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Affection / 베로니카·이지스·그중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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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이지스·그중 여섯

새끼 사자 에포스가 허둥지둥 지휘관의 무릎 옆으로 다가와 불안한 듯 옷자락을 물어뜯고 있었다.

빠르게 상태를 확인한 지휘관은 헤누트가 적조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극도의 과부하로 인해 급성 심부전이 일어나 심정지 상태에 빠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지휘관은 초조한 숨을 몰아쉬며, 운송 장비로 달려가 방전용 저항을 뜯어냈다.

지휘관은 운송 장비에서 필요한 부품들을 정신없이 뜯어냈지만, 베로니카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침묵하던 베로니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두 손은 기계처럼 반복적으로 가슴 압박을 이어가고 있었다.

지휘관은 베로니카의 차가운 표정 뒤에 숨은 격렬한 혼란을 눈치채고는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에포스가 베로니카 곁으로 다가와 털북숭이 머리로 차갑고 단단한 기체에 몸을 비볐다.

...

지휘관은 과거 생명의 별 강좌에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급하게 임시 장치를 조립했다. 그리고 소금물 거즈를 베로니카의 손에 감싼 뒤, 심폐소생술을 이어갔다.

방금... 내가 갈비뼈를 부러뜨렸어.

베로니카의 목소리엔 미세한 떨림이 배어 있었다.

내 기체에는 온도 제어나 응급 기능 같은 게 없어. 난 오직 파괴를 위해 만들어졌으니까.

난... 제어할 수 없을 거야.

비 내리던 첫 만남의 그 밤처럼, 세상에 죽은 이를 살려내는 신술은 없었지만... 죽음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생명은 언제나 존재했다.

...

베로니카는 고개를 들어, 흔들림 없는 인간의 눈빛을 마주했다.

소금물 거즈로 감싼 기계의 손바닥이 어미 사자의 가슴에 닿았다.

베로니카의 손이 닿자, 전류가 흘렀다.

그러자 지휘관은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이어갔다. 그렇게 다섯 번의 순환이 지나고 나서...

석양빛이 베로니카의 옆얼굴을 따스하게 감쌌다. 멀리서는 여전히 야수 무리의 굉음이 울리고 있었고, 적조의 위협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희망은 남아 있었다.

닿았다가 떨어지는 기계의 손끝에 미약한 박동이 전해졌다. 베로니카는 급히 고개를 돌려 인간의 얼굴을 바라봤다.

심장이... 뛰는 것 같아!

[player name], 네가 구했어.

천둥은 멀어졌고, 우기의 마지막 폭우는 끝내 내리지 않았다.

응급 약물이 투여되자, 헤누트는 서서히 의식을 되찾았다. 그리고 새끼 사자처럼 베로니카의 손을 파고들더니, 에포스의 머리를 애정 어린 모습으로 핥아주었다.

어미 사자는 목숨을 건졌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광란의 야수 무리가 차례로 몰려들었고, 그 뒤를 이어 적조의 파도와 이합 생물의 울부짖음이 다가왔다. 이제 이 초원의 생명들을 지켜낼 길을 뚫어야 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지휘관이 내민 손을 외면했다. 대신 날개를 퍼덕이며 총을 움켜쥐고는 적조 속 이합 생물들을 향해 날아올랐다.

앉아 있어. 난... 인간의 목줄 따위엔 관심 없으니까.

둘이 힘을 합쳐 싸웠지만,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이합 생물들 때문에 동물들을 대피시킬 틈조차 없었다.

더 많은 생명이 적조에 삼켜지려는 순간... 익숙한 경적이 울렸다. 세바니가 방랑자 무리를 이끌고, 이 위험한 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에이, 제 운송 장비도 위치 추적을 할 수 있거든요. 게다가 여긴 제 정신적 고향이에요. 이곳을 지킬 자격이 있다면, 지휘관님보다 제가 더 있지 않을까요?

멋진 드리프트와 함께 운송 장비가 멈춰 서자, 세바니는 몸을 내밀어 기울어진 아카시아에 있던 몽구스 두 마리를 안아 올렸다. 곧이어 치타 몇 마리가 바위틈을 넘더니 날렵하게 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 초원은 처음 와봤지만... 제 어린 시절과 청춘은 온통 에피로스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했어요.

실제로 이 광활한 대지와 여기서 살아가는 동물들을 보니 확신이 들었어요. 저와 조부모님 사이의 연결이 진짜였다는 것과 너무나 아름다워 믿기 힘들었던 그 과거가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을요.

적조, 야수 무리, 뒤틀려버린 초원. 그 어느 것도 세바니가 들었던 이야기 속 에피로스와 닮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의 눈웃음 속에서 지휘관은 분명 영원한 자유의 초원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지금껏 버텨온 이유는 바로 이 소중한 희망 때문이 아니었던가?

제 어린 시절을 채웠던 수많은 이야기와 진실을 알 수 없었던 지식이... 하나하나 다 의미가 있었어요. [player name] 님. 그러니 이곳은 제 일부나 다름없어요.

아니. 정확히 말씀드리면... 이곳에 있을 때야말로 제가 온전히 "저"일 수 있어요.

작은 운송 장비 세 대가 이 재앙 속 유일한 "생명의 방주"가 되었다. 비좁은 "방주" 안에는 사자, 치타, 누와 가젤... 심지어 호저를 품에 안은 대담한 인간까지 뒤엉켜 있었다.

재앙 앞에서 모든 생명은 같은 절망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기에 함께 버텨야 했다.

젠장, [player name] 님!

이합 생물에게 포위된 차들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됐고, 결국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베로니카가 지휘관보다 먼저 도착했다. 그녀의 냉정한 얼굴을 마주한 세바니는 용기를 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의 사자 무리... 우리가 해치지 않았어요. 그건 당신도 알잖아요!

베로니카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못마땅하게 고개를 돌렸다. 기억 데이터에서 헤누트가 수사자를 흰자 가득한 눈으로 흘겨보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자 베로니카는 이제야 그 표정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지금은 잠시 원한은 접어두는 게 어때요? 당신을 믿을 수 있는 동료라고 단정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힘을 합쳐야 하지 않을까요?

시끄럽군.

베로니카의 창이 휘두르는 궤적마다, 위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꺼져.

세바니는 입술을 삐죽이며 운송 장비를 다시 몰았다. 바로 그때, 적조에 잠식된 바위산이 무너져 내리며 운송 장비들 위로 거대한 암석이 떨어지려 했다.

비명 속에서 베로니카가 바위를 떠받쳤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눈빛이 운송 장비 안에서 인간 품에 안긴 새끼 기린과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눈을 깜빡이며 서로를 응시했다.

(목이 참 길군.)

어서 도망쳐요. 목숨이 먼저잖아요. 고마워요.

운송 장비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생명들을 싣고 초원을 가로질러 달렸다.

치열한 전투 속에서 베로니카는 문득 뭔가를 느꼈다. 그래서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멀리서 세바니가 차창 밖으로 몸을 내밀고는 손을 흔들며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인간의 시각과 청각으로는 분간하기 어려운 거리였지만, 기계 생명체인 베로니카의 시야에는 그 광경이 또렷하게 보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진짜 멋져요! 언니!

쳇...

베로니카는 퉁명스레 총을 들고는, 덤벼드는 이합 생물 하나를 관통시켰다.

야, 인간. 저 동물은 왜 목이 저렇게 긴 거지?

높은 절벽 위에서 기다리던 헤누트가 성난 포효를 내질렀다. 둘에게 그만 다투라는 신호인지 아니면 에포스가 또 장난을 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para\>세계를 뒤덮은 재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베로니카는 처음으로 내일을 기대했다.<para\>세계의 또 다른 얼굴이 자신에게도 열릴 수 있기를.

정의란 단지 분노와 폭력만이 아닌, 모든 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기도 했다.

올바른 방향이란 무엇일까?

베로니카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그 인간이 있는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모든 것이 잠시 가라앉았다.

지휘관님, 지원 소대가 곧 현재 좌표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적조 속에서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의료 지원이 필요하십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통신 시스템이 끊기자, 흩어졌던 사자 무리가 하나둘 헤누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새끼 사자들이 어미의 품에 파고들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석양, 사자 무리, 불타는 구름과 초원을 감싸는 하늘. 베로니카는 고전 회화 같은 이 장면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

지휘관의 눈에 비친 베로니카는 더 이상 차갑고 살벌한 침입자가 아니었다. 저녁 바람과 노을 속에 서 있는 기계 생명체는 자연에 녹아 있었다. 하지만 왜 그런지 혼자인 듯한 쓸쓸함이 묻어났다.

지휘관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베로니카가 고개를 돌렸다. 냉정한 얼굴에 평온한 눈동자가 지휘관과 눈을 마주쳤다.

짧게 마주친 시선 속에는 분노, 적의, 살기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베로니카가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맞이하게 된 평온한 화해의 순간이었다.

인간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해도, 나는 상관없어.

하지만, 이 세계는 내 생각과 다른 것 같군. 그리고 너희가 좋아진 것 같아.

시선을 거둔 베로니카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먼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는 말이 필요 없었다. 지휘관도 지금이 바로 이별의 순간임을 직감했다.

열역학 제2 법칙은 우주가 결국 무질서를 향해 나아간다고 말했다. 하지만 생명의 등장은 그 자체로, 고도로 정교한 질서의 기적이었다. 수많은 우연이 쌓아 올린 신의 붓놀림이자, 물질이 의식으로 변모한 장대한 서사시였다.

인간이든 기계 생명체이든, 모두 "가능성"이라는 망치를 손에 쥐고 창조주가 짜놓은 우리를 부숴왔다.

그것은 두 기적의 만남이었다.

인간이 추구하는 건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삶이었다. 그렇기에 어떤 시대든, 어떤 고난이든 인간은 자신들의 DNA를 새긴 문화를 창조해 왔다.

그리고 이 시대의 DNA는 더 이상 인간만의 고독한 나선이 아니었다.

베로니카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베로니카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무심히 손을 휘저었다.

네가 말하는 인간과 기계가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그 허무맹랑한 세상을 난 아직도 믿지 않아.

베로니카는 살짝 고개만 돌렸고, 역광에 가려진 그녀의 옆얼굴은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니 더 노력해. 인간. 그게 허상이 아님을 내게 증명해 봐.

빛과 그림자 속에 감춰진 건, 분명 미소였다.

이 별의 유구한 역사 앞에서 인간 문명은 아직 미숙한 소년일 뿐이고, 기계 생명체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였다. 그렇기에 두 존재 모두에게는 끝없는 길이 남아 있었다.

잠시라도 함께 걸었다는 건 행운이었다. 이 기적과 기적이 엮인 인연엔 반드시 희망의 끝이 어울릴 것이기 때문이다.

새끼 사자 에포스는 늘 그렇듯 베로니카의 발걸음을 쫓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정의"가 발을 늦추지 않았다. 그렇게 베로니카는 다시 자신의 사명을 향해 나아갔다.

지원 소대가 도착했을 때, 사자 무리는 머나먼 이주 길에 다시 오른 상태였다.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님... 어? 새끼 사자가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실제 사자는 처음 봅니다. 치료가 필요한 겁니까?

척추를 다친 새끼 암사자 마티드는 무리에서 뒤처져 홀로 남겨졌다. 상처가 너무 깊어, 자연의 냉혹한 섭리가 지배하는 초원에서는 살아남기 힘들어 보였다.

이 상처로는 초원에서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공중 정원으로 데려가면, 기본적인 의체 기술만으로도 뼈는 고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 성장기라 앞으로 주기적으로 교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운명은 마티드의 사자다운 삶을 무정하게 비틀어 놓았지만, 동시에 신의 연민 같은 은총을 남겼다.

수송차는 광활한 초원을 달리며, 금세 사라지는 푸른 흔적을 남겼다. 창밖으론 끝없는 초록빛이 강처럼 흘러가면서, 부드럽게 멀어져 갔다.

어? 레이더에 이상 경고가 잡힙니다. 무언가가 계속 우리를 따라오고 있습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지휘관은 차창 뒤로 펼쳐진 푸른 바다 같은 초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광활한 하늘과 대지 속에서 그 작은 인연의 흔적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지휘관은 느낌에 이끌려 위치 추적기를 켰다. 그러자 에포스의 신호가 생생히 깜박이면서, 발톱을 세우고 손을 흔드는 듯 인사를 하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투영된 지도 위에는 에포스의 붉은 점이 곡선처럼 이어진 흔적을 따라 지휘관의 발자취를 좇고 있었다.

녀석은 인간이 지나간 바위 더미를 넘고, 인간이 건넌 강을 헤치며,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희미한 바큇자국과 마지막으로 남은 인간의 냄새를 따라, 아득해지는 방향으로 몸을 던졌다.

저것도 지휘관님께서 구하신 사자입니까?

보아하니, 지휘관님을 많이 그리워하는 것 같습니다.

에포스는 결국 섬 같은 절벽에서 수송차의 흔적을 놓치고 말았다. 아직 너무 어린 탓에, 인간의 발걸음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높은 절벽 위, 처음으로 "이별"을 이해한 새끼 사자는 쓸쓸한 포효를 초원에 퍼뜨리며, 사라진 인간에게 작별을 고했다.

녀석은 평생 지휘관님을 기억할 겁니다.

우리의 지구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언젠가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곳은 인간이 결코 끊어낼 수 없는 고향이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되찾고 싶은 옛꿈의 터전이었다.

초원엔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하지만 내일이면 또다시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잘 자. 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