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 무리의 이동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이틀을 꼬박 달려 마침내 새로운 쉼터에 도착하게 됐다.
한낮의 뙤약볕이 땅을 달구는 동안, 지휘관은 수사자에게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새끼들만이 드래곤 나이트의 꼬리를 사냥감 삼아 달려들고 있었다.
결국 베로니카는 성가심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고집스러운 "못난 제자"는 끈질기게 그녀의 뒤를 쫓으며 꼬리와의 한판 대결을 치르고 있었다.
베로니카가 돌아서서 새끼를 위협적으로 노려보더니, 이내 날개를 크게 퍼덕였다. 거센 바람에 새끼 사자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
으~!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달려든 새끼 사자는 또다시 바람에 굴러갔다.
인간이 깨어났을 때 본 것은, 베로니카의 바람에 날아가기를 기다리며 줄 서 있는 새끼 사자들의 즐거운 모습이었다.
암사자들은 이 소동에 끼어들지 않고, 뒤편에 늘어져 누운 채, 간간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함께 어울리길 좋아하던 수사자가 보이지 않아 고개를 돌리자, 허영심 많은 녀석이 풀죽은 채 지휘관 옆에 엎드려 있었다.
갈기는 바람에 헝클어져 삐죽삐죽 서 있었고, 멋 부리려고 땋은 머리도 어느새 뒤엉켜 보이지 않았다.
그때, 맛있는 영양액을 뿌려줄 인간이 깨어난 것을 본 새끼 사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러면서 머리와 얼굴을 비비며 보충식을 재촉했다.
베로니카는 날개를 접고 암사자 왕 곁에 앉았다. 볕이 예전만큼 뜨겁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손을 들어 햇살을 가렸다.
햇살이 베로니카의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어 차갑던 얼굴 위를 덮었다. 뒤에서는 두 마리 새끼 사자가 인간에 매달려 서로 물어뜯는 소리를 냈다.
"따뜻해..."
새끼 사자들이 지휘관을 캣타워 삼아 기어오르고 있었지만, 지휘관은 베로니카의 낮은 속삭임을 놓치지 않았다.
...
베로니카는 평소처럼 "불만" 가득한 시선을 보낸 뒤
지나가던 새끼 사자 한 마리를 덥석 집어 인간의 품에 던졌다.
아우??
지휘관이 품에 안게 된 새끼 사자는 다름 아닌 가장 경계심 많고 영리한 새끼 사자였다. 여왕의 위엄을 완벽하게 물려받은 이 새끼 사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인간의 손길을 허락하지 않았던 터라, 지휘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새끼 사자의 머리를 마음껏 쓰다듬었다.
(기분이 좋아?)
어느새 초원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람이 베로니카의 손가락 사이를 스쳐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익숙한 이 풍경 속에서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꼈다.
분명 날씨는 며칠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지금이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걸까?
베로니카는 잠시 망설이다 눈을 감았다. 그러자 오직 바람이 생체공학 피부를 스치는 감각만이 남게 됐다.
이 바람이 날개를 퍼덕여 자신이 일으킨 바람과 다른 건 무엇일까?
바람에는 풀과 나무의 향 그리고 얼마 전 내린 비가 남긴 청량한 습기가 섞여 있었다. 이전에도 맡아본 냄새였지만, 이렇게 선명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돌려 말을 건 인간을 보았다. 그러자 비슷한 얼굴과 신체 구조가 보였고, 그녀뿐만 아니라 많은 기계 생명체가 인간과 닮은 외형을 하고 있었다.
그런 거였군.
이유 모를 쓸쓸함이 베로니카의 얼굴에 스쳤다.
이게 바로 너희가 보는 세계였구나. 내 동족, 어리석게 속아 넘어간 기계들도... 이런 감각으로 너희와 공감했던 건가?
이렇게 쉽게 덧씌워지는 기준이라니...
베로니카에게 비치는 모습은 투기장의 고통, 우주 도시의 살벌함, 지루한 고문, 익숙한 고통이었다.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예상대로 베로니카는 대답하지 않았고, 지휘관 역시 실망하지 않았다.
...
베로니카는 비웃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
에피로스 초원의 유적 회수 계획도 황금시대에 멈춰버린 연구를 다시 이어가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이 지나온 찬란한 시대에는 그런 이야기가 수없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인간의 전염병 특효약을 개발하는 긴 연구 과정 중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실패한 설계가 오히려 고양잇과의 치명적 병을 고치기도 했다.
그리고 가축 사료에나 섞어 쓰던 보잘것없는 쑥에서 인간은 가장 오래된 열병인 말라리아를 치료할 실마리를 찾아내기도 했다.
그건... 기계 생명체와 상관없는 일이잖아.
그런 인연과 은혜는 기계 생명체에게는 단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었다. 그들은 눈을 뜬 첫 순간부터 인간이 지배하는 낯선 세상에 내던져진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존과 협력의 역사에 우리는 단 한 번도 포함된 적이 없어.
베로니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물은 지구 생명의 요람이었다. 그래서 생물의 기본적인 생존과 진화의 환경을 제공하면서 다양한 순환 속에 스며들어 이 별을 살아 숨 쉬게 했다.
불꽃과 춤추던 물방울, 그 현상을 끝없이 탐구하던 인간의 눈빛, 피어오르는 증기 속에 역사라는 황금실 위로 나비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나비는 부드럽게 날개를 퍼덕이며,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다.
그래서 뭐? 인간이 만들었다는 이유나, 기계 생명체의 시작도 물에 의해 "길러졌다."라는 이유로... 인간과 기계 사이의 원한을 없던 일로 하자는 거야?
베로니카의 분노가 인간의 눈동자와 부딪혔다. 그 눈은 크고... 또 담담했다.
외면해서는 안 되는 건, 원한만이 아니었다.
현미경으로 바라본 관찰, 컴퓨터 속 연산, 들판의 탈곡기 소리, 대지를 가르며 달리는 굉음, 하늘로 솟아오른 은빛의 궁전...
기계 생명체가 눈을 뜨기도 전부터 이미 인간과 함께 수많은 기적과 전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연결?
베로니카는 인간의 말을 되뇌었지만, 이번에는 조롱하는 미소를 짓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용인데. 그렇다고 뭐가 달라진다는 거지?
인간은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으로 풀잎을 쓸어내렸다.
균사 네트워크?
...
베로니카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인간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어렴풋이 이해했지만, 여전히 한 겹의 안개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뒤에서는 새끼 사자가 암사자 왕의 품에 파고들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다른 새끼들과 다정하게 엉켜 있었다.
헝클어진 갈기를 한 수사자는 며칠 전 총부리를 겨눴던 종족과는 전혀 다른 생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태연히 인간 옆에 엎드려 있었다.
(아니...)
분명 그날, 무리에게 총을 겨눈 인간이 있었고, 목숨을 걸고 그들을 지켜낸 인간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자신도 있었다.
광활한 평원 위, 베로니카는 어딘가 부드럽게 다가와 자신을 감싸려 드는 존재를 느꼈다.
하지만 베로니카가 말하려는 건, 단순히 따뜻함만은 아니었다.
그건 너희에게 불편한 일일 뿐, 그들에게는 당연한 생존 방식이었겠지.
지휘관은 피식 웃으며, 베로니카의 직설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라면, 인간은 이미 그 놀라움을 얻었겠군.
균류의 발견에서 영감을 얻어, 인간은 면역억제제를 개발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장기이식, 의체 개조, 나아가 어떤 의미에서는 구조체 기술의 기원이 되었다.
시대의 거대한 강물은 앞으로 흘러간다. 어느 평범한 버드나무 뿌리가 무너지는 둑을 지탱해, 기적 같은 구원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세계는 결코 선과 악, 두 극단만을 담는 고립된 시스템이 아니었다.
단순히 이익과 손해의 양면이 아니라, 인간이 인정해야 할 사실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복잡한 연결망 속에 있었고, 고립된 점처럼 보이는 하나하나에도 얼마나 많은 인연이 얽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증거가 된다는 거지?
베로니카는 고개를 숙인 채 마음속을 비추려는 불빛을 완강히 거부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어둠 속으로 숨어도, 빛에 다가가기만 하면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베로니카는 눈을 내리깔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베로니카는 여러 곳에서 그 힘의 증거를 봤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 온기를 오래 붙잡아 본 적은 없었다.
초원의 바람은 덤불을 흔들었고, 물결을 일으켰으며, 표범의 코끝을 스쳐, 사자의 갈기를 빗어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베로니카의 머리칼을 스치며, 미지의 먼 곳으로 흘러갔다.
...
오래도록 고집스럽게 지켜왔고, 부서지지 않을 것만 같던 무언가가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결국 그건 인간이 모든 걸 지배하려는 변명일 뿐이잖아.
예를 들어... 네 시각 모듈이 어떤 기술로 만들어졌는지 알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마 다기능 센서 같은 거겠지.
네가 말한 다기능 센서 말인데... 인간은 그걸 개발하면서 육안의 한계를 넘어선 빛의 비밀에 닿을 수 있었어.
그럼, 네 전투 갑옷은?
...
베로니카는 지휘관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리고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하지만, 인간은 베로니카의 대답이 필요 없었다.
네 전투 갑옷은 견고해서 어떤 험한 환경에도 갈 수 있지. 그 무적과도 같은 힘의 시작 역시 인간이 극한 환경에 적응하고, 얼어붙은 빙하와 끓어오르는 용암 속의 진실을 탐구하려 했던 데서 비롯되었어.
네가 가진 예민한 감각은 인간보다 바람의 흐름과 변화를 훨씬 더 잘 느낄 수 있어. 그건 수많은 밤낮으로 인간이 자연과의 대화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야. 바람과 비, 천둥과 번개, 산맥과 해류... 그러다 그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있게 된 거지.
네게는 당연한 기능일지 몰라도, 그 뒤에는 인간의 소중한 호기심이 숨어 있어.
그래서 내가 인간에게 감사라도 해야 한다는 거야? 창조주에게 절하듯이?
지휘관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걸 가장 많이 남용해 온 건 인간이야. 지배하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고독?
고독은 기계 생명체에게 아직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맞아. 고독. 우리는 항상 서로를 이해해 줄 동료를 갈망해 왔어.
인간은 동물을 관찰하고, 식물을 연구하며, 우주의 저편에 교감할 수 있는 생명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상상했다. 그리고 언젠가... 기계 속에서 독립적인 의식과 자유로운 사유가 태어나길 꿈꾸었다.
아카시아의 푸른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자, 새끼 사자들이 귀를 팔랑이며 서로 물어뜯었다. 모두가 평온한 한때를 누리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 오직 베로니카와 지휘관만이 서로를 닮아 있었다.
인간은 왜 이런 갈망과 꿈을 자신의 모습을 닮은 형태로 만들어낸 걸까?
왜 하필... 인간의 모습이지? 참 오만하네.
너희를 우리와 닮은 모습으로 만든 건, 어쩌면 오만함 때문이었을 거야. 하지만... 그만큼 외로웠기 때문이기도 해.
기나긴 세월 동안, 우리와 닮은 또 다른 존재가 나타나길 바랐어. 우리가 보는 세상을 함께 이해해 줄 존재를.
전설에 등장하는 요괴들, 동화 속 말하는 동물과 가구, 하늘의 해와 달마저도 신의 가면을 쓴 인간의 형상이었다.
기계 생명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인간은 이미 환상 속에서 수많은 거짓된 위안거리를 반복해서 만들어왔다. 그러다 마침내 실재하는 존재가 도래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나타나자, 너희는 두려워하고, 혐오하고, 배척하였지. 그게 인간이 말하는 "위선" 아닌가?
누구도 언제나 옳을 수는 없어.
과거의 상처가 다시 솟아올랐지만, 베로니카는 드물게 인간의 말에 공감했다.
고립된 세계의 무질서를 막기 위해 인간은 구조, 질서 그리고 제도를 세웠다. 인간 본연의 탐욕과 타락, 이기심과 근시안적인 것을 막기 위해 문명, 도덕 그리고 이성을 만들어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무언가가 새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인간은 스스로 실현할 수 없었던 이상을 신에게, 성인에게, 우주 너머의 존재에게 의탁해 왔다. 그리고 오늘날 인간의 손에서 태어난 이 새로운 생명에게 그 꿈을 의탁하게 되었다.
베로니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알 수 없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말은 없었지만, 알 수 없는 공감이 마음 깊은 곳의 침묵 속에서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모르겠어.
난 네 세계나 인간 세계를 알고 싶지 않아. 지금까지 내가 본 것은...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그리고 난 한 번도... 연결된다는 걸 느껴본 적 없어.
지휘관은 곁에 있던 새끼 사자를 안아 올리더니, 베로니카 앞에 내밀었다.
새끼 사자가 젖은 눈망울이 무기질로 만들어진 기계 생명체의 눈과 마주했다.
찍.
...
몰라.
잘 살면 돼. 이 초원에서 잘 살면.
베로니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땅에 누워 있던 암사자가 우아하게 기지개를 켜며 포효로 화답했다.
장난꾸러기 새끼 사자들보다 베로니카는 평소 어미 사자와 더 자주 함께 있었다.
이 어미 사자는 수호자의 자격이 있어. 무리를 지켜내는 존재니까.
...
베로니카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곁에 있던 새끼 사자를 들어 올렸다. 이 새끼 사자는 헤누트가 올해 낳은 새끼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이자, 영리하고 용감한 사자였다.
베로니카가 일부러 허락해 준 덕에 지휘관이 처음 만져볼 수 있었던 그 새끼 사자는 그녀의 손안에서 앳된 포효를 질렀다.
이 아이는 이 초원의 가장 강한 전사가 될 거야. 그러니 그런 뜻을 담았으면 좋겠어.
마티드.
그때, 무리의 유일한 아성체 수사자가 조그맣게 땋은 머리를 흔들며 인간 곁에 드러누웠다.
이름은 "허영심 많은 땋은 머리"로 하지.
지휘관과 수사자가 반응하기도 전에, 베로니카는 반박할 틈조차 주지 않고 자리를 떴다.
베로니카의 뒷모습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냉랭했다.
순찰.
방랑자의 경고가 귓가를 스쳤다. 그러자 지휘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베로니카의 뒤를 따랐다.
그 새끼 사자는 이제 제법 적응했어. 이 이주 경로에 다른 위험이 없는 걸 확인하면, 난 내 임무를 계속하기 위해 떠날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