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으로 기운 해는 지나친 열기를 거두었지만, 남은 열기가 공기 중에 스며들어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감을 자아냈다.
베로니카는 빠르게 돌아왔고, 급강하하다가 공중에서 멈췄다.
당장 녀석들을 데리고 떠나야 해!
적조야.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는데, 초원의 절반 이상이 이미 포위됐어.
격리된 성역처럼 보였던 이곳도 더는 안전하지 않았다. 공기 중의 수분이 모조리 증발한 듯 목이 바싹 타들어 갔다. 그것이 환경의 경고인지, 마음속 불안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헤누트!
사자 무리가 머물던 쉼터로 돌아온 베로니카가 어미 사자의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최악의 상황 그 자체였다.
한때 푸르렀던 우기의 초원은 풀과 진흙이 썩어 붙은 끈적한 카펫으로 변했다. 썩어가는 뿌리 사이로 드러난 바위들은 마치 대지의 백골 같았다.
그것은 한여름의 태양 아래서 그늘을 내주던 아카시아의 잔해였다.
적막한 초원에는 새들의 지저귐마저 공포와 불안에 삼켜진 채, 남은 건 음산한 울음소리뿐이었다.
처음 만났던 그 밤처럼, 베로니카의 얼굴엔 살기가 가득했다.
베로니카는 부패한 고기를 뜯어 먹는 생물을 처음 목격했던 순간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기병창으로 어지러운 풀숲을 헤쳐보니, 그날처럼 수사자의 사체 위에서 먹이를 탐식하는 하이에나들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베로니카가 다가가자, 퍼져나온 살기에 하이에나들은 꼬리를 말고 달아났다.
...
진흙탕 속에 쓰러져 있는 것은 이미 심하게 훼손되어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수사자의 사체였다. 베로니카는 무표정하게 오래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선을 인간에게로 옮겼다.
베로니카는 이 사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지만, 책임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인간의 걱정과 위로가 뒤섞인 눈빛을 마주한 그녀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수사자의 갈기에 손을 뻗었다.
특별히 땋은 듯한 갈기 한 올이 베로니카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흔들리지 않던 기계의 심장이 순간 멈춘 듯했다. 베로니카는 확인하기를 거부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
지휘관은 베로니카의 눈동자에 비친 미세한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어깨가 힘없이 내려앉는 순간, 인간의 가슴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차마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예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갈기 한 올이 인간의 손에 닿자, 무심코 안도해 버린 자신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억누를 수 없는 안심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진흙에 뭉친 갈기였을 뿐, 자신이 직접 묶어준 조그마한 땋은 머리는 아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상치 않은 상황을 직감한 지휘관은 단말기를 꺼내 위치 추적기로 에포스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
등 뒤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베로니카의 시선을 따라가자, 지휘관의 눈앞으로 새끼 사자 한 마리가 기어들어 왔다.
으...
그것은 척추가 부러진 새끼 사자였다. 몸의 절반이 피와 진흙에 범벅이 된 채, 녹슨 쇳내를 풍기는 누더기 담요처럼 무력하게 끌려오고 있었다.
새끼 사자는 피로 긴 자국을 남기며 베로니카를 향해 기어 왔다.
(저건... 뭐지?)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섰다. 발끝은 검은 진창에 빠졌고, 그녀의 마음 역시 그 속으로 추락해 갔다.
그것은 누더기 담요가 아니라, 잘려나간 새끼 사자의 뒷부분 몸통이었다.
확인할 필요도 없이 지휘관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헤누트가 낳은 새끼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새끼, 마티드였다.
언제나 경계심 많고 날쌘 그 마티드였다.
수많은 비극을 겪어온 지휘관이었지만, 눈앞의 참상에 심장이 찢기는 듯한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휘관은 조심스레 마티드를 눕히고, 아드레날린과 항생제를 꺼내 천천히 주사했다.
늘 경계심이 많아서 얼굴을 만지게 하지 않던 마티드가 지금은 작은 머리를 지휘관의 손바닥에 묻고는 사람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일생의 힘을 다 쏟아낸 듯, 포근하게 안겨 있었다.
...
베로니카는 멈춰버린 기계 장치처럼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렇게 작은 몸에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피가...)
베로니카는 처참히 일그러진 마티드를 기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마티드는 베로니카의 차갑고 단단한 기계 인생 속에서 직접 보살폈던 생명이었다. 전투와 피, 분노만이 전부였던 삶에 불쑥 찾아온 낯선 온기였다.
강철 팔에 안겨 잠들던 그 부드러운 새끼 사자는 어느새 그녀에게 가장 익숙한 형태인 잔혹, 재앙, 비극으로 변해버렸다.
(이상해. 왜 이렇게 낯설지...)
더 잔혹한 광경을 많이 봤었지만, 이번만큼은 낯설었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낯익었다.
뇌 속의 알고리즘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이 기체의 주인이 마주한 감정의 정체를 해독하려 들었다.
베로니카는 눈앞의 사실도, 지금의 감정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계 생명체의 본능은 이유를 찾아내려 집요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논리 회로가 돌아갈수록, 베로니카는 더욱 깊은 공포에 휩싸였다. 원인을 규정하려 할수록, 이성을 빼앗아 가는 거대한 힘이 그녀를 덮쳐왔다.
이건 뭐지?
베로니카는 지휘관을 향해 기계이면서도 당황한 눈빛을 보냈다. 그것은 그녀조차 이해할 수 없는 상처였다.
지휘관은 그제야 분명히 깨달았다. 베로니카는 자신과 다르지 않은, 세계를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을.
베로니카는 분명 감정을 지닌 살아 있는 존재였다. 머릿속의 개념이 손에 잡히는 사실로 변했다.
슬픔. 기계 생명체에게서 본 적은 있었지만, 베로니카에게도 찾아올 줄은 결코 생각지 못했다.
창조주의 자비인지, 냉혹함인지. 그 순간, 운명은 고통과 두려움을 통해 베로니카에게 사랑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과거의 어둠까지 몰려와 베로니카를 더 깊은 지옥으로 끌어내리려 했다. 그때 이 혼란에서 벗어나려 발을 옮기는 순간, 발밑의 검은 진창이 잔혹한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진흙과 섞인 기름이었고, 기계 생명체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냄새였다.
이건 인간의 운송 장비 연료야.
인간... 그 방랑자 놈들이군.
베로니카는 담담히 판결을 내렸다.
베로니카는 다시 움직일 힘을 찾았다. 그리고 지휘관 곁으로 다가와 마티드의 몸을 더듬었다.
이내 증거를 찾아냈다. 새끼 사자의 절단된 뒷다리에 총상이 보였다.
고독... 연결의 힘? 설마 내가... 정말로...
격투장, 우주 도시... 과거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런 허튼소리를... 정말 믿어버리다니.
이 세계를 단 하나의 종족만 차지하게 된다면, 아마 외롭겠지. 하지만 훨씬 통쾌하겠군.
베로니카는 기병창을 마치 하늘과 땅을 가르는 벽처럼 비스듬히 옆에 세워놓았다.
이게 네가 내 손에서 구해내겠다던 생명들의 실체야. 파괴와 죽음만을 불러오는 것들.
이게 네가 말한 일부만 보고 단정할 순 없다던 인간의 모습이야.
맞아. 단정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 "예외"는 바로 너 하나뿐이야! 나머지 인간들은... 전부 죽어 마땅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