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Affection / 베로니카·이지스·그중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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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이지스·그중 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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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어릴 적부터 쇠사슬에 묶여 자란 서커스의 코끼리는</i>

<i>어른이 되어 천 근을 들어 올릴 힘을 갖게 되어도</i>

<i>스스로 그 족쇄를 끊어내지 못한다.</i>

<i>황금시대의 우화는</i>

<i>정신적 길들이기의 잔혹한 본질을 드러낸다.</i>

깨어진 바위, 꺾인 줄기, 드러난 황무지와 진흙 속에 쓰러진 고목. 뜨거운 바람은 짙은 피비린내를 실어 오며, 시야 너머에서 수많은 생명이 스러져감을 말해주고 있었다.

저 인간들을 찾아서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

베로니카는 더 이상 분노를 억누르지 않고, 몸을 돌려 날개를 펼쳤다.

황폐한 대지에는 차바퀴 자국조차 뚜렷하지 않았다. 게다가 미심쩍은 흔적들로 가득한 현장은 인간이 범인이라 단정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인간이 아니라고? 그럼, 마티드의 총상은 제 발로 총구에 몸을 들이밀었다는 말이야?!

됐어!

이런 상황에서도 인간 편을 드는 거야?!

가식 떨지 마! 어차피 네 동족은 인간이잖아. 너의 그럴듯한 말들은 전부 그 인간들을 구하려는 핑계일 뿐이야!

처음부터... "너희"와 "나"만 있었지. "우리"란 건 없었어.

인간... 하...

벗어날 수 없이 되풀이되는 고통은 영혼에 보이지 않는 족쇄를 채웠고, 그것은 "편견"이라는 속박이었다. 그래서 사실을 확인하기보다는 감정의 격류에 휩쓸려 성급한 결론을 내리게 만들었다.

편견, 그것은 스스로를 길들이는 또 다른 정신적 족쇄나 다름없었다.

진실? 또 그 낡아빠진 변명이야? 내가 왜 참아야 하는데?

내가 참는다는 건, 결국 또 한 번 인간이 날 해칠 기회를 주는 것뿐이야.

쓸데없는 자비는 피할 수 있는 재앙마저 불러오는 법이야. 난 정의로서 내 의무를 다할 거야.

달래는 말로는 베로니카를 설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날 선 목소리로 맞섰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지? 죽어 마땅한 인간이 이 집단이든 저 집단이든, 무슨 상관이야.

전부 죽여버리면, 다시는 죄를 지을 수 없겠지.

베로니카의 표정은 냉정했고, 목소리는 절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충혈된 눈과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그녀의 강철 가면 뒤에 가려져 있는 나약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베로니카의 눈빛이 한층 차가워졌다. 그리고 손에 든 창끝에서 번쩍인 은빛 섬광이 눈을 찔렀다.

기대와 애정이 있기에 실망도 찾아온다. 상대가 다시 잘못된 길로 들어설까 두려웠던 인간은 지금, 이 순간 마음속 초조함을 억누를 수 없었다.

다음 순간, 베로니카의 창끝이 지휘관의 목덜미에 닿았다.

베로니카가 견디기 힘들었던 건 지휘관의 비난이 아닌, 그의 실망 어린 눈빛이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정말로 내가 널 죽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그건 너희 인간의 도덕 체계일 뿐이야.

내 정의는 기계 생명체의 정의이자, 내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정의야. 인간의 평가 체계 따윈 상관없어.

네 생각은... 내겐 아무 의미 없어.

베로니카가 그 말을 내뱉을 때,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눈을 감았다 뜬 그녀는 다시 무심하고 차가우며 고고한 드래곤 나이트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서 충고하는데, 날 뭔가 더 나은 인간이나 더 순수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마. 그리고 내가 뭔가 더 나은 존재가 될 거라는 기대는 더더욱 하지 마.

내게 고상한 도덕이나 자기희생적인 인내 따윈 기대하지 마! 구세주인 척하는 네 오만과 동정도 집어치워!

똑똑히 봐! 나와 이 짐승들을!

베로니카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 시선은 인간의 영혼을 꿰뚫을 듯했다.

우리를 직시해! 우리에게도 너희 못지않은 야망과 욕망이 있어. 그래서 살아남고, 강해질 거야. 필요하다면 침략하고, 죽이고, 다 쓸어버릴 거야.

우린 더 고결하거나, 도덕적인... 네 환상 속 천사가 아니야. 살아남아야 하는 또 하나의 종족일 뿐. 남의 양심에 구걸하지 않아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종족이라고.

그 순간 베로니카의 눈앞에 펼쳐진 건 에피로스 초원의 사자 무리가 아니었다. 격투장에서부터 우주 도시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에 새겨진 끝없는 분노와 불복종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종족의 자비와 이성에 의지해야 하는 존재라면...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어. 그건 노예일 뿐이야.

자립하지 못하는 종족에게 돌아오는 건, 오직 멸망뿐이야.

살아남는다는 건, 결국 네가 죽고 내가 사는 것 아닌가?

우리도 인간과 다르지 않아. 이 세계에서 피로 길을 열며 살아가야 하는 종족일 뿐.

피로 길을 낸다라... 참, "인간다운" 말이군.

솔직히 인정할게. 인간은 정말 훌륭한 스승이야. 모든 면에서 말이야.

베로니카는 피비린내가 감도는 황무지를 뒤로하고, 날개를 펼쳐 음울한 하늘로 날아올랐다.

역시... 우리는 적으로 남는 편이 더 어울려.

바람이 귓가에 스치며, 얼음 조각 같은 낮은 속삭임만 남겼다.

에피로스 유적 회수 임무가 업데이트되었다. 적조의 확산 범위가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있어, 인원 안전을 위해 본부에서 곧 증원을 파견할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지상 인원은 즉시 집결하여 공중 정원으로 복귀할 준비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님, 에피로스 초원에서 적조 이상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즉시 귀환해야 합니다. 현재 위치가 어떻게 되십니까? 지원이 필요하다면 즉시 회신해 주십시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며칠간 함께한 베로니카가 선을 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삐...

맑은 경적음이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그러면서 뒤에서 운송 장비의 헤드라이트가 앞으로 환한 길을 열어 주었다.

[player name] 님!

방랑자 집단의 우두머리 세바니가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먼저 보냈어요. 지금쯤이면 위험 지대를 벗어났을 거예요. 저희는 [player name] 님이 걱정돼서 온 거예요. 이 초원이 위험해져서요.

그...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적조 때문에 이주하던 동물들이 전부 폭주하기 시작했어요.

이주하던 동물들이 야수의 물결에 휩쓸려 전부 흩어졌어요. 이 때문에 공포에 질려 달아나던 개체들이 다시 다른 무리를 휩쓸게 되면서 사태는 눈덩이처럼 불어났죠. 그래서 사자도, 코끼리도 모두 미쳐 날뛰고 있어요. 특히 물소 떼는 거의 다 광란의 상태예요. 그런데, 그분은요?

지휘관은 세바니에게 베로니카가 떠난 이유를 설명했다.

허... 그리 놀랄 일도 아니네요.

사실 저희가 돌아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에요. 적조를 피해 우회하다가 이곳을 지나게 됐는데, 연료 흔적도 아마 저희가 남긴 게 맞을 거예요.

물소 떼예요. 적조는 피했지만, 광란 상태의 물소 떼와 정면으로 부딪치게 된 거죠. 지휘관님의 그 사자 무리도 함께 휘말려 버리게 됐고요.

도망치는 동물들과 폭주한 동물들이... 현장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피해 집계조차 하지 못했어요.

물소 몇 마리가 저희 운송 장비를 들이받아서 뒤집을 뻔했어요. 사자들도 같은 상황이었고요. 그래서 사자 여러 마리가 심하게 부딪치고 밟히는 바람에 크게 다쳤어요.

저희는 물소를 막기 위해 총을 쏠 수밖에 없었어요. 그 상황에선 모두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이 아이를 잘못 맞췄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미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몰라요.

세바니는 마티드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저는 그렇다 아니다를 장담 드릴 수 없어요. 누군가를 죄인으로 지목해야 한다면, 제가 사과드릴게요. 하지만... 지휘관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죠?

사자를 자세히 보니, 지휘관님과 함께 있던 사자 무리더군요. 그래서 지휘관님께서 근처에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지휘관님께서 동족을 버리지 못하시는 것처럼, 저희도 그래요.

하지만 단순히 걱정돼서만은 아니에요.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 싫었어요. 지휘관님도, 이 초원도요. 더 나은 결말을 맞이하길 바랐거든요.

한 모금의 물, 한 톨의 곡식에도 인연이 있으며, 그렇게 만물은 연결되어 서로를 살린다.

세바니가 탐색하는 눈빛을 보냈다. 멀리서 천둥이 울리며, 우기의 마지막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렸다.

거센 바람과 먹구름이 드리운 하늘 아래, 세바니는 걱정스레 차창에 손을 올리며 지휘관을 바라봤다. 그녀는 방랑자 집단의 운송 장비 한 대를 내주며, 공중 정원의 지휘관이 그 괴팍한 기계 생명체를 찾아 나설 수 있도록 도왔다.

정말 베로니카를 찾으러 가실 건가요?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적조, 이합 생물 모두 위험해요. 거기에 제어할 수 없는 광란의 야수 무리까지 있어요. 베로니카는 충분히 강하니까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거예요.

드러난 상처는 조심스럽게 보살필 수 있지만, 단단한 갑옷 속에 숨겨진 상처는 외면한다고 해서 저절로 아물지 않는다.

지휘관은 이 말을 하고 나서야 깨닫게 됐다. 방금의 지적 또한, 베로니카에게는 잔인한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사랑이나 증오로도 빚어질 수 있다니... 결국 모든 생명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인 것 같네요.

뭐가 그렇게 걱정되세요?

하지만 이렇게 넓은 초원에서 어떻게 베로니카를 찾으시려고요?

지휘관은 능숙하게 실시간 지도를 불러냈다. 그러자 에포스의 위치 신호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 정도로 믿으시는 건가요?

붉은 핏빛이 초원을 타고 퍼졌다. 그리고 일렁이는 적조의 물결이 푸른빛을 한 뼘씩 삼켜갔다. 이합 생물들이 불길한 땅 위를 배회하고 있었는데,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이 모습이 적조가 덮친 초원의 가장 평온한 광경이었다.

지휘관의 예상대로, 혼자 떠난 베로니카는 망설이다 방랑자들의 흔적을 쫓는 걸 포기한 것 같았다. 대신 더 위험한 초원 깊숙한 곳으로 사라진 사자 무리를 찾으러 들어갔다.

베로니카는 날개를 높이 올려 광란의 야수 무리를 피했다. 날갯짓은 뜨겁고 눅눅한 공기를 갈랐지만, 눈앞을 스쳐 간 참혹한 광경은 지울 수 없었다.

(그 인간은... 무사하겠지?)

수많은 생명이 적조 사이를 허겁지겁 질주했다. 그러면서 야수의 그림자도 물결처럼 밀려왔다. 대지는 무수한 발굽 아래 떨며 먹구름 같은 흙먼지를 토해냈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베로니카는 이미 자신들의 보금자리에 무슨 일이 닥쳤는지 깨달았다.

영양의 비명, 하이에나의 울부짖음이 뒤엉키면서, 적조와 야수 무리가 만들어낸 광기의 북소리가 되었다. 죽음을 품은 채 피와 진창의 지옥 속으로 가라앉는 이 광경은 아무도 보지 않아도 될 "처형식"이었다.

어디 있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달려들던 하이에나를 한 번에 날려버린 베로니카는 광란의 야수 속에서 익숙한 무리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사자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짓밟혀 진창이 된 표범, 적조에 반쯤 잠식된 거대한 코끼리, 뒤집히고 부서진 인간의 운송 장비... 무자비한 파괴 앞에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는 없어 보였다.

더 거대한 힘 앞에서 평소 폭력을 무기로 삼아온 기계 생명체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베로니카는 허공에 멈춰 선 채, 헛되이 사방을 뒤졌다.

저건!

우기의 마지막 달, 헤누트의 무리는 떠돌이 수사자 연합의 습격을 받았다. 무리 내의 수사자와 그녀의 형제들은 침입자들과의 전투 끝에 쓰러졌고, 상처투성이로 남은 새로운 왕은 새끼 사자들을 모조리 죽이려 했다.

그러자 헤누트는 주저 없이 새 왕의 목을 물어 끊어버리고는, 놈의 입에 물려 있던 딸을 구해냈다. 그리고 쓰러진 침입자의 사체에서 처음으로 낯설고 위험한 붉은 악마의 냄새를 맡게 됐다.

헤누트는 청소년기의 아들, 다른 암사자 그리고 새끼들을 이끌고 먹이를 쫓지 않은 채, 오직 생존만을 위해 우기가 끝나기 전에 이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붉은 악마는 끝까지 그들을 추격했다. 물소의 광란 속에서 헤누트는 딸의 비명과 함께 진창에 짓밟히는 작은 몸을 보았다. 거기에 인간의 총성조차 광기를 멈추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녀의 딸은 더는 살 수가 없었다.

으... 으르르렁...

"크아아아...." 헤누트가 하늘을 향해 길고 고통스러운 포효를 토해냈다.

헤누트의 가슴 깊은 곳이 찢기듯 요동쳤다. 진창 속에서 울부짖는 딸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후, 그녀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에포스의 목덜미를 물고 광란의 야수 무리를 뚫고 달렸다.

하지만 붉은 악마는 끝까지 헤누트를 쫓아다녔다.

뛰고, 달리는 동안 곁에 있는 동료들이 하나둘 사라져 갔다. 흩어진 건지, 죽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붉은 파도는 수많은 생명을 삼켰고, 헤누트는 그 속에서 어머니의 울음 같은 섬뜩한 속삭임을 들었다. 그건 돌아오라는 부름이었다.

하지만 헤누트는 망설이지 않고 더욱 빠르게 달렸다. 그녀는 언제나 가장 뛰어난 암사자였고, 헤누트의 딸도 그랬다.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 역시 그럴 것이라 믿었다.

헤누트는 결연한 눈빛으로 섬의 절벽을 향해 뛰어오른 뒤, 거듭 높이 기어 올라갔고, 에포스는 낮게 울부짖었다. 적조의 굉음이 발밑에서 들려오자, 가슴 속에선 심장이 더 빨리, 더 빨리 움직이라고 북처럼 울려댔다.

살고 싶다. 살아남고 싶다. 계속 삶을 누리고 싶다!

하지만 마지막 도약에서 북소리가 멈추고 말았다. 그 평범한 심장은 끝내 운명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욕망을 버텨내지 못했다.

그렇게 헤누트는 하늘에서 추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온 베로니카의 품에 안겨 들었다.

헤누트! 헤누트!! 일어나!

베로니카가 간신히 때를 맞춰 날아와 헤누트를 받아낸 뒤, 안전한 절벽 위에 눕혔다. 하지만 그녀의 호흡은 이미 멈춰있었고, 베로니카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심폐 소생... 심폐 소생을 하면... 살아날 수 있을 거야!

비 내리던 첫 만남의 그 밤처럼, 베로니카는 인간의 동작을 따라 암사자를 옆으로 눕히고,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몸이 내 힘을 견디지 못할 거야. 힘을 줄여야 해. 할 수 있어.

하지만 어미 사자는 여전히 호흡을 되찾지 못했다. 새끼 사자는 초조하게 빙빙 돌며, 무거운 몸을 머리로 밀어 올리며 베로니카를 향해 애절한 울음을 냈다.

기계처럼 정확한 동작으로 가슴에 압박을 이어갔지만, 베로니카의 머릿속은 이미 과부하 상태였다.

(살아날 수 있을까?)

인공호흡을 진행해야 해. 인간이 그때 뭐라고 했었지? 흉부 압박, 기도 확보... 하지만 피와 살로 된 몸에 금속이 만들어낸 호흡이 효과가 있을까? 기도 확보, 산소 농도... 하지만 내겐 산소가 없어. 이들에게 생명이란 무엇일까? 생명이란 건... 그들의 눈에 난 생명으로 보일까? 왜 나는 계속 생각을 하는 거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올바른 걸까? "결국 죽게 되겠지. 그럼, 남은 무리는 어떡하지?" 내가 왜 이런 걸 신경 쓰지? 이제 멈춰도 될까? 왜 나는 계속 생각을 하는 거지? 이건... 내가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 "어째서 인간의 뇌는 감정의 장막 뒤로 숨을 수 있게 설계된 걸까? 그럼, 나도 두려워해도 되는 걸까?" 기계 생명체의 두뇌는 알고리즘과 논리 연산에 기반해, 인간처럼 쉽게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보다 훨씬 쉽게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죽는 걸까? 감정? 멈춰. 더 생각하지 마. 베로니카. 절차대로 해. 그래도 죽으면? 왜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이건 뭐지? 죽을 거야. 집중해.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될 거야. 감정이 뭔지, 나도 알아. 하지만 지금 묻는 건 그게 아니야.

이건... 대체 뭐지?

눈가에 맺힌 건 너무도 미약하면서 인색한 습기였다. 하지만 놀라울 만큼 뜨거웠다. 귓가에서 울리는 천둥소리는 가슴속에서 멈추지 않는 폭우인지 아니면 평온을 잃은 초원이 내는 마지막 울음인지 알 수 없었다.

축축한 빗방울이 베로니카의 손등에 닿으려 했다. 그리고 포개진 두 손은 사자의 가슴을 다시 한번 깊게 누르려 하고 있었다.

우드득.

크직.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베로니카가 움찔하며 손을 치켜들었다.

아니다. 그 소리는... 세라가 중상을 입었을 때의 괴이한 숨소리 같기도, 알렉세이의 살을 찢고 지나가던 차가운 흉기의 마찰음 같기도 했다.

어쩌면... 깊이 묻어둔 기억 데이터가 한꺼번에 터져 나와, 귓가에 잡음처럼 울린 것일 수도 있었다.

내가 힘을 너무 세게 주어서 갈비뼈를 부러뜨렸어.

논리 연산은 들끓는 사고의 폭풍을 외면했다. 베로니카의 의식 모듈은 혼란 속에서도 또렷했고, 기체는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는 인간이 읊었던 응급 처치 지침이 흘러나왔다.

멈추면 안 돼. 기도 확보... 인공호흡으로 산소 유지...

차갑고 무표정한 눈은 앞에 있는 광경에 어떠한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다시 두 손을 포개 암사자의 몸에 올렸다.

하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생명은 너무도 귀중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연약했다. 아무리 강한 그녀가 온 힘을 다해도 되돌릴 수 없었다.

언제나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잔혹한 요구처럼 느껴졌다.

...

베로니카는 인간처럼 깊은숨을 들이켰다. 그건 기계에게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포개진 손은 끝내 다시 내려가지 못했다.

...

어차피... 이번이 처음도 아니니까.

부러진 깃대처럼, 베로니카는 고개를 떨구고 긴장으로 굳었던 어깨를 늘어뜨렸다. 에포스가 차갑고 단단한 몸에 다가와, 그녀의 팔을 조심스럽게 핥았다.

어차피 처음도 아니잖아.

영원히 끝나지 않겠지.

그때, 인간의 손이 부드럽지만 무겁게 그녀의 어깨에 얹혔다.

비 내리던 첫 만남의 그 밤처럼, 인간은 이번에도 제때 도착했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멈추지 않던 장마에 한 줄기 햇살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언제나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해 왔지만... 지금만큼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