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Reader / Affection / 베로니카·이지스·그중 / Story

All of the stories in Punishing: Gray Raven, for your reading pleasure. Will contain all the stories that can be found in the archive in-game, together with all affection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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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이지스·그중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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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오래 나타나지 않았던 탓인지, 이곳에 있는 사자들은 이 낯선 두 방문자를 심하게 경계하지 않았다. 그래서 둘이 적대적이지 않음을 확인한 뒤, 암사자 우두머리의 묵인 아래, 둘과 새끼 사자는 무리와 평화롭게 어울려 지낼 수 있었다.

초원에서 가장 활기가 넘치는 건 역시 새끼들이었다. 그리고 베로니카의 일대일 특훈은 순식간에 새끼 사자들의 단체 유치원으로 변해버렸다.

미래의 털북숭이 초원의 왕들은 제법 전술적으로 뒤를 노리거나, 사납게 양옆에서 달려들기도 하고, 서열 높은 녀석은 여럿이서 하나를 몰아붙이기도 했다. 그중 가장 약한 녀석은 낑낑거리며 인간의 품으로 파고들기에 바빴다.

그런데 하필 가장 약한 녀석이 지휘관이 구해온 온 사자였다.

비켜.

네가 여기 있으면 저 녀석이 훈련에 집중을 못 하잖아.

누가 그랬더라? 무리에서 떨어져 우리가 키우면, 야생의 생존 능력을 잃게 될 거라고 말이야.

그런데 지금 뭐 하는 거야? 네가 방해하는 바람에 얘가 제대로 훈련도 못 받고 있잖아. 싸우는 법이나 사냥도 배우지 못하면 결국 어떤 무리에도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걸 모르는 거야?

괜히 뜨끔해진 지휘관은 베로니카의 따가운 시선에 못 이겨 멋쩍게 콧잔등을 긁적이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지휘관이 자리를 옮기자, 새끼 사자들이 새로운 사냥감을 발견한 듯 순식간에 서로 밀치며 우르르 몰려들더니, 지휘관의 다리 밑에 잔뜩 매달렸다.

미간을 찌푸린 베로니카가 앞으로 나와서는 제멋대로 구는 새끼 사자들을 훈육하려 들었다.

지휘관은 허둥지둥 새끼 사자들의 거친 돌진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결국 새끼 사자들 더미에 파묻혀 제대로 발도 떼지 못한 채 몇 번이나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러는 사이, 둘은 점점 가까워졌다.

쾅!

살과 피로 된 몸이 강철 갑옷에 부딪쳤다. 예상 밖의 아픈 충격보다 더 불길한 건, 베로니카와 또다시 닿았다는 사실이었다.

지휘관은 이전에 베로니카가 인간과의 접촉을 극도로 싫어했던 걸 떠올렸다. 그래서 아픈 곳을 주무르면서 조심스레 그녀를 바라봤다.

베로니카는 여전히 오만한 자세로 턱을 치켜든 채로 있었고,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마치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쳇... 약해빠진 탄소 덩어리.

지휘관이 예상했던 폭풍 같은 분노는 없었다. 베로니카는 그저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불쾌한 기색만 보일 뿐이었다.

긴장 늦추지 마! 전부 이리 와!

전원, 훈련을 재개한다. 그리고 열외는 없다.

베로니카는 엄한 목소리로 새끼 사자들을 불러 모은 뒤, 곧바로 등을 돌려 떠났다. 분명 말싸움이 벌어질 줄 알았는데, 뜻밖에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지휘관은 나무 그늘에 느긋하게 드러누웠다. 멀리서 베로니카가 엄하게 훈련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바람에 흩어져 희미한 잡음처럼 들릴 뿐이었다.

으르렁.

어느새 지휘관이 구해온 새끼 사자가 훈련을 빼먹고 돌아와 있었다. 녀석은 털북숭이 머리로 지휘관의 손을 꾹꾹 밀며 놀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지휘관은 슬쩍 베로니카 쪽을 바라봤다. 엄격한 교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당장 돌려보내."라는 살벌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지휘관은 새끼를 들어 베로니카를 향해 살짝 흔들어 보이더니, 이내 뻔뻔하게 녀석을 품에 안고 배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

으르, 으르렁.

곧이어 몰래 빠져나온 새끼 사자들이 하나둘 모여들더니, 인간의 훌륭한 쓰다듬기 기술에 굴복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품에 안긴 새끼 사자들의 무게가 날마다 조금씩 무거워졌다. 휴가 같은 나날은 해가 뜨고 지는 사이 흘러갔고, 그 사이 몇 차례 큰비가 초원을 적셨다.

고요한 어느 오후, 수업을 빼먹은 새끼 사자들이 항상 그랬듯 인간을 캣타워 삼아 오르락내리락했다. 그중에 가장 대담한 녀석은 지휘관이 구해온 그 새끼였다. 녀석은 지휘관의 머리 위 꼭대기를 차지하며 왕좌에 오른 듯 세상을 내려다봤다.

수업을 마친 베로니카는 유일한 모범생인 작은 암사자를 데리고 무리로 돌아왔다. 이 새끼 사자는 무리의 암사자 왕이 이번 번식기에 낳은 유일한 딸이었다.

지휘관이 데려온 연약한 새끼 사자와 달리, 이 새끼 암사자는 건강하고 튼튼했다. 이미 어린 나이에 어미의 침착함과 영민함을 물려받은 것만 같았다.

인간이 손을 뻗자, 어린 나이임에도 노련한 기운을 풍기는 작은 암사자가 "으르렁!" 소리를 내며 털을 곤두세우고는 재빨리 달아나 버렸다.

이맘때의 새끼 사자들이란, 고삐 풀린 망아지들 같았다. 그래서 넘치는 에너지는 군사학교 시절 특수 훈련을 방불케 할 정도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훈련은 내 담당이고, 놀아주는 건 네 담당이잖아.

베로니카는 멀찍이 앉아 꼬리까지 쭉 빼놓고는, 지루하다는 듯 풀을 툭툭 건드렸다.

지휘관은 자신이 구해온 새끼 사자의 통통한 엉덩이를 슬쩍 밀어 베로니카의 꼬리 쪽으로 보냈다. 그녀의 살랑거리는 꼬리는 영락없는 고양이 낚싯대 같았다. 새끼 사자는 꼬리를 보자마자 즉시 눈을 반짝이며 튼튼한 앞발로 덮쳤다.

베로니카의 매서운 눈빛이 번쩍이더니 지휘관을 노려봤다. 범인이 누구인지 이미 간파한 눈치였다.

흥.

하지만 베로니카의 꼬리는 모든 새끼 사자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눈을 감은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꼬리만 낚싯대처럼 흔들며 새끼들을 정신없이 뛰어놀게 했다.

그러다 베로니카는 무심하게 팔을 뻗어, 방금 인간의 손길을 피했던 작은 암사자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인간이 지켜보는 앞에서 머리부터 꼬리까지 천천히 쓰다듬었다.

또 한 차례 가랑비가 지나간 뒤, 아카시아 나무에 부드러운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지휘관은 가지 몇 개를 꺾어 초록빛 "월계관"으로 엮고는 옆을 바라봤다. 훈련 쉬는 시간이라, 새끼 사자들은 영양액 보충이 한창이었다.

무리의 허영심 많은 수사자도 덩달아 끼어들어 새끼들 몫의 영양액을 얻어먹으려 아양을 떨었다. 은근슬쩍 비위를 맞추는 법을 터득한 이 녀석은 어느새 지휘관 휘하의 "용맹한 부하"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지휘관은 베로니카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엮어둔 "월계관"을 내밀었다.

승자의 월계관이라면, 당연히 이긴 놈이 가져야지.

모두 일어나! 대결 준비!

베로니카의 감독 아래, 서로 정이 든 새끼 사자들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영양액을 내려놓았다. 그런 뒤, "새끼 사자 결전"에 몰두했다.

베로니카는 진지하게 "새끼 사자 결전" 우승자에게 인간이 엮은 승리의 관을 씌워주었다. 아쉽게도 지휘관의 새끼 사자는 여전히 꼴찌였고, 우승자는 암사자 왕의 딸이었다.

새끼 사자들

으... 으르렁.

싸우면서 정이 든 덕분인지, 새끼들은 이제 제법 친해져서 지휘관의 새끼 사자가 틈에 끼어 젖을 먹어도 더는 쫓아내지 않았다.

허영심 많은 수사자가 느릿느릿 다가와, 작은 암사자의 머리에 얹힌 "월계관"을 한참 구경하더니, 갈망하는 눈빛으로 베로니카를 바라보았다.

...

베로니카는 냉정한 눈빛으로 단칼에 거절했다. 풀이 죽은 수사자는 지휘관 곁에 털썩 엎드려, 새끼 사자들을 위해 다져둔 부드러운 생고기를 우적우적 먹기 시작했다.

지휘관은 수사자의 헝클어진 갈기를 만지작거리다 엉성하지만, 즉석에서 땋아주었다. 허영심 많은 수사자는 머리를 흔들어 땋은 갈기를 좌우로 휙휙 휘둘러 봤다. 그 모습이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어흥...

기분이 좋아진 수사자는 득의양양하게 물웅덩이로 달려가 자기 모습에 “심취“했다. 그 모습을 본 암사자 왕은 무심히 꼬리를 휘두르며 베로니카 쪽으로 걸어오더니 흰자 가득한 눈으로 수사자를 흘겨보았다.

베로니카는 그 눈빛이 의아해 암사자의 눈 상태를 확인해 봤지만, 구조적인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난 걱정한 적 없어.

베로니카는 불쾌하게 인간을 노려봤다. 하지만 예전처럼 살의를 띠지 않고, 그냥 작은 불만 정도였다.

베로니카는 대답하지 않고, 멀리서 뛰노는 새끼 사자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기계 생명체와 인간은 원래부터 이곳의 일원인 듯 사자 무리 속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사자 무리는 이제 낯선 새끼 사자와 그 기묘한 보호자들까지 완전히 받아들였다.

탕... 탕탕...

몇 발의 총성이 초원의 정적을 갈랐다.

며칠간의 평온이 경계심을 무디게 만들지는 않았다. 총성이 울리자마자 지휘관은 재빨리 바위틈으로 몸을 숨긴 뒤, 오른손을 무기 위로 가져갔다.

베로니카가 공중에서 급강하해 아카시아 나무 위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더니, 총성이 울린 방향을 꿰뚫어 봤다.

인간이야. 인간이 쏜 총성이야.

새끼 사자를 처음 거두던 날, 가죽이 벗겨진 채 버려져 있던 암사자의 사체를 봤던 그 끔찍한 기억 데이터가 베로니카의 뇌리를 스쳤다.

지금은 사자 무리가 사냥에 나설 시간이라, 새끼 사자들도 어미를 따라 사냥을 배우러 나섰을 것이었다. 다행히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둘은 짧게 눈빛을 교환한 뒤, 망설이지 않고 총성이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으... 으르렁.

둘이 이동하는 도중에 새끼 사자 한 마리와 어린 암사자가 울부짖으며 달려왔다. 인간이 몸을 낮추자마자 새끼 사자가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온몸의 털을 곤두세운 채, 겁에 질려 본능적으로 인간의 보호를 찾았다.

얼굴이 굳어버린 베로니카는 전속력으로 사자 무리의 사냥터로 날아갔다.

그곳에는 상당한 규모의 방랑자 차 부대가 있었다. 그들은 사자 무리에게 포위당해 있었고, 포효와 돌진 속에서 서로 사격 엄호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지휘관과 베로니카가 도착했다. 그러자 여유로웠던 암사자 우두머리가 돌변해 총성이 울리는 가운데에서도 둘을 향해 포효했다. 그러면서 이 위험한 전장에서 나가라고 몰아세웠다.

혼란 속, 총알 한 발이 지휘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으르렁!" 분노한 암사자가 포효하며 총을 쏜 차량에 덮쳤다. 방랑자들의 방어선은 즉시 벌어졌고, 곧이어 무수한 총탄이 암사자를 향해 쏟아졌다.

어, 사격 중지! 사람이 있어!

사격 중지! 아군에게 오인 사격할 수도 있어! 사람이 더 있다고!

방랑자들은 황급히 사격을 멈췄다. 지휘관은 그 틈을 이용해 그들의 무장 상태를 살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화력이 훨씬 약해 보였다.

젊은이들로만 꾸려진 임시 방랑자 집단과 달리, 이 집단은 노약자와 여성 심지어 부상자까지 뒤섞여 있었고, 그들은 차 안에서 보호받고 있었다. 이런 종말 속에서도 상부상조하며 살아가는 집단인 것 같았다.

미안합니다. 다친 데는 없나요?

저는 이 집단을 이끌고 있는 세바니입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어쩌다 이런 위험한 곳에...

세바니가 앞으로 한 발 내디디려는 순간, 긴 창이 날아와 그녀의 발끝을 스치며 땅 깊숙이 꽂혔다.

어차피 곧 죽을 몸인데, 이름 따위 알 필요는 없겠지.

이 괴상한 인간이랑 오래 있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네. 너희가 이렇게 역겨운 족속이라는 걸.

뭐라고요? 잠깐만요. 지금 뭘 하시려는 건가요?

베로니카가 몸을 날려 창을 뽑아 들고는, 한 손으로 세바니의 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기계 생명체의 칼날 같은 차가운 눈빛이 지휘관의 눈과 마주쳤다.

뭐야? 지금 이 인간들을 지키겠다는 거야?

사자 무리가 낮게 으르렁거렸고, 긴장감에 휩싸인 방랑자들도 총을 움켜쥐었다.

역시, 네게 진짜 동료는 저 인간들이겠지. 아무리 사자들을 다정하게 대한다 해도 결국 인간이 총부리를 겨누면 인간 편에 설 줄 알았어.

인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천이 없다고? 네 마음속에서 인간의 목숨이 사자의 목숨보다 귀하지 않다면, 왜 똑같이 상처 입은 상황에서 인간만 감싸는 거지? 이 세상은 인간이 동물을 사냥하는 것만이 진리란 말이야!

너희는 힘으로 억누르면 된다고 믿잖아. 안 그래?

베로니카의 손아귀가 더 조여들자, 세바니는 숨을 쉬지 못해 필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다. 그러다 손아귀가 살짝 느슨해지자 간신히 거친 숨을 쉴 수 있었다.

잘됐네. 폭력은 내가 가장 잘하는 거니까.

지휘관의 얼굴이 얼음처럼 굳어져 버렸다. 베로니카는 그의 단호한 시선을 받게 되자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손을 풀어내는 대신 세바니를 거칠게 땅바닥에 내던졌다.

역시 인간 편을 드는군. 좋아. 네가 지키지 않겠다면 내가 지키겠어.

베로니카는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노려봤다. 손에 쥔 창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언제든 찔러 댈 기세였다.

그땐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쿨럭, 쿨럭... 잠깐만요! 오해예요! 저희가 먼저 사자 무리를 공격할 리가 없잖아요!

식량이 필요했던 건 맞아요. 하지만 저희는 보통 영양이나 누 같은 약한 초식동물을 노려요. 그리고 최악의 경우, 혼자 다니는 표범이 훨씬 상대하기 쉬워요!

어느 정신 나간 놈이 사자 무리를 건드려요? 죽고 싶어 환장한 게 아니고서야...

저희도 부득이 이 구역을 지나던 중이었어요. 그런데 저희가 사자들의 사냥을 방해했던 건지, 먼저 공격을 해오더군요.

정당방위가 아니었다면 절대 총을 쏘지 않았을 거예요. 저희는 총알 한 발도 아쉬운 상황이에요. 이후에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니까요.

허... 사자를 공격한 적이 없다? 그럼, 네 몸에 걸친 망토는 뭐지?

세바니의 어깨에는 갓 무두질한 듯한, 서툴게 만든 가죽 망토가 걸쳐져 있었다.

사자 가죽이군. 그렇지?

베로니카의 추궁에 세바니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으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맞아요. 하지만...

그래도 사자 무리를 공격한 적이 없다고? 새빨간 거짓말!

아니에요! 우리가 손댔을 땐, 그 암사자는 이미 살 수 없는 상태였어요!

결국 네놈들이 죽였다는 소리군.

제 말을 끝까지 들어보세요. 얼마 전 사자 무리가 들소와 싸우는 걸 우연히 보게 됐는데, 암사자 한 마리가 치명상을 입고 무리에게 버려져 있었죠.

상처가 얼마나 심했는지, 배가 뚫려 있을 정도였어요. 가망이 없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차라리 저희가 고통을 끝내 주기로 한 거예요.

이 상황이라면, 차라리 그래도 죽는 편이 덜 고통스럽지 않을까요?

당시에 하이에나 무리가 이미 따라붙고 있었어요. 저희가 아니었어도, 훨씬 더 끔찍한 최후를 맞았을 거예요.

그래서? 그걸 핑계로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취했다는 건가?

저희는 굶주렸고, 밤은 추웠어요. 차 안에는 아이들과 노인도 있었죠. 모두가 살아야 했어요. 눈앞에 자원이 있는데, 어떤 바보가 외면할까요?

자원? 그건 생명이었다. 누가 너희에게 그런 권리를 줬지? 네 욕심을 위해 마음대로 빼앗을 권리를 말이다!

베로니카가 홱 돌아서더니, 실망과 분노가 섞인 눈빛으로 지휘관을 노려봤다.

닥쳐!

고작 며칠 함께 있었다고 내 생각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내 앞을 막지 마.

정의, 공정, 진리. 그 어떤 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이었다. 베로니카는 이것들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 언제나 자신의 직관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창끝이 또다시 지휘관의 목덜미에 닿았다.

입 다물어!

동료?

차갑게 콧방귀를 뀐 베로니카는 며칠간 함께했던 인간이 자신의 오래된 악몽과 함께 반대편에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난 그 어떤 인간의 동료도 되고 싶지 않아. 인간이 내게 남긴 상처와 죄악은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눈앞에는 서로 "단결"하여 자신을 경계와 혐오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인간들이 있고, 등 뒤에는 광활하고 쓸쓸한 대지와 함께 인간의 규칙 바깥에서 불안을 털어놓을 수 없는 사자 무리가 있었다. 그건 과거의 악몽과 너무나 닮아 있는 모습이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초원은 끝없이 넓었고, 머물 곳이 여기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날개를 펼친 고독한 드래곤 나이트는 집단을 벗어나기 위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늘 저편으로 베로니카의 모습이 사라지자, 세바니가 목을 주무르며 다가왔다.

대단하시네요. 그 무서운 분이 정말 창으로 목을 꿰뚫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그렇게 믿으시는 거예요?

역시 대단하시네요. 몰라봐서 죄송해요.

지휘관이 쓴웃음을 지었다.

공중 정원이요? 어쩐지...

저희 보육 구역은 오래전에 무너졌어요. 그래서 생존자끼리 물자를 모아 떠돌기 시작했죠. 다른 보육 구역도 찾아가 봤지만... 운이 없었는지...

새로운 터전마저 하나둘 재앙에 휩쓸리면서, 집단이 점점 커졌어요. 처음엔 차 한 대였는데, 서너 대로 늘더니, 지금은 일고여덟 대가 한 가족처럼 사방을 떠돌고 있어요.

최근에야, 이 초원에 도착하게 됐는데... 지휘관님께서는 어떻게 여기에 계시게 된 건가요? 혹시 공중 정원이 이곳에 보육 구역을 세우려는 건가요? 이 땅을 회수하려는 건가요?

그렇군요.

지휘관은 지도를 꺼내어 세바니에게 가장 가까운 보육 구역까지의 길을 짚어주었다.

감사해요. 새로운 거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네요. 다만... 좀 아쉽네요.

세바니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어딘가 허전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그냥 미련이 남아서요. 사실 이곳은 제 조부모님께서 사시던 곳이에요. 두 분께서는 과거 이 생태 보호구역의 연구원이셨어요. 제 이름도 조부모님의 언어로 "초원"이라는 뜻이고요.

어릴 때부터 이 초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어요. 그러면서 별별 지식과 전설을 듣게 됐죠.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을 이끌고, 혹시 새로운 희망이 있을까 해서 찾아온 거예요.

여기서 지내는 동안은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곁에 있는 것만 같았어요.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웠으니까요.

세바니는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아니요. 여긴 뭔가 이상해요. 동물들의 이주 시기가 너무 기묘하네요. 아직 우기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이 초원에 있는 동물들 대부분이 떠나고 있어요.

이를테면 이런 거였다. 지휘관이 함께 지냈던 사자 무리에는 아직 성장하지 않은 수사자가 한 마리밖에 없었다. 게다가 우두머리가 암사자인데도, 다른 성체 수사자가 나타나 무리를 차지하려 들지 않았다.

아마도 무리가 줄어든 뒤 서둘러 떠나려고 했을 거예요. 다른 사자 무리들도 전부 도망치느라 바쁘니, 지금까지는 안전했던 거겠죠.

그 비바람 치던 밤의 천둥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사실 지휘관도 눈치채고 있었다. 이렇게 좁은 범위 안에서 세네 무리나 되는 사자들을 발견할 수 있고, 새끼 사자를 맡길 곳을 고를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동 시기임을 고려해도 명백히 생태 습성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퍼니싱으로 황폐해진 지구에서 과거의 생태 규칙이 여전히 유효한지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지휘관은 그날 밤 죽음에서 건져낸 새끼 사자를 바라보며, 작은 위치 추적기를 꺼내 목에 걸어주었다.

자연의 아이들은 위험을 더 빨리 감지하죠. 이 평화도 곧 끝날지 몰라요.

그러니, 지휘관님도 서둘러 떠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바람에 흔들리는 아카시아 나무 사이로, 쓸쓸한 경적이 울렸다. 그리고 방랑자들의 차들이 다시 길에 올랐다.

사자 무리는 흩어져 다시 사냥에 몰두했다.

암사자 왕을 따라 누 사냥터로 향하던 중, 부드러운 포효가 신호처럼 울렸다. 지휘관은 이내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음을 느꼈다.

절벽 위, 베로니카가 홀로 서 있었다. 그리고 이곳을 침범한 인간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인간의 발소리를 들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뭐?

지금 당장 죄를 물을 명분이 없었을 뿐이야. 지금은 죄가 없어 보여도, 영원히 죄가 없지는 않을 테니까. 인간은 믿을 수 없는 타락한 종족이야.

베로니카의 뒤에 선 지휘관은 그녀와 함께 거친 야생과 평온이 공존하는 초원을 내려다보았다.

절벽 아래에서는 사자 무리가 뭉쳐 누를 포위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아카시아 그늘에서 함께 쉬던 암사자가 누의 목을 물어 끊었고, 붉은 피가 푸른 풀잎을 따라 흘러내렸다.

...

인간은 끝없는 구덩이처럼 모든 것을 탐해. 그 탐욕은 필요한 생존을 훨씬 넘어서지. 방랑자 무리가 죄가 없든, 네가 선하든...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 너희는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서야만 직성이 풀리는 생명체지. 도전도, 거역도 용납하지 않는 그런 생명체 말이야.

난 기계체를 짐승 취급하고, 심지어 인간까지 짐승처럼 내던지던 곳에서 탈출했어. 그들은 그걸 "격투장"이라 불렀지만, 내 눈엔 그냥 "투기장"에 불과했어. 그래서 난 짐승의 눈에 비친 세상이 어떤지 잘 알아.

새끼 사자에게 인간은 변덕스러운 신이나 다름없어. 눈앞에 있는 신이 자비로운 존재일지, 생명을 짓밟는 악마일지는, 결국 운에 달렸어.

동물과 인간 모두 같은 세계에 살고 있고, 같은 종말 속에서 발버둥 치는데도, 미래를 결정하는 건 결국 인간의 기준과 인간의 의지야.

자연의 사냥은 그저 약육강식일 뿐. 살고 죽는 건 운명이야. 반격이 죄가 되는 법은 없어. 그런데 인간은 언제나 도덕이란 것으로 우위에 서려 하지. 너희 기준으로 판단하고 심판하는 건 늘 인간뿐이야.

왜 동물은 인간과 같은 계단 위의 신이 될 수 없는 거지? 왜 인간은 동물이 세운 기준을 따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거야?

내가 바라는 건 단 하나야. 너희와 같은 높이에 서서 세계를 주관하고 규칙을 만들고 싶어. 동물처럼 배부를 때는 친구나 장난감이고, 위기 때는 고기나 적으로 취급받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

인간이 그런 권한을 기계 생명체에게 내줄 것 같아? 절대 아니야. 나 역시 인간에게 그런 기회를 줄 생각 없어. 그러니 우리는 결국 적일 수밖에 없어.

베로니카는 인간이 아는 유일한 기계 생명체가 아니다. 하지만 지휘관은 기계 생명체들과 적이 되는 상황을 좀처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망 속에서 내 동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인간 따윈 주저 없이 희생시킬 거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걸 희생할 각오가 돼 있어.

그럼 넌? 똑같은 상황이라면, 넌 무엇을 희생할 거지?

어떤 대가든 치르겠다. 흥, 적어도 믿을 수 없는 헛소리는 하지 않네.

그래서 난 결론을 내렸어. 만약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우리 둘은 분명 적이 될 수밖에 없어.

베로니카의 말이 망치처럼 가슴을 내리쳤다.

그래? 그럼, 마음껏 애써봐. 하지만, 이 세계는 원래부터 이런 곳이야.

처음 만났을 때의 날 선 목소리와 달리, 지금 베로니카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담담한 확신은 또 다른 형태의 벽이었다. 그녀는 이 세계에 대해 어떤 희망도 품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