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엘은 그레이 레이븐 소대와 헤어져 홀로 관제실로 향했다.
가는 길에 몇몇 이합 생물과 마주쳤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이스마엘을 보지 못한 듯 제 갈 길만 가고 있었다.
분홍 머리의 구조체는 태연히 이합 생물들 사이를 지나쳐 관제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뭐지?
관제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이스마엘은 이곳의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관제실에 원래 있어야 할 파일 캐비닛이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기이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그 구역은 공기가 일그러진 듯 뒤틀려 있었고, 방 중앙에는 특이한 형태의 이합 생물이 있었다.
이합 생물... 아니, 이상 적조 의사체라고 해야 하나.
넌 이 시간에 있어선 안 될 존재야.
이스마엘이 옆에 놓인 의자를 바라보았다.
한 걸음 내딛자, 다른 각도에서는 그 의자가 쓰러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의자는 여전히 바닥에 똑바로 서 있었다.
이스마엘이 손을 들어 허공에서 가볍게 휘저었다.
"어긋난 느낌"...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까지 어긋나 있네.
한 걸음 더 나아가자 끈적한 액체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관제실이 적조에 잠식된 것 같았지만, 그저 환영에 불과했다.
밖의 이합 생물들은 분명 다른 입구를 통해 침입했어.
하지만 여긴 달라.
현재 상황의 시발점이 바로 여기였다. "암실" 보호 시스템이 이곳에서 침식된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이곳이 침식된 걸까?
"암실"이 이합 생물의 공격을 받는 건 예상된 일이었어.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원래대로라면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거점 주민들과 함께 이합 생물을 물리치고 임무를 완수"해야 했어.
이 관제실은 침식되지 말아야 했는데.
뭔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던 거야...
이스마엘은 이상 적조 의사체를 신경 쓰지 않고, 눈앞의 공간을 바라보고 있는 척하였으나, 실제 시선은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더 먼 곳의... 머물렀다.
그녀의 시선은 더 먼 곳의 ▊▊▆▎▂▌▁▄▊▆▄에 머물렀다.
<size=50>더 먼 곳의...</size>
이스마엘은 고개를 숙이며 손안의 주사위를 만지작거렸다.
안 돼. 아직은 때가 아니야.
이스마엘은 한참 동안 먼 곳을 바라보았다.
시기가 적절하지 않아.
이스마엘은 주사위를 챙기며 관제실을 한 번 더 살폈다.
음? 잠깐...
그녀는 뭔가 흥미로운 걸 발견한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았다.
너였구나...
이상 적조 의사체가 괴로운 듯 울부짖으며 서서히 공기 속으로 사라져 갔다. 마치 시간 라인 밖에 있는 어떤 힘이 그것의 존재를 부정하기라도 하듯 했다.
관제실에서 느꼈던 "어긋난 느낌"이 점차 사라지며, 조금씩 원래의 궤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스마엘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딛자, 마치 다음 순간 다른 차원으로 걸어 들어갈 것만 같았다.
딸그락...
바로 그때, 바닥에 떨어진 물건이 이스마엘의 시선을 끌었다.
20면체의 나무 주사위였다.
아무래도 조금 전 주사위를 주머니에 제대로 넣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주사위는 20이란 숫자를 위로 한 채 바닥에 놓여 있었다.
흐음... 대실패네.
이스마엘은 원래 계획을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는 한쪽으로 물러서서, 관제실에서 퍼니싱이 서서히 사라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역시 네가 옳았어.
이스마엘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본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의 결말은 여전히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거점 주민들과 함께 이합 생물을 물리치고 임무를 완수했다"가 되겠지.
이곳은 모든 게 정상이었다.
안전 통로
안전 통로
그레이 레이븐의 지휘관, 내 목소리 들리나?
갑자기 통신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나야. 방금 관제실을 확보했고, 통신 차단도 해제했어.
잠시 후에 리랑 이곳 리더도 통신망에 합류시킬 거야.
지금 "암실"의 모든 보호 시스템이 내 통제하에 있어.
대부분의 이합 생물을 격리한 다음, 너희들에게 안전 경로를 알려줄게.
이스마엘은 눈앞의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칸으로 분할된 화면에는 각기 다른 장소의 실시간 감시 화면이 비치고 있었다.
아래층으로 돌파하는 [player name]의 모습과 지하 19층에서 주민들을 이끌고 저항하는 리의 모습도 한눈에 들어왔다.
"그레이 레이븐"과의 협력이라, 왠지 그립네...
이스마엘은 안내방송 버튼을 눌러 거점의 모든 사람에게 알렸다.
이스마엘이다. 지금부터 원격 지원을 시작하겠다.
[player name], 최적화된 돌파 경로를 단말기로 보냈어.
지하 13층에서 14층으로 가는 안전 통로에 이합 생물이 대거 몰려있어서, 방호벽으로 격리한 상태야.
이스마엘의 지시에 따라 인간 지휘관은 리, 호도와 함께 신속하게 피난민 대피를 진행했다.
백색 소음이 섞인 통신 장비에서 이스마엘의 차분한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지하 19층 D5 통로의 52식 자동 경기관총을 가동했어.
정말... 오랜만이네.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의미심장한 말이 귀에 들어왔다.
당연하지, 명성이 자자한 그레이 레이븐이잖아. 오래전부터 관심이 많았거든...
아, 그리고 지하 19층 A 구역 무기고 위치를 마킹해뒀어. 거기 가서 탄약을 보충하면 돼.
이스마엘은 화제를 돌리며 단말기에 새로운 위치를 표시했다. 지휘관은 의문을 잠시 접어두고 리에게 피난민들을 무기고로 안내하라고 지시했다.
스크린 속 [player name]을(를) 바라보며 이스마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예전처럼, 원활한 협력이 되겠네.
관제실
5시간 후
5시간 후, 관제실
감시기 앞에서 5시간을 꼬박 앉아 있던 이스마엘이 여유롭게 마지막 버튼을 눌렀다. 리와 루시아가 몰아낸 이합 생물들을 완전히 봉쇄하는 버튼이었다.
대피 경로의 위험 요소는 깔끔히 제거됐고, 남은 것들은 두꺼운 방호벽 뒤에 격리된 상태였다.
화면 속 일행은 벌써 지상 1층에 도착해 있었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임무는 반 정도 끝난 셈이었다. 이제 4천여 명의 사람들을 목표 보육 구역으로 이동시키기만 하면 임무가 끝날 터였다.
이스마엘은 더 이상 감시기를 보지 않고, 일어나 관제실 구석으로 향했다.
관제실 구석의 한쪽 벽면이 안쪽으로 꺼졌다가 옆으로 밀려나며, 숨겨진 엘리베이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스마엘은 엘리베이터에 올라 "-21"이라 새겨진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이스마엘은 눈앞의 작은방으로 발을 들였다.
이스마엘의 발걸음에 반응하여 센서 등이 하나둘 켜졌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는 파일 캐비닛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고, 그 너머로는 푸른빛을 내뿜는 거대한 계산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비밀스러운 소형 도서관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이스마엘은 어느 파일 캐비닛 앞에 서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진공 포장된 디스크 하나만 들어있었다.
임무 완료.
목표 보육 구역
3일 후 깊은 밤
3일 후 깊은 밤, 목표 보육 구역
그레이 레이븐 소대가 마침내 "암실" 거점 주민들을 보육 구역으로 무사히 이송하는 데 성공했다.
"암실"을 탈출해서 보육 구역에 도착하기까지, 총 47명이 목숨을 잃었다. 호도는 그들을 위해 간소하게나마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어찌 됐든, 이제는 일단락된 상황이었다.
이스마엘은 보육 구역 구석에 앉아,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 보육 구역 담당자, 그리고 호도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한 젊은이가 파일을 들고 보육 구역 담당자에게 달려왔고, 서류를 전달한 후 둘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과 호도만이 남았다.
이번에 정말 신세 많이 졌습니다.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명성이 허명이 아니더군요.
이스마엘은 인간 지휘관이 잠시 망설이는 모습을 보았다. 뭔가 말하려고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다 인간 지휘관이 호도에게 질문을 던졌고, 호도는 눈에 띄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짧은 대화가 오갔고, 호도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리를 떴다.
호도가 떠나자 이스마엘이 [player name]에게 다가갔다.
안녕.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방금 무슨 얘기 했어?
말하기 곤란한 이야기야? 그럼 안 해도 돼.
이스마엘은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공중 정원을 믿지 못했던 거겠지?
분홍 머리의 구조체는 의아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새 보육 구역으로 옮기려 한 이유가 뭘까?
내가 관제실에서 "암실" 전체를 살펴봤는데, 아직 사용할 만한 물자가 잔뜩 남아있었거든.
이합 생물만 제거하면, 밖의 퍼니싱 농도가 아무리 높아도 거점에서 10년은 거뜬히 버틸 수 있을 텐데...
10년이면... 충분히 긴 시간 아닌가?
희망이라고?
희망이라...
이스마엘은 그 단어를 곱씹어 보았다.
까마득히 오래전, 이스마엘도 "희망"이란 걸 품고 있었다... 그게 언제였을까?
너무나 먼 길을 걸어온 탓일까, 이제는 그 기억조차 흐릿해져 버렸다.
지금의 이스마엘은 과연 "희망"이란 걸 가지고 있을까?
시간은 많은 것을 바꿔놓지만, 어떤 것들은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는다. 마치 그 주사위처럼...
잠시만...
이스마엘은 자리를 뜨려는 그레이 레이븐을 불러 세웠다.
줄 게 있어.
이스마엘은 주머니에서 20면체의 나무 주사위를 꺼내 [player name]에게 건넸다.
이건 말이야... "희망"이라고 할 수 있지.
인간 지휘관의 손바닥 위에 놓인 주사위를 바라보며, 그 순간 이스마엘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발걸음을 멈추지 마. 계속 앞으로 나아가.
예전에 내게 이 주사위를 건네준 자가 했던 말이야.
이제, 너에게 전해줄게.
보육 구역 담당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좀 전의 일을 끝마친 모양이었다.
이제는 네가 나설 차례인가 보네.
이스마엘은 [player name]에게 미소 지으며 작별 인사를 하고 사람들 사이로 걸어갔다.
이스마엘은 한 여자아이가 기타를 연주하는 남자에게 가르쳐달라고 조르는 모습을 보았다. 남자는 흔쾌히 웃으며 수락했다.
이스마엘은 눈앞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다시 울리기 시작한 기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시각 모듈에서 황혼빛이 지워지고, 눈밭의 차가운 바람이 다시 뺨을 스쳐 갔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어서, 그 "무덤" 같은 곳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 했던 거야...
귓가에 울리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이스마엘은 망토를 단단히 여미고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네가 그들을 위해 희망의 횃불을 들어 올릴 수 있을까?