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베르테르 박사와의 두 번째 만남까지는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지휘관은 단말기로 약속 장소를 확인하느라 등 뒤에서 다가오는 푸른 치맛자락의 기척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목덜미를 스치는 서늘한 기운에 잠시 멈칫했다.
돌아보니 검푸른 머리의 여인이 햇살 속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방금 차가운 손등으로 인사를 건넸던 게 자신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잘 잤어, 레이븐?
수면은 자가 회복에 가장 중요해. 바쁜 와중에도 잘 쉬는 법은 집행 부대가 더 잘 알겠지. 나중에 한 수 가르쳐 줘.
스트레스 때문이야, 아니면...?
네티아는 귀밑머리를 쓸어 넘기며 위로하듯 말했다.
사건에 휘말려서 참 고생이 많아라는 말보단, "조금만 더 같이 힘내자"라고 하고 싶어. 우리도 맘 편히 쉴 때가 올 거야.
문 앞에서 떠들려고 이 빵집에서 만나자고 한 게 아닌데, 들어가자.
문을 열자 "달콤한" 호수에 발을 들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밀가루가 고온에 의해 구워져 마음을 안정시키는 향기를 내뿜고 있었고, 고소한 빵 냄새와 캐러멜, 버터 향이 어우러져 배고픈 손님을 따뜻하게 반겼다.
가게는 아담했고, 세 개의 진열장이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진열장 위에는 독특한 무늬가 새겨진 캔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어제 네티아가 언급했던 그 캔과 흡사했다.
보급이 빵빵해야 일에 집중하지, 안 그래?
쟁반을 든 지휘관은 네티아를 따라가 그녀가 담는 대로 두었다. 그리고 둘은 창가 나무 탁자에 마주 앉았다.
검은 깃털 치마를 입은 구조체는 턱을 괸 채, 지휘관이 네모난 애플파이를 먹는 모습을 기대감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파이 껍질은 촘촘하고 두껍고, 속엔 계피를 넣지 않았어. 모양도 맛도 독특하지, 공중 정원에서 이렇게 애플파이를 만드는 건 여기뿐이야.
이건 카헤티식 애플파이의 레시피거든.
가게 주인은 공중 정원 출신도 아니고, 어머니의 고향인 카헤티에 가본 적도 없어.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저씨였지만, 내가 첫입을 맛보고, 눈물을 흘렸을 때, 그 마음을 공감해 줬지.
구조체는 식사를 통해 생명을 유지하지 않지만, 음식의 맛은 내 기억을 붙들어 시간과 사람을 잇는 다리가 되어 주거든...
네티아가 손을 뻗어 검은 손끝으로 지휘관의 아랫입술을 조심스레 스치더니, 작은 부스러기를 떼어냈다.
이제 너도 이 맛의 일부가 됐네.
함께 맛보고 싶은 건 이것 말고도 많지, 기대해도 좋아.
네티아는 미소를 지으며 진열장 위의 캔들을 가리켰다.
그나저나 지금... 넌 조금 전부터 이걸 쳐다보고 있었지? 그래, 맞아. 나도 어제야 생각난 건데, 리노르의 책상에 늘 있던 아몬드 쿠키가 여기 거였어.
운명이라는 건 원래 우연이 따라붙기 마련이지.
우리도 한 통 사서 베르테르 박사에게 주자. 가끔은 낯익은 물건이 새로운 정보보다 마음을 여는 데 더 효과적일 때가 있잖아.
상대방의 마음은 알기 어렵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봐야지.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에, 둘은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마쳤다. 그러고는 카운터로 가서 종을 울렸다.
얼굴에 밀가루가 묻은 덩치 큰 남자가 커튼을 걷고 주방에서 나왔다.
안녕, 방금 먹은 애플파이, 크루아상, 크림 호른, 그리고 아몬드 쿠키 한 통 포장해 줘.
모둠 쿠키 한 통도 추가해서 제 숙소로 보내주시고요.
가게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빈 캔과 집게를 둘에게 건넸다.
네티아가 집게를 딱딱거리며 쿠키 진열장을 열었다.
모둠 쿠키는 직접 고르는 거야. 다음 티타임에 뭐 먹을지는 너한테 맡길게~
흠, 그럼 널 위해 준비한 찻잔을 꺼낼 때가 됐네. 나중에 말해주려 했는데.
블루베리, 초콜릿, 레몬 버터... 신중하게 고른 알록달록한 쿠키들이 캔을 채웠다.
날개 모양의 치마를 입은 구조체는 벽에 기대어 지휘관을 지켜보고 있었다. 곁눈질로 본 그녀의 표정은 아침 햇살 속에 녹아들어 전례 없이 부드럽고 만족스러워 보였다.
준비는 끝났어, 이제 슬슬 심경이 복잡한 증인 선생님을 만나러 가볼까?
네티아는 주변이 조용하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틈을 타, 다가와 지휘관의 팔짱을 끼고 먼저 문을 열었다.
풍령 소리가 울렸고, 지휘관은 네티아의 뺨이 살짝 붉어진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말없이 팔을 더 꽉 꼈다.
베르테르 박사의 집
공중 정원
집 주인이 문을 여는 순간, 지휘관과 네티아는 말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눈앞의 남자는 눈 밑이 퀭하고 숨소리가 거칠었는데, 보아하니 밤을 꼬박 새운 모양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살피며 낮게 속삭였다.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지?
이번엔 없어. 내 보조기가 이 구역의 감시망을 장악하고 있으니, 안심해.
그래, 들어오게.
커튼이 굳게 닫혀 방 안은 어두웠다. 베르테르는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아, 허벅지 위에 팔을 괸 채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맞은편 소파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지휘관이 들고 있던 쿠키 캔을 찻상 위에 살며시 내려놓자, 금속이 유리에 부딪히는 소리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베르테르의 시선이 캔에 새겨진 무늬에 닿자, 숨이 턱 막힌 듯 멈칫했다. 두 손은 느리고 뻣뻣하게 맞잡혔다.
그 가게의 캔이군. 리노르가... 예전에 자주 사 왔었지.
네티아는 대답 대신 조용히 그 숨겨진 파일을 투영해 띄웠다.
남자의 핏발 선 눈동자에 자신의 이름이 비쳤다.
눈물로 화살을 주조해 그대에게 주노니, 그대의 결정을 기다리겠소... 암호치고는 참 시적이군.
시적인 정의를 갈망했던 거겠지. 선악의 응보가 있는 극적인 결말을 말이야. 살아서는 절망했고, 죽어서는 눈을 감지 못했으니까.
레노아는 당신을 이 정의의 저울 가장 앞자리에 올려뒀어. 어쩌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신은 여전히 그녀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이었던 거야.
베르테르는 깍지 낀 손에 이마를 기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머리의 무게를 견딜 수 없는 것 같았다. 한참 뒤 고개를 든 그의 눈빛엔 고통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만약... 저울에 추를 올려도, 여전히 부족하다면?
레노아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우리가 뭘 해도 그녀를 되돌릴 순 없어. 소송에서 지면, 레노아의 명예는 어떻게 할 건데? 논문에서 이름이 지워지고, 미치광이 배신자로 낙인찍힐 텐데...
그리고 나는? 월든 교수가 내 연구 인생을 망쳐버리면, 평생 지켜온 내 이상, 나를 자랑으로 여겼던 우리 부모님은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다 착오로 이어진다는 건가?
침묵이 무거운 장막처럼 방 안을 짓눌렀다.
……
네티아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둔 채 힘을 주었다. 내뱉은 말이 모두 진실이었기에 그만큼 무게감이 실렸고, 그녀 역시 그 무거움을 감당하면서 단 한 번도 물러선 적이 없었다.
이 흔적들은 무언가를 꽉 쥐고 있으면 약점이 되지 않아. 단말기든, 무기든... 누군가의 손이든.
영광은 눈을 멀게 하고, 짙은 안개는 마음을 가라앉힌다. 본심을 지킨다는 건 좁은 길을 걸어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그 연구소에서 만나기 훨씬 전부터, 지휘관과 네티아는 이미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각자의 전장에서 방황하고 몸부림치며 대가를 치렀고, 밤낮없이 걸어와 마침내 나란히 섰다. 그것은 오직 서로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가치였다.
그렇기에 불타는 황금 거목 아래에서든, 하늘을 뒤덮는 불비 속에서든, 혹은 좁은 회의실에서 몇몇 사람들 앞에서든, 지휘관과 그녀의 선택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검은 깃털 치마를 입은 구조체가 지휘관의 눈을 깊이 바라보았고, 두 이상주의자는 서로의 손을 꽉 잡았다.
영광은 눈을 멀게 하고, 짙은 안개는 마음을 가라앉힌다. 본심을 지킨다는 건 좁은 길을 걸어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그 길이 연구소에서 교차하기 훨씬 전부터, 지휘관과 네티아는 이미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각자의 전장에서 방황하고 몸부림치며 대가를 치렀고, 밤낮없이 걸어와 마침내 나란히 섰다. 그것은 오직 서로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가치였다.
그렇기에 불타는 황금 거목 아래에서든, 하늘을 뒤덮는 불비 속에서든, 혹은 좁은 회의실에서 몇 안 되는 사람들 앞에서든, 지휘관과 그녀의 선택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검은 깃털 치마를 입은 구조체가 지휘관의 눈을 깊이 바라보았고, 두 이상주의자는 서로를 찾아냈다.
베르테르 박사, 이건 당신과 리노르 사이의 약속이잖아. 제3자가 하는 말이라면, 그 내용이 뭐든, 잔인하고 오만하게 들릴 수 있단 걸 알아.
이 세상에서 당신에게 답할 자격이 있는 건, 오직 당신의 속마음뿐이고.
하루, 일주일, 아니면 수십 년이 지나도 이 고통은 줄어들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렇게 앉아서 이 명단을 바라보고, 우리와 옳고 그름을 논하고 있다는 건... 어쩌면 마음속에 이미 답이 있는 게 아닐까?
지휘관은 네티아의 시선 속에서 탁자 위의 쿠키 캔을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고는 묵묵히 베르테르 앞으로 내밀었다.
기억 속 달콤한 향기가 공기 중으로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
초췌한 남자가 캔 안의 쿠키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쿠키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씹으며 눈을 감았다.
피로가 역력한 그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전히 맛있네.
베르테르는 손등으로 붉어진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결심이 선 듯, 목소리 깊은 곳에서 배수진을 친 듯한 냉정함이 솟아올랐다.
지난번에 쫓아내서 미안해. 그땐 그냥.... 화풀이한 거였어.
당신들을 보면서 자꾸 그런 생각을 했거든. 만약 그때의 나도... 지금 이 지휘관처럼, 더 단호하고, 용감하게 리노르의 편에 서줬더라면...
레노아가 조금이라도 덜 외로웠을 텐데... 그럼 혼자서 삶을 끝내는 선택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잖아.
베르테르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늦었어... 이제 리노르를 따라잡을 순 없어. 하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평생 자신을 원망할 것 같아.
처음 그 코드를 받았을 때, 유언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베르테르는 옷깃 안에서 목걸이를 꺼내더니, 펜던트를 열어 그 속에 들어 있는 아주 작은 칩을 지휘관에게 건넸다.
칩을 단말기에 꽂는 순간, 데이터 분석이 시작됐다. 네티아의 선홍빛 눈동자는 화면에 나타난 문자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형식, 자릿수, 명명 규칙... 이건 실험 샘플 번호야.
레노아의 고발장에는 제조 번호만 적혀 있었어. 구체적인 번호가 있으면, 증거를 담고 있는 샘플 개체를 바로 특정해서 회수할 수 있을 거야.
번호도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지.
우리가 옳게 추리한 거지, 베르테르 박사?
그래.
사실 리노르 사고 직후에 만든 비밀 그룹 채팅방이 있어. 내가 그들을 설득해 볼게. 다들... 너무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어.
과학 이사회의 안전 총감이 그에게 정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편에 서줘서 고마워. 이후의 증거 회수는 우리한테 맡겨.
네티아가 실험 샘플 위치 시스템을 열고 빠르게 번호를 입력했고, 지휘관과 베르테르 박사는 자기도 모르게 숨죽여 기다렸다.
조회 결과가 뜨자, 네티아는 지도를 보며 팔짱을 꼈다.
음... 나쁜 소식 하나랑 좋은 소식 하나가 있어.
나쁜 소식은... 샘플이 보관된 실험 구역이 과거 습격으로 봉쇄된 데다 기계체 폭주 경보까지 떴다는 거야.
붉은 눈동자가 가늘어지고, 그녀의 말엔 냉기가 서렸다.
경보가 어느 하급 부서에서 묻혀버린 것 같아. 과학 이사회는 관련 보고를 받은 적이 아예 없거든.
하, 감사원 분기 보고서에 쓸 거리가 생겼네.
좋은 소식은... 워낙 위험한 상황이라, 월든도 함부로 현장에 손을 댈 수 없다는 거야.
만약 늘 그들과 같은 체스판에서 힘을 겨루던 "선수"였다면, 비용이니 협력이니 핑계를 대며 서로 떠넘겨서 이 사건을 권력 구조 속에 묻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겠지.
일리 있는 말이야, 레이븐.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그들에게 보여주자고.
검은 깃털 치마를 입은 구조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입꼬리를 더욱 날카롭게 올리더니, 슬쩍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위험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따라와. 이 안전 총감이 파트너에게 전면적으로 안전 업그레이드를 해줄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